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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선수 출신으로는 처음 정부 부처 차관직에 오른 박종길(67) 신임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은
1970년대부터 박근혜 대통령과 친분을 가졌다는 특이한 이력이 있다.
박 차관의 꿈은 원래 군인이었다. 그런데 해병대 장교로 복무 중 사격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당시 ‘피스톨 박’으로 불리던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의 권유로 71년 선수로 정식 입문, 국가대표가 됐다.
이어 74년 8·15 경축 행사 때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으로 국가대표에서 전격 청와대 경호원으로 특채됐다.
대를 이어 박 대통령을 보좌한 셈이다.
박 차관은 경호원 근무시절 속사에 능해 박 전 대통령의 총애를 독차지했다고 한다.
그는 2년 후 다시 국가대표로 돌아갔고, 박 차관을 좋아하던 박 전 대통령이 태릉사격장으로 자주 격려차 왔다.
박 차관은 그때 박 전 대통령과 함께 왔던 박 대통령과 인사하며 교분을 맺어왔고 이번에 차관까지 발탁되는 영광을 안게 됐다.
박 차관은 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 연속 출전해 아시안게임 3개 대회에서
속사권총 금메달 3개와 은메달 6개, 동메달 3개를 획득한 한국 사격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선수생활을 그만 둔 이후 사격 국가대표팀 감독, 대한사격연맹 실무 부회장과 대한체육회 이사 등을 거쳐
2011년 1월부터 국가대표의 요람인 태릉선수촌장을 맡는 등 체육 실무와 행정까지 경험했다.
지난해 런던올림픽에서는 한국선수단 총감독을 맡아 한국이 역대 원정대회 최고 기록인 종합 5위에 오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13일 국가대표 선수 출신으로는 처음 한국 체육 주무부처의 차관으로 임명된 주인공이 됐다.
제2차관은 체육 분야와 더불어 신문·방송 등 미디어 분야 업무도 맡는 자리다.
하지만 박 차관이 미디어 분야에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이 분야는 당분간 조현재 제1차관이 관장하게 된다
- 국민일보 2013. 03 14 -
2012 런던올림픽을 정조준한다.
나를 따르라!
일발필중 박종길 촌장
- 아시안 게임 속사권총 3연패 전설의 해병대 장교
- 런던올림픽 TOP10을 목표로 스포츠 강국을 이끄는 야전지휘관
박종길 태릉선수촌장은 잠시도 앉아 있을 틈이 없다. 시간을 쪼개가며 선수촌 구석구석을 훑는다.
현장이 최고고, 선수촌장은 선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잰 걸음으로 선수들 사이를 누비는 그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성사된 인터뷰.
아늑한 선수촌에 자리잡은 촌장실에서 만난 박종길 태릉선수촌장은 약간만 과장해서 말하면 여전히 현역선수의 느낌이었다.
혈기 넘치는 얼굴, 당당한 체구, 그리고 그를 아시안게임 3연패로 이끈 투박한 손.
그 어느 것 하나도 은퇴한 선수로 보이지 않았다.
1974년. 테헤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은 한국 스포츠사에 중요한 포인트다.
공산권 국가로 국제 스포츠대회에 참가하지 않던 중국과 북한이 등장한 것이다.
북한은 대한민국에 이어 금메달 1개 차이로 5위에 올랐고
남과 북은 이때부터 스포츠를 통해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된다.
당시 아시아선수권자였던 그는이 대회 권총부문에서 내심 3관왕을 기대했지만
중국과 북한에 밀려 은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하는데 그쳤다.
“해병대 장교가 적군에게 졌다”며 절치부심한 그는 이후 아시안게임 3연패의 쾌거를 이룬다.
지금, 그 사격 전설과의 유쾌한 두 시간을 들어보자.
“어딜 가도 내가 해병대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빨간 명찰의 혼이라는 게 신기해서 지금도 흐트러짐이 없거든.
이 혼을 배워오라고 난 복싱팀과 레슬링팀을 캠프로 보냈어요.
거기서 일장연설을 했지.
기필코 해병혼을 몸에 가득 담아와서 어디 가서든 이길 수 있도록 하라고 하죠.”
첫 대면 인사가 끝나고 자리에 앉자마자 해병대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해병대 출신임은 이로써 입증이완료되었다.
그는 해병대 간부후보생 41기로 입대해 김포 2사단에서 중대장을 지냈다.
“옛날 선수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힘들 때면 항상
‘내가 해병대인데, 나 중대장 출신이야. 이것도 못하면 되겠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흐트러짐이 없다고 자부해요.
당시 월남전이 절정에 있을 때라 사격훈련 비중이 엄청났어요.
소총 4주, 권총을 3주 훈련했죠.
난 새벽구보를 소대원 전체가 크게 구령 붙여서 하곤 했는데 대대장님이 내 구령소리에 잠 깬다고 하셨어.
열정적인 장교생활이었죠. 후보생 1등, 초군반 1등한 것도 열정이었을 거에요.
난 머리보다는 열심히 했거든요. 내 생활신조가 열정이니까. 하하”
그의 사격신화는 해병대 장교로 입대하면서 시작되었다.
전혀 사격과는 연관이 없는 삶을 살다가 군사훈련을 통해 자신이 사격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운명과도 같이 전군사격대회에서 우승하고 대한민국 국가대표 사격선수로 발탁되었다.
지금의 박종길을 있게 한 은인이 해병대인 셈.
“대통령 경호실장이 대한사격연맹 회장이 되더니 갑자기 아시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했어요.
근데 그때 한국 체육계에 인프라라고 있나.
서울운동장, 장충체육관, 동대문 아이스링크가 전부였거든.
70년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었는데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포기했을 정도였어요.
근데 덜컥 사격대회를 열게 된 거지. 선수가 있나.
대통령 특별명령으로 각 군에 사격 잘하는 사람을 불러올린 거죠.
해병대도 난리가 난 거죠. 전쟁준비로 정신이 없었는데 내가 거론이 된거에요.
그때 나는 월남전에 참전하려고 배 타고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전쟁보다 더 큰 국가과업이 있다면서 올라갔죠.
경찰도 있었고 각 군에서 내로라 하는 총잡이들이 올라왔는데 내가 금메달을 땄어.
그때부터 내 사격인생이 시작됐죠.”
훈련은 어떻게 했을까. 군대에서 과연 체계적인 사격훈련을 할 수 있었을까.
가볍게 물어본 질문에 엄청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스스로 열정이 생활신조라고 했던 것을 너무 간과했다.
해병정신과 열정으로 가득한 그의 훈련일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힘들 때면 항상
‘내가 해병대인데,
나 중대장 출신이야.
이것도 못하면 되겠어?’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흐트러짐이
없다고 자부해요.
“어떻게 훈련해야 하는지를 모르니까 그냥 무작정 남들보다 곱절로 했어요.
해병대에서 사격 잘 한다는 선배님께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어봤는데 이런저런 방법을 알려주시더라고.
그대로 그저 우직하게 했을 뿐이야.
균형감각과 신체조절능력이 좋아야 해서 철길을 걸으면 좋다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걸었어요. 그때 열차도 잘 안 다닐 때라 3~4킬로 정도 경춘선 철로를 출퇴근삼아 걸었죠. 총쏘는 자세로.
나를 말리는 화랑대 역무원하고 싸우기도 하고 막무가내였지.
또 속사권총을 잘하려면 순발력이 좋아야 하니까 산을 달려서 오르라는 거에요. 그래서 뛰었죠.
다만 나는 또 한술 더 떠서 총을 들고 나무사이를 지그재그로 통과하면서 뛰어다녔지.
그렇게 6개월 이상을 했더니 이제 좀 뭔가 보이더라고.
좌우간 현역시절 동안에는 잠자는 시간 외에 손에서 총을 놓은 적이 없었어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지독하다’는 생각만 들었다면 실례일까.
하지만 그의 훈련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 지독한 훈련량과 목표를 향한 막무가내 열정에 감탄만 나올 뿐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훈련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한창 철길을 따라 균형감각을 훈련할 땐 데, 버스를 타면 절대 앉지 않았죠.
대신 왼손으로는 버스 기둥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사격자세를 취하면서 갔어요.
마인드 컨트롤을 하면서 흔들리는 버스에서도 조준하는 격발연습을 한 거죠.
멀쩡하게 생긴 장교가 앉지도 않고 한쪽 눈은 찡그리고 오른손 검지를 지그시 구부렸다 폈다 하니까 이상하게 생각했나 봐.
진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 미쳤다고. 하하.
한번은 같은 버스에 있던 할아버지가 진지하게 물어봐요.
몸이 좀 안 은 것 같은데 자기가 잘 아는 용한 한의원이 있다고 침 맞으러 가자는 거에요.
어디 안 좋은데 있냐는 질문은 한두번 들은 게 아니지.”
미친사람 취급을 받았던 웃지 못할 이야기.
총을 차고 탄띠를 두른 단독무장을 한 채 태릉선수촌과 가까운 육군사관학교 유격교장을 활용하기도 했다.
해병대 장교의 우락부락한 성격을 다스리기 위해 요즘말로 템플스테이, 명상학원을 다니기도 했단다.
일반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열정과 끈기.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완전 몰입해 미쳐야 한다고 했다.
이미 속사권총분야에서 독보적 존재감을 뿜어낸 그는 정말 사격에 미쳐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사격만을 생각하면서 매일같이 연습을 했더니
어떻게 사격을 준비해야 하고 어떻게 사격시합에 임해야 하는지 서서히 눈이 떠졌다.
그래서 자신의 생활습관마저 사격에 초점을 맞추면서 자신의 모든 감각을 24시간 내내 사격을 위해 깨어놓는다.
술, 콜라, 커피는 물론 담배에도 일절 손을 대지 않았고 간접흡연도 피해 다녔다.
22시에는 틀림없이 자고 아침일찍 일어나 운동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기를 6개월.
서서히 늘어나는 실력과 함께 당당해지는 자신감은 보너스였다.
“나보다 더 훈련한 사람은 없다. 내가 최고다. 그런 자부심이 생겨요. 정열을 다 바쳐서 최선을 다했으니까.
보고싶은 사람 만나듯이 시합이 막 설레는 거에요. 그것이 자만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겠지만 자기 확신은 필수에요.
나를 믿어야 총알도 10점에 명중하는거지. 나는 자신감이 떨어질 때 해병대 주문을 많이 외웠거든.
내가 해병대 장교인데 하는 기합. 아유~ 그 덕분에 심리적 안정이 많이 되었지.”
이런 과정을 거쳐 그의 아시안게임 3연패의 신화는 시작되었다.
생각해보면 요즘은 엘리트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어릴 때부터 연습하고 재능을 길러온다.
하지만 그의 사격 이력은 해병중위부터 시작이다. 다른 선수들은 최전성기를 누릴 시기에 사격에 입문한 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권총 속사분야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르고 꾸준히 그 실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같은 피나는 노력과 끊임없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첫 아시안게임 무대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아시아선수권자였지만 은메달 2개, 동메달 2개로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금메달을 못 딴 게 문제가 아니야. 북한한테 졌잖아요. 해병대 장교가 적군에게 진 거지.
정말 이를 악물었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으니까.
그렇게 준비한 4년. 78년 방콩아시안게임에서 운명처럼 마주한 북한과 영화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때..도 한국선수단 성적이 안 좋았어요. 개막 5일째였는데 금메달이 없었죠.
속사권총 결승이었는데 북한 선수가 먼저 쐈습니다.
당시 아시아 신기록이 589점이었는데 북한 서길산 선수가 2점을 갱신한 거야. 591점이 나왔어요.
북한은 금메달을 확신하고 신이 났죠.
우리 선수단에 와서 약을 올리면서 그럽디다. ‘동무들 우리는 금메달 6개째야요’
그리고 내 차례가 됐는데 난 보기 좋게 593점을 쐈지.
감독하고 코치진이 서로 얼싸안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감독이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내 마지막 사격이 10점에 명중하는 걸 봤다지 뭐야.
앞선수가 갱신한 신기록을 깨고 또 신기록을 쏜 것만으로도 특종인데
그 대상이 북한이었으니 대한민국이 뒤집어진 거죠. 거기다 첫 금메달이었고.”
이 금메달로 그는 6개월 동안 대한뉴스에 보도되면서 지금의 박태환, 김연아를 능가하는 스타가 된다.
“금메달도 정말 기뻤지만 내가 해병대 장교로서 적을 멋지게 해치웠다는 생각에 더 가슴이 벅찼어.”
환희의 순간을 회상하는 그의 눈에는 자부심이 엿보였다.
목소리는 아직도 그때의 감독을 기억하는 듯 살짝 떨리기도 했다.
사격 영웅 박종길은 이제 화려했던 현역의 옷을 벗고 이제 대한민국 체육계의 예비역으로 또 열정을 담아 살아가고 있다.
농구인 김인건씨에 이어 태릉선수촌의 촌장이 된 것이다.
한국 체육계는 2012년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출전권 획득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런 비상시국에 모든 것을 책임지는 태릉선수촌장으로 취임했다.
선수촌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해병대 장교로서 중대장을 지낸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제가 있을 때만 해도 선수촌하면 엄격하고 상명하복의 꽉 막힌 훈련이 전부였죠.
하지만 지금은 선수들이 스스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유분방한 신세대 선수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선수촌이 즐겁고 흥겨워야 경기력도 향상되는 거에요”
그는 또 자신의 철학을 이렇게 이어갔다.
“촌장은 감투가 아니거든요. 한 집안을 토닥이고 이끌어가는 할아버지일 뿐이에요.
자식과 손자를 돌보는 것처럼 선수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에게도 절대 선수들에게 고함치거나 짜증 내지 말라고 하죠.
이제는 선수들이 지나가면서 촌장님이 할아버지 같다고 그래요.”
신세대 선수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그들과 소통하는 ‘감성선수촌’과 ‘할아버지 촌장론’은 선수들에게 크게 어필하며 다가가고 있다.
선수촌을 이끌어가는데 해병대 중대장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는 그에게 이번 총기사건은 어떻게 느껴졌을까.
“사건 속보가 날 때부터 계속 지켜봤죠. 물론 언론보도를 다 믿을 수는 없겠지만 가혹행위나 구타는 너무 가슴 아팠어요.
지휘관과 지휘자들이 관리에 좀 더 신경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젊은 세대를 이해하고 다가가야 합니다. 자신들이 훈련받던 때, 자신들이 고생하던 때만 생각하고 일방적으로 지휘하면 문제가 발생해요.
정말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면서 커맨더가 아닌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국가에 충성하고 선봉에서 국가를 호위하는 진짜 강군이 되어주세요.
각종 사고로 나타난 지금의 모습은 해병대가 아닙니다.”
선배 해병이자 선배 지휘관으로서의 가슴 절절한 당부와 충고가 느껴진다.
그리고 흐르는 어색한 공기.
해병대 장교로서의 자부심과 당당함으로 살아왔던 그에게 총기사건은 큰 충격이었나 보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지는 어두운 표정이 더 짙어지기 전에 얼른 화제를 바꿨다.
2012 런던 올림픽은 한국 체육계에 큰 의미가 있다.
1948년 건국 이후 처음 참가한 올림픽이 런던 올림픽이었다.
그 후 64년만에 다시 찾는 런던에서 스포츠 강국으로 성장한 한국의 기량을 세계에 보여 줘야 한다.
이외에도 코 앞으로 다가온 동계아시안게임과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따른 동계선수 발굴과 육성도 그의 몫이다.
차후 한국 체육계의 성패를 좌우할 열쇠를 잡고 있는 그의 각오는 어떨까.
“3회 연속 Top10을 달성해야죠. 금메달 13개 이상은 반드시 획득할 겁니다.
지금까지 각 종목 대표팀의 훈련을 꼼꼼하게 살피고 선수들과 많은 대화를 해봤는데 전망이 밝아요.
우리 신세대 선수들은 자유롭고 밝은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목표를 위해 굉장히 노력합니다.
외국인 코치 초청은 물론이고 해외 정보수집 비용도 배정해서 유력종목은 집중 지원할 겁니다.
런던의 시차와 기후 적응을 위해서 대한체육회가 직접 런던에 훈련캠프를 차릴 예정이어서 효과적인 훈련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할 겁니다.
해병혼으로 정신력을 강화하라는 주문도 물론 필수적으로 하고 있죠.”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촉촉하게 젖은 태릉선수촌을 박종길 촌장과 함께 둘러볼 수 있었다.
자유롭고 밝은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꿈을 향해 진지한 땀방울을 흘리는 선수들을 보며
그의 말 대로 2012 런던올림픽의 전망이 밝다는 것을 확인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를 달리며 식지 않는 열정과 해병혼을 불태우고 있는 자랑스러운 예비역 선배들.
대한민국 체육계의 발전을 위해서 뿐 아니라 예비역 해병 대위 박종길을 위해서라도
이번 런던 올림픽에 엄청난 금광들이 발굴되길 기원해본다.
그는 1973년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고 해군과 통합되면서 군복을 벗었다.
영원한 해병으로 남고 싶었다고 단호하게 대답하는 그에게 영원한 해병대 장교로서 후배들에게 덕담을 부탁했다.
“우리 해병대는 언제나 국가의 최선봉에서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삼군에 앞장서 있다는 그 명예와 자부심을 절대 잊지 마세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해병다운 해병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지금 새겨넣은 해병대 정신은 평생 인생의 주춧돌이 되어 줄 것입니다. 참다운 해병대 정신을 길러주세요.”
자리에 앉자마자 해병대 이야기부터 꺼낸 그는 마음만은 여전히 현역 중대장이었다.
고도의 인내로 고통을 이겨내고 목표를 성취하는 해병혼을 그는 선수들에게 강조한다.
선수촌 구석구석 그의 발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출처 : "해병대" 제40호, 해병대사령부,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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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필승...축하드립니다 훌륭한 선배님이 중책을 맡으셨으니 틀림없이 멋진 공무원이 되리라 생각합니다...해~~병
성격이 여자같으신데" 서울 목동 실탄사격장 운영하셨는데(가족모두) 축하드림니다 중대장님!
축하드립니다.
필승!
예전에 한번 읽은 기억이 나는 기사,,,참 자랑스런 해병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해병들이 갖게되는 혼,,,우리만의 영원한 자산이지요,,
승전을 축하드림니다.필~~~씅.!!
해병대 독립에 기대가 큼니다~~~
박종길 선배님의 문체부 2차관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한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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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길 차관님이 해병대 출신이라서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