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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게시판 스크랩 [성종실록] 1.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 결탁을 통한 왕위 계승
아모레퍼시픽 추천 0 조회 140 09.06.11 15: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예종은 불과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를 남긴 채 요절하고 말았다. 그런데 예종이 죽던 날 세조비 윤씨는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덕종)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조선 역사상 왕이 죽은 날 곧바로 다음 왕을 앉힌 예는 없었다.

그 때문에 조정 대신들은 논란을 일으켰으나 윤비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더구나 그녀 뒤에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권신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대신들이 미처 손쓸 틈도 주지 않고 조선 제9대 왕으로 13세의 자을산군(성종)이 결정되었다.

자을산군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데에는 정치적 내막이 깔려 있었다. 예종의 아들 제안군이 엄연히 존재했고 또한 자을산군의 형 월산군도 있었다. 제안군은 4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였기에 제외될 수도 있었겠지만, 16세였던 월산군을 배제한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조치였다.

월산군은 명실상부한 세조의 장손이었고 세조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었다. 때문에 제안군이 나이가 너무 어린 탓에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면 당연히 월산군이 왕위를 이어야 했다. 그런데 정희왕후 윤씨는 자을산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그런데 정희왕후 윤씨는 자을산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이는 왕위 세습의 관습에 비춰볼 때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정희왕후는 이에 대해 세조의 유명이라고 말했지만 설득력이 없었다. 그래서 늘어놓은 변명이 월산군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월산군의 건강이 특별히 나쁘다는 근거 역시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바로 정치적 결탁 이었다. 정희왕후와 정치적 결탁을 한 사람은 한명회였다. 한명회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동시에 바로 자을산군의 장인이기도 했다.

물론 신숙주, 구치관 등의 원상들도 이에 동조했을 것이다. 이는 정희왕후 입장에서도 크게 손해될 것이 없었다.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이 왕이 되었을 경우 그녀는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신하게 될 것이고, 또한 그것이 왕권을 안정시키는 길이기도 했다.

사실 예종이 병약한 몸으로 왕위를 오래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서부터 정희왕후는 왕권 찬탈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세조의 유명을 받든 한명회를 비롯한 원상들과의 결탁이었다.

이 결탁 과정에서 그녀의 생각은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한다는 것이었고, 한명회는 자을산군을 내세웠다. 논의 과정에서 정희왕후는 장손인 월산군을 지목했을 것이지만 한명회의 반대에 부딪쳐 자을산군으로 낙착을 보았다. 정회왕후와 권신들은 이러한 선택이 종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예종이 죽던 날 곧바로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왕실 세력의 중심이었던 구성군을 유배시켰다. 구성군은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아들로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세조는 그를 매우 총애하였으며, 이시애의 난이 발생하자 사도병마도총사로 임명했다.

구성군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와 오위도총부 총관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영의정으로 특서되었다. 이때 구성군의 나이 불과 28세이었다. 그러나 막상 예종이 죽자 그는 위협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장성하고 재질이 뛰어나며 인망이 있는 종친은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로 간주되었고, 섭정을 하고 있던 정희왕후와 원로 대신들 역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몹시 우려했다.

이런 상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대신, 대간들은 구성군을 집요하게 탄핵하기 시작했고, 1470년 (성종1년) 마침내 정희왕후는 그에게 유배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 10년 후 구성군은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이 사건은 성종 초의 왕권이 불안정하던 시기에 원로 대신들의 입김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이후 종친의 관료 등용은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경국대전> 완성 이후 이 법은 정착되었다. 말하자면 구성군 사건은 신권 견제를 위한 왕의 종친 중용 정책의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신권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어쨌든 왕권 안정을 위한 정희왕후의 정치적 결단은 성공을 거두었고, 한명회, 신숙주 등의 권신들은 세조 대부터 누려오던 자신들의 권세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월산군이나 제안대군 등은 정치적 결탁에 의한 희생자로 남아야 했다.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지은이 : 박영규, 들녁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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