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꽃
앵두꽃이 바람에 머리를 푼다. 그리 크지 않은 앵두나무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멀리서 보면 헝클어진 머리처럼 무더기로 피어 있고
가깝게 보면 꽃잎이 활짝 펴지못하고 울고 있는 듯하다. 여린 잎과 꽃이
피어 화려함도 없다. 꽃잎이 지는 모르고 있다가 어느날 문득 가슴을 놀라게
하는 앵두빛 얼굴들이 한가지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꽃이 지고 난 뒤 한달 만에 열렬한 잎술을 달아놓는다. 우리의 사랑도 앵두꽃과
열매처럼 가깝게 손을 잡고 싶어진다. 저녁 내내 땅속 깊은 곳에서 그리움의
에너지를 끌어 올려 한낮에 꽃이 된 향기는 땅끝과 하늘끝의 경계가 되어 시간의
공간을 두었다. 가깝게 있지만 다가갈 수 없는 것이 오늘 하루 살아갈 질량이다.
너무 그리우면 독해지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사랑의 질량도 늘 변화물쌍하다.
꽃이 피는 에네지와 열매가 맺는 그리움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 않는 앨두꽃이
되고 싶어진다. 사랑의 에너지가 늘 변하지 않고 같은 질량의 힘으로 그리움의 행성이
되고 싶다.
이드앵두꽃이 필 때는 벚꽃, 자두꽃, 배꽃이 핀다.
비 오고 활짝 개인 날인데도
오늘은 우체부조차 오지 않는
이 슬쓸한 자리보전,
떨치고 뒷산 숲속에 드니
일렁이는 게 생생한 바람인지
제 금보석을 마구 뿌리는 햇살인지
온갖 젖은 초록과 상관하는 것인데
은사시, 자작나무는 차르르 차르르
개느삼, 수수꽃다리는 흐느적 흐느적
왕머루, 청미래덩굴은 치렁치렁
일렁이는 것이 당연할 뿐, 여기서
제 모자란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랑이여, 나 저절로 일렁이네
오월 숲에선 뻐꾸기 한나절 호곡도
가슴 깊숙이 녹아내릴 뿐
세상은 너무 억울하지도 않네
그렇다네, 세월이 잠깐 비껴난 숲에서
일렁이는 것들이 진저리치다
산꿩의 썽썽한 목청을 틔울 때
사랑이여, 난 이 지상의 외로움
조팝꽃 그 쌀알 수만큼은 녹이겠네
아니아니 또르르륵 또르르륵 굴리는
방울새는 은방울꽃을 흔들고
핑핑핑 크루루 하고 쏘는
흰눈썹황금새는 산괴불주머니를 터뜨린다면
다만 이것들의 신기한 재주에 놀라
흐린 눈 동그랗게만 떠보아도
마음의 환한 자리 하나 어찌 못 얻으랴
그 누구라서 농축된 외로움 없으랴만
저 잎새 하나하나로 좀 녹여본다면
계곡의 물소리로 흘러본다면
어느 시인은 저 찌르레기 소리를
쌀 씻어 안치는 소리라 했지
오늘은 이팝나무꽃에다 쏟아붓는군
또 금 주고 사고 싶은 저 금붓꽃의
이파리엔 정녕 어찌 하지 못할 뿐
이 오월 숲의 초록 절정,
이 생생한 일렁임과
아득히 젖어오는 그 무슨 은총과
목숨의 벅찬 숨결 한 자락이
쟁명한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순간을
무척은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없을 때
사랑이여, 나는 내 생의 죄업을
저만치 밀어둘 참이겠네
그렇다네, 서러울 것 하나 없이
서러움도 가득 일렁이는 오월 숲에서
비껴난 세월을 다시 깨우치는 물소리에
서러움도 그만그만하게 여겨질 때까지
사랑이여, 나 오월 숲에서
천지를 우러러 사랑의 길을 묻네
사랑이라서 무슨 거룩한 게 아닐 테지만
저 일렁이는 것들이 하루 몽땅 저물어
머루빛 속 은하수로 일렁인다면
나 그만큼은 드높아야 하네
드높아서는 세상의 길 잃은
사랑의 길을 한껏 비추며
그대로 한번쯤 지워져도 좋을 일이라면
이 설레는 숲에서 저절로 일렁여도
그 무슨 산통 깨는 일은 아닐 테지
저봐, 이젠 어스름 속의 잎새들이
서로의 숨결을 뽑아내 서로를 속삭여주듯
내 아픈 몸의 우선한 것으론
저 무덤 앞 제비꽃이라도 일별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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