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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0일 월요일(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제1독서 : 1요한 2,12-17
복 음 : 루카 2,36-40
그때에 36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루카 복음사가는 한나 예언자의 출신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루카 2,36)
아세르 지파는 구약성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거나 주목받는 지파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나는 ‘여자 예언자’였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볼 때, 출신으로나 성별로나 그리 주목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한나 예언자가 한 일에 주목합니다.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2,38)
여기서 ‘같은 때’는 시메온이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2,30-32)라고 하느님을 찬미한 순간입니다.
시메온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였다면,
한나 예언자는 시메온이 선포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모든 이에게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루카 복음사가는 이와 같은 한나의 역할도 시메온 못지않게 비중 있게 바라봅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은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나 예언자처럼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성탄 축제를 지내는 우리는 모두 한나 예언자처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웃에게 널리 알리는 매우 중요한 부르심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24년 파리올림픽 여자 공기 소총 10m에서
올림픽 역사상 대한민국 100번째 금메달을 거머쥔 반효진 선수가
자기 노트북에 붙여 놓은 쪽지가 화제였습니다.
‘어차피 이 세계 짱은 나다.’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사회심리학 이론 중에도 자기 충족적 예언이 큰 효과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특정 상황을 마음속에서 ‘실제’라고 결정해 버리면
그것에 맞게 자기 행동과 생각을 변화시켜
결국 원하는 결과를 이뤄낼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담도 기억납니다. ‘말이 씨가 된다.’
생각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데도 생각을 닫아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히려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생각만 하면서 자기 변화를 멈춰버립니다.
‘어차피 안 될 거야.’라면서 쉽게 포기합니다.
언젠가 방에서 나오지 않는 중학생을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방에서 나오지 않고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다면서
그 부모가 한 번 만나주길 원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학생은 사람 만나는 것도 힘들고,
이 세계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냥 가상의 세계에서의 삶만이 이 아이에게 행복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앞으로 엄청나게 많을 텐데 할 수 없다면서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이 들어서 이렇게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거 해 볼 걸….”
생각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이 힘을 키우는데 주님과의 대화는 결정적입니다.
사랑이신 주님은 생각 안에서 큰 힘을 주시며,
그 힘으로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후회를 줄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라는 예언자도 생각의 힘을 믿었던 분이었습니다.
주님을 뵙게 되리라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그 생각이 한두 해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여든네 살이 될 때까지
자기 생각이 이루어지길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즉각적인 결과만을 바라면서 쉽게 포기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포기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일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큰 기쁨과 함께 새로운 변화를 갖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태어난 지 40일 만에 아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됩니다.
이 봉헌은 예언자 시메온에 의해 거행되는데,
오늘 복음은 그때 성전에 있던 여 예언자 한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봉헌은 구약의 사무엘의 봉헌을 떠올려줍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남편 엘카나와 함께 실로의 성소에서
노사제 엘리를 통해, 아기를 주님께 봉헌했습니다(1사무 1,24-28).
그때에 엘리가 한나를 축복했듯이(1사무 2,20),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시메온도 마리아를 축복합니다(루카 2,34).
또 사무엘의 경우, 성소의 문에서 봉사하는 여자들이 언급된 것처럼(1사무 2,22),
예수님의 경우에서도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루카 2,37)
여 예언자 ‘한나’가 등장합니다.
‘한나’는 7년 동안을 남편과 함께 살고, 84세가 되도록 과부로 살았습니다.
마치 밤낮으로 하느님을 예배하고 지냈던 과부 유딧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이 봉헌될 때, 예언자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루카 2,39).
그녀는 ‘은혜’, ‘호의’라는 그의 이름의 의미대로, 하느님의 은혜와 호의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마치 시메온이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루카 2,25)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녀는 '예루살렘의 속량'(루카 2,38)을 기다려 온 까닭입니다.
‘한나’는 시메온처럼 아기가 ‘예루살렘을 속량’할 메시아임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사가는 그 감사 찬양의 노래를 전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한나’의 자리로 불러들이는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기 예수님께 직접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지어 부르도록 말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 “대체 참된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묻게 합니다.
코헬렛은 말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하느님을 경외함에 있다.”(3,14)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9,10)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대체 나는 ‘존경받기 위해 공부하는가? 존경하기 위해 공부하는가?’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영광을 드리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주님께 찬미의 노래를 불러드려야 할 일입니다.
‘한나’처럼 밤낮으로 기도하고 성전에 머물며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7)
주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과부의 마음속 말을 들으시듯,
미처 말이 되지 않는 제 마음 헤아려 들어 주소서.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면전에서 기도하게 하소서.
밤낮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에 감싸여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만으로 족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그러나 현실은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방황하고 걸려 넘어지며 은혜를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오늘을 감사하고 늘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하며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출신 '한나'라는 예언자를 생각합니다.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벌써 이름에서부터 행복을 누렸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누엘은 “하느님은 빛이시다”는 뜻입니다. 아세르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빛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으니,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이겠습니까?
그는 충만한 은총 안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름 자체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은총이 많아도 담을 그릇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나는 겉으로만 보면, 남편을 일찍 잃은 불행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루카2,37).
불행한 처지에 매여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처지를 하느님을 섬기는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남편이 있다면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찍 과부가 된 것은 불행이지만 온전히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음은 행복입니다.
한나가 행복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한나의 행복은 그의 처지나 형편에 따라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것을 추구함으로써 누리는 행복입니다.
주어진 현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를 생각할 때입니다.
주변의 환경이나 상황에 흔들림 없이 하늘을 향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왔다가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을 보았고
시메온이 예수님에 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루카2,33-35).
그리고 구원자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관해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늘 성전을 찾아 기도한 덕택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원한다면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체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께 마음을 둔다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사랑과 기쁨, 희망과 평화로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한나' 예언자가 하느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였듯이
모두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셔서 행복하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봄에 뉴욕에서 달라스로 왔습니다. 오니까, 교우들이 ‘창고’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창고 공사에 필요한 비용을 후원하고 떠나셨습니다.
매주 토요일 형제님들이 창고 공사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기초를 놓았고, 바닥, 벽, 지붕, 창문, 문, 전기 공사를 했습니다.
창고가 완성된 다음에는 청년들이 멋진 벽화로 마무리했습니다.
2월에 시작한 창고 공사는 7월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저도 매주 토요일 현장에서 형제님들과 함께했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선물한 것은 ‘창고’가 아니라,
창고 공사를 통해서 형제님들과 청년들을 선물했습니다.
지난 8일에 ‘사도회와 이냐시오회’의 송년 모임이 있었습니다.
사도회는 40대 형제님 모임이고, 이냐시오회는 50대 형제님 모임입니다.
모임 자리가 하나도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미 창고 공사를 통해서 얼굴과 이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형제님들이 제게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어떻게 사람들 이름을 잘 외우세요?’
제가 사람들 이름을 잘 외우는 이유는 가능하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자녀와 아버지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글을 쓰는 이유 3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겁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알았다는 겁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악을 이겼다는 겁니다. 그
리고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 팔일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은 친절하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탄을 지내면서 카드를 보내는 것도, 구유 경배를 하는 것도,
선물을 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성탄을 지내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묵상하는 것도 좋습니다.
오늘 독서는 신앙인들이 삶을 살아가야 할 방향과 목적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올해도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363일을 욕심과 욕망 때문에 채우려고만 했어도,
오늘과 내일 마음을 비우고 나누는 삶을 산다면, 베푸는 삶을 산다면, 기도의 삶을 산다면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한 해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나는 예수님을 만나고 축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세상의 분주함 속에서는,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만날 수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헤로데가 살았던 궁전에서는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과 규율에 얽매여서 살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을 찾았던 한나는 예수님을 보았고, 축복의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한나라는 과부의 기쁨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에서 기도하며 지내다가
하느님의 구원을 발견한 한나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여인이 과부라고 소개한다.
인생에 있어서 과부라고 하는 생애는 남편과 사별을 하고
외롭고 슬픔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편을 잃은 슬픔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비통에 빠지기 쉬운 경우라고 하겠다.
한나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뼈아픈 체험을 통하여
현세의 삶과 죽음의 허무함을 통감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더욱 의탁하는 경우이다.
현세에서 당하는 슬픔은 단지 이런 여인의 슬픔만이 아니라,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당하는 모든 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외면하게도 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어 그 뿌리를 튼튼하게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을 자기 생활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는 여인은 결혼한 후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 사람이었다.
84세에 이르도록 성전에 몸담아 하느님께 봉사와 기도로써 지내왔다.
이것은 하느님 공경에 참으로 정성스러운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그 할머니가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의 한나 할머니는 과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았고 충실히 믿었기 때문에,
또 하느님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분이시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안나 할머니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하였을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아기 예수님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다들 세상사나 자기 생각에 깊이 빠져 그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두 사람, 육화 강생하신 하느님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품에 안아보는 특전을 누린 예언자들이 있었으니, 시메온과 한나였습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세상 의롭고 독실했습니다.
언제나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성령께서 항상 그들 위에 머물러계셨으며, 성령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여 예언자 한나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 36-37)
보십시오. 한나 예언자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지복직관할 수 있었던 비결이
짧은 문장 안에 정확히 들어 있습니다.
이른 나이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큰 고통을 겪었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항상 하느님만 바라보며 신앙생활에 충실했습니다.
요즘 우리 가톨릭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7-80대 자매님들처럼
단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에 참석하며, 교회 일에 협조적이었습니다.
항상 묵주를 손에 놓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는데,
신명기에 따르면 아세르 지파는 모세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은 모범적인 지파였습니다.
“아들 가운데에서 가장 큰 복을 받은 아세르.
그는 형제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가 되어 발을 기름에 담그리라.
너의 빗장은 쇠와 구리 너는 한평생 평안하리라.”(신명 33, 24-25)
한나의 좋았던 시절 7년과 현재 나이 84세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설이 흥미롭습니다.
한나가 남편과 함께 산 7년 세월은 주님께서 육신으로 사셨던 시간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84세에 대해서는, 일곱에 열둘을 곱하면 84가 됩니다.
일곱은 또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전 과정을 나타낸답니다.
열둘은 열두 사도의 완전한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한나 예언자가 84세란 표현은
그녀가 삶의 전 과정을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히 살아온 신앙인이었음을 강조합니다.
결국 한나는 갖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84년 동안,
아니 평생토록 충만한 은총 속에 주님을 섬겨온 신앙인의 모델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한나 예언자처럼 불행한 여인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결혼 7년 만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참으로 많은 고생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가장 불행한 인생의 대표 격인 ‘청상과부’로 60년 이상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삶을 보십시오.
그 오랜 세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한평생에 걸친 기도의 결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큰 상급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바로 ‘지복직관’ 하느님의 얼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뵙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품에 안겨 계신 만왕의 왕,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품에 안아본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희망도 없던 좌절의 시대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노력은 기다리는 일이군요.
비록 단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의 나날이라 할지라도 그저 기다리는 일입니다.
꼬이고 꼬인 인생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풀 방법이 없어 보이는
실타래를 손에 들고 있다 할지라도 기다릴 일입니다.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어쩌면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고통의 정도가 극심하다면 그것은 어쩌면 고통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정말 너무너무 지루하다면 기다림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기다리다 보면 선하신 하느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우리 앞에 좋은 날을 펼쳐놓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내에 백배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한나 예언자에게 하신 그대로 말입니다.
기나긴 기다림의 성취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치러진 마리아의 정결예식과
아기 예수의 봉헌예식을 통한 예수의 公顯을 마무리하는 부분이다.
예언자 시메온에 이어 예언녀 한나가 등장한다.
남녀를 차례로 등장시키는 기법은 루카복음의 특징에 속한다.
특히 예수를 따라다니며 도왔던 여자들(8,1-3),
겨자씨의 비유에 이어 누룩의 비유에 등장하는 여자(13,18-21),
잃은 양의 비유에 이어 잃은 은전의 비유에 등장하는 여자(15,3-10)
마티아를 비롯한 12사도와 함께 있었던 마리아와 여인들(사도 1,13-14) 등의 대목이 그렇다.
예언녀 한나는 결혼한 지 7년 만에 남편을 잃고 84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에 몸담아 밤낮 없이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을 섬겨온 사람이다.
그녀의 나이가 84살인지 아니면 과부 생활이 84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성서 원문을 따른다면 한나는 과부로 84년을 살았다.
따라서 그녀의 나이는 구약에서 105살을 살았던 유딧처럼
대략 104-105살로 추정된다.(유딧 16,23 참조)
과부로서의 한나의 삶은 구차하고 가난하기가 이를 데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경건했을 것이다.
가난한 자가 하느님을 먼저 공경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한나는 오늘을 보기 위해 84년을 기다려 왔다.
R따라서 한나의 삶은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모범이다.
이스라엘의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임박한
메시아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던 자들이다.
한나는 이들을 대표하는 자로 묘사되며,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교적 과부들의
가난하고 경건한 삶을 이끌 수 있는 모범으로 제시된다.
그러한 그녀가 시메온의 팔에 안겨있는 아기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았고,
시메온의 예언을 밖으로 배달한다.
루카는 한나가 어떤 말로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도래를 알렸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그것은 시메온의 예언이 어떤 말을 덧붙일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를 두 팔에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 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었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기는 영광이 됩니다.”(루카 2,29-32)
예언녀 한나도 시메온처럼 평안히 눈 감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메온의 말씀과 메시아로서의 예수 아기에 관한 이야기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전해진다.
이 말은 예수의 탄생 사건이 그 자체로서 세상의 구원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탄생으로 말미암은 메시아의 현존에 대한 의식의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기 예수도 메시아로서의 자의식을 키워가야 하며,
동시에 세상 또한 메시아와 그 현존에 대한 인식과 의식이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예수도 세상도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 시간은 성령의 시간이다.
성령 하느님만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계시며,
성령 하느님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또 선포하는 일을 도와주실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는 공동체는 가난하고 경건한 예언녀 한나처럼
성령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구원의 날을 기다리며
이에 합당한 자신을 가꾸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