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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조선의 선비정신 / 趙憲과 大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18 14.10.18 11: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키워드로 풀어보는 조선의 선비정신 -

趙憲과 大

 

자신의 신념대로 大丈夫의 길을 걸은 ‘참 자유인’

 

조헌의 삶은 孟子가 大丈夫를 설명하면서 말한 ‘뜻을 얻지 못한다면 혼자서도 그 道를 행하는

(不得志獨行其道)’ 모습이었다.

 

 

조헌 초상.

  지금으로부터 만 422년 전, 이 나라 역사에는 참으로 희한(稀罕)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1589년(선조 22년) 음력 4월에 초로(初老)의 선비가 홀로 대궐문 앞에서 상소(上疏)를 올린 후 임금의 비답(批答)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소를 올리고 답변을 기다리는 것이야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엎드린 상소자의 옆에는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가 놓여 있었다. 자신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자신의 목을 이 도끼로 치라는 강력한 압박을 한 것이다.
  
그 선비는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군(倭軍)과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중봉 조헌(重峯 趙憲·1544~1592년)이었다.

자기 목숨을 담보로 내놓은 상소문의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조헌은 왜 도끼를 지니고 상소를 올리는, 일명 ‘지부상소(持斧上疏)’라는 방식을 택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자. 
  
조헌은 누구인가? 조헌은, 본관은 백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도원(陶原), 후율(後栗) 등으로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했다. 율곡(栗谷)과 토정(土亭)의 문인이었다.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56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 1년)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 파주목, 홍주목 등의 교수(조선 시대에 지방 유생의 교육을 맡아 보던 종6품 벼슬)를 역임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잡았다. 1572년부터 교서관(校書館)의 정자(正字·조선 시대 홍문관·승문원·교서관에 속한 정9품 벼슬), 저작(著作·조선 시대 교서관·승문원·홍문관의 정8품 벼슬), 박사 등을 지내면서, 궁중의 불사봉향(佛寺封香)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려 국왕 선조(宣祖)를 진노하게 하였다.
  
三餘의 학문
  
1575년부터 호조좌랑, 예조좌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통진현감으로 있을 때, 내노(內奴·宮노비)의 죄를 엄히 다스리다가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아 부평으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났다. 1582년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자청하여 보은현감으로 나가 있는 동안, 그 치적이 충청좌도에서 으뜸으로 손꼽혔다. 하지만 대간(臺諫)의 모함에 따른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586년에 다시 공주(公州)의 계수제독관(界首提督官)으로 돌아왔다.
  
제독관이란 이해(1586년)에 명나라 학제를 본받아 목(牧)과 도호부(都護府) 같은 각 도의 행정·군사의 중심지에 교육을 감독, 장려하기 위해 두었던 관직이다. 조헌은 제독관에 임명되어 공주에 부임한 뒤 선비를 양성하는 규범과 그 조약을 엄하게 하고 이를 몸소 먼저 실천하니 먼 곳으로부터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조헌은 당시 자신이 맡은 제독관의 소임을, “어린 선비들을 교도하여 ‘삼여(三餘)의 학문’을 권장하고, 스승을 높이고 도를 중히 여겨 그 정신이 안에서 밖으로 드러나고, 의(義)를 숭상하고 사리(私利)를 버림으로써 근원이 정화되어 지류에까지 미치게”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여기서 필자는 ‘삼여의 학문’라는 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삼여의 학문’이란 세 가지 여가를 이용하여 공부한다는 의미이다. 밤은 낮의 여분이고, 비오는 날은 맑은 날의 여분이며, 겨울은 한 해의 여분이다.
  
이 여분의 시간에 일념으로 집중하여 책을 읽을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는 밤과 비오는 날, 그리고 한겨울에는 들에 나가서 일할 수 없기 때문에 집에서 책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헌이 생각하는 학문은 실천을 위한 학문이었다. 그 학문이 결코 삶보다 우선일 수는 없었다.

어려서부터 가난한 가정형편으로 들에 나가 논밭을 갈아야 했던 조헌은 쟁기질을 하면서 들판의 한 귀퉁이에 나무선반을 설치한 후 그 위에 책을 올려놓고 글을 읽어 가며 일을 하였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 학문을 못한다는 자세로 일관해 온 필자 자신은 이제 더 이상의 핑계를 찾아내기 힘들게 되었다.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 것일까? 우리네 삶은 고비마다 만나는 문제들의 연속이다. 수없이 만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준비하는 것이 공부일 것이다.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하는 하나의 방편이 공부이다. 하지만 반대로 예나 지금이나 그 공부를 위해 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필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비가 오면 비를 대비하고, 눈이 오면 눈을 대비하기 위한 지혜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공부이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젊은이들이여! 들어가서는 효를 하고, 나와서는 공손하게 하며, 행실은 삼가고, 말은 성실하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인한 자를 가까이하시게. 이 모든 것을 실천하고 여유가 있으면 곧 공부를 하라(弟子入卽孝 出卽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卽以學文)’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공부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이제 공부 자체가 전면에 배치되게 되었고, 우리는 마치 그 공부를 위해 사는 사람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살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사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조정대신을 직접 공격하다
 

충북 옥천에 있는 조헌의 묘소.

  아무튼 이 당시 조헌은 비교적 한산한 자리에 있으면서 지역의 교화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스승 율곡과 성혼(成渾) 등이 무고(誣告)를 당하게 되자 율곡과 성혼이 어질다는 사실을 진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헌이 보기에 당시의 조정은 아첨하는 무리들의 간사한 행위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배척하는 내용과 스승을 변호하는 내용을 함께 올리게 된 것이다.
 
  해가 바뀌어 1587년 5월에 조헌은 다시 상소를 올려 시사에 대해 극언(極言)하였다. 그런데 이때 조헌은 가난하여 행장을 꾸려 서울에 올라올 수가 없었다. 이러한 경우 자신이 속한 도(道)를 통해 올리는 것이 당시 관례였다. 
  
조헌은 관례대로 관찰사를 통해 상소를 올리고자 하였다. 하지만 관찰사는 조헌의 상소가 너무 과격하였으며, 자신이 또한 그 상소에 연루될까 두려워하여, 상소의 형식을 문제 삼아 반려하였다.

조헌이 곧 다시 짧은 소장을 첨부하여 네 번 올렸으나 네 번 모두 받지 않았다. 이에 조헌은 관직을 사임하고 옥천(沃川)의 향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향리로 돌아온 조헌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금을 시역(弑逆)하고 아울러 여러 도주(島主)를 죽이고 사신을 보내어 우리의 형세를 엿보는데도 조정에서는 두려워 감히 이를 척결하고자 말하는 이가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헌은 이를 듣고 상소를 지어 관찰사에게 올렸는데, 관찰사는 “풍신수길이 저희 임금을 죽였다는 것은 자세히 알 수도 없으며, 또 상소 중에 고위 대신을 직접 배척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그 소를 또다시 올리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조헌은 걸어서 대궐 앞에 나아가 다시 지은 소와 앞서 올리지 못했던 두 개의 소를 모두 올렸다. 이 상소에는 일본에 대한 대비책과 더불어 이산해(李山海) 등 당시 조정 대신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들어 있었다. 재상을 공격하는 것은 그 재상을 임명한 임금을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조는 크게 노해 그 상소를 불태워 버렸다. 
  
이상이 조헌이 도끼를 들고 대궐로 향하게 된 그간의 배경이다. 관찰사를 통해 올린 상소는 임금에게 전달되지도 못했으며, 직접 올린 상소는 임금으로부터 불태워 버리라는 실로 해괴한 처분이 내려졌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 끝에 나온 조헌의 행위가 바로 ‘지부상소’였다. 
  
“잘못된 정치로 죽이는 것은 살인”
  
이제 그 상소문의 내용을 살펴보자. 조헌의 상소문은 무엇보다도 장문(長文)이라는 특징이 있다. 대부분의 상소가 엄청나게 길다. 간략하게 그 내용만 소개한다.
  
조헌은 ‘백성을 배양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을 ‘그릇에다 물건을 담는’ 일에 비유했다. ‘그릇을 위태로운 곳에 두면 그릇이 깨져 물건이 흩어지듯이, 죽을 곳으로 백성을 몰아넣으면 백성이 죽고 나라도 따라서 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은 바로 ‘죽을 곳으로 백성을 몰아넣고’ 있었다. 
  
조헌에 의하면 당시 북쪽 지방의 백성들은 도망가지 않을 수 없는 딱한 사정이 있었다. 그곳에 무인(武人)들이 포악하게 백성의 재물을 강탈하는 수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조헌은 당시 북쪽 지방 백성들이 겪고 있는 대표적인 고충을 고발한다. 
  
한 사람의 이름을 세 곳의 군대 문서에 나누어 기재를 해 놓는다. 겨우 한 곳에서만 점호를 할 수밖에 없으니 나머지 두 곳은 벌금을 내는 것으로 책임을 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엉터리 군적부(軍籍簿)로 인하여 북쪽 지방의 백성들은 도망하여 흩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은 남쪽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현실을 고발하면서 조헌은 자신의 감정을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격렬하게 표현하였다.

“칼로 죽이는 것이나 잘못된 정치로 죽이는 것이나 살인한 것은 같습니다.”

백성들에게는 도망하여 굶어 죽으나 잡혀서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위기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국가의 위기는 왜 생겨난 것일까? 조헌은 이산해(李山海), 유성룡(柳成龍) 등의 ‘태만한 무리에게 맡겨 조종(祖宗)의 중기(重器)를 그르쳤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조헌은 이산해에 대해 “국사(國事)가 중대함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사당(私黨)만을 끌어들이려는 마음을 품었고, 결국 나라를 좀먹는 간인(奸人)을 그 지위에 나누어 배치시키고 공심(公心)을 가진 사람을 배척하였다”고 비판했다. 또한 유성룡은 “세상을 다스릴 만한 재능이 못 되고 원대한 계책을 지닌 식견도 없는데 악당들이 서로 헛된 명예를 과장하면서 몰래 사특(邪慝)한 의논을 주장하며 어진 이를 시기하고 선한 사람을 미워하였고, 결국에는 임금을 고립시켰다”는 것이 조헌의 주장이었다. 
  
“임금의 命은 밤을 재우지 못한다”

 

조헌을 모신 경기도 김포시의 우저서원(牛渚書院).

  이 자리가 이산해와 유성룡이 옳은가 조헌이 옳은가를 가리는 자리는 아니다. 우리 사회는 한 인물을 논할 때 흔히 시비선악(是非善惡)이라는 2분법에 익숙하게 길들여져 왔다.

인조(仁祖·재위 1623~1649년) 임금 시기 청나라와의 전쟁을 두고 갈린 김상헌(金尙憲)과 최명길(崔鳴吉)의 논쟁에서부터 현대사에서는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흔히 한쪽이 옳고 다른 한쪽은 그르다는 식으로 평가를 해 왔다. 세상에는 하나가 옳으면 그와 다른 입장은 당연히 틀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둘 다 옳은 경우는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이다.
  
그래서 차가운 얼음과 뜨거운 숯불은 한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이란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이 세상에는 둘 다 옳은 경우도 있고, 둘 다 그른 경우도 있지 않은가. 아니 그보다 먼저 그 옳고 그름이란 것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판단해야 할 일이 아닌가. 동서고금을 통해 영원히 선한 가치는 이념상으로는 존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가 사는 현실 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이 세상을 솔직하게 살아가는 지혜일 터이다. 
  
이제 필자는 조헌의 주장을 ‘옳고 그름’이라는 시비(是非)의 차원에서 평가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조헌이 어떠한 구체적인 상황에서 무슨 연유로, 무슨 주장을 했고,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를 살펴본 후 그것이 갖는 의미를 나름대로 이해해 보는 자리로 삼고자 할 뿐이다. 
  
선조는 ‘지부상소’를 올린 조헌을 길주(吉州) 영동역(嶺東驛)에 유배를 했다. 조헌이 배운 것은 하나같이 실천을 위주로 하는 것이었다. 조헌은 귀양을 가라는 명(命)을 받자마자 바로 길을 떠났다.

조헌을 압송하기 위하여 온 의금부(義禁府)의 나졸(邏卒)들은 조헌으로 하여금 밤을 이용하여 귀양 갈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일부러 저녁 늦게 도착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헌은 “임금의 명은 밤을 재우지 못한다”면서 그날 밤에 길을 떠났다. 
  
일본의 침략을 경고
  
조헌은 귀양 생활 또한 조금도 어김이 없었다. 귀양의 명을 받고 역에 정배(定配)된 사람은 반드시 사사로이 역관(驛館)과 통하여 모두가 그 노비에게 노역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 오래된 관례였다. 하지만 조헌은 “조정에서는 바로 이렇게 노역을 시키는 것으로써 죄를 다스리고자 하는데 이것을 모면할 것을 구한다면 이것은 임금의 명을 어기는 것”이라며 묵묵히 자신의 노역을 스스로 수행하였다. 하지만 조헌의 귀양살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동인(東人)이 실각하자 조헌은 귀양에서 풀려났다.
  
1591년 3월에 조헌은 왜국의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옥천(沃川)에서 백의(白衣)로 걸어와서 상소를 또다시 올렸다. ‘자신의 말이 수용되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선비의 당연한 태도’이지만 워낙 위급한 시기라는 생각에 조헌은 그런저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조헌은 말했다. 
  
“일본에 갔던 사신(使臣)이 돌아오자 적선(賊船)이 해변에 와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우리나라를 함몰시키고 중국을 침범할 경우에는 중국에 대해 변명할 길이 없고 이들이 기회를 포착하여 갑자기 쳐들어올 경우에는 해변의 방어가 너무도 허술합니다. … 오늘날의 사세를 헤아려 보건대, 국가의 안위와 성패가 매우 긴박한 상태에 있으니 참으로 불안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히 왜사(倭使)의 목을 베고 중국에 주문(奏聞)한 다음 그의 사지를 유구(琉球) 등 제국(諸國)에 나누어 보내어 온 천하로 하여금 다 함께 분노하게 하여 이 왜적을 대비하도록 하는 한 가지 일만 있을 뿐입니다. … 만리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면 신에게 절월(節鉞)을 빌려주어 사행(使行)의 말단에 충당시켜 주소서.”
  
조헌(趙憲)이 궐하(闕下)에 엎드려 상소에 대한 비답이 있기를 기다렸으나 내리지 않자 머리를 돌에다 찧어 피가 얼굴에 가득하였다. 그래도 비답이 내리지 않자 이 상소를 봉진(封進)하였으나 정원(政院)에서 받지 않았다.
  
700명의 의병과 함께 전사

조헌과 함께 전사한 의사(義士)들을 기리는 종용사(從容祠). 충남 금산 칠백의총(七百義塚) 내에 있다.

1592년 4월, 마침내 조헌의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하였다. 
  
조헌의 군사가 곧장 금산성 밖 1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결진(結陣)하고 관군을 기다리는데, 적이 후속부대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군사를 잠복시켜 후면을 끊은 뒤 군사를 총동원하여 나와 싸웠다. 조헌이 영(令)을 내리기를 “오늘은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니 하나의 의(義)자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하니, 군사들이 모두 따랐다. 한참 동안 힘을 다하여 싸웠는데 적이 세 번 진격했다가 세 번 패하였다. 그러나 조헌의 군사는 이미 화살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왜군은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여 마침내 장막 안까지 돌입하였다. 빨리 피하라는 부장들의 간절한 호소에 조헌은 말안장을 풀어 버렸다. 죽을 자리를 정한 것이다. 그는 “여기가 나의 순절(殉節)할 땅이다. 장부(丈夫)는 죽음이 있을 뿐 전쟁에 임해서 구차하게 모면하면 안 된다”고 말한 후 북을 울리며 싸움을 독려했다.

조헌의 군사들은 죽기를 작정하고 맨주먹으로 싸우면서 대열을 이탈하지 않았고, 단 한 사람도 요행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람이 없었다. 
  
조헌의 아들 조완기(趙完基)는 신체가 장대하고 성품과 도량 역시 절륜(絶倫)하였다. 군사가 패하게 되자 일부러 관복(冠服)을 화려하게 입었다.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고자 한 것이다. 이에 적(敵)이 그를 주장(主將)으로 오인하고 그 시체를 찢었다.
  
得失과 時勢를 좇아 살기를 거부
  
조헌의 삶에서 느껴지는 점은 무엇보다도 조헌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실천했다는 점이다. 그 실천을 위해 공주제독관이라는 높지 않은 감투도 너무 무거워 벗어 버렸다. 재산이 없어 상소를 올리기 위한 여비를 마련하기도 여의치 못해 관찰사를 통해 올렸던 조헌이었다. 스승과 벗을 위해 한 발언으로 붕당(朋黨)으로 몰렸다. 자신의 편을 유리하게 하고자 붕당을 하는 극렬분자로 비쳤다. 
  
필자는 조헌과 관계된 붕당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조헌이 득실(得失)과 시세(時勢)를 좇아 살지는 않았다는 점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조헌은 붕당으로부터 아무런 이득도 취하지 않았기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여기서 붕당 문제로 조헌으로부터 절교를 당한 이발(李潑)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이발은 조헌과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그런데 율곡 사후(死後) 이발이 율곡을 공격하였다. 조헌은 계속하여 이발을 설득하였으나 이발이 응하지 않자 마침내 그와 절교를 선언한다. 
  
그런데 정여립 사건이 터지면서 조헌은 귀양에서 풀려나고, 이발은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한다. 이발이 처형당한 후, 이발의 어머니 윤씨(尹氏)와 그의 아들들을 고문으로 죽였다. 이때 친구들 가운데 감히 돌보는 자가 없었다. 조헌은 이발의 가족이 추죄(追罪)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옥천(沃川)에서 술을 싸 들고 올라와서 잡혀 가는 이발의 어머니 윤씨에게 길거리에서 술을 올렸다.
  
이제 조헌의 삶과 짝이 될 만한 키워드를 찾아보자. 조헌은 700명의 의사(義士)들과 죽어 가는 자리에서 “대장부가 죽으면 그만이지 구차스럽게 살 수는 없다”면서 전사하였다. 조헌은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갔다. 그 어떠한 상황도 그를 구속하지 못했다.

권력도 금력(金力)도, 심지어 죽음조차도 그의 길을 막지 못했다. 조헌은 그저 주어진 상황에 맞게 자신의 길을 갈 뿐이었다. 이 길에 누구를 원망하거나 세월을 한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조헌에게서 ‘참 자유인’의 모습이 보인다. 필자가 닮고 싶은 점은 이러한 ‘참 자유인’의 모습이다. 
  
孟子의 大丈夫
  
여기서 조헌이 올린 상소를 다시 한번 살펴본다. “임금(聖主)은 저버릴 수 없고 스승과 벗(師友)은 버릴 수 없고, 하늘의 노여움은 소홀히 할 수 없고, 백성의 곤궁함은 보고만 있을 수 없고, 변경 근심은 잊을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조헌은 바로 이를 위해 자신의 삶을 살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삶을 버렸다.
  
필자가 생각하는 ‘참 자유인’을 조헌은 죽어 가는 자리에서 ‘대장부’라고 표현했다. 이제 대장부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대장부란 말은 맹자(孟子)가 사용하였다. 맹자가 말한 대장부는 다음과 같다 . 
  
<천하라는 넓은 집에 살면서, 천하의 올바른 위치에 자리를 잡고, 천하의 큰 도(道)를 행하는 자이다.

이러한 대장부는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같이 하고, 만약에 뜻을 얻지 못한다면 혼자서도 그 도를 홀로 행하는 자이다.

대장부는 나아가 아무리 부귀해도 결코 음란하지 않으며, 빈천해도 결코 절개를 변하지 않으며, 위세와 무력으로 협박해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자다.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與民由之, 不得志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조헌의 삶에서 느낀 점은 바로 맹자가 대장부를 설명하면서 말한 ‘뜻을 얻지 못한다면 혼자서도 그 도를 행하는(不得志獨行其道)’ 모습이었다. 조헌에게 크다(大)는 의미는 강함(强)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강함을 의식한다면 결코 의병을 일으킬 수 없었다. 또한 조헌에게 크다는 의미는 붕당과 같은 편협한 의론에 구애되는 것이라면 조헌은 결코 이발의 모친을 위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대학생들이 소중한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대학생뿐 아니라 이 나라 국민들은 자살(自殺) 선진국(?)으로 진입한 지 이미 오래다. 자살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로 진단하고 설명하고 그 처방책을 내고 있지만 어디 총장이 사퇴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식의 논의가 처방책이 될 수 있을까?

단지 오늘 내 삶을 잘살겠다는 즉, 대장부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굳은 의지만이 절실할 뿐이다. 어려운 시대 대장부가 없다고 아쉬워만 할 것인가. 우리 주위에 대장부는 항시 있다. 아니 그보다 먼저 왜 주위에서 대장부를 찾는가.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대장부 노릇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

 

崔鎭弘
⊙ 48세.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 박사.
⊙ 現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 저서 : 《법과 소통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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