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기운이 서려있는 시골 한구석, 이곳의 평화로움을 색채로 비유하자면 밝은 녹색이라
고나 할까. 마을의 짧은 다리의 아래에는 강이 찬란한 빛깔을 내보이며 물결을 따라 흘러가고,
그 저편에 있는 산 어귀에서는 등을 살포시 밀어주는 바람이 불어온다. 이 바람은 공기를 따라
흐르고 흘러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뒤로 젖혀주었다.
다시 바람은 흘러가 나무 위의 잎들에 맺힌 이슬을 흔들어주고 또다시 흘러가 마을의 학교
운동장에 모래들을 흩날려준다. 다시 흐르고 흐르니, 한 창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 창문 가에
앉은 한 어린아이의 머리에 맺힌 땀을 살짝 식혀주었다.
그 소년은 바람을 살짝 맞고는 잠시 저 파란 하늘색의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이 멍한 표정으로 그 조그마한 입술을 연다.
'날개라...'
...
모든 수업의 끝마침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아이들은 돌아가서 뭘 할지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차 연신 싱글벙글 이다.
그 무리 속에서도 여전히 무표정을 꿋꿋이 유지하고 있는 어린아이가 한 명 있다. 창가에
앉아 있는 그 아이는 여전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레이널드 선생님이 와 계신
것도 모르는 채.
"사쿠, 뭘 그리 생각하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향해 레이널드 선생이 묻는다. 대답을 바라는건 아닐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아이는 아무 핑계도 대질 않는다
"사쿠는 오늘 남아서 당번들이랑 같이 청소하도록"
레이널드 선생님의 엄한 명령에는 그 어느 아이라도 거역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아이도
예외는 아닐 테지. 하지만 그 아이에겐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다, 그저 무언가를 골똘히 생
각하고 있을 뿐. 덕분에 이 아이는 하지 않아도 될 청소나 하고 가게 될 테니 다른 청소당
번들은 수고가 덜어진 다는 생각에 그저 좋을 뿐이다.
"오늘 어딘가 이상해... 아픈거야?"
그 아이의 옆에 앉아 있는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물어온다. 하지만 그 아이의 무표정은
변함이 없다. 도리어 다시 눈을 돌려 몸을 돌려 묵묵히 생각에 잠길 뿐이다.
이내 종례는 끝나고 남은 청소당번들은 쓰레기 흩날리는 교실을 비질하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에서 교실 밖으로 나간 이들을 향한 비난이 쏟아져 나오고만 있다, 마치 자신들은 그
교실은 쓴 적이 없다는 듯한 말투로. 그런 와중에 사쿠라는 아이는 창틀을 닦고 있다. 눈의
초점은 은은한 하늘색을 띠고 있는 하늘을 향해 있는 채로...
그리고, 회상에 잠긴다...
*
하아... 시원하다... 역시 축구 한 판 뛴 후에 한 모금 마시는 물맛이란... 캬~ 어른들이 일
마친 후에 마시는 맥주 맛과 비슷하다 고나 할까? 뭐, 난 아직 마셔본 적이 없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시원해 죽겠네... 으으... 이게 바로 천상의 맛이라고나 하는 것 일까나? 물론, 운
동 후에 마셔야만 하는 점이 있지만...
"이봐, 사쿠! 얼른 비키라구"
"알았다고, 보채지 좀 마"
"자식... 검술은 언제나 형편없어서 혼만 나는 녀석이... 체력만 세서는, 만날 제일 먼저 수도
가로 뛰어가기냐?"
"뭐야?"
이 놈들... 앞으로 용사가 되실 분에게 그런 실언을 하다니... 니들은 오늘 물 다 마신 줄 알
아라... 맛 좀 봐라!
"우왓! 뭐하는 거야!"
"히히... 보시는 대로"
수도꼭지의 꼭지부분을 손가락으로 막아버리자 그 안에서 흘러나오던 물들은 나올 곳을 찾
아 헤매다 내가 살짝 열어준 빈틈으로 나가 섰고, 그 틈에서 나온 물줄기들은 이내 내 뒤에
줄줄이 서있던 아이들을 향해 폭격되었다.
"푸웁! 풉!! 풉!! 그만햇!"
"시원~ 하지?"
"크악! 저 자식 잡앗!"
"다 지쳐 쓰러져 가는 놈들이 무슨 재주로... 쯧쯧"
킬킬... 방금 까지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던 녀석들이 잡겠다는데... 무서
울게 뭐 있나? 이 몸은 이미 원기충전이 완료된 상태라고. 그래도 일단은 피해 봐야겠지?
비리비리 한 놈들이지만 일단 뭉쳐 있으니, 잡히면 뼈도 못 추릴 거야 아마. 아쉽지만 일단
은 이 정도로 끝내주자고. 그럼, 어서 도망쳐 줄까나?
"얼른 잡앗!"
난 이미 교문을 벗어나 있는데... 아직도 저만치에서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크하핫, 재밌
어 죽겠네. 이런 재미도 있어야 만날 학교 갈 의욕이 생기는 법이라고. 그러니, 날 너무
원망하지 말도록, 그랬다간 저 하늘위의 신께서 너희에게 천벌을 내려 주시리~
...
얼마나 달린 거지?
이런... 너무 들떠 있었던 걸까... 너무 달려버린 것 같다. 여기가 대체 어디인 거지... 일단
은 숲으로 보이긴 하는데 말이야... 도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처음 보는 풍경이다. 하지
만, 마을의 울타리 너머에 있다는 산보다도 아름답다면 아름답다 고나 할까나. 찬란한 햇볕
이 내리 쬐고 있는 주변에 있는 나무들은 마치 엘프의 숲에 있다는 고목들 만한 크기들이었
고, 그 나무의 아래에는 가지각색의 야생화들이 여럿 피어나고 있었다. 나비들은 꽃들의 위
에 잠시 머물라 앉아 꿀을 마시고 있었고, 나무 위의 새는 그런 나비를 보며 무어라고 재잘
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곳에 펼쳐져 있는 풍경들 중, 가장 아름답다 라고 할만한 게 있다면... 숲의 저
너머로 보이는 들판에 서있는 소녀가 아닐까 싶다.
지금은 뒷모습밖에 보이질 않지만, 저 소녀의 주변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오렌지 빛을
띠는 머리카락. 그리고,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서 들판에 서있는 저 소녀의 모습은 나의 발
을 이곳에 묶어두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너무나도 황홀했던 탓일까? 나는 그만 멍한 얼굴로 옆에 있는 나무에 몸을 맡기고는 모든
신경을 눈에 집중한 채로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가 얼마나 서있던 걸까, 그리고 나는 얼마나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상당한 시간
이 지나갔다고 느껴졌다. 그 때였다.
-스르륵
멀어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틀림없이 저런 소리가 났을 것이고, 그 소리와 동시에 소녀는
자신이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기 시작했다. 하지만 왜 였을까? 나는 그 자리에서 그저 가
만히 서있었다. 소녀의 알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다리가 내 몸을 붙잡고 있었다. 잠자코 보고나 있으라는 듯이.
어느새 소녀가 입고 있던 옷이 모두 그녀의 발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나는 소녀의 알몸
은 보지 못했다, 아니 볼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을 가려주던 옷이 있던 자리에는, 순백색의...
전혀 때가 묻지 않은, 아델리아 천의 맑기와도 같이 맑은 색을 띠고 있는 두 개의 날개가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등의 어깨죽지에서 뻗어져 있는 두 개의 날개는 서로 다른 방
향으로 그녀의 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날개가 펼쳐졌다. 소녀의 전신을 가리고도 훨씬 남을 듯한 크기의 커다란
날개. 그 모습은, 마치 라이미라크 신께서 부리신다는 '천사'의 모습이라 하더라도 믿을 수
있을 법한 모습이었다, '천사'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봐온 적이 없는 나이지만, 있다면 분명히
저 소녀의 모습일 것이다.
소녀의 두 날개가 한 번 펄럭여졌다. 그와 동시에 산뜻한 바람이 내 얼굴에 쐬여졌다.
모든 것을 녹여버릴 수도 있을 법한 따뜻한 바람이... 그 바람에 내 머리카락이 잠시 살랑이
자, 내 눈을 가려버렸다. 나는 그다지 개의치 않고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앞을 바라보았
다. 하지만... 그 소녀가 날개를 펄럭이던 자리엔 틀림없이 날고 있어야 할 소녀가 마치 힘
없이 죽어 가는 참새의 모습을 한 채로 들판에 쓰러져 있었다.
어째서지? 날지 못한 건가? 왜 저렇게 비참하게 쓰러져 있는 거야 대체!
이상하다. 나의 일이 아님에도, 나는 무언가 울컥하며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일
까, 소녀의 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바램이 컸던 탓일까. 나는 참지 못하고 소녀를 향해
걸어갔다. 달리지 않았다, 왜 달리질 않는 걸까... 몸은 다리에게 어서 달리라고 명령을 하
고 있지만, 다리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서서히 다가가고 있다, 소녀를 향해.
이윽고, 내 그림자가 소녀의 몸을 뒤덮을 정도로 다가갔다. 소녀는 자신의 얼굴을 꽃밭에
묻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원통한 것일까, 날개가 있음에도 날지 못한다는 사실이...
눈앞이 어두워졌음을 느낀 걸까, 소녀는 얼굴을 들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녀의 얼
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분명 나는 이 소녀는 틀림없이 아름다울 거라 생각했다. 하지
만, 눈물이 소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탓일까, 소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추해 보였다. 슬픈
빛을 띠고 있는 눈동자가 나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나 자신이 추해 보이느냐고.
눈동자의 물음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뜻을 알아챈 것인지, 소녀는 이내 눈물
을 자신의 가녀린 팔로 닦아내었다. 팔이 눈물을 닦느라 가려졌던 얼굴이, 눈물을 닦고 나
자 환하게 웃음을 짓고 있는 얼굴로 바뀌었다. 소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귀여웠다. 하지만,
말없이 나를 향해 짓고 있는 웃음은 대체 뭘까... 그 뜻은 알 수 없었지만, 나도 그녀를 따
라 미소지었다. 이게 소녀의 웃음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되었기에.
소녀는 알몸이었지만, 그다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나 또한 소녀가 알몸이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소녀
가 쓰러져 있는 자리의 옆으로 가 조용히 누웠다. 그리고는 다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저 계속 누워있었다. 하늘위의 노란 달이 지금 위에 자리잡은 해의 자리를 대신 해 줄 때까지.
며칠 후
말없이 집에서 나온 나는 아침의 해가 내리 쬐는 빛을 한 몸에 받으며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
였다. 그 생각에 따라 몸은 순순히 응해 주었고, 내 몸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
고 나의 몸이 멈추었을 때에, 나는 언제나처럼 그 숲에 도착해 있었다. 주변엔 여전히 황홀
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으나, 나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숲의 저 너머에 있을 소녀
를 볼 생각뿐.
예상대로 소녀는 들판에 가만히 서있었다. 오늘도 날개를 퍼덕여 볼 생각인 걸까. 나는
말없이 소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옆에 서서 나 역시 가만히 서있었다. 이런 행동이 무슨 의
미가 있냐고 물어온다면, 내가 무슨 대답을 할 순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으니. 하지만, 적어도 이런 대답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보단 곁에 누군가
있어주는 게 더 나을 거라고... 그다지 성의 없는 대답이려나.
또다시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은 어제처럼 멀리
서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옆에서 보고 있던 터라 실례가 된다고 생각됐기에 그녀에게
서 몸을 돌렸다.
-툭, 툭
소녀가 내 오른쪽 어깨를 그녀의 작은 손으로 툭툭 쳐왔다. 잠시 이게 무슨 뜻인지에 대
해 생각했던 나는 이내 그 뜻을 알아채리고는 다시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녀를 똑똑히
봐주었다. 물론, 그녀의 알몸이 아니라, 그녀가 날개를 퍼덕이는 모습을...
-퍼덕, 퍼덕
소녀의 날개가 소리를 내며 펄럭여졌다. 어제와는 약간 다른 모습. 아니,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틀림없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게 확신하였다.
내 감이 적중한 것일까? 난 보았다. 그녀의 다리가 잠시나마 허공을 밟고 있었던 것을.
난 그 놀라운 광경을 보았지만, 그저 말없이 박수를 쳐주었다. 나의 어리고 작은 손에서 나
오는 박수소리는 그 놀라운 광경을 채우기에는 너무나도 턱없이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
녀는 날개를 펄럭이는 것을 멈추고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나를 안아
주었다. 내가 그녀에게 안긴 채로 잠시동안 시간이 지났다. 그러던 중 무언가가 뇌리를 스
쳐지나갔다. 그녀가 알몸이라는 것이... 순간 당황한 나는 그녀를 밀쳐내었다. 나의 행동에
당황한 듯한 소녀였으나, 잠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이해했다는 뜻인지
얼굴을 붉히었다. 물론 내 얼굴도 화끈한걸 보니 틀림없이 나도 소녀의 얼굴과 같은 색을
띠고 있겠지. 잠시간을 그렇게 어색한 듯이 고개를 숙이며 아래를 바라보던 우리는 이내
동시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웃었다.
비록 너무나도 작은, 너무나도 낮은 비행이었지만, 그녀는 해내었다. 자신의 날개로 날았
다는 것을. 언젠간, 그녀의 날개로 저 이웨카가 있는 곳까지 닿도록 날게 될 수 있을 것이
다.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난 답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또 왜냐고? 답이 너무나도 당연하니까...
*
청소가 끝나자 사쿠의 회상도 동시에 끝났다. 사쿠는 말없이 교실을 나섰다. 그리고는 운
동장의 한 구석에 세워져 있는 단련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했다.
소녀는 날았다. 이젠 자신의 꿈을 이룰 차례라는 것인가.
오래 전부터 사쿠의 꿈은 용사가 되는 것. 하지만, 지금 그의 검술실력은 형편없었다.
때문에 아이들에게 체력만 좋고
검술은 젬병이라는 소리를 자주 들어왔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 사쿠는 왠지 자신의 꿈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사쿠가 단련대의 앞에 서서 천천히 목검을 빼 집었다. 그리고는 단련대를 향해 크게 반원
을 그리며 휘두른다.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나무재질의 단련대에 자신이 평소에 냈던 자국
보다 커다란 자국이 생겼다. 만족스런 웃음을 띠고 사쿠는 옆을 돌아보았다.
그가 돌아본 곳에는 사쿠를 바라보며 말없이 웃으며 서있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있는
소녀가 서있었다.
***
소녀와 소년은 아직까지 단 한마디도 말을 나누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 둘은 함께 있을 겁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함께 용사가 되기 위한 모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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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서 꿈을 좇는 사람이 있다면 곁에서 말없이 지켜봐 주세요.
그런다면 그 사람도 당신을 곁에서 말없이 지켜봐 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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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소설
[만화가 지망생이 그려내는 이야기] - 1.소녀의 날개 편 ②
아르세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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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02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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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로서 만화의 내용을 표현한다는게 가능할까요...? 이제 겨우 2편을 쓰는거지만... 왠지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기도...;;
재미있네요, ㅎ 건필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