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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8일 토요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제1독서 : 1요한 1,5―2,2
복 음 : 마태 2,13-18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6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동방박사들이 찾아왔을 때,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마태 2,4)
그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구세주로 오신 그분을 경배하러 동방 박사들과 함께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탄생이 그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졌고,
결국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비극적인 일을 벌입니다.
헤로데가 이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자신의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질 하느님의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 그것들이 그에게는 ‘하느님’이고 ‘구원’이었습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의 최후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6,24)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짜 주님’은 누구이신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를 멈추게도 하고 움직이게도 하는 것,
절대로 빼앗기지 않도록 노력하게도 하고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게도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실제 ‘주님’이십니다.
헤로데에게 그 주님은 ‘자신의 왕권’이었습니다.
“헤로데는 ……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2,16-17).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뇌과학의 관점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은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때 도파민이 분비될까요?
사실 우리의 뇌는 아주 큰 욕심쟁입니다. 그래서 늘 ‘더 많이’를 추구합니다.
어제와 똑같은 삶에서는 결코 도파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지금에 만족하고 있지 못하다면 도파민을 분비할 새로운 일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일을 찾지 못하면 좌절과 절망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됩니다.
종종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도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이 있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고통과 시련에 그냥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불행 속에 머무는 것입니다.
성당에서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어서 조금 쉬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지쳤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그 안에서 새로운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일을 계속 찾는 일,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도 너무나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저의 경우는 책 읽고 글 쓰는데 새로움을 얻습니다.
똑같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책을 계속 읽고 있고,
똑같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글을 쓰고 있으니
새로움을 얻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항상 똑같은 기도를 하고 있다면 기도 안에서 행복을 느낄까요?
아닙니다. 매번 다른 기도를 하는 사람만이
다양한 주님을 새롭게 느끼면서 행복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의 기준안에만 살면 새로움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더 많은 부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순간의 만족에 그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준안에서 사는 사람은 늘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순간의 만족을 벗어나 계속된 만족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헤로데 왕이 베들레헴과 그 근방에 사는 아기들을 무자비하게 죽입니다.
왕의 위치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께서
장차 유다의 왕이 되시리라는 예언을 듣고는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했기에, 이런 엄청난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자기 왕위를 유지하려고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과연 행복했을까요?
정적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잠시의 평화와 기쁨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 안에서 최악의 왕으로 기록될 뿐입니다.
당연히 하느님께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헤로데왕처럼 세상의 기준만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늘 새로움으로 지금을 기쁘게 살 수 있는 주님의 기준인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큰 행복을 차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기념하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은
무죄한 이들의 고통의 신비를 드러내 줍니다.
동시에 훗날 예수님의 죽음도 ‘무죄한 아기의 죽음’처럼
죄 없으면서도 무고하게 죽게 될 예수님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사실 이 ‘죄 없는 아기들이 학살당한 일’은 겉으로는 헤로데의 잔인한 학살을 드러내지만,
실상은 ‘메시아가 태어났음’을 알려줍니다.
곧 그들의 죽음은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가 ‘메시아’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메시아가 나타나심에 대한 지상의 왕의 두려움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헤로데의 죄없는 아기 학살을 두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레미아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이는 예레미야가 아들을 잃은 야곱의 아내 라헬의 통곡을 들어 예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마리아를 신약의 ‘새로운 라헬’이라 칭합니다.
곧 라헬이 일생 동안 고통을 겪고 죽음의 고통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면,
마리아 역시 '영혼이 칼에 꿰 찔리는'(루카 2,35)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셨던 ‘고통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또 라헬이 <예레미아서>에서 ‘이스라엘의 어머니’(예레 31,15)라 칭해지듯이,
마리아는 <요한묵시록>에서 전체 ‘교회의 어머니’라 칭해집니다(묵시 12,17; 12,1-6 참조).
그리고 라헬이 하느님 앞에서 지상의 자녀들을 위해 슬퍼하며 울음으로 전구했듯이,
마리아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장 유력한 ‘기도의 전구자’가 되십니다.
또한 우리는 ‘무죄한 어린이의 희생’을 들으면서 앞서 있었던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을 억압하면서 저질렀던 어린 사내 아기들을 살해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사실 파라오와 헤로데, 그들은 모두 자신을 지키고자 빛을 두려워한 이들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러한 완고함과 자기중심적인 폭력과 독선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지 않는지 잘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사랑의 왕국을 저버리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이유를 확고하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2,14)
이는 하느님께서 베푸는 구원의 역사는
그 어떤 어둠에도 방해에도 아랑곳없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죄 없는 아기들이 살육당한 소식을 들었을 때,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살인자 아닌 살인자가 되어버린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헤아려 보게 됩니다.
분명 죽어가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보다 어머니들의 '애끊는 통곡 소리”'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아기들의 슬픔은 한순간이었고 죽음이 슬픔의 끝이었겠지만,
아기를 잃은 어머니들의 슬픔은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죽은 아기들의 어머니들의 아픔을 마리아는 통째로 짊어지셔야 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아기가 희생되어 다른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그녀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 모든 책임을 떠맡고 고통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또다시 아무런 죄도 없는
당신 아드님 예수님의 죽음을 떠맡아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죄 없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 쓸 줄을 아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가 봅니다.
그렇게 예수님도 훗날 죄 없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혹 ‘무죄하면서도 억울함을 당할 때’가 있다면,
바로 그 일을 순교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그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주님!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아기들이 살육당할 때,
어머니 마음은 미어지셨을 것입니다.
이토록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을 짊어지는 일인가 봅니다.
그러니 저희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어머니 마리아처럼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 뜻에 충실한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각하지 못한 많은 일을 접하게 됩니다.
기쁜 일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분하고 원통하기 짝이 없는 일도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 마음을 흔들어 괴로워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날이 지나면 괜찮을까 해도
어느 날 갑자기 떠올라 속이 쓰리고 아플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해 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2,18).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헤로데 임금은 이스라엘의 두 살 이하의 아기를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마태2,16).
그것은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을 잘라버리겠다고 한 행위입니다.
이런 일이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이 계집아이를 낳으면 살려두되
사내아이를 낳으면 모두 강물에 집어넣어라”(탈출1,22). 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파라오의 학살에서 구출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도 헤로데의 잔악한 행위에서 살아남으셔서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십니다.
사람들은 파라오의 행동을 욕합니다.
헤로데 임금의 악한 행동에 분노합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전쟁으로 많은 이들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습니다.
어느 전쟁보다 더 큰 희생을 요구하는 소리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보호막이 되어야 할 어머니의 뱃속에서 많은 태아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공식 집계한 임신중절수술만도 1년에 35만에 가까운 태아들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에 의해 죽어가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전쟁의 살상이 어디 있습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사형 제도를 찬성하거나 자기 결정권을 우선하고
낙태 합법화를 찬성하면서 누구를 악하다고 욕하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간 어린이들은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 쿠옷볼트데우스는 헤로데 임금에 의해 살해된 무죄한 어린이들의 죽음을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가고 …
그들은 아직 말을 하지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 하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예기치 않은 일이 하느님께서 주신 벌입니까?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해야 합니까? 하느님께 책임을 물어야 합니까?
먼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소유와 지배욕, 시기와 질투, 불필요한 욕심을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2,13).고 했을 때
요셉은 일어나 그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가르침을 줍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바로 그때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날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합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져야합니다.
“인간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가 인간을 낳습니다.”
무고한 아기들의 떼죽음, 그 비참한 학살의 소용돌이에서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혼돈 속에서 오셨습니다.
각 사람은 저마다의 역할이 다르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뿐입니다.
성 베드로 크리솔로그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순교자들은 죽음으로 태어나고, 끝남으로 시작을 이루며, 죽임 당함으로 살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 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종교는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입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푼다.’라는 영어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느끼고 체험하는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불교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고통, 거짓된 자아를 따르려는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부처님은 그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고 합니다.
집착이라는 줄을 놓아버리면 집착에 매달려 있는 고통도 사라질 거라고 합니다.
집착을 놓아버리는 훈련이 필요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팔정도’의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렇게 집착에서 벗어나지면 깨달음을 얻게 되고, 참된 자아를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교회는 고통의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고통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간에게 ‘고통’이라는 벌을 주셨습니다.
최초의 고통은 노동하는 고통과 아이를 낳는 고통입니다.
죄의 결과 죽음이라는 고통이 생겼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은 ‘회개’입니다.
회개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육체라는 집이 허물어지면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하나는 ‘대속(’代贖)입니다.
구약에서는 ‘어린양’을 속죄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심청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바쳐서 임당수로 뛰어야 했습니다.
이수현이라는 청년은 일본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을 구하고 대신 목숨을 바쳤습니다.
대속에는 자발적인 대속이 있고, 힘으로 바쳐지는 대속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은 자발적인 고통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시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우리를 향한 끝 모를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을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나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허망하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무참하게 돌아가셨고, 무덤에 묻히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한 고통이었지만,
신앙인에게는 영원한 삶으로 나가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죽음을 기록하였고, 그분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는 교회를 세웠고, 성지를 조성하였습니다.
교회가 순교자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공경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받았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음을 우리는 신앙의 신비로 믿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의 신비를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 홀로 외롭게 죽은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 또한 천상의 별이 되어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는지,
고통과 시련은 왜 다가오는지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이것이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깊은 묵상 중에 ‘신앙의 원리와 기초’를 찾았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냐시오 성인이 보았던 ‘원리와 기초’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드러낼 수 있다면
우리는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산다면 억만년을 살아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국립현충원에는 ‘이름 없는 무명용사’들을 위한 탑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이 조국을 지키는 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가 주님을 기리나이다.”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큰 신비를 본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 곁에 머물지 않은 이유와
성가정이 베들레헴에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만남의 기쁨을 누린 뒤 모두 다 도망자처럼 서둘러 달아나야 했다.
박사들은 페르시아로, 성가정은 이집트로 가야 했다.
왜 그랬을까?
헤로데는 구세주를 없애려고 박사들에게서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 명령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까지 미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의 사악함을 이미 알고 계셨다.
성가정을 이집트로 피신시키신다.
베들레헴의 아이들과 인근 마을의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리스도 대신 죽은 이 죄 없는 아기들은 그리스도의 첫 순교자들이 되었다.
이 아기들과 젖먹이들이 그리스도 대신 죽임을 당하며 순교자의 완전한 찬미를 바쳤지만,
하느님의 임금님을 거슬러 자신을 지키려고 아이들을 죽인 헤로데는 파멸했다.
이 아기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자격을 지녔던 첫 순교자들이었다.
마태오는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어머니들의 “통곡소리”를 표현한다.
아기들이 우는 것은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이 우는 것은 마치 내장이 뜯겨 나가듯이 아기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아기들보다 남겨진 어머니들의 슬픔이 더 크다.
아기들의 슬픔은 죽음으로 인도되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니, 한순간의 슬픔이다.
그들은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들의 슬픔은 갑절이었다.
그들은 아기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에게는 이제 아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기들에게는 그들의 슬픔에 복된 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아기를 잊지 못해 슬픔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흔히
“왜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이런 일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가?” 하며 불평을 하고
신앙도 버리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것은 분명히 인간의 잘못이다. 인간이 욕심이 저지르는 잘못이기에 인재이다.
우리 인간의 회개가 필요한 것이지 하느님께 탓을 돌릴 수가 없다.
나의 잘못으로 우리 가운데 나신 예수님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역사는 반복한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린이들은 마치 어린양처럼 뛰놀며,
그들을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였도다."(독서기도; 후렴1)
계속되는 성탄축제중 오늘은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얼마 전 12.3 비상계엄 내란 사태를 보면서, 어제 국무총리 탄핵 사건을 보면서,
또 오늘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내면서
새삼스러이 깨닫는 진리는 ‘역사는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늘 거룩한 반복, 새로운 반복이 있을 뿐입니다.
문득 생각나는 “시지프의 신화”입니다.
시지프가 형벌로 산꼭대기까지 돌을 굴려 올려놓으면 떨어뜨리고,
또 올려놓으면 떨어뜨리고...
참으로 무의미하고 단조로운 반복의 인생이 흡사 형벌 같기도 합니다.
삶의 의미를 잃은 믿지 않는 이들의 삶이기도 할 것입니다.
수도원에서 42년 동안 정주의 삶을 통해 늘 새롭게 깨닫는 엄중한 삶의 진리가 반복입니다.
늘 읽어도 늘 새로운, 26년 전 한 여름에 써놨던 ‘담쟁이’란 애송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다시 써내려 가면서도 시공을 초월하여 불끈 샘솟는 초록빛 열정을 느낍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종신불퇴, 백절불굴의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정주의 반복의 삶에 항구할 수 있음은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느님 향한 희망에서 샘솟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의 열정이요 무한한 인내력입니다.
역사는 반복합니다(History repeats itself).
역사가 지속되는 한 반복은 계속될 것입니다.
조선 500년 역사의 실록을 보면서도
보복의 악순환의 반복의 역사이기에 한권으로 족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해방 80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반복되는 좌우의 첨예한 증오와 배척의 극단적 대결입니다.
세계 곳곳에서도 여전히 반복되는 불의의 전쟁의 현실입니다.
무지의 죄로 인한 악순환의 반복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빛 속에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바로 그 좋은 모범이 오늘 이집트로 피신하여 예수 아기를 살린 요셉 마리아 성가정 부부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의 말씀이 깊은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길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하느님은 빛이시며,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빛 속에서 회개와 화해,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과 친교를 누리며 사는 것이
반복의 악순환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고통과 고난의 악순환에 함몰되지 않게 합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가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봄과 겨울이 모두 계절이듯, 살아가며
겪었던 고통과 고난 또한 나를 이루는 것이다.”<다산>
참으로 주님을 믿는 우리는 무의미한 반복의 고통과 고난이 아니라,
세월과 더불어 연륜의 나이테처럼 모두가 참나의 완성에로 이끄는 거룩한 반복임을 깨닫습니다.
“근심과 고난이 나를 살게 하고, 편안함과 즐거움이 나를 죽음으로 이끈다.”<맹자>
참으로 살려면 안락함을 추구하지 말고, 근심과 고난을 일상의 벗으로 삼으라는 충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의 폭정을 피하여 이집트로 도주하는 요셉의 모습이,
헤로데와 요셉의 싸움 같지만, 실은 헤로데와 하느님의 싸움입니다.
빛이신 하느님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요셉을
어둠 속에 살아가는 헤로데가 결코 이길 수는 없습니다.
빛이신 하느님의 인도로 언제나 헤로데 보다 몇 걸음 앞서가는 요셉입니다.
그 누구도, 무엇도 주님의 빛 속에서 살아가는 요셉을, 우리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폭군 헤로데는 가상현실, 과대망상 속에 살아가는 편집증 환자입니다.
그에게는 일상도 없고 상식도 없고 무도, 무법, 무지, 무능합니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지 않습니다. 2인자를 허락하지 않는 권력자들입니다.
권력욕의 화신 같은 헤로데는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식도 둘이나 처형 했고, 이어 화근이 될 수 있는 베들레헴과 그 일대의
죄 없는 아이들을 죽여 버리니 대략 20여 명 안팎으로 추정합니다.
당신 주민 인구는 1000명쯤 됐을 거라 합니다.
그 아득한 옛날 이집트 폭군 파라오의 폭압 치하에서
모세의 탄생과 더불어 많은 히브리 아기들이 살해되었듯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 탄생과 더불어 많은 아이들이 희생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예수님도 빌라도에 의해 희생될 것입니다.
새삼 역사는 반복됨을 깨닫습니다.
반복되는 순교의 역사는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는 이 무죄한 아기 순교자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들뿐 아니라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은 물론
모든 인류의 생명을 보호해 주십사 기도와 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 성무일도 화답송 후렴도
“무죄한 어린 순교자들의 화관이신 그리스도 나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기도하며 이들을 주님을 위한 순교자들로 기립니다.
예수님이 아니곤 이들의 억울한 죽음의 비극과 신비를 해명할 길이 없습니다.
아, 인류역사상 얼마나 무죄한 이들이 억울하게 비참하게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죽어가겠는지요!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빛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의 악순환은 계속됩니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가 내 주변에서는 재현되지 않도록,
오늘 복음의 성 요셉처럼 늘 주님의 빛 속에 깨어 기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여러분 모두를 무지의 죄악에서 보호해 주시어
주님의 빛 속에서 영적 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출되어
하느님에게 바쳐진 첫 열매이며,
아무런 흠 없이 하느님의 옥좌 앞에 서 있는도다."(독서기도;후렴2).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