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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외 9편
우리가 세운 세상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 몰랐다
찬장의 그릇들이 이리저리 쏠리며 비명을 지르고
전등이 불빛과 함께 휘청거릴 때도
이렇게 순식간에 지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줄 몰랐다
우리가 지은 집 우리가 세운 마을도
유리잔처럼 산산조각 났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고 폐허만이 곁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황망함 속에서 아직 우리 몇은 살아남았다
여진이 몇 차례 더 계곡과 강물을 흔들고 갔지만
먼지를 털고 일어서야 한다
사랑하는 이의 무덤에 새 풀이 돋기 전에
벽돌을 찍고 사원을 세우고 아이들을 씻겨야 한다
종을 울려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숲과 새와 짐승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좀 더 높은 언덕에 올라 폐허를 차분히 살피고
우리의 손으로 도시를 다시 세워야 한다
노천 물이 끓으며 보내던 경고의 소리
아래로부터 옛 성곽을 기울게 하던 미세한 진동
과거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모두 배워야 한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그만 하기로 하자
충격과 지진은 언제든 다시 밀려올 수 있고
우리도 전능한 인간은 아니지만
더 튼튼한 뼈대를 세워야 한다
남아 있는 폐허의 가장자리에 삽질을 해야 한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로 등을 밝히고
떨리는 손을 모두어 힘차게 못질을 해야 한다
세상은 지진으로 영원히 멈추지 않으므로
별 하나
흐린 차창 밖으로 별 하나가 따라온다
참 오래되었다 저 별이 내 주위를 맴도는 지
돌아보면 문득 저 별이 있다
내가 별을 떠날 때가 있어도
별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 별처럼 있고 싶다
상처받고 돌아오는 밤길
돌아보면 문득 거기 있는 별 하나
괜찮다고 나는 네 편이라고
이마를 씻어주는 별 하나
이만치의 거리에서 손 흔들어주는
따뜻한 눈빛으로 있고 싶다
스물 몇 살의 겨울
나는 바람이 좋다고 했고 너는 에디트피아프가 좋다고 했다 나는 억새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늦가을 강가로 가자고 했고 너는 바이올린소리 옆에 있자고 했다 비루하고 저주 받은 내 운명 때문에 밤은 깊어 가고 너는 그 어둠을 목도리처럼 칭칭 감고 내 그림자 옆에 붙어 서 있었다
너는 카바이트 불빛 아래 불행한 가계를 내려놓고 싶어 했고 나는 독한 술을 마셨다 너는 올해도 또 낙엽이 진다고 했고 나는 밤하늘의 별을 발로 걷어찼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 너는 왜 나를 만났던 것일까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우리는 왜 헤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사랑보다 더 지독한 형벌은 없어서 낡은 소파에서 너는 새우잠을 자고 나는 딱딱하게 굳은 붓끝을 물에 적시며 울었다 내가 너를 버리려 해도 가난처럼 너는 나를 떠나지 않았고 네가 절망의 영토를 떠났다고 해서 절망이 너를 떠나지 않는 것인 줄 그때는 몰랐다 서른을 넘기고도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 수 있을지 막막한 겨울이었다
이제 너는 없고 나만 남아 견디는 욕된 날들 가을은 해마다 찾아와 나를 후려치고 그럴 때면 첫눈이 오기 전에 죽고 싶었다 나는 노을이 좋다고 했고 너는 목탄화가 좋다고 했다 나는 내 울음으로 피리를 불고 싶다고 했고 너는 따뜻한 살 속에 시린 손을 넣고 싶다고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밤은 찾아오고 오늘도 운명처럼 바람은 부는데 왜 어디에도 없는가, 너는
황홀한 결별
이 세상에서 가장 샛노란 잎 한 장씩 내려 지붕의 반쪽을 덮고 나머지 반은 당신 가실 길에 깔아놓고 있는 은행나무를 향해 누가 바이올린 소리를 들려주면 좋겠어요 은행잎이 떨어지면서 긋는 음표의 곡선들을 모아 오선지에 오려 붙이며 당신을 생각했지요 가장 황홀할 때 결별하는 은행나무 밑에서 이 음악이 완성되면 어긋나는 우리의 운명도 아름다운 풍경이 될 것 같아서요
떡갈나무 잎 떨어져 날리는 동안 바람은 몸을 부벼 첼로의 낮은 음을 만들고 나는 그 소리에 내 비애의 키를 한 옥타브 내려 맞추었어요 내 슬픔은 비명소리보다 낮은 음에 더 잘 어울리거든요
오늘은 내 슬픔보다 더 많은 산벚나무 팽나무 갈참나무 작은 잎들이 결별하는 날 오후 내내 리끼다소나무 잎들이 금빛 실비를 지상에 뿌리며 흐느껴 우는 날 나는 비처럼 내리는 초독楚毒을 향해 은빛 금관악기를 불었어요 내 어깨 내 손등을 바늘 끝으로 찌르며 쏟아지는 아픈 모음들
그러나 나는 파멸보다 먼저 가을이 찾아오고 노을이 아직도 내 한쪽을 불태우고 있을 때 이 산의 나무들과 내게 이별이 찾아온 걸 고맙게 생각했어요 이렇게 서서 이별의 끝을 향해 걸어가는 그대를 향해 경배하는 오늘은 이 산의 모든 나무들이 나뭇잎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날
빙하기
벌목을 하다 잠시 쉴 때면 자작나무에 등을 기댄 채 떨어진 자작나무 껍질 주워 편지를 쓰곤 했다 자작나무 껍질은 희고 얇아서 마음의 몇 조각을 옮겨 적기 알맞았다 백 년에 이 백 여 리씩 녹으며 후진하는 빙하가 남긴 영토를 따라 우리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야크와 순록과 여우가 먼저 올라갔고 늑대의 발자국을 따라 우리가 그 뒤를 따랐다
빙하기로부터 시작한 내 어린 날의 결빙이 언제 풀어질지 그때는 짐작할 수 없었다 월세 이천 원짜리 쪽방에 기거하는 동안 연탄불이 자주 꺼졌다 손도끼로 침엽수 도막을 잘게 부수어 십구공탄에 불을 붙이는 동안 삶은 매캐했고 문짝도 없는 부엌에서부터 일찍 어두워졌다 내가 눕는 윗목에는 그릇의 물이 바로바로 얼었고 내 몸도 밤새 달그락거렸다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 나는 말이 없었고 한 마을에 사는 친구와도 졸업 때까지 두세 마디 짧은 말 밖에 주고받지 않았다 말을 할 때도 눈을 내리깔거나 시선을 피하는 것은 영하의 숲에 사는 이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추위는 사람을 느리지만 끈질기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흑야는 길었고 일찍 진 해는 늦게 떠올랐다 수렵을 그만 둔 아버지도 정착할 곳을 정하지 못한 나도 각각 우울하였다 보드카는 추위를 이기기에 좋았다 고독한 늑대 한 마리 멀리서 측은하게 나를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때 고독한 것들에게 보낸 자작나무 엽서는 어느 숲과 바람 속을 떠돌고 있을까 생각하는 저녁이면 어둠과 칼바람이 친구처럼 찾아와 오래 곁에 머물곤 했다
채송화
송악초등학교 담 옆 채송화 연노랑 꽃잎 속으로 작은 벌 한 마리가 붕붕거리며 날아들어 갑니다. 탱탱한 날갯짓 소리가 몸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채송화는 얼마나 가슴이 콩당거렸을까요? 이제 겨우 봄 여름을 건너왔을 뿐인 여린 이 꽃은 사람으로 치면 몇 살쯤 되는 소녀일까요? 채송화가 꽃잎을 조금 오므린 채 몸을 옆으로 돌리고 있는 동안 뾰족하게 달아오른 입술로 가장 황홀한 향기의 중심을 열고 있는 어린 호박벌 솜털이 보송송한 채로 날개 떠는 소리가 이제 막 변성기를 지나는 중인 이 소년은 언제 연애처럼 떨리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임을 배웠을까요?
노루잠
노루잠이 들었다 깨니 저녁이었다 추녀 밑에서 흐린 물감을 풀어 천천히 하늘을 손질하며 오늘 하루도 문 닫을 채비를 하는 게 보였다 추근덕대며 나를 따라다니던 비루한 욕망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몸도 자주 피곤하였다 그 비루함으로 어떤 때는 발걸음에 힘이 들어가고 옆 의자에 앉은 이가 예뻐 보이기도 한다는, 이 부인할 수 없는 목소리를 어떤 날은 내치고 어떤 날은 은근히 기다리며 구두 끝에 묻은 흙을 털기도 하다가 어느새 동무가 되었다
쪽잠이 든 사이 낮술에 취한 듯한 시간이 가고 그도 다른 일거리를 찾아 슬그머니 나를 빠져나가고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다 저녁 무렵 혼자되니 이것도 참 좋다 가만히 있는 허술한 몸을 바람이 발길로 툭툭 건드려 보다가 간다
후궁
교태전에서도 멀리 떨어진 뒷방에는 햇볕도 잠깐 머물다 간다 잊혀지는 것의 불편함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동안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사랑이 아니었다 천천히 존재의 그림자를 지우며 지나가는 시간 권력의 총애가 권력을 위한 것이었음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랑은 짧고 잊혀지는 고통은 길었지만 그보다 더 비극적인 건 오늘도 안지밀을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인편에 건너오는 서찰의 봉투를 뜯으면 지로용지나 회원배가운동 서한만 들어 있을 뿐 중심에 있던 날들은 지나간 지 오래 되었다 노론도 남인의 편도 못되었던 그녀 희빈이나 귀인도 못 된 채 잊혀져 가는 그녀
금빛 하늘
하루치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가던 신들이
고개를 돌려 아침에 떠나온 곳을 돌아보는 동안
솟대 끝에 앉은 나무새들도 그 모습을 바라보다
엉덩이 쪽을 꼼지락거린다
빛이 숲을 주재하던 시대는 곧 잊혀지고
다시 어둠이 올 것이다
주류와 자주 불화하던 나도
나무기러기가 보고 있던 금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안에 각자 자기 영토를 세운 부족들과
어떤 시간은 충돌하고 어떤 영역에선 휴전하면서
오늘도 하루치의 벌판을 지나왔다
내가 그러건 말건 말벌들은 열심히 집을 지었고
무쇠로 된 바퀴를 가진 것들은 제 궤도를 돌았다
여름에 거두지 않은 열매들은 혼자 익었다가
얼굴을 붉히며 돌아가고
가을이 오기 전에 어떤 잎은 몸을 버리고
어떤 녹색의 관엽들은 상처를 안은 채 몸을 비틀었다
우리끼리 주고받은 상처가 많아서
잘 치유되지 않는 날이 더 아팠다
나도 비주류에서도 다시 이류가 될 줄은 몰랐다
이제 강을 사이에 둔 내 안의 여러 부족들 중
한 무리가 모든 영토를 점령하고 쓸어버려야 한다는
집념을 버려야겠다
경계가 있어서 긴장도 있고
피톨들도 팽팽해지곤 할 것이다
길이 내 앞에서 몸을 틀어 꼬리를 흔들며 사라지는 걸
망연히 바라보아야 하는 날도 있었으나
언젠가는 다시 그 길과 조우하는 날이 올 것이다
신들이 마시다 남기고 간 하늘의 포도주를 마시며
나도 그들이 바라보던 쪽을 오래 쳐다보고 있다
그해 여름
숲의 나무들은 진종일 허리를 구부리고 울었다
여기저기서 나뭇잎이 얼굴과 등짝을 번갈아 뒤집으며
몸부림치거나 옆의 나무 허리를 붙잡고 소리 없이 울었다
스크럼을 짜고 우는 나무들도 있었다
산의 갈비뼈를 흔들던 흐느낌은 산맥을 타고 오르기도 했다
나라에 큰 슬픔이 있던 초여름이었다
연초부터 벼랑으로 몰린 사람들이
망루를 오르다 불에 타 죽고
죽은 몸은 다시 냉동되어 여름까지도
망각의 상자 속에 갇혀 이승에 방치 되어 있었고
경찰과 깡패가 한 개의 방패 뒤에 저희
그림자를 가리고 발맞추어 지나가고 나면
신문은 무기가 된 활자의 볼트와 너트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마구 던졌다
검게 그을린 영혼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하던
신부는 용역들에게 맞아 성체와 함께 나뒹굴었고
신부님이 두들겨 맞았다는 말에
어머니는 묵주
를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수백의 시인들이 다시 조시를 쓴다는 말이 들려왔다
부러진 칼을 필통에서 꺼내 연필을 깎으며 나도
흐느껴 우는 나무들에게 몇 줄 편지라도 쓰고 싶었다
슬픔이 장마처럼 하늘을 덮었다
하늬바람에 밀려갔다 하는 어느 오후
국정원 직원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내 이름도 압핀에 꽂혀 자기들 일정표 모서리에
걸려 있다고 말했다
슬퍼하는 이는 넘쳐났으나
잘못했다고 말하는 이는 없이 여름이 지나가고
숲의 나무들만 여러 날씩 몸부림치며 울었다
어제는 뒷마당에서 청죽 몇 그루가 허리를 꺾고 쓰러지고
차벽을 가운데 두고 무거운 구름과 뜨거운 바람이
대치하는 동안 비는 오르고 내리는 길마다 쏟아졌다
곳곳에서 길이 끊어지거나 후퇴하는 여름이었다
첫댓글 멋진 작품입니다.
문학의 산이 저렇게 높고 골짜기가 이렇게 깊은 줄 몰랐습니다.
우리나라 문학계 대표주자이신 도종환 선생님 숨결을 진하게 느껴 행복합니다.
앞뒤에서 조용히 큰 힘 되어주시는
박영우 대표님 박연숙 선생님 우리들의 진정한 버팀목이십니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문학계의 지킴이십니다.
감상 잘 했습니다. 며칠전 서점에서 도
환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발길이 멈췄었는데...아마도 윤동주문학상을 예고하기라도 하듯 기운이 미리 예감된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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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視野 -
끝간데 없음으로,,ㅎ 도 시인이 보입니다. 이 후 작품두 기다려져,,욤.
깊고 넓은 시심의 마당을 심중에 가꾸어주시는 도종환시인님의 수상을 축하드리며 윤동주시인의 울타리안에 함께 하는 영광에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