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대학 자치'
주장한 서울대 교수들,
월북해 김일성대 창설
경성대학 등 통합하자
좌익 소요 '국대안 파동'
< 일러스트=한상엽 >
1924년 일본의 여섯 번째 제국대학으로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은 매년 50명
내외 한국인의 입학을 허용했다.
1945년 폐교될 때까지 한국인 졸업생은
다 합쳐도 800여 명에 불과했다.
역대 재직 교수 275명 중 조선인은 고작
4명이었고, 그나마도 폐교를 1년 앞두고
임용된 의학, 이공학 전공자였다.
해방과 함께 조선 유일의 대학이던
경성제대는 기능이 마비되었다.
일본인 교수와 학생은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고, 얼마 안 되는 한국인 조수,
학생, 직원, 동문이
‘경성대학 자치위원회’를 결성해 학교
시설을 보호하고 재건을 도모했다.
전문 직업인 양성을 위해 설립된
관‧공립 9개교, 사립 전문학교 11개교도
사실상 ‘대학 기능’을 수행했지만,
초엘리트 지도자를 양성하는
제국대학보다 ‘아래’로 취급되었다.
해방 당시 관‧공립 전문학교 9개교의
보유 장서가 5만권도 채 안 되었지만,
학생이 수백명에 불과한 경성제대는
60만~70만권의 장서를 보유했다.
1945년 9월, 대학 행정 사무를 접수한
미군정은 학교 명칭을
‘경성대학’
으로 변경했다.
곧이어 총장 대행 겸 법문학부장에
예일대 박사로 연희전문 교수로
재직했던 백낙준,
예과부장에 와세다대 출신으로
보성전문(현 고려대) 교수로 재직했던
현상윤을 임명했다.
경성대학 자치위원회는 두 사람의
학부장 임용에 거세게 반발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들의
‘친일 이력’
이었지만, 그 기저에는
“비(非)제국대학 출신 ‘외부인’이
대학을 접수하려는 시도”
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게 작용했다.
결국 몇 달 후 백낙준은 연희전문 교장,
현상윤은 보성전문 교장으로 이직했다.
미군정은 식민지 교육 청산을 위해
경성대학의 우월적인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관‧공립 전문학교와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1946년 4월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통합이었다.
하지만 경성대학은
“최고 엘리트를 양성하는 대학의
의학부를 전문학교와 통합할 수 없다”
는 이유에서, 경성의전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경의전을
다른 학교와 통합할 수 없다”
는 이유에서 통합에 반대했다.
1946년 7월, 미군정 문교부는
경성대학과 경성경제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 등
8개 관‧공립 전문학교,
사립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등
10개 학교를 통합하여 대학원과
9개 단과대학으로 구성된
‘거대한 종합대학’
을 설립한다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
을 발표했다.
석 달 전 의대 통합 때 예견된 것처럼
경성대학은 물론 전문학교 9개교의 교수,
학생 모두 국대안에 거세게 반발했다.
대학 구성원과 협의 없이 미군정
당국의 일방적 의사만으로 통합이
결정된 것,
10개교를 하나로 합치는 만큼 교육
기회가 축소될 우려가 있다는 것,
국립대학 설치와 같은 중차대한 과업은
미군정이 아니라 통일 정부가
추진해야 할 문제라는 것 등
수많은 반대 이유가 제시되었지만,
가장 핵심적 반대 이유는 행정
관료만으로 구성된 ‘이사회’가 인사와
재정 등 대학 운영의 최종적 결정권을
갖는 것이었다.
이사회에 의한 대학 운영은 미국식
대학 제도에서는 일반적이었지만,
‘교수회의’가 학장, 학부장, 교수의
인사권과 대학 운영의 주요 결정권을
갖는 일본 제국대학의
‘교수 자치’
‘대학 자치’
관행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1947년 3월 12일자 '민보'라는 신문에 실린 시사만화
'국대안 후문'. 국대안 반대 동맹휴학으로 텅빈 교실을
풍자했다----
미국식 이사회 도입에 제국대학 출신
‘조선공산당(조공)’ 계열의 좌익
교수들이 특히 반발했다.
도호쿠제국대학 물리학과 출신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 한인석은
“일본과 같은 비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대학을 관료의 손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방어선으로써 교수자치권은
인정되었다”
는 논리로 국대안을 비판했다.
의혹과 불신 속에 국대안 반대 여론이
고조되는 가운데 8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
(법령 제102호)이 공표되었다.
법령에 따라 이사회가 미군정 문교부
고위 관리들로 구성되었고, 총장에
법학박사 앤스테드 ‘대위’가 임명되었다.
조선인민보, 독립신보 등 좌익 언론,
민주주의민족전선, 문화단체총연맹,
과학자동맹, 조선교육자협회 등
조공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좌익
단체가 국대안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조공은 교수로 재직 중인 당원을 통해
국대안 반대 운동을
‘반(反)미군정 투쟁’
으로 확대했다.
국립대 참여 거부 운동을 주도한
경성경제전문 교수 박시형과
경성사범 교수 김석형은
‘교수 226명의 사퇴 의사’를 받아내
미군정을 위협하는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이후 그들이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임용돼 제출한 이력서에는
“조공 푸락취”
라는 경력이 ‘당당히’ 기술돼 있다.
미군정 장교의 증언처럼
“불행하게도 가장 역량 있는
교수들이 좌익 사상가였으므로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그들과 공감”
했다.
9월 개학이 되자, 국대안을 반대하는
집단행동이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등록을 거부하고 친일 교수
배격, 경찰의 학원 간섭 중지,
국립대 행정권 일체를 조선인에게
이양할 것,
미국인 총장을 한국인으로 대체할 것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서울대로 통합될 10개교는 물론
사립 전문학교, 일부 중학교,
심지어 일부 국민학생까지 동조
동맹휴학에 나섰다.
동맹휴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참가한 학교 수가 57개교,
학생은 연인원 4만여 명에 달했다.
미군정 문교부는 휴교, 제명, 해직
처분으로 강경하게 대응했다.
신학기가 시작되는 1947년 3월,
서울대학교 9개 단과대학 8040여 명 중
4956명(61%)의 학생이 제명된 상태였고,
429명의 교수 가운데 380여 명(88%)이
서울대 참여를 거부했다.
5월, 미군정 문교부는 이사진을 9명의
한국인만으로 구성하고, 총장도 한국인
이춘호로 교체했다.
제적된 교수와 학생에 대해 심사를
거쳐 조건부 복직과 복교를 허용하는
수준에서 국대안 사태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어정쩡한 타협은 이후 한국
대학 교육에 나쁜 선례를 남겼다.
제적된 학생들은 최소 한 학기 이상
출석도 공부도 하지 않았지만,
형식적인 필답고사를 치르고
재입학과 진급을 허용했다.
미군정 미국인 고문은
“세계 어느 대학에서도 공부하지 않은
학생에게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주는
경우는 없다”
고 경고했다.
대학 자치를 실현하려다 좌절한
서울대 교수 상당수는 월북해
김일성대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도상록(양자물리학), 이승기(화공학),
한인석(물리학), 이재곤(수학) 등
북으로 초빙되거나 월북한 교수들은
제국대학 출신들로 독특한 학연으로
맺어졌으며, 조공 당원으로 국대안
반대 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또한 대학 자치를 요구하며 서울대를
사임했지만, 정작 이직한 김일성대에서는
대학 자치를 한 번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해방 후 서울대 문리대
건물로 사용되다가 1975년 관악캠퍼스 이전 후
그 자리에 마로니에공원이 조성됐다----
< 서울대학교 박물관 >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출처 : 조선일보]
[100자평]
JMS
북으로 잘 갔다. 지금도 보낼자들 많다
opba
버얼건 교수 ㆍ
종치인의 특징은 대한민국을 사사건건 비난하다가도
북한 중공 러시아에 대해서는 절대로 절대로
비판하지 않는다.
큐브1
대한ㅁㄴ국은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뿌리가
깊고 아직도 사회에는 이런 자들이 너무 많다.
굿엉클
사회주의 좌파의 구호는 탕후루 보다 달콤하다.
그러나 실상은 인민의 피와 살과 영혼까지 갉아
먹는다.
다만 구호를 외치는 지도부만 저팔계가 된다.
이재명 정청래 박찬대 최민희 서영교 이들은
이미 저팔계를 넘어 섰다.
전과4범 체포
지금도 국내에서 암약하고 있는 좌익 세력
반국가세력들 전부 색출해서 참수 척살하여야
한다.
진격의 마루치
북한에 가서 자신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독립적인
자치대학을 만들었나?
아마 죽을 때까지 김일성 꼭두각시로 살면서
후회 했을 것이다.
지금도 북으로 갈 사람들 많다. 제발 남한을
북한과 같은 지옥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고 자신들만
이상의 나라 더불어 함께 북한으로 갔으면 좋겠다.
박문수2
의대 교수들아! 북한 가서 의대 차리고 잘 먹고,
잘 살아라.
또생각하는구나
주사파 백낙청은 아직도 유튜브에서 지껄이고 있다.
회원04264547
한강 정비 사업 때도 어벙한 교수들 반대가 심했다.
새가 안 날아 오느니, 물고기 알 날다가 없느니...!!
그 인간들 서울 살고 있을까??
서울서 아주 벽지로 쫓아 내자!!
거기서 새 나 보구 살구로...
solpi
김일성 대학교에서 자치를 요구하는 즉시 흔적도
없이 사라??을 태니까 ㅎ ㅎ ㅎ ㅎ !
또생각하는구나
사노맹 주사파 조국을 서울대로 끌어온 넘도,
보나마나 서울대 교수.
사실과자유
서울대는 간첩 양성소. 습건평 탁자와 의자를
기념물로 보존하는 공산주의 잔당들의 집합소.ㅠ
종로청년
이정도의 판단력 밖에 없던 자 들이
교수님 이셨다. ㅋㅋㅋㅋㅋ
TigerWoops
남한 정권에는 독재자 욕하면서 북한의 김씨 가문
독재에는 한마디도 안하는 남한의 정치인들이
곧 간첩들이다.
다 솎아내야 하는데 개돼지 국민이 계속 뽑는다.
컨츄리맨
독일에서 윤이상의 꾐에 빠져 북으로 갔다 탈북한
오길남씨가 서울대 출신 탈남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한적이 있다,
외진 곳에서 북한 찬양 글만 쓰고 있다고 그렇게
좋은 북한에 가서 자유가 뭔지 그때 알았을거다.
근데 이미 거대한 감옥속으로 갔으니 자신이
한심할거다.
대한민국이라는 훌륭한 나라에 구더기 같은
종북자들 이들은 왜 북으로 안가는지.
가서 제대로 살아라.
늘 대한민국이 불만이면 북한가서 김정은
찬양하면서 빌 붙어 살면되지 강남에서 잘 살고
배터지게 온갖 혜택은 다 보면서 대한민국
흔들지 말고 오길남씨 책만 읽어봐도 그 실체를
알텐데 한심한것들 조국이 대학때 한 사노맹도
다 종북 주사파랑 같은건데 정신들 차려라.
쌍길
한국민에게는 원래 사촌이 잘되는 꼴을 못보는
좌익평등사상이 기저에 깔려있습니다.
625동란으로 공산주의를 경험한후 자유민주주의가
좋다는것을 깨닫게된거죠.
그 잘난 월북교수들 말년을 보세요.
대가 반골들이니 숙청당했지요.
학문의 자유 떠들었지만 전공학회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꿀 벌
현재도 북우로 보내야 할 자는 국회는 반이 넘을
것이다.
이제 말로만 인권을 떠드는 자 색깔이 붉게 물든
자들이다.
삼천갑자
묘하게 지금 상황이 중첩되어 보인다.
미군정이 역할을 못했다면 큰일날 뻔했다.
금화규
국가보안법을 강화하고 이적행위 수사기관을 되돌려
활성화 하자
블루투스
조국 이도 월북 해라..
돼지하고 살어..
실컷 위조해서 딸내미 의사 시켜라
씨드랙
지금도 어느 점있는 욕쟁이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침흘리며 그저 쎄쎄거리고 있잖으~
막산 찢
그때나 지금이나 내로남불은 좌파들의 기저,
그 명맥을 찢당이 이어가고 있구나.
북쪽 돼지가 국지전이라도 일으키면 찢당의 강아지들
스탠스가 정말 궁금해.
노노기스
기생충을 자처하는 따불당의 주사파들이
개과천선하여 전향할 때는 아직 멀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