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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다(제2회)
글쓴이 : 김 봉 렬/『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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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최대 쟁점은 기원전 108년 고조선 중심지에 설치되었던 한나라 낙랑군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이다. 낙랑군 위치와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눌 수 있다.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 일대에 있었다는 ‘낙랑군 평양설’과 낙랑군이 중국 요동 일대에 있었다는 ‘낙랑군 요동설’이다.
대일항쟁기 때 조선총독부는 평양지역 유물들을 근거로 ‘낙랑군 평양설’을 통설로 확정하였고, 오늘날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근거가 되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지사들은 중국의 각종 문헌기록을 근거로 ‘낙랑군 요동설’을 주장하였다. 필자는 중국 문헌기록을 토대로 한나라 낙랑군이 고대 요동지역인 현 중국 하북성 북경일대에 있었다는 핵심근거 10가지를 10회에 걸쳐 제시하려 한다.
참고로 아래 지도에서 '낙랑1'이 BC 108년 설치된 본래의 한나라 낙랑군 위치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학설이다. '낙랑2'는 AD 7세기경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하여 왜곡한 낙랑군 위치이다. 윤내현 등 대다수 재야사학자가 주장하는 학설이다. '낙랑3'은 AD 12세기경 요나라가 고려와 요동지역 패권을 다투면서 왜곡한 낙랑군 위치이다. 신채호 등 다수 독립지사가 주장한 학설이다. '낙랑4'는 대일항쟁기 조선총독부 가 한반도 식민지배를 쉽게하기 위해 왜곡한 낙랑군 위치이다. 중국 동북공정과 일제 식민사학자가 주장하는 학설이다. 조선총독부 식민.노예사관을 계승한 현 대한민국 강단사학계의 망국적 통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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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갈석산은 고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다.
위에서 살펴본 『회남자』와 『태강지리지』의 기록은 한민족 상고사에 한줄기 빛과도 같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되었던 고조선의 중심부에 갈석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지만 산천이야 어찌 쉽게 변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갈석산을 찾을 수 있다면 고조선의 중심지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게 된다. 갈석산에 깊은 관심이 가는 이유이다. 과연 고조선의 갈석산은 어디에 있었을까?
역사서에 나타나는 갈석산은 여러 개가 있다. 그리고 갈석산의 위치에 대해서도 예로부터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그런데 갈석산 관련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본래 갈석산은 하나뿐이었다.
갈석산은 『서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아래의 사료 B-1이다. “도이는 가죽옷을 입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고 하였다. 이것이 역사서에 등장하는 갈석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무척이나 평범하게 보이는 이 구절은 그러나 한민족 상고사에 있어서 태풍의 눈과 같다.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태강지리지』에서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라고 한 갈석산은 바로 사료 B-1에 나오는 갈석산을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B-1 | “도이는 가죽옷을 입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 島夷皮服, 夾右碣石,入于河. 『書經』夏書, 禹貢第十‧十一章 |
도이島夷는 발해만 북부지역에 살던 동이족의 한 갈래인데,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인 중국 하나라 우임금 시절에 도이가 배를 타고 발해만 연안을 돌아 황하로 들어설 무렵, 오른쪽 해변에 우뚝 솟은 갈석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갈석산을 우임금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우공갈석’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갈석산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이 구절로부터 파생되었다.
본래 갈석산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있었다는 이 ‘우공갈석’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래의 <그림 1> 과 <그림 2>에서 보듯이 황하 하류의 흐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를 따라 많은 변동이 있었다. 또 발해의 해수면 높이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로 인하여 갈석산이 있었다는 ‘황하 하류 해변가’의 위치도 시대를 따라서 달라졌다.
그런데 이를 알지 못한 학자들이 사료 B-1의 『서경』에 나오는 ‘우공갈석’을 자기 시대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서 찾게 됨으로써 새로운 갈석산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필자는 이들 갈석산들이 학자들의 착오로 인하여 생겨났으므로 ‘착오 갈석산’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역사왜곡을 위해 황하의 흐름과는 무관한 갈석산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들 갈석산들을 ‘가짜 갈석산’으로 부르기로 한다. 이들 ‘착오 갈석산’과 ‘가짜 갈석산’들로 인하여 지금까지 한민족의 상고사가 미로를 헤매고 있다.
<그림 1> 각종 갈석산과 황하 및 해안선 변천도
<그림 2> 황하 및 해안선 변천도 : Tristram R Kidder(워싱턴대 교수) & Yijie Zhuang(런던대학 연구원)의 공동논문『Archaeology of the Anthropocene in the Yellow River region, China, 8000-2000 cal. BP, The Holocene』참조.
필자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던 본래의 갈석산인 ‘우공갈석’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다. 그리고 학자들의 착오로 생겨난 ‘착오 갈석산’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수경』에서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고 기록한 갈석산이며, 다른 하나는 현 중국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에 위치한 갈석산이다.
역사왜곡을 위해 본래의 갈석산을 동쪽으로 지명 이동한 ‘가짜 갈석산’도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이며, 다른 하나는 현 한반도 평양 부근에 위치한 정체불명의 갈석산이다. 역사서에 나타나는 유의미한 갈석산들은 모두 위에서 언급한 5개 중 하나이다. 나머지 몇몇 갈석산들은 언급할 가치가 없는 것들로 생략한다.
사료를 통하여 이들 갈석산들의 위치와 생겨나게 된 배경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들 5개의 갈석산을 올바로 이해하면 한민족의 상고사가 어느 시기에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를 알 수 있으며, 한민족 상고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림 1>에서 표시한 5개의 갈석산에 대하여 각각의 갈석산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먼저 결론부터 간략하게 살펴본 후, 뒷부분에서 관련 사료들을 통하여 자세히 검토하기로 한다.
갈석산 | 특 징 |
| ①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의 백석산(또는 동쪽 지맥인 낭아산)이다. 고조 선의 중심부이자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했던 갈석산이다.
② 『서경』에 나오는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던 본래의 갈석산으로 ‘우공갈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③ 고대 ~ BC 602년까지 <그림 1>에서 황하가 Ⓐ 방향으로 흐를 당시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던 갈석산이다. |
| ① 발해 바다 속으로 빠져 사라졌다는 상상속의 갈석산이다. ② BC 602 ~ AD 15년까지 황하가 Ⓑ 방향으로 흐르면서 생겨난 ‘착오 갈석산’이다. 황하가 Ⓑ 방향으로 흐를 때는 ‘황하 하류 해변가’에 산이 없으므로 학자들은 갈석산이 바다 속으로 빠져 사라졌다고 생각하였다. ③『수경』에서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고 기록한 갈석산이다. |
| ① 현 중국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에 위치한 갈석산이다. ② AD 15년부터 지금까지 황하가 Ⓒ 방향으로 흐르면서 ‘황하 하류 해변 가’에서 생겨났다. 4세기 진晉나라 사람 곽박이 주석한 『산해경』에 처 음으로 등장하는 ‘착오 갈석산’이다. ③ 현재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있는 갈석산이다. |
| ①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이다. AD 801년 편찬된 『통전』이후부터 등장하는 ‘가짜 갈석산’으로, 현재 중국에서 무체현의 갈석산과 함께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있는 갈석산이다.
② 이 갈석산은 역사왜곡을 위해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갈석산 1)을 1천 여 리 동쪽으로 지명 이동한 ‘가짜 갈석산’이다. ③ 수‧당의 고구려 침략을 위한 역사왜곡 ⟶ 요나라 시기의 대대적인 지명 이동 ⟶ 송나라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九河淪海說’ 등 3단계의 왜곡 과정을 거쳐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갈석산 1)이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으로 지명 이동되었다. 한민족 상고사를 짙은 안개 속으로 몰아 넣은 갈석산으로,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 전 중화 사대사관에 의하여 저질러진 고대판 동북공정의 결정체이다. ④ ‘구하윤해설九河淪海說’이란 구하(九河, 황하 하류)가 바다 속으로 침 몰하였다는 설이다. 황하 하류는 9갈래로 나누어져서 ‘구하九河’라 불렸다. ⑤ ‘구하윤해설九河淪海說’은 송나라 주자학파들이 난하 하류의 산을 갈석 산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꾸며낸 학설이다.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 변가’에 위치한 산인데,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황하 하류로부터 북쪽으로 500여리나 떨어져 있는 산이므로 갈석산이 될 수 없는 산이 다. 그래서 주자학파들은 황하 하류로부터 난하 하류의 갈석산까지 500 여리의 바다가 본래는 육지였고, 구하(九河, 황하 하류)가 그곳까지 흘 렀는데, 이 500여리의 육지가 침몰하여 바다가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황하 하류와 갈석산이 서로 500여리 떨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⑥ <그림 1>과 <그림 2>에서 보듯이 발해만 일대는 황하에 의한 토사의 퇴적으로 육지가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500여리의 육지가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는 ‘구하윤해설’은 과학적으로 아무런 근거 없는 황당한 주장이 다. 그러므로 ‘구하윤해설’을 근거로 생겨난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가 짜 갈석산’이다. |
| ① 한반도 평양 일대에 위치했다는 정체불명의 갈석산이다. ② 일제강점기 때 식민사학자들이 유물들을 조작하여 한반도 평양일대를 한나라 낙랑군으로 역사왜곡하면서 생겨난 ‘가짜 갈석산’이다. ③ 현재 중국은 『중국역사지도집』에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 일대까지 그리고 있다. 『태강지리지』등의 기록에 의하면 만리장 성의 동단은 갈석산이므로, 중국은 일제 식민사학을 활용하여 갈석산을 한반도 평양 일대의 산으로 비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짜 갈석산’은 현대판 동북공정의 핵심근거가 되고 있다. |
* 갈석산은 여러 사서에서 그 기록이 매우 풍부하여, 이들 기록을 통하여 한민족의 상고사가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알 수 있다. 갈석산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존재했다는 분명한 시‧공간적 좌표를 가지고 있는 산이므로, 현대과학으로도 그 위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갈석산을 통하여 한민족의 상고사를 추론이 아닌 과학의 단계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갈석산은 한민족 상고사의 블랙박스 같은 존재이다. 갈석산은 한민족의 상고사가 중화 사대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에 의하여 두 번의 커다란 왜곡을 겪어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조선의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었던 본래의 갈석산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었다. 그런데 송나라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에 의하여 본래의 갈석산이 난하 하류 방면의 ‘가짜 갈석산’으로 1차 왜곡되었다. 갈석산의 지명이동과 더불어 고조선의 중심지도 동쪽으로 1천여 리 이동하여 난하 하류 방면으로 역사 왜곡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 전, 중화 사대사관에 의하여 저질러진 고대판 동북공정이다. 또 일제 강점기 때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하여 낙랑유물 조작을 통하여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이 한반도 평양 일대로 지명 이동되었다. 갈석산의 지명이동과 더불어 고조선의 중심지도 함께 동쪽으로 2천여 리 이동하여 한반도 평양 일대로 역사 왜곡되었다. 현재 중국은 일제 식민사관의 역사왜곡을 활용하여 현대판 동북공정을 진행 중에 있다. 이와 같이 고조선의 중심지는 중화 사대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에 의하여 두 번의 커다란 역사왜곡을 거치면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서 동쪽으로 3천여 리 이동하여 한반도 평양 일대로 축소․왜곡되었다. 갈석산이 온몸으로 이를 증거하고 있다. 현재 ‘낙랑군 재난하설’을 주장하는 재야사학계나, ‘낙랑군 재평양설’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모두 이러한 갈석산의 증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다음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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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개사과와 개인적사과를 병행하고 스스로 활정같은 책임을 졋다면 해결될 문제가 이제 미권스차원을 넘어섯네요
사태확산의 모든 책임은 사건을 단순한 농짓거리로 보는 님의 안이한 사태인식에 전적으로 있음을 지적합니다.
본문과 관계있는 댓글만 달아주세요.
@인내천 공개사과와 개인적사과를 병행하고 스스로 활정같은 책임을 졋다면 해결될 문제가 이제 미권스차원을 넘어섯네요
사태확산의 모든 책임은 사건을 단순한 농짓거리로 보는 님의 안이한 사태인식에 전적으로 있음을 지적합니다.
@인내천 님 글 올릴 자유가 있는 것만큼 댓글을 쓸 자유가 회원들에게 있는겁니다. 본문과 관계있는 댓글만을 원하시면 역사 커뮤니티에다 글을 올릴 것이지 뭐하러 여기에 올리셨소?
글이 읽어지지 않습니다. 문제가 마무리 되지도 않았습니다.
음.. 이런 글은 재명투개더에나 올리세유.^^
그러고 보니.. 올리기는 하셨네 .. ㅋㅋ
제명투개더라... 할 말을 없게 만드는구만요...
@▶◀난 영원한 29살(한밀알사퇴) 넵.. 그래서 다슉님 관련 사건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올린 비아냥 댓글로 보여유
@▶자게◀김재규는 진정한 영웅 인식이 이러니 저런 인간을 지지하는 거군요... 쩝...
@▶◀난 영원한 29살(한밀알사퇴) 누구를 지지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정당한 행위였다고 주장 하려고 하는..
음.. 말도 안되는 행동들이 눈에 보이네유.
인내천님이 김봉렬 작가에요
아니면 그사람 책에서 가져온 겁니까?
본인인거 같아요~ 안그러면 저작권법 위배 되는데 설마 그런짓을 했을라구요?
이런글 보다 사과하는 글을 먼저 올리시요!
비도덕 비상식으로 점철된분.
어찌나 재명스러운지ㅉㅉ
'사람이 곧 하늘이다' 이게 인내천 사상 아닌가요?
님은 사람을 개돼지로 여기는 듯 보이는데,
저런 닉네임 스스로 부끄럽지 않소?
인간 갖잖은것들한테는 제대로 대접을 해줄 필요가없어요.
머가 어쨋다고요?
사람모두가 가지고있는 신체 일부에 대해서
말했다고요?
당신 부인이나 딸.어머니에게도 똑 같은
말을 누군가한다고해도 같은거겠죠.
쓰레기글 싸지르지말고 그만 나가요
같은 시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역겨우니까
- 먼저 인간이 되어라 -
승자는 실수했을 때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지만
패자는 실수했을 때
'너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승자는 어린 아이에게도
사과할 수 있고
패자는 노인에게도
고개를 못 숙인다
222222222222222222222222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애먼 사람잡지 마시죠.
이분이시나요
토할것 같네... 당신 자폭단이야? 사람들 열폭해서 욕나오게 해서 활정먹게하는게 목적이야?
뻔뻔함도 정도것이지... 뻔뻔함이 이정면 나도 배우고 싶네 씨펄~
물곰같은 소리 하시네.
인내천이 어느날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게 아니랍니다.
개인적인 수양과 수행이 없는 인내천은 그저 울리는 꽹과리소리에 지나지 않아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으셨으리라 믿어요.
다슉이님께 정중히 사과 먼저하세요.
그게 인내천의 알파요 오메가 입니다.
윤내현 교수님은 재야사학자가 아닙니다. 단국대교수셨고 현재는 파킨슨병으로 투병중이시지만 명예교수직을 맡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아마 단국대 부총장까지 지낸 분이시죠. 그런데 재야와 견해가 같아서 강단사학계에서 재야로 부르고 왕따했죠.
역사 바로 잡기 앞서서 자기 변명을 바로 잡을 맘은 없으신가?..뭐 역사 많이 안다고 자랑질 하는 것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