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심가(丹心歌)는 정몽주(鄭夢周)가 지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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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는 이방원의 집에서 나온 후, 바로 선죽교에서 살해된다.
이방원과 마주 앉아 주고 받은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는 어떻게 하여
오늘 날까지 전해지게 되었을까? 이방원이 메모라도 해 두었을까?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이 정몽주가 이런 시로 답을 해서 내가 죽였다고 발설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방원은 등신 중에도 팔불출이었을 것이다.
정몽주가 죽은 후, 모든 고서와 정몽주의 문집 "(포은집)"(조선에서 17번 간행)을
샅샅이 살펴도 하여가, 단심가는 없다고 한다.
정몽주가 죽은 후, 225년이 지난 광해군 때,
심광세(沈光世)가 지은 "해동악부(海東樂府)"에 처음 등장하며 이후 간행된 포은집에도 실린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가 배운 단심가는 정몽주가 지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설이 많다.
그 중 하나가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단심가는 정몽주가 지은 것이 아니다. 한주(韓珠)라는 여인이 지었다고 한다.
歷史 Essay - 안장왕과 한주의 사랑이야기 ① 행주산성
고구려 22대 안장왕(安臧王 位519-531)이 장수왕의 손자 문자왕(文咨王)의 태자 시절에
상인으로 변장하여 당시 백제 땅이던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잠입했다가 그 지역 세력가인
한씨 집에 머무는데 그 딸 한주(韓珠)가 절세의 미녀라, 부부의 인연을 맺은 후
나중에 고구려가 이 곳을 정벌할 때까지 기다리라 한 후 돌아갔다.
후에 행주 태수가 이쁜 건 알아가지고 그녀에게 청혼하지만, 한주는 옥중에서,
“이몸이 죽고 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라는 단심가(丹心歌)를 부르며 버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데 단심가가 정몽주(鄭夢周) 이전에
한주가 지었다는 이야기가 되니 놀랄 일이다.
歷史 Essay - 안장왕과 한주의 사랑이야기 ② 을밀대
안장왕과 한주의 사랑이야기 ② 을밀대
행주성(幸州城)에 갇힌 한주(韓珠)를 구출하면 상을 주겠다고 하자,
마침 안장왕(安臧王)의 미녀 동생 안학(安鶴)과 사랑하던 을밀(乙密)이라는 장수가
한주를 구출하면 공주와 결혼하게 해 달라 애원해 허락을 받았다.
왕의 대군은 외곽에서 대기하고 을밀은 광대패로 위장한 20명의 용사를 데리고
마침 행주 태수의 생일잔치에 잠입해 감추었던 무기로 감옥 속의 한주를 구출해 온다.
결국 안장왕과 한주, 그리고 을밀과 안학의 사랑은 결실을 맺는다.
지금도 평양(平壤)에 있는 궁전의 이름이 안학궁(安鶴宮)이고,
남편 을밀이, 뒤이은 내란 때 목숨바쳐 지켰다는 누대가 을밀대(乙密臺)가 되어
평양의 명소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