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 최영준 지음, 한길사, 2010.
강원도 홍천이라. 졸병 시절 그 주변을 돌아다녀 그런지, 깊은 산골이라는 기억이 남아 있다. 대학원 시절 채집을 위해 이따금 찾던 오지, 두어 차례 다니는 군내 버스를 놓치면 하루를 허송하거나 무거운 장비를 들고 터덜터덜 걷다 트럭을 얻어 타야했던 홍천은 수도권과 거리는 가까워도 꽤 먼 곳이었는데, 거기에서 교수가 농사를 지었다고? 그것도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궁금한 일이다.
하필 왜 홍천이었을까. 땅이 특별히 좋았을까. 지리학자가 좋은 땅이야 쉽게 구별할 텐데, 좋은 땅은 홍천까지 가지 않아도 많았을 터. 1980년대 말이면 투기바람이 산골까지 번지지 않았다. 주말농사 짓겠다는 현직 교수가 굳이 산골을 향할 필요는 없을 텐데. 마흔아홉을 맞은 최영준은 남은 인생 동안 욕심 버리고 좋은 글 읽겠다고 주말마다 홍천강변의 산골로 들어갔다. 궁벽한 적막강산에서 서울 생활의 떼를 씻고 책상머리에 앉길 원했다. 도시에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기에 일부러 택한 건 아닐까.
신혼 초, 도심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도예 전공하는 아내의 작업실과 자신의 서재를 꾸미고 작은 텃밭에서 채소와 화초를 가꾸고 싶었다. 그런 최영준의 소박한 꿈은 “젊은 교수가 벌써 안주하려 든다.”면서 공부를 뒷전으로 미룬다는 주위의 힐난에 아랑곳하지 않고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저러다 말겠지’ 하는 의구심을 떨치며 1년 365일의 적어도 3분의1인 120일은 홍천강변에서 보냈다. 1990년부터 농가가 딸린 7000여 평의 토지에서 밭농사와 논농사, 그리고 나무를 심고 잉어를 키우며 30년 넘게 살았다. 아니 정년한지 여러 해가 지난 지금도 거기에 산다. 그러니 희로애락이 오죽하랴. 연필을 놓지 않은 최영준은 일기를 꾸준히 썼고, 그 중20년 기록을 정리해 책으로 남겼다.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이 그것이다.
자동차 길이 없어 풀숲을 헤치며 들어가 주말을 보낸 곳인데, 이젠 아스팔트가 번듯한 전원마을이 되었다.그러자 들어온 건 도시의 자가용 족이고, 그들을 불러들이는 온갖 놀이터였다. 궁벽한 산골에서 낮에 농사짓고 밤에 좋은 글 읽으려던 서생에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루탄이 난무하는 캠퍼스를 잠시 벗어나 물 맑고 공기 맑으며 조용한 산골에서 낮에 땀 흠뻑 적시며 일하고, 밤에 책을 읽는 삶을 만끽하고 싶던 최영준은 안타까워도 홍천강변을 떠날 수 없었다. 부딪혀야 했다.
홍천의 집에 오니 웬 사내가 낚싯대를 떡 드리우고 앉아 떠나라는 집주인의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틴다. 커다랗게 자란 잉어가 사는 남의 집 저수지에서 선점권을 주장하는 경우는 애교에 가까웠다. 자물쇠를 뜯고 들어와 냉장고를 비우고 안방과 부엌을 차지하다 집주인 들어오는 소리에 놀라 쓰레기 남기고 달아나는 관광객도 부지기수다. 아스팔트가 가져온 발전의 대가인가? 《영남대로》를 쓴 지리학자지만 도로에 도무지 긍정적일 수 없었다. 산촌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아스팔트는 지리학자의 조용한 삶을 무너뜨리지 않았는가. 연못에 내리는 오리 놀랄까 까치발로 걷던 최영준은 모터보트를 동원해 다슬기를 쓸어담는 상인들과 차 세우자마자 투망 꺼내며 왁자지껄한 도시 사람들에 진저리를 친다.
오리에 총질하고 산에 너구리 올무 놓는 자들만이 아니다. 이웃하는 땅을 구입한 한 사업가는 빗물의 흐름을 생각하지 않고 축대를 쌓아 남의 농경지를 망가뜨리지 않나, 텃밭에 콩을 심는 데 찾아온 낯선 방문객은“소득 적은 농토보다 지기들에게 땅을 맡겨 정기적으로 큰돈 받는 게 어떠냐.”고 은근히 떠본다. 전망 좋은 땅을 자신들에게 거저로 주면 펜션을 짓고 그 이익을 나눠주겠다는 개발업자의 투기 심보. 산골의 촌로 속이는 사기꾼과 다름없는데, 그들은 지리학자를 몰라보았다. 전문용어를 사용하며 “하숙집에 불과한 펜션이 어떻게 최고급 숙박시설로 둔갑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니 꽁무니를 뺐다.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교수 농부는 흙으로 귀를 닦아내고 싶어 한다.
몇 차례 당부도 소용없이 흑염소를 풀어놓아 기껏 심은 묘목들 뜯어먹게 하는 이웃 농부들, 다 자란 장뇌삼을 모조리 가져가는 이웃 마을 사람들이 땅을 지키려는 지리학자를 괴롭히지만, “학자가 연구하지 않고 어찌 땅이나 파는 천한 일을 하느냐”는 선배 학자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농사야 말로 가장 좋은 수신의 길”로 생각하는 최영준은 강의와 연구는 물론, 대학원생 지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홍천강변을 떠나지 않았다. 가뭄에 양동이를 들고 홍천강에서 밭을 오르내리다 종아리 근육이 파열되었지만, 지렁이와 굼벵이가 늘어난 논밭에서 누리는 수확의 기쁨, 가끔 찾아오는 제자, 그리고 친지들과 농사를 함께 짓고 나누는 기쁨을 포기할 수 없었다.
가련하게 바싹 마르던 홍천강이 어느 해는 주위를 집어삼킬 듯 무섭다. 그때마다 배수로의 낙엽들을 드러내고 빗물에 패인 농로와 논밭을 정비하며 힘에 부쳐하지만, 홍수와 가뭄은 강의 생명현상이다. 그런 생명현상에 기대며 온갖 생물들이 산다. 나중에 들어온 사람도 마찬가지다.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 동안 초등학생이던 두 아들은 군 생활을 마치고, 어엿한 사회인에 되어 유학도 떠났고, 며느리도 데리고 왔다. 자신을 격려하며 자주 들리던 장인도 세상을 떠났다. 정년을 맞은 최영준 내외는 아예 홍천강으로 세간과 주민등록을 옮겼다.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교수 생활하던 지리학자가 산골에 뿌리내린 것이다.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을 읽으니 섣불리 귀농할 생각이 쑥 들어갔다. 개발의 삽날이 산골이라고 예외가 아니기 때문만이 아니다. 땅에 뿌리내릴 다짐이 없다면, 근육이 파열되고 발이 부러지며 온갖 방해꾼들과 싸울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시도하지 않는 게 낫겠다 싶어진다. 농사는 무식한 촌로의 저급한 노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땅과 내일을 살리고 조상의 기억과 문화, 그리고 수많은 당대 사람들과 후손의 생명을 살리는 땀과 희생이 아닌가.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을 읽으며 귀한 농산물 쉽게 얻는 도시인들은 농민에 대해, 최소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첫댓글 신념대로 살아가는 지리학자의 결론은 농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50의 나이에 농사를 시작한 철학자 윤구병의 경우처럼 최영준도 40대 말에 홍천강변에 정착한 뒤 연구와 농사를 게을리하지 않은 딸깍발이로 살아왔고, 지금은 그 자리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 기간의 우여곡절, 희노애락을 같이 귀농량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습니다.
그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저도 시골에서 10년 넘게 출퇴근하다 보니, 여기도 도회지나 마찬가지 전쟁터입니다. 소재가 조금씩 다를 뿐이지요. 농촌은 도피처가 아니지요. 어제 앞집 지환이네 할머니가 방금 짜온 참기름+들기름이라면서 맥주 병 한 병을 내밀었는데, 차마 죄송해서 손을 내밀지 못하겠더라고요. 할머니는 그 병을 문 앞에다 놓고 갔습니다.
농사 짓는 분들에게서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요 농사 짓는 분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