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niUXRKdpeZ0?si=gaS-bwW8z4DsdIEb
Charles Ives: Three Places in New England — NEC Philharmonia and Hugh Wolff
코네티컷(Connecticut)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에 있는 주. 롱아일랜드 만에 접해 있으며 서쪽으로 뉴욕 주, 북쪽으로 매사추세츠 주, 동쪽으로 로드아일랜드 주와 경계를 이룬다. 주도는 하트퍼드이며 미국에서 3번째로 작은 주이다.
원주민은 알공킨 인디언이었으며, 1630년대에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에서 온 청교도들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 1635년 하트퍼드·웨더즈필드·윈저·세이브룩 등 코네티컷 강 유역에 정착지들이 세워졌으며, 1638년에는 뉴헤이번 정착지가 세워졌다. 초기에는 농업 중심지였으나 19세기초에 섬유공장들이 들어서면서 1850년부터 제조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농업 인구보다 많아졌고, 그후로 제조업 중심지가 되었다. 지형에 따라 세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그 가운데 서부 고지대, 즉 버크셔 구릉지대가 주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며, 최고봉(725m)은 이 구릉지대의 북서쪽 가장자리에 있다. 중앙 저지대는 사암과 혈암으로 뒤덮인 단층분지로 작은 능선과 넓은 계곡이 많다. 서부 고지대와 마찬가지로 동부 고지대 역시 구릉지대이며, 많은 강이 흐른다. 기후는 온화한 편으로 1월평균기온은 약 -3℃이며, 여름평균기온은 21~24℃이다. 강우량은 월평균 75~100㎜로 연중 고르게 분포한다. 기후 변화가 심한 것이 특징이며 한파와 열파, 폭풍과 청명한 날씨가 1주 또는 하루 간격으로 반복된다.
최초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영국의 청교도들이었으나, 19세기에 유럽 남부와 동부로부터의 이민이 가속화되었다. 1900~70년에 인구성장률이 전국평균을 웃돌았으나 그후 10년 동안은 전국평균보다 크게 낮아졌다. 흑인은 7%에 불과하다. 주 대부분이 도시화되어 있지만 두드러진 대도시는 없으며, 도시의 인구집중현상도 찾아볼 수 없다.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으며, 농가수도 크게 줄고 있다. 그러나 낙농업은 여전히 중요하며, 자급용 야채가 재배되고 있다. 중요한 수출작물은 음지에서 재배되는 담배인데, 이 담배는 주로 엽궐련을 싸는 담배잎으로 사용된다. 굴 채취와 고래잡이가 상업적으로 중요한 유일한 어로활동이었는데, 고래잡이는 현재 사라졌다. 한때 성했던 탄광업은 크게 쇠퇴하여 이미 오래 전에 철광석 광산과 구리 광산이 모두 폐쇄되었으며, 모래·자갈·돌·장석·점토·운모 등이 지금까지도 채굴되고 있다. 원래 삼림자원이 풍부했으나 원시림은 모두 벌채되었으며, 주의 2/3가량을 덮고 있는 현재의 숲은 2차 혼합림이다. 제조업의 비중이 크며 제조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전체 노동력의 약 1/4을 차지한다. 코네티컷의 주요생산품은 수송장비, 특히 헬리콥터, 잠수함, 비행기 기관 등이며 총과 탄약도 생산한다.
뉴헤이번은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가장 큰 항구로 꼽히며, 산업 중심지로 성장한 스탐퍼드에는 미국 굴지의 기업들 가운데 몇 개의 본사가 있다. 미국 해안경비대사관학교가 뉴런던에 있으며, 여행자들로 늘 붐비는 보스턴-뉴욕 해안로에는 여러 철도와 고속도로가 지난다. 주간(州間) 고속도로는 인구밀도가 높은 해안지역과 코네티컷 강 유역을 지난다. 곳곳에 주립산림지와 주립공원이 있다. 주요 문화행사들은 흔히 연극과 관련되는데, 특히 스트랫퍼드에 있는 아메리카 셰익스피어 극장, 뉴헤이번에 있는 롱 와프 극장, 유명한 예일대학교 연극대학 등이 중요하다. 1701년에 세워진 유명한 예일대학교가 이곳에 있다. 면적 12,966㎢, 인구 3,405,565(2000).
아이브즈,찰스 에드워드(Charles Edward Ives 1874 댄버리, 코네티컷 주~1954 뉴욕)
미국의 작곡가. 그의 음악에는 어린 시절을 보낸 뉴잉글랜드의 미국적인 전원풍경과, 군악대의 일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 마을의 브라스밴드와 합창단을 이용하여, 연주 중에 음악집단을 겹쳐서 복합적이고 혼란스러운 리듬과 화성을 만드는 동시성 음악의 실험에 즐겨 몰두했다. 아이브즈가 흔들리고 움직이는 전체, 리듬이나 화음, 조성(調性)을 중복시키는 데 흥미를 가진 것도 그러한 시도를 통해서임에 틀림없다. 여기서의 불협화음은 전체적인 조화, 즉 깊은 통일감에 의해 해소되고 있다. 현대음악의 혁신을 예고하는 많은 새로운 서법(書法)이 혼잡하게 찰스 아이브즈에게 주어지고 있다. 다조성(多調性), 무조성(無調性), 음열기법, 미분음정(微分音程), 폴리리듬, 공간에 배치되는 공간 음악, 다양한 연주에 의한 가변적인 형식, 클러스터의 화음(동시에 울리는 소리의 고밀도적인 덩어리), 기존 음악의 콜라주나 인용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수법은 그의 음악에 있어서는 단지 개인적인 의미밖에 갖고 있지 못하며, 형식이나 양식의 가능성을 추구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아이브즈는 독립성을 지키는 방법을 스스로 알고 있어서, 작가로서의 그의 경력은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14세 때부터 고향 마을의 오르간 반주자가 되어 생활의 대부분을 교구의 음악가로서 활약하고, 파이프 오르간을 위해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1894년부터 1898년에 걸쳐서는 예일 대학에서 호레이쇼 파커에게 배웠다. 그러나 고전적인 교육은 그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고,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학업을 마친 뒤에 그는 실업계에 투신할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1899년 그는 줄리어스 마이릭 Julius Myrick과 함께 보험 대리점을 설립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자신이 보험회사의 경영 지침서를 집필하여 권위있는 책으로 인정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작곡도 계속하고 있었다. 그가 작곡한 대부분의 작품은 생전에는 연주되지 않았으며, 만년에야 겨우 음악적 가치를 인정받아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1908년에 하모니 트위첼 Harmony Twichel과 결혼하여 뉴욕으로 옮겨 살았으나, 주말과 휴가는 코네티컷에서 보냈다. 그가 의욕적으로 창작에 몰두한 기간은 20년이 채 안된다.
(1900~18). 1918년 그는 만년에 고통을 받게 되는 심장 발작에 걸리고 1930년에는 반신불수가 되자 사업에서 은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동시에 음악 창작활동도 중지하고 말았다. 활동을 하지 못한 나머지 25년의 여생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영광이 시작되는 시기가 되었다. 1929년 이후 시인인 헨리 벨라메인 Henry Bellamain이 그를 칭송하는 글을 써서 그의 음악 보급을 도왔다. 또한 작곡가 헨리 코웰, 피아니스트 존 커크패트릭 John Kirkpatrik도 그의 음악을 보급하는데 기여했다. 아이브즈는 미국 문예협회 회원으로 선출(1946)되었고 1947년에는 1901년부터 1904년에 걸쳐 작곡한 교향곡 제3번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1950년대에는 그의 음악이 호평을 받아 그때까지 연주되지 않았던 그의 많은 곡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54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는 위대한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찰스 아이브즈의 작품은 작품번호가 186에 이르며 그 중 100곡 이상이 가곡이다. 집중적인 창작기간에 구상된 이들 야심적인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걸렸다. 그의 초기 작품 중에서도 합창을 위한 시편 제67번(1894)은, 이미 리듬과 화성을 겹치는 수법을 사용한 동시성 음악의 예가 되었다. 교향곡이라는 쟝르는 그에게 환기력 있는 묘사와 몇 개의 프레스코화를 창조케 했다. 교향곡 제1번(1895~98), 교향곡 제2번(1897~1902), 그리고 후기의 작품에서 많이 볼수 있듯이 소년시절 뉴잉글랜드에서 자주 들은 찬송가를 곁들인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 제3번, 3개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 제4번(1910~16), 고향 시민의 축제와 종교적인 축제를 모티브로 한 축제 교향곡 Holidays Symphony(1904~13) 등이 그것이다. 유니버스 교향곡 Universe Symphony이라 불리는 교향곡 제5번(1911~16, 1927~28)은 미완성 작품이고, 크로마티멜로드튠 Chromatimelodtune이라 불리는 작품도 미완성이었으나 1967년에 작곡가 군터 슐러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들 색채감이 넘치는 대작-아이브즈는 야외의 축제를 상기시키는 금관악기의 음향을 좋아했다-외에, 아이브즈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짧고 조용한 고전적인 작품 몇 곡을 남겼다(2곡의 명상인 저녁의 센트럴 파크 Central Park in the Dark[1906]와 대답 없는 질문 The Unanswered Question[1906]과 같은 작품이 있다). 이밖에 묘사적인 작품인 뉴잉글랜드의 세 장소 Three Places in New England, 즉 관현악곡집 제1번 First Orchestral Set(1903~14)은 다른 많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작곡자의 역사적, 지리적 뿌리의 깊이를 말해 주고 있다. 아이브즈의 교향 작품으로는 그밖에도 교향악곡집 제2번(1909~15)과 로버트 브라우닝 서곡 Robert Browning Overture(1908~12)이 있다. 소편성을 위한 작품은 종종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보다도 실험적이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소리의 중복을 여기에 익숙하지 못한 청중에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관현악의 풍부한 울림이라는 구제수단이 없는 만큼 적어도 실험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가령, 베베른의 희박한 서법(書法)을 예고하는 듯한 톤 로드 ToneRoad(1911~15), 현악4중주와 피아노를 위한 가변적인 작품 할로윈 Hallowe'en(1906), 스케르쪼인 포장도로 위에서 Over the Pavements(1906~13), 연못 The Pond(1906), 무지개 Rainbow(1914),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4개의 소나타(1902~16), 2개의 현악4중주곡(1896, 1907~13), 피아노 3중주곡(1904~11), 2대의 4분음 피아노를 위한 4분음의 3개의 피아노곡 3 QuarterTones PianoPieces(1923~24) 등을 들 수 있다. 피아노를 위한 그의 수많은 작품 중 소나타 제1번(1901~09)을 비롯하여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ConcordMass. 또는 흔히 콩코드 소나타 Concord Sonata라 부르는 대작 소나타 제2번(1911~15)이 대표작이다. 이 소나타 제2번은 콩코드 마을에서 살면서 알게 된 초월주의자인 철학자나 작가, 에머슨, 호손, 올코트가의 사람들, 소로 등에 대한 헌정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 그는 해설과 주석을 위해 소나타 앞의 에세이 Essay before a Sonata라는 한 권의 책을 썼는데, 이것은 그의 사상과 착상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아이브즈는 모방이나 이미지의 환기를 지체없이 실행에 옮겼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의 창조는 세계, 사회, 그리고 자기 자신의 근원이 되는 것을 꾸밈없이 드러내는 일이었다. 직업과 창작활동을 분리한다는 당초의 선택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일상과 예술적 착상 사이의 단절 및 딜레마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분열하고 세분화된 현대 음악 속에서 아이브즈의 경우를 매력적으로 만든 것은, 부조화를 감수하고 화해시켜 나가는 이 낙관주의인 것이다. 아이브즈에게 있어서 혁신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새로운 원리에 음악의 언설(言說)을 묶어 놓고, 그것을 억제해 버리겠다고 하는 욕망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혁신이란, 파괴적인 무정부 상태로서가 아니라 생명의 원천으로서 자연의 무질서한 상태를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음악은 원심적인 것이지 구심적인 것은 아니며, 수법에 구애받아 자신을 폐쇄하는 것도 아니다. 또 그의 음악에 대해 다조성(多調性)이나 폴리리듬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도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브즈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개개의 음악적인 요점이 아니라 자율성과 형식의 과정, 음악적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다음악(多音樂)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 소리를 겹친다는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 없이, 그 한가운데서 공기와 우연성을 순환시키는 것이다(그러기에 존 케이지와 같은 사람이 찰스 아이브즈에게 애착을 느끼는 것 같다).
동시에, 그의 음악과 아주 친한 콜라주의 미학(그는 많은 작품 속에 찬송가나 민요의 한 절, 또는 군대의 음악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도 긴장감이나 문화적인 아이러니같은 성격은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태어난 고향과 어린 시절의 체험의 연상에 위치한 그의 작품은 모두, 그 안에 매우 자연스럽게 음악적인 추억을 포함하고 있다. 이 혁신적인 음악가가 그의 유년시절과 아버지의 모습 또는 이 연장선상에 있는 몇몇 모범이 되는 사람, 예컨대 랠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82)이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62) 같은 뛰어난 인물들, 즉 대지와 자연의 연속성 및 융합을 제창한 평화주의자들에게 가장 집착해 있던 사람이라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찰스 아이브즈의 음악작품은 전형적으로 미국적이라 할 수 있으며, 양식의 통합과 동질화 작용에 의한 소화 및 동화를 거부하고, 이질적인 인상과 영향의 혼합으로 존재한다. 1970년대에 이르러 이와 같은 작품을 유럽에서 볼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의 작품이 서법상의 대담성에 있어서 예언적이었다기보다는(지금은 이미 감명을 주지 못하고 있으나) 오히려 그의 놀라운 존재의 자유성, 세계와 사회에 대한 공감, 낙천적인 생활방식, 그가 쉽게 다원성을 소화하여 이질적인 것, 조화되지 않은 것을 통합해 버린 것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글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nGPRk1-L5yc?si=jFMqP19q0pKMU_O8
Ives "Three Places in New England" - Boulez / Cleveland Orchestra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