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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9일 주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제1독서 : 집회 3,2-6.12-14
제2독서 : 콜로 3,12-21
복 음 : 루카 2,41-52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머니 마리아는 미혼모였습니다.
양아버지였던 요셉과 혼인한 뒤, 당시 임금이 아이를 죽이려 하자
이를 피하여 이집트로 갔다가 나자렛으로 돌아오는 떠돌이 생활을 합니다.
아들 예수는 성인이 되어서도 일은커녕 어부들과 떠돌아다니다가
어느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우리가 성가정이라고 부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은,
실상 행복한 가정이나 기쁨이 흘러넘치는 가정,
또는 자녀들이 성공해서 부모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가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가정을 본받으려 합니다.
성가정의 중심에 하느님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루카 1,38 참조)을 가지셨고,
요셉 성인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마태 1,24; 2,13-15. 19-23 참조)으로 살았으며,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8)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모에게도 순종하셨고,
성모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이해하기 어려우실 때조차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루카 2,51 참조)
오늘날 많은 가정이 사랑을 잃고 가족들은 외로워합니다.
가정이 하느님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순종, 마음속에 간직함,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기도,
이것이 가정이 성화 되는 길이고, 외로움과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서 빠져나오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2,51)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 아는 청년들과 야구장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경기는 흥미로웠고, 역전에 역전을 거쳐 응원하던 팀이 이겨서 너무나 기분 좋은 경기였습니다.
함께했던 청년들도 모두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이렇게 말합니다.
“솔직히 뭐가 재미있는지 모르겠어요.”
분명히 재미있는 경기였는데 왜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요?
야구 규칙을 하나도 몰랐고, 그날이 야구를 처음 본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하긴 미국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미식축구를 저는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예전에, 교구청에서 생활할 때,
인천교구 초대 교구장님이신 고(故) 나 굴리엘모 주교님과 함께 미식축구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주교님께서는 너무나 신나셨고,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위해 친절한 설명도 계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재미가 없어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졸았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이런 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르면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습니다. 주님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을 모르면 신앙이 재미없고 지루하게만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게 되면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잘 모르겠다고 그래서 신앙이 지루하다면서 주님을 멀리해야 할까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에 계속 모르는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가는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고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하면서 하룻길을 간 것입니다.
하루가 지나서 부모는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고,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까요?
그래서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대답을 하십니다.
이 말에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통은 부모의 마음을 애타게 한 자녀를 혼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보통은 가족 모두가 성당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면 성가정이라고 하지만,
더 큰 의미를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이룬 가정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서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서로에게 봉사함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서로를 알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과연 성가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서로를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또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봉사하고 있나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사람이 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거룩한 탄생은 하느님께서 ‘가정’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가정’을 만드시며(이루시며)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엮어지고 꾸며졌기 때문입니다.
곧 ‘성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이루시며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첫 장소로 ‘가정’을 이루셨습니다.
이토록 당신의 오심으로 모든 것을 축복하고 새롭게 하시는 당신께서는 맨 먼저 ‘가정’을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가정’이란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무대임을 깨우쳐줍니다.
곧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무대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가정의 주인이 되시도록 모셔 들이는 일입니다.
곧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집회 3,6)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신앙공동체 구성원의 신분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곧 하느님의 호의를 입은 자요, 하느님의 사랑을 입어 선택받은 자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삶으로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용서, 사랑, 평화, 감사로 제시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서 풍부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 3,16)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시고,
“이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콜로 3,20)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바로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준재임을 말하면서도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명하고 지냈다.'(루카 2,51)고 전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연상시킵니다.
곧 ‘친교와 사랑과 통교를 이루는 일치의 공동체’를 연상시켜 줍니다.
그래서 ‘성가정’은 모든 ‘가정’뿐만 아니라 모든 ‘수도공동체’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가정’이라고 해서,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문제 가정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 했고,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 했으며,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으며,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버린 ‘불우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을까요?
분명 ‘행복한 가정’이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도 없어서 성가정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가정’이란 단순히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거나 말썽부리는 사람이 없는 가정이라서가 아니라,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머물러 계실 뿐만 아니라 주인이 되어 계시는 가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을 이루는 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머무실 수 있도록 하는 일’이요,
‘그 말씀이 품은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일 것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기에 성가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구원의 길에 함께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가정'은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가는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머무르게 하되,
'말씀'이 주인으로 머무르게 할 뿐만 아니라, ‘주인이신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순명과 섬김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서로 순명으로 섬기고, 섬김으로 순명하며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정공동체 안에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과 평화가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를
구원의 길로 동행하시기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주님!
눈을 뜨고도 당신을 보지 못함은 당신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바다 안에서 바다를 찾아다니는 우둔함을 멈추게 하소서.
찾는 것을 멈추고,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이곳이 아버지의 집임을!
춤추는 춤꾼과 춤이 분리되지 않듯,
제 안에서 저와 분리되지 않으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나라의 사정이 혼돈 속에 있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주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복을 많이 만드시고, 나눠주시고 또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늘 복된 사람으로, 꼭 필요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 시간 성가정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각 가정에 행복을 더해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보십시오. 아버지 요셉은 목수일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의 말을 듣고, 믿었으며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들을 묵묵히 잘 견디어냈습니다.
헤로데의 손아귀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구하기 위한 피난살이에서 오는 혹독한 시련을
묵묵히 받아들였고 전 생애 동안 가난을 감수하시면서 주어진 삶에 충실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아들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으며
그에게 일어나는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 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5).라는
시메온의 예언의 말씀을 들어야 했고,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복되신 분이 성모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파스카 축제 때
3일간이나 예수님을 잃고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찾아냈을 때 아들에게 들은 소리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19)하는 말이었습니다.
부모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더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습니다.
나자렛 가정은 어려운 처지와 상황, 예기치 않은 일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의 신뢰와 순종, 그리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며 지켰습니다.
각자의 소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가정의 모범입니다.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서로 간에 기대를 채우지 못해 상처를 주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벽을 쌓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찾기는커녕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기까지 합니다.
한집안 식구끼리도 서로 손해 보는 일, 희생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식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신도 이만큼은 해야 하지 않느냐며 따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도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기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해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가정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머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 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콜로3,13-14).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은 곧 우리 삶의 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입니다.
모든 문제의 답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을 가슴에 모시고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가정이 성가정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이 떠나면, 말씀을 멀리하고
영성체를 소홀히 하면 허전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은 메마르고 삶은 공허해 집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화목함이 무너집니다.
하느님을 떠나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의미와 공허와 비인간화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으신 존재,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게끔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바꾼 대통령 링컨'이라는 책을 보면
너무나 가난했던 링컨의 어머니는 어린 링컨에게 성경만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으로 남긴 것도 성경 한 권이었습니다.
링컨은 성경을 읽고 또 읽어 지혜를 얻었고 링컨의 삶을 이끌었던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는 대통령(미국16대, 1861)이 되고 나서도
집무실 책상 위에 항상 성경을 두고 읽었으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노예해방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결과입니다.
성가정의 핵심은 바로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느냐?
기도하고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집회서를 보면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집회3,4)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3,15.17).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들볶지 않는 가운데 화목함을 이루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외침이 하나의 공허한 외침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 삼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행복의 원천이며 모든 해답이 거기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말씀과 함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내 마음 안에 모셔 들이면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생활양식이 바뀌고 갈등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고 행하는 성가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파수가 헛되리라.”(시편127,1)고 했습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행복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 해를 보내며 부족했던 모든 것에 대해 자비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주일 아침 성당 가는 길이었습니다.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고 했지만, 나올 때는 비가 오지 않아서 우선도 없이 성당으로 갔습니다.
중간쯤 가면서 비가 내렸습니다. 사제관으로 가기도 그렇고, 비를 맞으면서 성당으로 갔습니다.
‘머피의 법칙’이 제게도 해당하는지 그만 성당 열쇠를 사제관에 놓고 왔습니다.
아무리 본당 신부라고 해도, 열쇠가 없으면 성당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조금 기다리니 수녀님이 오셨고, 성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비를 맞으며 걸어오면서 예전에 토론토에서 지냈던 시간이 생각났습니다.
2005년 11월에 저는 해외연수를 신청했고, 토론토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동창 신부님과 저는 2시간 걸리는 거리에서 따로 지냈습니다.
말을 배우려면 따로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2달 정도 지내다가, 동창 신부와 저는 같이 지내기로 했습니다.
말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낯설고 먼 타향에서 같이 지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습니다.
2년 동안 지내면서 부부가 같이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집은 열쇠가 있으면 열리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있어야 열린다는 걸 알았습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3가지 차원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하느님께서 머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몸과 마음에 하느님께서 오실 수 있는지,
지금 나의 몸과 마음이 예수님께서 머물렀던 ‘구유’가 될 수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가족이라는 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혼자 있어야 하는 아담을 위해서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와는 아담의 몸에서 나왔습니다.
그러기에 가족은 서로 아껴주고, 보듬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우리 모두는 가족이라는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하늘과 땅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지구라는 집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물려주었던 아름다운 지구를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오늘을 ‘성가정 축일’로 지내는 것은
예수, 마리아, 요셉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나자렛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며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요셉 성인은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마음을 바꾸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하느님의 뜻이 함께한다면,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난다면 우리의 가정 역시 ‘성가정’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모든 ‘추억, 기억, 상상력’이 시작되는 ‘성가정 축일’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가정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소중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가족들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혀지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읽었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비가 오는데, 키 큰 사람하고, 키 작은 사람이
우산 하나만을 가지고 비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키 큰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작은 사람이 비를 맞게 되고,
키 작은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큰 사람이 비를 맞게 됩니다.
서로가 키가 다른 것에 대해 한탄하거나 탓하면 둘 다 불행해 집니다.
또 서로를 탓하다 갈 곳을 못 가게 될 수도 있죠.
해결 방법의 하나는,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을 업고,
키 작은 사람은 우산을 들면, 비 맞지 않고 갈 곳을 가게 될 뿐만 아니라,
둘이 서로의 믿음과 나눔의 경험을 창출해 낼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문제는 함께 해결할 수 있고
또 함께 해결하면서 성장의 기회를 얻게도 됩니다.”
기도와 마음을 열어주는 대화,
그리고 신뢰를 통해서 성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성가정 축일
조욱현 토마 신부
성가정 축일:
오늘은 성가정 축일이다. 가정은 교회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매우 중요한 곳이다.
우리는 항상 서로 간에 사랑의 막을 쳐야 한다.
가정 안에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사랑하기를 배우지 못한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가정교회는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인식과 또한 생명과 인간 품위에 대한
존경심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1979.1.28. 멕시코 푸에블라에서)라고 하셨으며
그 때문에 가정 사목에 중점을 두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의 가족관계가
사랑이라는 기본법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느님께서는 부모에게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자녀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이 사랑의 교류 법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한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누구도 변경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초월적인 구원계획에 속한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의무를 채우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희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성서는 가정을 더 풍요로운 역량을 갖추도록 초대하고 있다.
복음: 루카 2,41-52: 부모는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것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사명을 드러내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의 관계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이고,
당신의 삶 전체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실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루가 24,26.46-47).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다는 것은
나자렛 가정에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분위기는 마리아가 걱정하며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를 발견하였을 때,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48절) 하신 말씀 속에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우리가 보는 가정은 모두가 아무런 번민,
즉 갈등, 오류, 실패, 질병, 또는 죽음 등으로 인한 문제가 없을 만큼
이상적인 가정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고 있는 가정은 모두 이럴 수 있다.
여기서 신앙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뢰’만이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있고
가족들을 더 가깝게 일치시켜 주고 밝은 희망을 줄 수 있다.
괴로움과 고통이 생활을 멈출 수는 없다.
하느님을 통해 보이는 괴로움과 고통은 생활을 보다 역동적이고 풍요롭게 해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51-52절)라고
복음을 맺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에는 우리의 사고를 요구하는 대목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50절) 한다.
아들의 태도와 말속에는 어떤 신비가 들어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일 것이다.
이 신비는 그의 부모들도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도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성장 과정에 있는 인간존재 안에는 ‘신비’가 들어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하느님 안에서 자녀들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들이 그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자녀들의 길은 부모들이 원하거나 생각하는 길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충만한 믿음으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존중하고 용기를 주어야 한다.
제2독서: 골로 3,12-21: 주님과 함께 사는 가정생활
콜로새서에서도 가정의 원천이 오로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면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고, 그 안에서 각자는 형제자매로서 받아들여지고
또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역할 때문에 남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만 가능하다.
가정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주님 마음에 드는 일”(콜로 3,20)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그리스도교 사상은 오늘날 퇴폐하고 파탄에 이를 지경에 놓이게 되는
이 자연적 가정에도 새로운 힘과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다.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자렛 가정은
자녀들에 대해서 부모가 갖추어야 할 자세를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성가정을 이루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2천 년 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묵상하면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가정’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기쁨에 찬 자발적 순명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정말이지 힘든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순명의 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윗사람이 하라시니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하는 순명이 아니라,
기쁨에 찬 자발적 순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내 의지를 과감하게 접는다는 것,
분명 나보다 부족해 보이는 상대방의 뜻에 따른다는 것,
타인의 생각과 계획에 내 삶을 종속시킨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몸소 인간에게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러한 정황을 아무런 가감 없이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
참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지, 당신의 삶 전체, 당신의 미래를 인간의 손에 맡기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극도의 자기 낮춤이요, 지극한 겸손의 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눈여겨볼 측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셨지만,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께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수도 공동체 안에서 때로 장상들도 회원들에게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때로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순종하신 예수님, 그 놀랍고 감동적인 덕행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명이 있었습니다.
골고타 언덕에서의 끔찍한 십자가 죽음을 고스란히 예견하신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마음이 심란하고 괴로운 나머지,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바쳐,
온 몸과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살벌한 죽음의 현장,
그 모습이 너무나 끔찍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 22,42)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최종적인 결정은 아버지께 맡겨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순명의 덕과 관련해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 사이에서는 돈보스코 시대 때 부터 내려온
너무나 아름다운 전통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Faccio Io, Vado Io’(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전통입니다.
굳이 장상이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렵사리 부탁하기에 앞서,
수도자들은 미리 장상의 괴로움을 파악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원장님, 어려운 일이 있으신가보군요.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거 제가 하겠습니다.
관구장님, 어디 힘든 자리로 누군가를 보내기 위해 고민하고 계시는군요.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큰 목소리로 ‘Faccio Io, Vado Io’를 외치지만,
어딘가를 보내면 그쪽에서 너무 힘들어합니다.
그러니 잘 순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어디를 가든 공동체와 잘 어울리면서, 기
쁘고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어딜 가든 그쪽 사람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자신을 갈고 닦아야겠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집회서와 바오로 사도가 건네는 권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집회 3,12~13)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콜로 3,19~21)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1920년에 처음으로 제정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없었던 축일입니다.
19세기 말부터 출현한 유럽의 산업 사회는
인류의 기본 공동체인 가정의 가치를 훼손하였습니다.
과거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산업체의 근로자들은 가정 중심으로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생명과 사랑의 온상인 가장의 가치는 점차 손상되고,
산업체 중심으로 가정생활도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회환경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새롭게 강조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교회는
성가정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을 아버지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한 가정 안에서 자랐습니다.
생명이 태어나 자라는 곳이 가정이고, 사랑과 섬김을 배우는 곳도 가정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의 부모가 열두 살 된 아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아들을 잃어버린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아들을 찾아 사흘을 헤맨 끝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를 찾았습니다.
소녕 예수는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나무라는 부모에게 예수는 ‘저는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라고 대답합니다.
율법교사들과 토론하는 예수, 그들이 경탄하는 예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 부르는 예수,
소년 예수에 대한 이런 이야기들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 후,
그분을 주님이라 믿는 신앙공동체가 그들의 믿음을 담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어릴 때부터 율법교사들을 상대할 만큼 현명하였고,
성전을 자기 아버지의 집이라 일컬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는데,
그것은 어릴 때부터 그분이 가진 확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유대교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파는 오로지 율법 준수를 원하는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사두가이파는 전통을 철저히 따르는 하느님,
혁명당이라는 과격파는 무력으로라도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하느님,
에쎄네파는 금욕적 수도 생활을 원하는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심판하실 무서운 하느님이었습니다.
율법과 전통을 소홀히 하면, 무서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데에 그들의 생각은 일치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사람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도
유대교의 하느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성토하고 비난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정의이고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비로운 아버지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고 용서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며,
그분의 자녀로 사는 것이 정의이고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믿은 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분에게 하느님은 양 한 마리도 잃지 않으려는 목자와 같은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자녀의 잘못을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는 부모와 같은 아버지이십니다.
부모의 사랑이 자녀에게 흘러들어서 자녀가 성장하고 사람이 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배워서 자녀도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과 사회를 위해 헌신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된 사람은 예수님이 실천하여 보여주신 하느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흘러들게 하여 자기도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며 삽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에서 들은 콜로새서는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자비를 다음과 같이 풀어서 설명하였습니다.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사랑을 입으십시오.’
이런 실천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하느님의 자녀안에 보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또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을 우리는 모두 가슴에 안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고통스런 일도, 후회스런 일도 있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부끄러운 회한으로 남은 일도 있고,
나와 관계없이 닥친 불행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 각자에게 은혜로운 세월이었습니다.
그 은혜로움 안에 하느님의 손길을 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나에게 상처로 아직 남아있는 것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묵시 21,5)에게 맡겨드립시다.
“죄가 많아진 거기에 은총이 넘쳐 흘렀다.”고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로마 5,20)
하느님은 고치고 새롭게 하십니다.
내가 이웃에게 준 상처와 내 마음에 남은 미움의 앙금들을 하느님에게 보여드리고,
그분이 당신의 자비를 불어넣으시게 기도합시다.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지금도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다.”(5,17)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롭게 된 그만큼 하느님은 우리 안에 일하십니다.
한 해가 과거라는 忘却 안으로 흘러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은 은혜로웠던 순간들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일하신 순간들이었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손길을 우리에게 전달한 분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와 가까이 있거나 잠시 우리를 스치고 지나간 분들입니다.
은혜로운 눈길, 은혜로운 손길을 남기고 지나간 분들입니다.
그 은혜로움이 있어 나의 삶이 은혜로웠습니다.
우리는 다른 일에 정신을 빼앗겨 그 눈길과 그 손길들을 예사로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한해를 마감하면서 우리가 은혜롭게 회상하고 감사해야 할 것은,
그런 눈길과 그런 손길들입니다.
세월도 가고, 우리도 가지만, 그런 눈길과 손길들은
하느님 안에 우리와 함께 살아있을 것입니다.
성가정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하느님이 아버지 되시게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의 가정은 가족 모두가 잠시 쉬고 나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자녀들도 학생이 되면,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각자가 해야 할 일이 많은 오늘의 세상입니다.
해가 지면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내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하기도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구성된 모두가 서로를 의식하며 삽니다.
선입견이나 이해관계 없이 서로 들어주고 말하면서 삽니다.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처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종류의 횡포는 인류가 출현하기 전, 진화 과정에서 얻은 동물적 유산입니다.
우리가 청산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비를 실천하는 마음이 지배해야 하는 우리의 가정입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또 한 해입니다.
기쁘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합시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