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 도자경판을 조성하고 삼천불상을 직접 도자로 구워 봉안하는 등 20년 이상 도자기를 굽는가하면 법당에 둘러앉을 방석을 직접 만들고, 딱풀을 만들어 선방에 깔기도 했다. 4~5만평 개간터에 감나무를 심고 천연 암반수를 개발하여 된장과 고추장을 만들어 승속에 공양을 베푼다.
쪽물을 들여 옷을 염색하고 21년간 시조상을 제정해 시조의 계승과 발전에 공헌하는 시조시인이며 최근에는 북경으로 가 중국의 유명화가에게서 그림수련을 했다 한 가지도 하기 힘든 일을 혼자서 그 모든 일을 다해낸다면? 어슬픈 흉내가 아니라 하는 일 마다 최고가 된다면? 도저히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그 사람은 질투와 존경을 한 몸에 받을 것이다.
통도사 서운암 성파스님이 그 주인공이다. 그런데 성파스님이 그 많은 일을 거뜬히 해낸다 할지라도 수행과 연관이 없다면 단지 재주꾼에 머물렀을 것이다. 스님은 서운암에 무위선원을 열어 수좌들과 함께 참선 정진하는 공부인을 그 본분으로 삼는다. 다른 일은 모두 수행의 방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님을 시인이나 화가 혹은 도예가로 부르지 않고 수행자라고 한다. 스님은 왜 그 많은 일을 하는지, 도대체 어느 것이 스님의 본 모습인지, 명성으로만 듣던 스님을 직접 만나 뵙고 여쭙기로 했다. 다루는 분야가 많은 만큼 이야기도 많을 터. 미리 질문을 드렸다.
지난 13일(2013년도) 서운암에는 감이 익고 있었다. 코스모스가 한들 한들 춤추는 사이로 그 유명한 서운암 된장독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감나무 밭을 지난 언덕 위에는 대형불사가 한창이다. 팔만대장경 도자경판을 조성할 장경각 공사다. 스님은 질문지를 보지 못했다고 하셨다. 질문은 그 많은 일을 하게된 계기와 과정 그리고 수행과의 연관성 등을 묻는 것으로 시작하기로 돼 있었다. 그리고 참선공부에 관한 몇가지 내용 등. 하지만 첫 질문에서 스님은 그 모든 궁금점을 회통(會通)해 버렸다. 스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런 것이었다.
수 많은 미립자들로 구성된 흙은 황하수 모래만큼 많은 번뇌와 같다. 흙에 물을 부어 한 덩어리로 만드는 것을 도예에서는 성형(成形)이라고 하는데 화두선에서 화두를 통해 의심을 하나로 만드는 과정 즉 의단(疑團)과 같다.
이는 만법(萬法)이 일법(一法)으로 귀결되는 원리(萬法歸一)다. 제 모양을 갖춘 도자는 불 속에 들어가 고열처리 과정을 거친 뒤 도자기로 태어난다. 즉 자기를 태워 없앤뒤 옥으로 다시 태어난다(以土爲玉). 이는 그 이전 과정과는 전혀 다른 ‘성질’이다. 불에 태우는 과정은 선에서는 치열한 정진에 해당한다. 흙이 옥이 되는 것은 곧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중생이 자기를 태우는 과정은 목숨을 건 수행이며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딛는 것이다. 하지만 옥의 성질은 흙이듯 중생이 곧 부처다.
흙은 번뇌요 가마 속은 정진이라 자기를 태워 옥으로 태어남이여
스님은 말했다. “진흙이 흙이 되는 과정이 도자기다. 진흙은 물들지만 백옥은 진흙 속에 던져 놓더라도 물들지 않고 색이 바래지 않는다. 이를 성불이라고 한다. 용광로를 거치기 전은 중생이요, 거치고 나면 부처다. 그래서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더 이상의 이야기나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스님은 손에 주장자를 들었던 흙을 묻혔든 아니면 호미를 들고 밭을 맸던 상황이나 공간에 상관없이 늘 한가지만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일 뿐. 스님은 흙을 빚고 불을 지피면서도 늘 수행자였다. 용광로의 불빛 속에서도, 그릇을 만드는 물레질을 하면서도 늘 화두일념이었다. 그런데도 우매한 중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웃고 운다. 하나 하나 짚어가며 설명하지 않으면 도대체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느냐고 역정을 낸다.
기자가 꼭 그 꼴이다. 스님이 한가지 설명을 해주자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그러니까 수행이란 자기부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라며 반색을 했다. 스님은 연민을 가득 담은 눈을 하면서도 예의 웃음을 거두지 않고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무슨 해석을 하든 어떻게 받아 들이든 그건 기자님 자유고….”
부처님도 말씀 하셨다. 당신이 보시기에 세상이 그렇더라고.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열매맺고 가을이면 수확하더라.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더라. 그걸 꼭 말해줘야 아는가. 그래서 스님도 말씀하셨다. “부처님이나 조사님들이 말은 하지만 답답해서 하는 것이지. 비유도 드는 것이고.”
답답하기는 스님이나 기자나 마찬가지다. “이왕 시작하신 것 우매한 중생을 위해 하나 더 들어주시죠.” 이번에는 밤나무 이야기를 꺼내셨다.
“밤나무를 겨울에 처음 본 아이들은 밤이 다시 열릴 거라고 믿지 않아. 그런데 한번이라도 사계절 순환을 본 사람은 봄에 꽃만 피어도 알지, 저기에 밤이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과 안한 사람은 그렇게 달라.” 스님의 밤나무 비유는 계속됐다.
이번에는 수행과 성불에 대한 비유를 들었다.
“알밤이 열매를 맺기전 비 바람을 견디지 못하면 떨어져 썩게돼. 열매를 맺지 못하고 떨어지면 그걸로 끝나. 싹을 못 틔우게 되지.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비 바람을 이겨내고 성과(成果)를 맺게되면, 즉 알밤이 되고 나면 밤술도 껍질도 필요없어져. 오히려 거추장스럽지. 그래서 저절로 밤송이에서 분리돼 나오잖아. 과(果)를 증득한 것이지. 과를 증득하기 전에는 어떻게 해서든 밤송이에 꼭 붙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곧 수행의 과정이야. 열매를 맺고 나면 무애(無碍)인 것이지. 열매를 맺은 뒤 떨어지는 것을 백척간두 진일보에 비유할 수 있어.
천길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는 현애살수(縣崖撒手)할 때 비로소 성불의 길에 들어서는 거야.”
스님의 설법은 거침없었고 도무지 막힘이 없었다, 비유는 머리에 쏙쏙 박힐 정도로 간결하고도 분명했다. ‘토불은 물을 지나지 못하고 [土佛不渡水], 금불은 불을 지나지 못한다 [金佛不渡火]. 내가 토불인데도 물을 건너가다 빠지고, 내가 금불인줄 알면서도 불을 건너다 사라진다.'
첫댓글 저희도 어머님 모시고 2년전에 서운암 도자경판 친견하고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
기술자과 수행인,,,나무아미타불...()()()...고맙습니다...
통도사 서운암은 장독으로 유명하고 도자기를 굽어서 경판을 조성한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열의와 불심을 가슴에 담고 왔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