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눅6:39-42
들보와 티끌
(눅 6:39, 개역)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눅 6:40, 개역)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눅 6:41, 개역)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눅 6:42, 개역)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본문에 보면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명령하는 분의 권한을
먼저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만약 같은 사람들 끼리 만나서
이 말을 하게 되면
상대방에게서 주저없이
다음과 같은 반발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네까짓게 뭐라고
감히 나에게 이런 잔소리를 하느냐
나는 부모님 한테도
잔소리 안 듣고 자란 사람이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이런 지시와 명령을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면
이 명령 속에서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전체가 배후에 진치고 있으면서
나오는 명령입니다.
단순히 본문만을 가지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마태복음 5:18에 보면,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기’ 위하여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명령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2장에 보면,
우리 조상 아담에게 명령하기를,
“선악과실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정녕 죽으리라’의 의미는
‘타락한 영혼은
영원토록 저주와 고통이 따를 것이라는
선언을 의미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선언을
하나님은 취소할 의향이
전혀 없으십니다.
우리 인간이 이 땅에서 고생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된
결과입니다.
마치 그림 액자 속에 들어앉은
그림 같습니다.
다빈치라는 사람이 그린
모나리자라는 그림에 보면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여인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그림 밖에서
오늘날 그 여인을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그 여인은 그림속의 여인일 뿐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이 세상에서 무슨 짓을 해도
모두 ‘정녕 저주받아야 하느니라’는
네모난 말씀의 액자 속에 갇힌 채
그 안에서 웃고 떠들고 울고 불고
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의 지시와 명령은
그 자체가 인간을 가두어놓은 양상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환경을 방패막이로 삼아서
자신의 처신을 변명하려 합니다.
즉 환경이 나빠서
죄 지을 수밖에 없노라고 버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환경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 안에 숨어있는 인간에게
직접 말씀으로 들이대십니다.
“네 눈에 있는 들보를 빼고 난 뒤에
남의 눈의 티를 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신체 부위를 가지고
왜 자신이 이 세상에 오셔야 하는지를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이란 밖에서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동시켜서
일단 자신이 지킬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시하고 명령하는 상대방의 기준을
갖고 있지 아니하면
그 어떤 말씀이라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는 겁니다.
특히 구약 이스라엘 나라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이 만드신 나라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으로
자동적으로 구원이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다른 이방나라에 없는
거룩한 하나님 말씀도 있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성전도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정없이
그들이 자신들의 형편을 가리고 있던
그 나라 자체를
아예 돌 무더기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시편 79:1에 보면,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 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고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요즈음 식으로 해서
교회들을 모두
돌 무더기로 만든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거룩해보이고,
경건해보이고
고상하고 격조있어 보이는 그 교회들이지만
예수님 보시기에는
그저 돌 무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주변 환경들 속에
숨어있지를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광야로 만들므로서
애굽에서 출애굽하게 된 내막을
새롭게 밝혀줍니다.
즉 하나님은
새로운 액자 그림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 관계’로 그려진
액자 그림입니다.
그 그림 안에서
세례 요한은 황량한 광야 위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적인 것들은 의미가 없고
돌 무더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서서 오실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선지자 맞는지 아닌지는
그 뒤에 오시는 예수님깨서
어느 노선으로 들어오시느냐로
판가름 납니다.
율법은 모세로부터 세례요한 때까지입니다.
그 뒤에는 사랑이 들어와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게 됩니다.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행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들입니다.
마치 축구에는 법이 있습니다.
아무데나 골 넣으면 안되고,
손으로 공을 만져서는 아니되고
축구장에서 한 팀이 12명 이상이 되면 아니되고
라는 법칙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아무런 법이 없습니다.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법이란
전혀 없습니다.
이 말은 그 어느 누구도
“정녕 저주받으리라”는 원칙에서
벗어날 위인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미 확정적인 율법의 사각형 테두리를 벗어나서
그 저주에서 벗어날 자는 없는 겁니다.
하지만 분명
지금도 천국에 가 있는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까?
그들에게는 법이 없는 사랑이 찾아와서
구원된 것입니다.
사랑에는 법이라는 것이
성립되지를 않습니다.
그 사랑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실행됩니다.
아브라함 당시에 ‘할례 언약’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할례 언약’으로 인해
사람이 육신으로 만들어낸 자식과
그렇지 않은 자식으로
구분되게 되었습니다.
즉 ‘정녕 죽으리라’는
힘의 저촉을 받아야 될 몸과
‘정죄함이 없으니라’에 해당되는 몸이
따로 등장하는 겁니다.
할례란
남성의 생식기 끝을 잘라내므로서
인간의 생식 능력에 준해서
낳은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겠다는 겁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생겨난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의 자식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습니다.
이 할례 언약에 준해서 생겨나는 자식이
신약에 오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자들을 두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2:11-12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생명나무에 뿌리를 둔
새로운 나무로서 새로운 피조물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십자가에 피를 흘러주신
그 사랑만을 고백하고 증거합니다.
이로서 성도는
전부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목적물이 됩니다.
033강-누가복음 6장39-42(티와 들보)-luk100627
2010-06-29 19:29:59 녹취 : 오용익
033강-누가복음 6장39-42(티와 들보)-luk10062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6장 39절에서 42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00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6:39-42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말씀을 읽고 나면 나오는 아멘이 한 달째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명령 때문이겠지요. 들보라는 것은 기둥입니다. 눈 속에 기둥이 박혀 있어서 네 눈이 거의 소경수준인데, 그래서 세상 볼 줄도 모르고 자기 자신도 볼 줄 모르고 그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도 하나도 이해를 못하지요. 그런 잘못된 기준을 형성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는 엄청 잘못된 기준을 형성하고 있으면서 그런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형제들의 티를 빼겠다고 하니 그 티가 과연 티이겠습니까? 그러니 ‘너 자신부터 고쳐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여기에 선생이 등장합니다. 선생은 가르치는 자이고 그 선생이 있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만 성립이 되느냐하면, 한수 배워야 될 제자들이 있을 때 선생이라는 것도 같이 형성 되겠지요.
그런데 제자에게 지금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에게 먼저 문제 삼는 겁니다. ‘선생, 너부터 네 눈에 있는 기둥을 뽑아라. 그러고 난 뒤에 가르치든지 말든지 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성경의 예수님이 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우리가 예수님이 성경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여기지 말고 그냥 길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칩시다.
‘어이, 네 눈 속의 들보를 먼저 빼고 네가 나의 티를 보든지 선생노릇을 하든지 하라.’ 하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 뭐야?’ 하고 나오지요. ‘네가 뭔데 나에게 뭘 빼라 말라, 그런 명령을 하느냐.’라고 나오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합니다. ‘이것이 내 이야기가 아니고 누가복음 6장 39절에서 42절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이거든.’라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교회 꽤나 다닌 사람은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 그렇다면 미안하이. 예수님 이야기인줄도 모르고 나는 그저 너의 이야기인줄 알았지. 미안하이.’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러나 교회를 안다니는 사람 같으면 ‘예수? 예수 저는 뭔데? 저가 부처보다 더 나은 것이 있나?’ 이렇게 나오지요.
하라, 하지 말라, 가 죽 나오는데 42절 중간에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이것은 명령이죠. 그 명령을 할 때에 제일먼저 우선시해야 될 것은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됩니까?’ 그것부터 따져야 돼요. 그게 중요해요. 왜 이게 중요하냐 하면 요새 사람들은 자기에게 명령자를 아예 두지를 않습니다.
‘누가 감히 나를 명령해? 이제 잔소리 듣는 것도 지긋지긋해. 그것도 고등학교 때까지나 듣는 거지.’ 하면서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잔소리도 안 들어요. 다 컸다 이 말입니다. 감히 나에게 명령을, 이 민주주의사회에서 감히 나에게 명령을 한다? 이것은 사람의 자존심을 굉장히 상하게 만듭니다. 북한의 김정일보고 남한의 정치가들이 ‘어이, 나라를 비우고 중국으로 도망쳐라.’ 하면 그 사람이 듣겠습니까? ‘네가 뭔데 나에게 명령을 해.’라고 나오지요.
그런데 중국의 고위층이 북한에 하면 ‘예, 예!’ 하면 잘 듣지요. 같은 명령이라도 나보다 더 힘이 센 사람이 명령할 때 ‘내가 저사람 말 안 들으면 큰일 나겠다.’ 하는 관계가 형성된 사람에게 명령이 명령으로 먹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대충 믿고 교회도 잘 안다녀도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인생을 내가 꾸려나갈 수 있다면 이 누가복음 6장의 이 말씀을 예수님으로부터 구태여 들을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누가복음 6장의 이 말씀에 나오는, 들보를 빼라든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라는 이것만 봐버리면 ‘옛날에 많이 들었던 성경구절인데 앞으로 내가 조심해서 잘할게요. 남에게 잘난 체 안하고 겸손하게 살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명령할 때 어떤 취지로 명령하는지는 생각 안하고 그저 ‘예! 잘 한다니까요. 잘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 참 잔소리도 한 두 번이지, 내가 이 성경말씀을 어렸을 때부터 들었으니까 잘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라고 귀찮다는 듯이 하면서 자기일상에 몰두하고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명령 하실 때 이 누가복음의 이 말씀만 명령이 아니에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를 그 안에 품고 본문에서 하나의 돌출부로서 출구로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출구는 좁지만 내용은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다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전에 있었던 명령을 먼저 생각해 봅시다.
창세기 3장이나 2장에 보면 ‘네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명령이거든요. 명령권자가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정녕 죽으리라.’가 뭐냐 하면 ‘타락한 자는 영원히 저주와 고통이 따르리니.’ 이런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그냥 잘살고 못살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영원한 저주와 영원한 고통을 살아 있을 때나 죽고서 지옥 가서나 영원이 당하리라, 뭐하는 자에게는? 선악과를 따먹는 자에게는, 따먹게 되면 그런 속성이 여전히 남아 있는 자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있으리라, 라고 명령을 하는 거예요. 그 명령하신 분이 오늘날 이 본문을 통해서 ‘들보 빼고 그 다음에 남의 티를 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말씀 속에는 ‘만약에 이 말씀대로 안 살면 너의 영혼은 영원히 저주받는 영혼이 될 것이다. 고통과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도 1,2년이 아니고 영원히 너는 저주받을 것이다.’라는 것을 뒤에서 죽죽 밀어주면서 앞으로 톡 튀어나온 것이 뭐냐 하면 ‘남의 눈의 티를 보려면 네 눈의 들보부터 빼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명령권자가 우리 신체부위를 가지고 처음에 이야기한 ‘정녕 죽으리라’와 연관을 시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정녕 죽으리라, 저주받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어기면 죽으리라.’ 마태복음 5장에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일점일획이라도 다 완성하러 왔기 때문에 이 말씀대로 안 살면 영원히 지옥에 간다, 그런 이야기예요.
그러면 우리는 평소에 누구에게 지시받고 명령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 연령대가 점점 낮아져서 옛날에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순종했는데 지금은 중학교, 중학교에서 초등학교, 이제는 유치원 애들도 어른 말을 듣지를 않아요. ‘예! 예, 예, 예, 예!’ 이러고 치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나 말고 내 주변에 있는 환경가지고 이야기합시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뭔가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라는 것, ‘교회에서 열심히 하고 바르게 살면 교회를 바르게 운영한 것 가지고 그냥 대충 눈감아 주면서 넘어갑시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을 더 낫게 만들고 착하게 살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 그것으로 그만 영원한 저주는 해결 된 것으로 그렇게 거래하고 계약합시다.’ 그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죠.
사람이 자기의 환경문제를 자꾸 들고 나오는 것, ‘교회가 어쩌고저쩌고, 사는 환경이 어려우니 어쩌고저쩌고, 회사가 나를 교회 못 가게 만들었다.’는 둥, 이렇게 매사를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숨기기 위한 조치입니다. 교회 형편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계속 숨기는 거예요.
‘괜찮은 환경만 되면 나도 주의 말씀을 괜찮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환경이 좋지 않아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주의 말씀에 순종 못하는 것이지 환경만 바뀌면 저도 얼마든지 새사람 될 수 있습니다.’라고 자꾸 변명을 둘러대는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직접 ‘네 눈’이라는 우리의 신체에 직접 다가오십니다.
어려운 이야기지지만 이것을 좀 설명을 해 드려야 되겠어요. 여러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들어보셨지요. 이스라엘나라가 국가라는 환경 그것을 가지고 마치 천국이 된 것 인양 오해했던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하니까 이스라엘이 잘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국가였습니다. ‘좋은 나라 만들어서 하나님이 계시는 그런 천국이 되자.’ 그런 구호아래 움직였던 나라였어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관리 잘하고 율법을 최선을 다해서 지키면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나라라는 환경속의 우리를 봐주겠지,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지난 주 금요일에 광주에서 에스겔서 6장부터 봤어요.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하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전부 다 광야로 만든다.’ 하는 거예요.
집에 와서 다시 찾아봤습니다. 시편 79편 1절에 보니까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합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과 율법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그 모든 것이 멀리서 보면 오아시스의 신기루처럼 종교적으로 멋있어 보이고, 유일한 언약백성으로서 착실하게 사는 것 같은데 가까이 와서 만져보면 전부 다 광야요 돌무더기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돌무더기의 환경 속에서 그들은 파묻혀서 살아온 겁니다. 마치 오늘날 큰 교회에 커다란 규모의 찬양대가 있고 예배당천정이 샹들리에로 장식되어 있고 파이프오르간이 구비되어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주 고상하고 정돈되고 질서 잡힌 상태의 최고의 건축기술과 예술성으로 조화를 이루어서 감동스럽기가 그지없어서 누가 보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성싶은 공간인데 가까이 와서 말씀으로 만져보면 그것이 황무지가 돼요.
돌무더기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에서부터 천국 가는 길은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은 ‘정녕 죽으리라, 정녕 저주받으리라.’ 했으면 그 말씀대로 될 뿐이지 저주 안 받는 쪽, 고생 안하는 길, 고통이 없는 삶, 이것은 애초부터 인간에게 허락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진즉에 저주받아야 되고 아예 고통을 당해야 될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명령으로 확인해 준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의 종교적인 환경을 만들어서 그 환경 속에 앉아서 저주와 고통을 바꾸려고 시도를 한 거예요. 본문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42절에 ‘자기 눈의 들보를 빼고 남의 눈이 티를 보라.’고 하는데 자기 눈 안에 들보가 있는지 없는지를 무슨 수로 압니까? 만약에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이나 복음 아시는 분이 ‘형제여, 당신 눈에 들보가 있네요.’라고 해도 그 이야기가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거기에 대해서 그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평소에 내가 다듬어서 가지고 있던 나의 기준이 동원이 되어서 마중을 나가요. 여러분들 가정에서 아내가 잔소리를 하면 남편이 곱게 듣습니까? 일단 듣고 난 뒤에 그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를 확인해 보고 ‘그것은 네 생각일 뿐이지. 내가 네 기준으로 봐서, 당신의 일방적인 생각에 의해서 내가 남편노릇을 잘 못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내가 내 기준으로 봤을 때는 남편 노릇 90점은 된다.’라고 나오면 부인네들은 어떻게 하렵니까?
‘아니다, 50점이다.’ ‘아니, 90점이다.’ 그것 가지고 싸우렵니까? 그런데 갑자기 시골에서 장인장모가 올라와서 ‘자네는 90점인 줄 알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자네 50점 밖에 안 돼.’라고 하면 사위가 되어서 장인장모 말에 ‘아니요. 저는 90점입니다.’ 이렇게 할 수가 없거든요. ‘예! 예, 예, 예.’ 하고 양보할 뿐이지 동의는 안 해요.
사람이 동의를 할 경우에는 내게 말하고 명령하는 쪽과 일치될 경우에만 동의가 되지 그렇지 않고 예, 예, 하는 것은 일종의 협상입니다.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그냥 넘어가 주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 속에 들보가 있다는 것을 외곽에 있는 어떤 사람이 이야기 한다 할지라도 내가 그 사람 아닌 이상은 동의 못합니다.
내가 그 사람 아닌 이상은 동의 될 수가 없어요. ‘나 같은 인간에게 들보가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돼. 물론 내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티는 있겠지. 하지만 들보는 너무 심했다. 나한테 들보 있으면 너는 석가래야.’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선생이 자기 들보를 보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보시기에 돌무더기에 불과하고 황무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을 못하는 거예요. 인정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계속 이끌어 오신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명령, 일종의 그림 액자로 보시면 되는데 그 명령안을 하나님께서 액자로 만든 거예요.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그림이 모나리자라는 그림입니다. 다빈치가 그렸던 모나리자라는 그림이에요. 그 그림속의 여인은 웃는 듯 안 웃는 듯, 하면서 웃고 있어요.
그런데 그 모나리자안의 그 여인은 그 액자 안에서만 웃습니다. 그 그림 밖에서 그 여자를 수배해봐야 그 여자가 없습니다. 그 여자는 이미 죽은 여자입니다. 없어요. 그림액자 안에만 있는 겁니다. 그 사각 진 액자, 주님의 명령, 명령, 명령으로 액자를 만드는 거예요. ‘너는 그 안에서 울든지 웃든지 16강 들어가든지 못 들어가든지 너는 죽은 자다.’라는 거예요.
‘너는 내가 들보라면 들보야.’ 그것이 그림액자 속에 갇히게 되는 거예요. 이 ○표가 은퇴를 하든지 말든지 그것은 네 생각이고, 박 지○이가 은퇴를 하든지 축구경기를 계속 하든지 관계없이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갇혀 있는 그림액자인 거예요. 그림액자 속에서 인간들은 교회부흥이라고 해서 그 뭔가, 열심히 활동하고 움직이고 전도하고 활동하고 선교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기껏해야 그 모나리자 그림 안에 갇혀 있는 채로 자기 기준에 준해서 활동하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일 아닙니다. 하나님 일은 하나밖에 없어요. ‘정녕 죽으리라. 타락한 자는 영원히 고통 받게 될 것이다.’ 그것뿐이에요. ‘백날 해봐야 너는 황무지야. 돌무더기가 되게 하리라.’ 이스라엘에서의 그 수많은 역사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전을 줘도 결국 그들은 돌이었고 황무지였다는 겁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갈 때 광야를 거쳐서 나왔거든요. 그들은 그 광야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겁니다.
약속의 땅에 가도 그 약속의 땅을 황무지로 만들어버려요. 이것은 인간들이 환경 탓, 환경이 잘못돼서, ‘환경이 나쁜 환경이라서 내가 말씀을 제대로 못 지킨다. 그러나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최선을 다한다.’ 이런 핑계는 안 되는 거예요. 사람은 자꾸 환경을 문제 삼는데 주님은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개나 소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선악과 따먹지 않는 인간이 되어라, 직접 사람보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적당한 환경 속에 자기가 놓여 있으면 그 환경 탓에 자기도 그냥 넘어갈 줄 알고, 그냥 좋게 평가받을 줄 알고 삶의 환경 탓을 그렇게 해대는 거예요. 주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래, 네 환경이 어떤 질의 환경인지 궁금하냐?’ ‘궁금합니다.’ ‘그러면 내가 알려줄게.’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제사 드렸던 성전과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돌무더기 되게 했습니다. 광야로 만들어버렸어요. 광야로 만들면 결국 어느 인간도, 그림액자 속에 있는 모나리자가 그림바깥으로 튀어나가서 웃지를 못하는 것처럼 어떤 인간도 자기 환경 밖으로 벗어나서 천국에 가는 일은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황무지 되었으면 우리도 같은 황무지에 불과한 겁니다.
가두어둔 거예요. 가두어둬 버리면, 그래서 아무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아무리 들보를 빼려고 해도 ‘들보를 빼라’고 하는 그 말씀에서 ‘가만히 있어 보세요. 이게 들보인지 아닌지 일단 내가 점검을 먼저하고 들보가 있다면 내가 뺄게요. 내가 유치원 애도 아니고 어른이니까 내가 알아서 뺄게요.’라고 하는 짓거리가 그래서 ‘정녕 죽으리라.’입니다.
그러니까 명령권자가 어떤 취지에서 명령하는지를 모르고, 산상설교가 어떤 입장에서 뭘 품고 명령하는지를 모르고 마치 우리는 괜찮은 내가 이 말씀을 지킬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면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림 속에서 그냥 놀고 있는 거예요. 그림 밖으로 못나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구원받는 새로운 그림액자를 소개합니다. ‘네가 네 기준으로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 이것은 이스라엘 짝 나고 너는 황무지고 돌무더기다.’ 그 말입니다. 사람의 모든 인생이란 마치 왜곡된 필름이 둘둘 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필름이 끊어지는 날, 우리가 죽는 날 장의사가 와서 우리를 장례 치르면 끝나는 겁니다.
한 시간 후에 죽어서 장례를 치르고 화장터에서 뼈 가루만 남는다면 두 시간 전에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요? ‘야, 내가 두 시간 후에 죽는다면 어느 장례식장이 돈이 싸게 먹일까?’ 그게 기억의 필름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이 필름처럼 다 있는데 그것을 죽 풀어버리면 그것은 하나의 테이프에 불과한 겁니다.
진짜 모습은 한 시간 뒤에 뼈 가루가 될 그 모습이 진짜 모습인데 그것을 기억의 필름으로 둘둘 감아요. 그런데 기억의 필름도 자기 것도 아닙니다. 그동안 들었던 풍월들 죽 깔아 놓은 겁니다. 어릴 때 우리 집이 제사를 지냈는데 할아버지가 제사지낼 때는 열 폭 병풍을 칩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인데 그 병풍의 그림을 다 조사합니다.
그 병풍그림이 심산유곡에서 낚시를 드리운 태공이 그려져 있는 동양화거든요. 어릴 때 그걸 보고는 ‘야, 이 노인네가 얼마나 심심하겠나.’ 했어요. 제사가 일 년에 댓 번은 되었었어요. 그 때마다 그 그림을 보니까 그 그림이 죽어 있는 그림이 아니고 반가워요. 그림만 펴면 그 안에 들어갑니다. 그 흐르는 물에서 멱도 감아 보고 그 태공의 옆에 앉아도 보는 거지요.
그게 나의 기억이라는 필름에 새겨집니다. 그게 새겨지면 ‘나도 이 나이 되어서 저 심산유곡에 낚시 드리우고 살면 얼마나 좋겠는지.’ 이렇게 그것이 흙덩어리 속에 감겨 있는 필름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경험한 것, 본 것, 들은 것, 그런 것들이 쌓여서 자아라는 것으로 장착되어 있다가 거기에 성경말씀 주어지니까 자기가 왜곡해서 잘못된 해석을 하는 거예요.
‘음, 저것은 경험상 내가 지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그 병풍 편 할아버지도 나쁜 할아버지죠. 왜 부자가 들어간 그 엄청난 지옥불의 그림으로 하지 않습니까? 이태리에 가면 커다란 성당이 있는데 그 벽면에는 스테인드글라스로 해서 전부다 성경말씀을 그림으로 나타냈답니다. 병풍을 쳐도 성경말씀으로 좍 쳤으면 어릴 때부터 성경말씀 안에서 놀았을 텐데……, 또 환경 탓인가요?
환경이 잘못되어서 유교적인 분위기속에서 동양화속에서 놀게 된 거예요. 거기에 병풍은 쳐놓고 할아버지는 어른이라고 권위 있게 교훈을 하네요. 우리 삼촌이나 고모들은 귀 닳도록 들은 이야기예요. ‘남자는 모름지기 세 가지 끝을 조심해야 된다.’ 저는 어릴 때 세 가지 끝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혀끝을 조심, ‘아, 말조심 하라는 뜻이구나.’ 손 끝 조심, ‘아, 폭력하지 말라는 뜻이구나.’
그 나머지 한 가지 것, 그것이 뭔지?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흘렀는지. 전부 다 유교적 분위기 속에서 나의 필름이 작성된 거예요. ‘아, 착하게 살면 드디어 이 병 풍속의 세계 같은 세계로 구원받는구나.’ 그것이 어릴 때 나의 종교였습니다. 그것이 나의 세계관이었어요. ‘착하게 살자.’라고 새겨 넣고 다니는 그 조폭들의 문신처럼 ‘착하게 살면 좋은데 간다.’
주님께서는 다른 그림액자를 내줬는데 그것이 요한복음 1장 23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그림으로 갖춘 거예요. 그림 속에 예수님이 참여했습니다. 세례요한이 모나리자라면 그 그림속의 모나리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림 속에 들어와 버렸어요.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비로소 빛이 나는 선지자입니다. 가능성, 희망, 일체 허용되지 않는, 그 세례요한이 딛고 있는 발은 황량한 벌판, 광야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파괴되고 파괴된 그 광야,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저주했다는 증거들이 층층으로 겹겹이 쌓여 있는 예루살렘 불탄 자리위에 서 있는 세례요한, 엉뚱한 신을 섬겼던 산당, 요새 말로 하면 기도원과 교회지요, ‘지성이면 감천이다.’ 해서 신에게 제사하는 그 더러운 산당들, 그 산당들이 불타버린 그 현장에 세례요한은 우뚝 두발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곳은 전부다 광야다. 돌무더기 광야다.’ 이것이 주님이 주신 그림입니다. 이 돌무더기 광야 위에서 구원받는 길은 뭐냐, ‘곧 오신다. 그 분이 오신다는 증거는 뭐냐, 그분이 오신다는 증거는 하나밖에 없다. 내가 미리 와서 외친다는 이것이 그분이 오신다는 증거다. 내 말이 아니고 나는 빛을 증거 하기 위해서 빛보다 잠시 먼저 온 사람이고 내 노선 따라서만 뒤에 빛이 오신다.’고 하지요.
그러면 그 선지자의 노선, 선지자가 딛고 있는 그 바닥이 무슨 바닥이냐 하면 황무지요, 돌무더기요, 폐허요, 그리고 저주의 흔적들입니다. 인간이 시도해서 어떤 종교적인 것, 교회, 성당, 이런 것들 전부 다 세례요한의 눈에는 돌무더기요, 세례요한의 외침 속에서는 돌무더기요 황량한 벌판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예수님 드디어 오십니다.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나는 쇠해야 되고 그분은 흥해야 된다.’ 촛불이 밤에는 촛불 값을 하지만 태양이 반짝 지평선위로 떠오르면 촛불은 퍽 하고 꺼져야 되고 다 같이 태양 쪽을 봐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들보와 티의 문제해결은 간단합니다. 서로 상대를 보니까 들보와 티가 보이는 거예요.
서로 스승이 되려고 하니까 둘이 티격태격하고 있는 겁니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태에서 방향을 50도만 틉시다. 틀어서 세례요한 노선 따라서 올라오는 태양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다 같이 어깨동무해서 보자는 말입니다. 보게 되면 그 태양빛이 너에게도 나에게도 다 같이 오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그림액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 그림액자의 모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른 그림은 해당 안 됩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 사이, 예수님과 세례요한 사이, 그 관계 외에 다른 철도, 다른 궤도로서는 천국 갈 수가 없습니다. 막혀 있습니다. 들보 떼어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들보 좀 떼고 왔는데 뗀 것 같은가?’ 이렇게 물어볼 필요도 없어요.
환경문제가 아니고 ‘정녕 죽으리라’ 한 환경문제는 ‘정녕 죽으리라’ 한 그 말씀이 진짜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이 거하는 땅 자체가 저주받은 거예요. 환경이라는 것은 그 실마리가 어디 있느냐 하면, 인간이 선악과 따먹었다는 거기에 있습니다. 환경 탓 하지 마세요. 인간이 잘못되어서 환경도 같이 저주가 된 겁니다.
주의 말씀은 주님께서 직접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 소경이지?’ ‘맞습니다.’ ‘너 들보 있지?’ ‘맞습니다.’ ‘빼라.’ ‘못 뺍니다.’ ‘왜?’ ‘우리는 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율법이라는 그림 액자 속에 모나리자가 아무리 웃어도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사각 진 그림액자 속에서 인간은 항상 명령권자인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그 명령에 의해서 돌무더기 될 수밖에 없고, 황무지 될 수밖에 없고, 흙덩어리 될 수밖에 없는 그런 확정된 운명의 길을 그대로 가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은 결국 인간이 천국 가는 길은 막혀 있다는 뜻이고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다 천국에 못 가는데 저주받은 율법이라는 액자 속에서 빠져나온 사람도 분명히 있거든요. 모세, 엘리야, 사도바울 이런 분들이 있어요. 분명히 천국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들고 어린양에게 환호하고 감사하고 있어요. 분명히 빠져나온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빠져나왔느냐? 여기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또다시 출애굽 시절로 돌아갑니다. 애굽에서 광야로 올 때 홍해가 갈라진 것처럼 뭔가 갈라져서 나왔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그들이 어린양의 피를 자기들의 문지방과 설주에 바를 때 조건이 있었어요. 뭐냐 하면,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할례 받은 자에 한해서 어린양의 피를 발라야 애굽에서 무사히 탈출, 아니 애굽에서 탈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서 ‘정녕 죽으리라’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할례 받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을 설명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물론 마치겠다고 해도 교장선생님이 마치겠다고 하는 것은 마치는 것이 아니지요.
할례란 남성 생식기의 끝을 잘라버리는 겁니다. 이삭이라는 아기가 태어났을 때 부모들은 이미 할례 받은 상태에서 이삭이 출현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생식기를 타고 내려오는 혈육적인 관계를 절단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최초로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하는 사람이 이삭인데 이삭에게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너는 아브라함의 육적인 계통에서 튀어나온 자식이 아니고 너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는 겁니다.
원래 부모 없이는 자식이 생길 수 없잖아요. 그래서 아브라함보고 ‘이것을 너의 자식이라고 생각하면 큰일 난다.’는 거예요. 그럼 이삭은 누구의 자식인가? ‘너는 할례의 자식이다.’ 하나님의 할례언약이라는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고 아브라함언약의 자식이 되는 거예요. 현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그림액자에서는 우리의 경험상 부모가 있어서 부모가 결합해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부모 없이 태어나는 자식이 없다, 그렇게들 알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기준입니다. 그게 표준이 되어서 우리가 성경말씀 볼 때에 내가 있고 그 다음에 내 자식이 있다는 그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로 해석을 해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소경이 본다 하니 소경이다.’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보는데 왜 소경이라고 하느냐, 이렇게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것은 지금의 내 신체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 하나님의 저주받을 신체고 저주받을 신체라 하는 것은 이 신체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고 거꾸로 생각한다는 그런 신체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생각, 그것을 우리는 짐작을 해야 돼요.
우리가 물려받은 신체, 그러니까 추하고 더럽다는 거룩의 기준을 우리가 알아서 판단해서 윤리적인 행동에 나선다, 라는 그 자체도 주님 보시기에는 영 마음에 안 들어요. 그 자체가 엉터리예요. 자기 윤리에 안 맞으니까 남보고 나무라는 거예요. 그쪽은 그 쪽 윤리에 안 맞으니까 나보고 죄인이라 하는 겁니다. 둘 다 꽝 하고 부딪혀서 서로 헤딩을 해야 돼요.
두 사람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양쪽 다 부모가 만들어주지 않은 몸을 가지고 있어야 양쪽 다 들보가 떨어지고 티도 떨어지고 다 떨어지는 몸을 가지고 평가할 수 있는 거예요. 그리 되려면 기존의 부모로부터 받은 이 신체를 포기해야 됩니다. 신체포기각서 쓰든지 해서 신체를 포기해야 돼요. 하늘에 있는 우리 어머니가 만들어줘야 돼요.
어머니 하니까 ‘○○○증인회’ 이단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 어머니는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어머니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해서 성령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일 경우에만 티고 들보고 다 없어지지요. 왜냐하면 신체 자체가 이미 할례를 받은 몸은 누가 주도권을 쥐게 되느냐 하면, 할례받기 전에는 아담에게서 내려오는 죄가 우리를 장악했는데 하나님의 할례언약에 의해서 하늘의 어머니로 인하여 만들어진 몸 같으면 주도권을 하늘에 있는 생명나무의 능력, 영생의 능력이 우리 죄 된 몸을 지배해서 선악적인 관점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나무 관점으로 우리의 눈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랑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축구에는 법칙이 있어요. 축구는 열 한명이 뜁니다. 열두 명이 뛰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축구는 손을 써서는 안 된다, 축구는 골을 골대 안으로만 넣어야 된다, 이런 법칙이 있습니다. 법칙이 있다는 말은 인간은 할 수 있다는 거예요. 헤딩으로 골인을 넣든지 하여튼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천국가면 아예 법칙이 없어요. 천국에는 오지 말라는 법밖에는 없습니다. 오지 말라는 법이 있어서 이 법을 지켜서 가고 싶어도 법이 있어야 가는데 법이 없는데 어떻게 가겠습니까? 축구라면 공 가지고 잔디밭에서 펄펄 뛰고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뛸 것도 없고 아무 법도 없고 아무런 규칙도 없어요.
요즘 월드컵 영향 때문에 할머니들도 오프사이드반칙도 알고 다 알아요. 이렇게 인간의 법은 인간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생긴 법이예요. 그런데 그것은 전부 다 ‘너는 이래서 저주받을 수밖에 없어.’라는 천국에서 밀쳐내는 법입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황무지 만들고 돌무더기 만드는 법이예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줬는데 그 율법 가지고 완전히 황무지 되고 말았습니다.
세례요한은 황무지 위에서 예수님 오신다고 소리친 거예요. 그럼 뭐냐? 사랑 안에는 법이 없습니다. 그냥 사랑해준 분만 쳐다보는 것이 요한복음의 새로운 개념으로서 ‘사랑’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은 형제만 보라는 말이 아니고 형제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원천을 보라는 말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나에게 사랑을 주신 분과 사랑주신분의 조치에 같이 변화를 겪는 거예요.
율법은 버리고 사랑으로 가는 그 변화를 같이 겪는 것이 신앙이고 신앙적인 삶입니다. 자꾸 원천을 돌아보고 원천이 생명나무에서 왔다면 율법적인 것 윤리적인 것을 버리는 거예요. 사랑은 내 기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기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기준이 나를 망치고 있다면 그 나를 망치는 기준을 여러분 짐으로 더 이상 놔두지 마세요.
‘그래 나는 못났다. 못났어.’ 이게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십자가마을에 선덕여왕이라고 계십니다. 녹매교회 이 선덕이라는 성도님이 글을 써놓았어요. 그 글을 우리교회에 올려놓았어요. 그 글을 집에 가서 한 번 보세요. 그걸 보면서 ‘왜 목회자들은 이런 고백을 못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뭐냐, 악마의 앞잡이이기에 이런 고백을 못하는 거예요.
그 평신도가 할 수 있는 그 고백이 목사들 입에서는 안 나오고 있어요. 왜, 선생도 아닌 것이 선생노릇 하고 있어요. 남을 가르치려고 하기에 그 고백을 못하는 거예요. 그 고백이 뭐냐, ‘평생 살면서 뭔가 하려고 한 짓이 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못해도 거저 주시는 피의 공로로 구원받았는데 세상에 이 놀라운 것을 어떻게 다 전할까? 이 거저 받은 사랑을 황홀해서 어떻게 견디지?’라는 그 고백, 너무 좋아서 하는 그 고백인 거예요.
목사가 그런 고백을 하려고 하면 내가 신학을 한 것, 신학교 나온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예수님 피만 전부다, 라고 믿는 목사에 한해서만 그 고백이 나오고 그것만이 설교 강단에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어딜 감히 누구 보고 명령합니까? 누굴 보고. 자기도 액자 속에 갇혀 있는 주제면서, 밖에 나온 적도 없으면서.
주님 주신 그 사랑은 법이 없습니다. 그 액자 속에 있는 세례요한은 그냥 사랑을 받을 뿐이에요. 성도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목적이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목적을 끄집어내면 안돼요. 지금 여러분이 여기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지금 설교 듣는 자체가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한 행동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일하신 목적이고 그것이 결과물입니다.
이것을 ‘내가 행동해서 교회 왔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뒤에 늦게 오신 분들도 주께서 늦게 오게 하신 거예요. 늦게 오신 그것도 결과물이에요. 그리스도께서 사랑을 했다는 결과물이 그런 거예요. 할례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나라는 것이 우리의 육적인 것으로 만들어낸 몸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지요.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우리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 세상에서 말하는 포경수술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육적 몸을 포기하는 것이고 육에서 일어나는 모든 윤리, 도덕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평생을 살면서 어떤 더러운 짓이라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죽은 것으로, 황무지로, 돌무더기로 봤다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황무지 드러내게 하시고 그 황무지에 예수님의 사랑이 덮이게 함으로서 하나의 훌륭한 천국 가는 사람의 액자를 만들어내겠다는 것이 그리스도 일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목적이 된 거예요. 내가 평생에 한 일이 전부다 황무지 돼야 되고 저주받아 마땅한 것이고 돌무더기 돼야 되고 광야에 불과한 거예요. 그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그 몸을 벗어버리고, 원피스 벗듯이 벗어버리고, 그 다음에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니까 우리 몸이 죽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이 몸의 뿌리가 죽은 자의 뿌리가 된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예수님으로부터 돌출된 몸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은 몸이 아니고 산몸이 돼요. 산몸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이라는 것이 없고 저주라는 것이 없는 몸이 됩니다. 저주 없는 몸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15절에 보면 “십자가로 승리”했다는 것을 우리 몸을 가지고 고백을 하도록 되어 있어요.
옛날 몸 같으면 ‘내가 들보를 뺐습니다. 이제 티 안보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데 이제 새로운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이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승리했습니다. 그 승리로 만들어진 결과물이 제 몸뚱이입니다. 제가 못난 놈이 맞고 죄지은 것 맞는데 그러니까 이 몸이 바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효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렇게 만들었습니다.’라고 보여주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완전해서 구원받은 것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먼저 광야에 우뚝 서야 될 분으로 온 겁니다. 마찬가지로 그 같은 그림에, 예레미야도 엘리야도 다 마찬가지로 그 그림 속에 우리가 지금 끼어든 사람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했습니다.’
내가 뭘 했다든지 누가복음을 지켰다는 말이 아니고 ‘십자가로 인하여 이렇게 못 지키는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법 없이 우리는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하고 예수님의 공로를 드러내는 것, 그것이 십자가로 가는 여정에 미리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는 환경 탓을 했습니다. 환경이 좋지 않아서 신앙생활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자기 행함을 자책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아직도 자기 자신의 행함에 미련을 갖고 있는 율법적인 선악과적인 정녕 죽을 수밖에 없는 저주받을 사고방식이고 기준인줄 압니다. 이제는 그 기준을 죽이게 하시고 새로운 기준, 법 없이 구원받은,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생명나무 기준이 저희들의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