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 피천득 -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있는 비취가락이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서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피천득 수필가, 1910-2007)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 실료애정통고 -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피천득이 오월이라는 시를 써서 신록을 예찬하고 있다.
스물한 살의 나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ㅡㅡ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은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작가, 수필가. 대표작으로는 인연, 은전 한 닢 등이 있다.
생애 1910년, 한성부 종로(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아버지 피원근(皮元根)과 어머니 김수성(金守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홍천이며, 호는 금아(琴兒)이다. 부친은 서울 종각에서 종로5가 땅까지, 강남에서는 양재동 땅에 이르기까지 소유한 유명한 부호였다.
6살 무렵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는 일본인 대신이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피천득이 10살이던 1920년에는 모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뜨자, 9삼촌 집에서 자랐다.
그의 호인 '금아'(琴兒)는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으로, 서화(書畵)와 음악에 능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춘원 이광수가 붙여준 호이다.
서울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도중 1926년 중국 상하이로 유학을 떠나 1929년부터 상하이 후장대학(滬江大學, 호강대학)[2]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후 1937년 졸업 때까지 국내를 여러번 오가며 많은 문인,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았고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을 발표하며 등단하게 된다.
1937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미국계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社의 직원으로 근무하였다가 서울에서 교원생활을 하며 영문학 연구와 시 창작에 매진하던 중 1945년 경성대학 예과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이후 1946년 이름이 바뀐 서울대학교에서 1974년까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4년엔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약 1년간 영문학 연구를 하기도 했다. 강원도 춘천시의 성심여자대학교에 출강하기도 했다.
교수직을 그만둔 뒤에는 장기간의 미국 여행을 다녀왔으며, 그 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다가 2007년 5월 25일 향년 97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작품에 대한 평가 피천득 선생의 문학적 시작은 영문학, 시(詩)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교과서에 피천득 선생의 수필이 많이 실린 영향인지, 요즘 세대에게 피천득 선생은 수필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교과서에 실린 또는 실렸던 그의 수필 목록은 다음과 같다. 나의 사랑하는 생활 인연(수필) 수필 은전 한 닢 플루트 플레이어
일화 사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었음에도 피천득 선생은 다른 문학가들에 비하면 다소 조용히 살아온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의 수필 인연에서는 그가 살아오면서 겪은 고난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으며 그의 지인들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있다.
일화 인연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알아주는 딸내미바보이다. 그래서 그가 아들 둘이 더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선생의 아들이 자신을 피천득의 아들이라고 하면 십중팔구 '피천득 선생님에게 아들도 있었어요?'라고 물어보았다고 했을정도다.
딸사랑이 지극하기로 소문난 선생은,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소문난 딸 서영을 두고 당시 이화여자고등학교와 경기여자고등학교가 각축전을 벌이자 수업일수 중 3분의 1을 결석해도 좋다는 조건으로 이화여고로 진학시켰다. 비가 오거나 조금이라도 아픈 날이면 무조건 결석(…). 대신 서울대 영문과 교수였던 아버지의 1:1 가르침을 받았다.
서영은 잦은 결석으로 인해 내신성적은 비교적 좋지 않았지만, 모의고사에서는 눈에 띄는 두각을 보였다. 결국 서울대로 진학했고 지금도 물리학자로서 훌륭히 활동하고 있는 걸 보면 피천득 선생의 교육 방식이 남달랐던 듯. 딸에게 퀴리 부인, 아인슈타인을 멘토로 삼을 것을 권한 것도 피천득 선생.
가족
그의 수필집을 보면 가족에 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가족들 또한 선생만큼이나 각자의 영역에서 큰 활약을 하고 있다. 다음 항목은 선생의 가족 중 유명인사에 대한 것.
피서영(皮瑞英) :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에서 자주 언급되는 막내딸로 수필 <서영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서울대에서 물리학을 전공[6]한 후, 미국 뉴욕 주립대 스토니브룩 캠퍼스로 유학을 가 현재는 보스턴 대학교 물리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유학 시절에 이휘소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또한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브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스테판 재키브(Stefan Pi Jackiw) : 피천득 선생의 외손자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인 아버지 로먼 재키브(Roman Jackiw)와 보스턴대 물리학 교수인 피서영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인기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더 나아가 앙상블 디토(Ensemble DITTO)에 소속되어 있다. 12세 때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데뷔했으며, 이후 에이버리 피셔 상을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며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참고로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학사 출신.
피세영(皮世英) : 피천득 선생의 장남.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한 후, 60~70년대에 연극배우, 탤런트, 성우, 라디오 DJ 로 다양한 활약을 펼쳤다. 은퇴 후 30여년간 캐나다에서 치과 기공소를 운영하다, 2011년 7월경에 귀국하여 경북 문경시에 수목원을 짓고 있다. 귀국은 부친의 생전 뜻이기도 했다고 한다.
피수영(皮守英) : 피천득 선생의 차남. 서울대에서 의학을 전공한 후, 미네소타 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 교수, 서울아산병원 소아과 과장 및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 교수를 역임하였고, 퇴임 후 현재는 하나로의료재단 경영고문으로 있다. 「피가지변」이라는 수필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우리 아이는 옥관자는 못 달더라도 우간다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 올 것이다'가 피수영 씨를 가리킨 부분이다
-옮긴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