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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4일 PM15:00~]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촉구 거리 캠페인 - 동대문운동장역
1. 어떤 계기
사람이 삶을 살면서 겪는 수많은 경험과 기억들의 가치를 함부로 매길 수 있을까. 하지만 곰곰이 되씹어보고 기억의 책장에서 자주 끄집어내고 싶은 시간과 공간들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개인의 삶 속에서 강렬한 인상으로 흔적을 남기고 나아가 성숙하고 풍요롭게 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 가치는 인생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얻은 것이 많은 그리고 앞으로도 자꾸 되짚어보면서 힘들 때 자신을 바로잡아주기 위해 펼쳐보고 싶은 경험과 기억들이 바로 나의 짧은 4개월의 활동보조인으로서의 시기에 담겨져 있다.
제대를 하고 학교를 한 학기 다닌 후 이대로 졸업으로 바로 가기에는 젊은 청춘의 혈기가 너무도 뜨거워 색다른 경험과 인간관계를 형성하고자 -물론 개인적인 욕구와 상대적인 경제적 궁핍함도 적지 않는 몫을 한 것도 사실이다- 소위 말하는 아르바이트를 찾기 시작했다. 2003년 8월 초 방학 중이라 모든 대학생들이 너도나도 아르바이트를 찾는 시기, 그렇게 쉽게 나에게 적합한 일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방구석에서 인터넷으로 여러 가지 일을 알아보는 도중 우연히 활동보조인에 대한 모집광고를 보게 되었고 그 광고를 올리신 한국자립생활네트워크 대표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하 존칭을 편의상 본인이 평소 불렀던 ‘형님’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장애인의 활동을 보조하는 활동보조인. 무슨 이야기인지는 대충 알겠는데 급여를 준다는 것이었다. 노인복지활동을 하는 어머님한테도, 특수교육학과를 다니는 여동생한테도 장애인 활동을 보조하면서 급여를 받는다는 것은 듣지 못한 일이였으나 나는 거부감은 없었다. 내가 노동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이 장애인이건 뭐건 간에 정당하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형님을 만나기 전 한국자립생활네트워크(http://www.knil.org)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을 대충이나마 읽어보고 형님과 대면을 한 후에 전(前)활동보조인의 시범을 보고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활동보조인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과연 얼마나 잘 할 수 있으며 며칠이나 견뎌낼 수 있을까라는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지만 부딪혀보기로 했고 이제 4개월이 되어 개인적 사정으로 다음 활동보조인에게 인수인계를 해야 할 시점에서 이 글을 쓴다. 아르바이트의 기간이 4개월인 것이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형님의 말을 빌자면 최장기간이 3개월임을 미루어 볼 때 나름대로 어줍지 않은 자부심(?)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마치 4년을 한 것처럼 많은 일들과 고충이 있던 것이 사실이다.
“전문가보다 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형님은 정말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분이였다. 한국자립생활네트워크 대표이자 장애인이동권연대의 공동대표이고 도중 한국장애인IL단체협의회 상임대표로 선출까지 되셨다. (왠지 모르게 이 때는 내 어깨까지 으쓱해지기도 했다.) 중증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형님을 보면서 존경스럽기도 하고 활동보조인의 역할이 중증 장애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느꼈다. 주변에 있는 친구들에게 형님을 이야길 할 때도 나는 장애운동 활동가라고 한다. 스스로 밥숟가락 뜨기도 휴대전화를 받기도 힘든 형님에게 매일 회관으로, 회의장소로, 캠페인장소로, 그리고 투쟁의 거리로 나아가는데 활동보조인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때문에 나는 약속시간에 늦을 수도 그리고 활동 도중에 긴장을 늦출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은 나도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일부라는 것이고 때문에 책임감과 의무감이 한층 배가된 것이라 생각된다. 만일 자원봉사자였으면 내 편의대로 자의대로 모든 것을 처리하고 그래도 형님은 별다른 요구를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2. 현실의 잔인함
활동보조인을 하면서 나름대로 얻은 성과는 우리사회의 모순 된 현실에 대한 적나라한 모습들을 실감하고 배운 것이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면서 형님을 통하여 이야기 듣는 것도 소중했지만 이동권연대 회의에서, IL협의회 출범과정에서,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캠페인에서, 보건복지부와의 간담회에서 이 땅에 소외되고 제도적으로 배제된 장애인의 위치와 현실이 얼마나 척박하고 미흡한 것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IL패러다임으로 변환기, 이동권 보장,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전동휠체어 보급, 연금법 제도, 장애인차별법제정, 이런 화두들을 어깨 넘어 듣고 나름대로 고민하면서 이제까지 나의 시야가 얼마나 조야한 것이었는지 새삼 느꼈다. 그리고 가장 직접적인 경험은 아마도 여름에는 뜨겁고, 겨울에는 찬바람 부는 한량한 아스팔트 거리에서이지 않았나 싶다. 대학교에서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 집회와 전쟁반대 집회는 숱하게 나갔지만 활동보조인을 하면서 처음으로 이렇게 거리에 나오는 장애인도 많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분명 그 전에도 나는 휠체어에 몸을 실은 장애인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거리에 장애인들이 분명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에 나지 않는다. 그러나 활동보조인을 하면서 일상적으로도 휠체어가 눈에 띄게 많이 들어오고 혹시 아는 사람이 아닌가 한 번 더 고개가 돌아간다. 그만큼 경험의 지각은 무서운 것이었다.
거대담론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불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정말 작은 일들에서 나는 잔인한 세상의 폭력을 느낄 수 있었다. 추운 날 턱없이 부족한 장애인 콜택시를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고 건 대역 리프트는 작동이 되지 않아 공익요원들과 들어 옮겨야 했으며 식당을 가려해도 경사로나 엘리베이터 설치여부를 확인해야 했고 보건복지부의 책임 있는 공직자로부터는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이 자립생활을 원하느냐”라는 허접한 발언을 직접 들어야 했고, 거리에서 장애인이 행사를 하려고 하면 전투경찰들이 무장을 하고 진을 치는 것을 무덤덤히 바라봐야했고, 그런 하루활동이 끝날 때 즈음에 항상 집에 돌아가는 차편 형님과 함께 걱정을 해야 했다. 형님의 장애특성상 그리고 그날의 사정상 일반택시를 타야하는 경우 왕복차비가 만 원 이상이 나오는데 건대역에는 그리고 대부분의 지하철 역사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도 않고 지금의 이 정도도 장애인들의 거리로 나와 오랜 기간동안 숱하게 다치고 연행되면서 이루어낸 성과인, 이러한 현실 속에서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을까.
거칠게 말하면 이 모든 일들이 앞으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장애인도 아니고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공부하고 취직하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물론 이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사회는 더불어 살아야하고 그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국가와 정부는 책임을 다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배워왔고 지금도 믿고 있다. 이는 건전한 생각을 가진 국민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내가 겪은 현실의 단편들은 너무나 초라하고 궁핍했다.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캠페인을 하면서 모금함에 돈만 급하게 넣고는 어떠한 설명도 그리고 서명도 거부하는 행인들의 모습에서 내가 살고 있는 시민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때문에 더욱 더 형님은 거리로 나아가 자신을 보여주고 그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고 그런 활동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3. 2% 부족함
달콤한 소리 백 마디보다 쓴 소리 한 마디가 모든 체계와 제도의 발전에 더욱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활동보조인 4개월의 경험으로 감히 무슨 평가를 할 수 있을지, 혹 건방지게 보이지는 않을지 생각에 지레 겁이 나기도 한다. 또한 센터나 회관을 통해서 고용되지 않고 형님과 직접적인 연계로 일을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나의 생각이 얼마나 보편성을 가기고 설득력을 가질 지 의문이다. 하지만 궁극적인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립생활의 실질적인 정착화와 자립생활센터의 활동보조서비스 활성화를 위해서 혹시라도 활동보조인 당사자로서의 몇 가지 조잡한 평가가 작은 보탬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아쉽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 적고자 한다.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활동보조인들에 대한 교육의 체계화가 미흡하다. 나는 단체를 통한 연계가 아니라 형님과 개인적으로 고용이 되었기 때문에 형님이 집필하신 글이나 활동 중 틈틈이 활동보조인의 역할이나 자세에 대해서 교육을 받았다. 물론 활동보조인을 모집하는 센터에서 활동보조인 활동초반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이나 코디네이터를 통해 이런 것들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교육은 활동기간 도중에도 간간히 이루어져야 하고 서비스 이용자와 활동보조인들이 함께 평가하고 교육받고 경험들을 나누는 자리들이 규모는 작지만 자주 있어야 한다고 본다. 장애인 당사자와 활동보조인의 쌍방향의 커뮤니케인션도 중요하지만 코디네이터를 매개로 설문조사, 평가지 작성, 사례발표, 주제토론회 등 집단적으로 경험과 생각들을 공유하는 자리가 체계적이고 종종 있어야 자주 발생하고 충돌하는 문제에 대해서 원활하게 해결하고 미리 예방할 수 있는 초석이 되지 않을까 싶다.
또한 그 날의 일정이나 이동장소에 대해서 이용자와 활동보조인이 미리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숙박을 해야 하는 등 커다란 일정이 잡혀 있는 경우에 사전에 활동보조인에게 알려주어 준비할 수 있는 여지도 마련해 주어야하며 하루일과가 마감되는 대충의 시간이나 이동할 장소나 참가할 행사에 대해 하루 전에 이야기해주는 것이 활동보조를 하는데 심리적으로 안정적이고 보다 수월하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이용자와 활동보조인이 개인적으로라도 서비스평가와 부족한 부분, 활동상 불만사항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풍토가 정착되었으면 한다. 이것은 쌍방이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도 형님과 활동기간 중간에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 하면서 대화의 시간을 가졌는데 정말 좋았었다. 바쁜 일정과 원활하지 못한 주변여건상 이런 기회들이 많지 않았던 것이 못내 아쉽다.
4. 자그만 한 목소리로 형님의 건투를 빌며
활동보조서비스가 제도화가 되고 자립생활센터들이 활성화되면 지금의 부족하고 미흡한 점들이 보충되고 자리잡혀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당연한 목적 그러나 아직 기나긴 싸움을 준비하고 실행하고 있는 장애인 분들의 부단한 노력이 자립생활이념의 정착화라는 결실을 맺을 것으로 기대한다. 활동보조인을 그만 두고 다시 본연의 학생으로 돌아가고 훗날 사회 나가서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더라도 머릿속 한 편에 ‘자립생활’과 ‘활동보조인’이라는 단어를 집어넣고 소박한 일상에서 그 단어를 발견했을 때 지금의 경험과 기억을 떠올리게 것은 아마도 진보적인 패러다임을 뿌리내리려는 수많은 장애인 당사자분들의 절박한 노력들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다소 장황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나의 활동보조서비스가 말 그대로 형님에게 ‘질’이 좋은 서비스를 제공했냐라는 반성과 아쉬움이 든다. 어떤 일련의 과정이던 부족함과 섭섭함이 남기 마련이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짧은 20대의 한 편을 차지하는 활동보조인으로서의 경험은 소중한 경험의 기억이 될 것이다. 한국자립생활네트워크의 활동가 4인방 누님들, 노들장애인야학의 거리의 투사들, 정립회관의 얼굴 자주 보고 인사도 자주 드리는 정희경, 조현민 선생님들을 비롯하여 정말 열심히 열정을 다해 사는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도 못하고 친분도 못 쌓은 것이 아쉽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활동보조인은 장애인 당사자를 중심으로 놓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법, 스스로를 평가함에 있어서 형님에 대한 나 자신의 부족함이 마음 한 편에 계속 남을 듯싶다. 짧은 시간이지만 인연을 나누고 항시 부족하고 모자른 활동보조인에게 배려와 아량으로 대해주신 형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왠지 평생 동안 만나고 지낼 듯한 예감이 든다.
그리고 앞에서 거리에서 휠체어를 보게 되면 달려가 한 번 확인할 것 같다.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위한 거리 캠페인
▷일시 : 2004년02월04일 수요일 오후3시~7시
▷장소 : 동대문운동장역 4 ~ 5호선 환승구간
▷홈페이지 : http://www.knil.org, 다음카페 : http://cafe.daum.net/knil
▷E-mail : memolove@hanmail.net, 전화 : 02-3436-6407(팩스겸용), 018-403-9464
▷주소 : 143-853 서울시 광진구 자양1동 226-25번지 101호
* 활동보조 제도화를 위한 거리 캠페인은 매주 수요일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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