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2월 27일 금요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 1요한 1,1-4
복 음 : 요한 20,2-8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2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요한 13,23)
요한 사도는 제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님의 품에 기댈 수 있을 만큼 깊은 사랑을 받은 제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빈 무덤을 향하여 베드로와 함께 달려 먼저 무덤에 다다랐지만
베드로가 올 때까지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요한 사도였다면, 저는 곧바로 무덤에 들어갔을 것 같습니다.
저를 그토록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없어지신 것을 가장 먼저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요한 사도는 왜 베드로를 기다렸을까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과 뜻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기다렸고, 그가 빈 무덤을 확인한 첫 번째 사람이 되게 하였을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랑을 사도들 안에서 권력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그토록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정말로 바라시는 일,
베드로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려는 그분의 뜻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력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시려고 하시지 않았을까?’라고
주님을 원망하거나 시기와 질투로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요한 사도가 보여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도 배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이루어지도록 협력할 줄 아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요한 20,5)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제 모임이 있을 때, 책 한 권을 들고 갔습니다.
제 옆에 앉은 신부님은 제가 들고 간 책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책 이해가 돼? 나는 도대체 무슨 말 하는 줄 모르겠더라.”
이 신부님은 저보다 훨씬 똑똑하고 책도 많이 읽었지만,
이 책을 읽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렵기는 했지만 다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더 똑똑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쩌면 제가 더 이 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두 이해한다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공부를 왜 할까요?
모든 것을 알고 또 이해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고 있고 또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기에 계속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책도 그렇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앎을 갖게 되었다면서 호기심을 가지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종 주님을 도대체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주님 믿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요?
모르기 때문에 알기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노력을 통해 조금씩의 ‘앎’이 자기에게 다가옵니다.
그 앎으로 기쁨과 함께 주님과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중요한 사건에 늘 요한 사도가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간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에 놀라서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인 요한에게 알립니다.
그리고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빈 무덤을 보고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몰래 다른 곳에 옮겼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직접 평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새겨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예수님께 대한 앎을 키워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우리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온전히 알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알기 위해 노력하면서 조금씩 알게 됩니다.
이 앎을 통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주님과 더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성탄 8부 안에서 요한 사도의 축일을 맞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구약성경의 ‘새로운 벤야민’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곧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벤야민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이'(신명 33,12)였듯이,
열두 제자 가운데 요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요한 13,23; 19,26; 21,7; 21,20)라 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보다 빨리 무덤이 도착하였지만, 먼저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베드로보다 더 젊은 요한이 더 빨리 도착 수도 있었겠지만,
이는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먼저 도착한다’는,
또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깊이 깨닫는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기만 하지만,
요한은 들어가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실 ‘빈 무덤’과 ‘구유’는 예수님께서 몸을 눕혔던 ‘같은 한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작’과 ‘마침’, 곧 오실 때와 가실 때에 머무른 땅의 자리입니다.
그분은 ‘구유’로 우리의 출생을 성화시키시고,
‘빈 무덤’으로 우리의 죽음을 성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탄생이 당신 어머니의 동정성이라는 봉인을 뜯지 않으셨듯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실 때도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막은 돌을 통과해서 지나가신 것과 같습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주간 첫날 아침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
예수님의 무덤은 봉인된 상태였습니다.
그 때문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마태 28,2)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고 통과하셨습니다.
곧 '당신 어머니의 동정성이라는 봉인을 뜯지 않으셨듯이,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또한 아기의 몸을 감싸고 있던 ‘포대기’가 구세주 ‘탄생의 표시’가 되듯이,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아마포 수의’와 머리를 쌌던 ‘수건’은 ‘부활의 표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마포’는 놓여 있었고, ‘수건’은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이 두 개의 수동태는 ‘하느님의 개입’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구세주의 ‘강생의 표시’와 ‘부활의 표시’를 동시에 봅니다.
이제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무덤’으로 ‘들어가고’, ‘마구간’으로 ‘들어가서’ 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세를 낮추어 더러운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무덤의 돌문’을 열 듯 우리 마음의 빗장을 열고서,
울고 있고 지친 이들이 있는 곳, 춥고 배고픈 이들이 있는 곳,
‘세상 속의 마구간’과 자신의 악취에 찌든 ‘우리 자신의 마음 속 마구간’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생명을 가져다 준 ‘구유’의 아기 예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드러내는 ‘빈 무덤’을 동시에 봅니다.
우리 안에 더없는 사랑으로 들어오시는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봅니다.
하오니, 주님!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듯, 목동들이 구유로 달려가듯,
고귀한 경쟁에서 질세라 빨리 달리게 하소서!
무덤을 들여다보지만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비워져 나오게 하소서!
비어진 맑은 눈으로 보게 하시고, 본 바를 믿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생명과 사랑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또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어디선가 그 속내를 드러내게 됩니다.
물론 없는 사랑을, 있는 척해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갔습니다.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와 제자는 무덤을 향해 함께 달렸습니다.
듣자마자, 그것도 달려갔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 줍니다.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 있습니다. 역시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리아와 제자들은 이미 무덤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깊은 슬픔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아닌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습니다.
젊어서이든 주님을 더 사랑해서 빨리 달렸든, 이유는 모르겠으나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덤을 들여다볼 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들어가서 본 후에야 들어가서 보고 믿었습니다.
여인의 증언을 듣고, 빈 무덤을 확인하고 믿었습니다.
증언하는 사람과 그 증언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의 관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이지만
그를 받아들이고 베드로를 여전히 으뜸 제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지만, 여전히 그는 주님의 제자이고, 죄를 범했지만, 그는 여전히 제자들의 맏형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그것을 알기에 그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준 모습입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압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해 주신 것(요한13,23; 19,26; 20,2; 21,7.20)처럼 베드로를 사랑했습니다.
베드로가 공식적 사실을 조사하러 갔고, 다른 제자는 보고 믿기 위해 갔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의 역할입니다.
부활 신앙은 부활 발현 없이도 가능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상대방의 어떤 과거를 알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그는 낙인이 찍히고 미래가 없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은 없습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나는 넘어지지 않았는데 저 사람은 왜 넘어졌을까?”
판단하고 단죄하지 말고 “자비와 연민의 눈길”로 봐야 합니다.
“의인은 자신의 판단과 판결을 미안해합니다.
의로운 판결은 편견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옛말이
‘기쁨을 나누면 시기,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고
바뀌었다 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마음!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더욱 소중한 시대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 12월 1일부터 4일까지 달라스 교구 시노드 회의가 있었습니다.
시노드는 3년 동안 준비했고, 이번 모임으로 폐막하였습니다.
3년 동안 4,000개가 넘는 안건이 논의 되었습니다.
준비위원회는 그중에서 307개의 안건을 선별하였습니다.
307개의 안건은 다시 17개의 주제로 나누었습니다.
교리교육, 학교와 교육, 성사, 혼인, 이민, 성소수자, 교구 행정, 본당 행정,
자선, 사회복지, 성사, 미사, 전례음악, 사제 생활,
사제 양성, 사제 교육, 환경과 같은 주제로 나누었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307개의 안건 중에서 먼저 실시해야 할 50개를 선별하였습니다.
17개의 주제 중에서 먼저 실시해야 할 5개를 선별하였습니다.
교구장님은 시노드의 투표 결과를 참조해서 2031년까지 교구의 사목 지침에 반영하겠다고 했습니다.
시노드 폐막 미사에서 모두의 기립박수를 받았던 자매가 있었습니다.
자매는 시노드의 모든 과정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하였습니다.
교구장님이 그녀를 소개하고, 꽃다발을 선물했고, 모든 준비위원이 기립하여 박수쳤습니다.
그녀는 8살 때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파티를 준비했고,
이웃들을 초대해서 부모님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묵시록을 통해서 박해와 고난을 이겨내고,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다른 차원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이 사실과 현장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표징과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도 새로운 관점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로고스 찬가’입니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땅을 기어다니는 것이 숙명입니다.
그러나 애벌레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하얀 날개가 날린 나비가 됩니다.
이제 나비는 더 이상 땅 위를 기어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나비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 찬가를 읽으면
하늘을 힘차게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웅장한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전승은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성모님을 모시고 살았으며, 교회의 귀중한 보물인
요한복음, 요한 서간, 요한 묵시록의 저자라고 합니다.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서
늘 가까이 데리고 다녔던 제자 중에 한 분이셨음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도 요한 사도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죽은 소녀를 살려 주셨을 때도 요한 사도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을 때도 요한 사도는 함께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떠나실 때도 요한은 예수님 곁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드렸습니다.
어머니께는 요한 사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 사랑을 받은 만큼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사도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 사도가 있어서 십자가 위에서도 눈을 감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 사도가 있어서 행복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또한 요한 사도처럼 주님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때문에 주님께서 행복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요한 사도의 겸손함을 보았습니다.
그토록 사랑을 받았던 요한 사도는 베드로 사도보다 앞서서 빈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 사도는 그 중요한 일은 베드로 사도에게 양보하였습니다.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많은 일이 다른 이들이 해도 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자리를 차지하는 것 때문에 실수하고 잘못하는 때도 있겠지만
자리를 포기하고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더 큰 실수와 잘못을 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준 요한 사도의 겸손함을 배운다면
우리는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면서 요한복음의 세계로 잠시 들어가면 어떨까요?
저는 요한복음 13장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겠습니다.
부활 날 아침에 무덤에 간 제자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은 사도 요한의 축일이다.
본시 전례는 성탄 다음 날을 성 스테파노 축일로 정하였고
그다음 날을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게 하고 있다.
스테파노 성인은 교회사에서 첫 번 순교자이시다.
교회는 예수님을 처음으로 생명을 바쳐 증거하신 성인을 먼저 지내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다음 당신의 일생을 통해 그분이 사랑이심을 증거한 요한 사도를 오늘 기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도 증거해야 하는 것이며,
우리의 삶이 항상 사랑의 삶으로써 증거의 삶이 되어야 함을 말해 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은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가 무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무덤에 먼저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 사도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베드로의 으뜸 수위권이 나타난다.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고 자신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가
주님의 부활을 믿은 첫 사람이 된다.
무덤 안에는 수의가 흩어져 있었는데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고 한다.
이 수건은 얼굴에서 치워진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고, 하느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도 수건으로 가려야 했다.
얼굴이 너무나 빛나서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얼굴은 인간으로서 관상할 수가 없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봄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므로 더는 수건이 필요 없게 되었다.
요한은 실제로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복음에서 말하고 있다.
이제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을 사랑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과 나누었던 친교는 제자들만 누리는 특권은 아니었다.
요한은 이 친교를 전 교회 공동체가 나누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그분과 진정한 친교 안에 살고 있는가?
또 나의 형제자매들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게 산다면 이것은 우리의 특권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이 특권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하여야 한다.
이 특권은 끝까지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특권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 순간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나를 주님 앞에 낮출 수 있는 삶,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살고 실천하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신 그분을 닮을 수 있다.
우리도 성탄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삶 속에서 그분과 나누고 있는 친교의 기쁨이 나의 것으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이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는 의미이다.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우리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어야겠다.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기쁨을 주고 한시름 잊게 하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끔씩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명대사를 접하면
대본 작가님들의 민중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에 감탄하게 됩니다.
“우리 같은 서민들 하루하루의 삶은 위에 앉아 있는 분들이 상상 못 할 정도로 힘겹답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한 편의 연극이나 드라마를 보며 박수를 치고, 대리 만족합니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잠시나마 기쁨을 주고 한시름 잊게 하는 것이 예인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니 저희 같은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명도 막중한 것 같습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영혼을 돌보는 존재로서 전례나 성무를 더 잘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잘 연습 된 아름다운 성가로 교우들이 마음을 활짝 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상처 입은 마음들을 부드럽게 위로하고 고통 속에서도
힘차게 살아갈 에너지를 제공하는 멋진 강론도 필요하겠습니다.
한명 한명 교우들과 눈을 맞추고 진심으로 환대하고 경청해야 하겠습니다.
더 많은 사랑을 관대히 나눠야 하겠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요한복음 사가가 그랬습니다.
사도 성 요한 복음사가는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주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고, 또한 그 사랑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타이틀을 하나 붙인다면 사랑의 사도입니다.
나이 든 그는 만년에 말하기조차 힘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틈만 나면 외친 단어가 사랑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을 듬뿍듬뿍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 어떤 시련과 고통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 체험을 바탕으로 죽음조차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으며, 그 사랑의 체험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건장한 남성이었던 그가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이런 표현까지 썼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이 세상 안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사랑은 언제나 한계가 있고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연인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영원할 것 같던 불같은 사랑도 세월과 더불어 식어갑니다.
마치 산같이 든든했던 아버지의 사랑도 초라하고 구차한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이 있으니 바로 주님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랑, 최종적으로 추구해야 할 사랑은 주님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 불멸의 사랑, 한계가 없는 사랑,
마지막 날까지 변하지 않을 사랑, 오직 주님 사랑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가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님 성탄 팔일축제의 셋째 날에 교회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지낸다.
사도 요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통상 그가 스스로 집필하였다고 알려진
요한복음 자체에서보다 공관복음의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우선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였다.(마르 1,19)
그는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야고보의 형제요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12사도의 명단에 들어있다.(마태 10,2)
복음사가 마르코는 사도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에게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붙였다.(마르 3,17)
이로써 두 사도는 매우 활동적이고 격한 성품을 가진 인물로 추정되며,
예수의 일행을 거부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살라 버릴 생각도 하였다,(루카 9,54)
요한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 예수로부터 총애를 받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하기도 했다.(마태 17,1; 마르 9,2; 루카 9,28)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명예욕도 강하여 예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오른편과 왼편의 자리까지 부탁하였다.(마르 10,35-40)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에서도 요한과 야고보는
베드로와 함께 믿음의 기둥처럼 존경받던 사도들이었다.(갈라 2,9)
이처럼 공관복음서는 사도 요한에 대하여 그의 이름을 擧名하여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 복음서가 사도 요한의 이름을 단 한 번도 거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면 사도 마태오는 자기 복음서에 자신의 이름을 3번 기술하고 있으며(마태 9,.10; 10,3)
사도가 아니었던 구카의 이름은 바울로의 서간에만 3번(골로 4,14; 2디모 4,11; 필레 1,24)
마르코의 이름은 사도행전에 5번, 서간에 4번 등장한다.
유독 요한복음만은 ‘요한’을 거명하여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러나 복음서 전체에 사도 요한을 가리키는 부분은 많다.
요한복음은 딱 한 번 ‘제베대오의 아들들’(21,2-21장은 추가 편집 부분)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밖에 다른 대목에서는 막연히 ‘제자’로 표현되고 있지만
문맥상 사도 요한을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밑줄을 그은 부분의 ‘제자’는 모두 사도 요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요한복음에서 보듯이 밑줄을 그은 부분의 ‘제자’는 모두 사도 요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암시하는 ‘제자’로 언급된 대목을 정리하여 보자.
“다음날 요한이 제자 두 사람과 함께 다시 그곳에 서 있다가
마침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하고 말하였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1,35-37)
“그때 제자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눈짓을 하며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여쭈어 보라고 하였다.
그 제자가 예수께 바싹 다 앉으며 ‘주님, 그게 누구입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하셨다.”(13,23-26a)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사제와 잘 아는 사이여서 예수를 따라
대사제의 집 안뜰까지 들어갔으나 베드로는 대문 밖에 서 있었다.
대사제를 잘 아는 그 제자는 다시 나와서 문지기 하녀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18,15-16)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19,26-27)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하고 묻던 제자였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예수께 물었다.”(21,20-21)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퍼졌다.”(21,23)
“그 제자는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글로 기록한 사람이다.”(21,24)
위의 요한복음이 기술하는 대목들을 미루어 볼 때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제자(애제자)였고,
공관복음이 거론하는 바로 그 사도 요한과 동일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사도들 중에서
예수님의 빈 무덤을 가장 먼저 목격하고 믿었던 자들이 바로 베드로와 요한이다.
요한이 빈 무덤에 먼저 도달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를 기다린 것은
초대교회 안에서의 베드로의 首位的 위치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ㄱ석된다.
따라서 초대교부들이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을
초대 교회의 직무와 열정, 권위와 사랑, 首弟子와 愛弟子, 직무교회와 사랑교회 등으로
각각 표현한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로 남는 부분은 사도 요한이 정말로 요한복음, 요한서간들, 요한 묵시록의 著者인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 성서학자들은 성서 원문 비판과 성서 주변 연구들을 근거로
이들 기록들이 요한의 저작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요한은 늦어도 60년경에 순교하였고,
통상 요한의 작품이라고 인정되었던 이 기록들이
거의 빨라도 90년 이후에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의 놀라운 신학적 내용과
묵시록에 담겨 있는 구약성서에 관한 해박한 지식들을
갈릴래아 어부 출신의 요한이 혼자 소화하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것이다.
요한서간들이 다루고 있는 영지주의적이고 그리스도론적이며,
윤리적이고 종말론적인 이단 사상은
역사적으로 볼 때 1세기에 등장하는 사조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이 요한 사도의 親著性을 완전히 까는 것은 아니다.
약간의 異見이 있더라도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美德이라고 여겨진다면
사도 요한이 그 저자라고 인정할 수도 있다.
아니면 사도 요한의 직접적인 증언을 토대로 요한의 제자들이 집필하여
스승의 이름을 붙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적어도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던 제자로서
다른 누구보다 스승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받았던 사랑만큼 스승을 사랑했고 또 그렇게 추종했다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