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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주 가르멜 가족 원문보기 글쓴이: 별하나
새는/ 노래하는 의미도/ 모르면서/ 자꾸만/ 노래를 한다//
새는/ 날아가는 곳도/ 모르면서/ 자꾸만/ 날아간다//
<송창식 작사 작곡>
자신의 영역을 지키거나 짝을 구하기 위해서 만 노래할까? 그렇다면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서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님이 그리워 운다…’ 라는 옛 민요와 다르지 않다. 허지만 이것만으로는 새들이 왜 그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수많은 노래를 만드는지 또 왜 그 많은 시간을 노래하는 데 소모하는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어쩌면 새들은 노래 부르는 것이 좋아서 노래를 부르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 사람들과 똑같이 말이다. 행동하는 동물이라고 생각할까 두렵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라는 티브이 광고를 보고 “다음 중 가구가 아닌 것은?” 이란 선다형 시험에 침대를 고른 아이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더욱 그러하다. ‘새머리(bird brain)’ 라는 말을 멍청하다는 말과 같이 취급하기도 한다. 오죽 했으면 다음과 같은 병아리에 관한 농담이 나왔겠는가? 병아리가 학교에서 돌아와서 시무룩하게 어미 닭에게 말한다. 훨씬 발달된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새들은 머리는 작은 것 같지만 몸에 비한 뇌의 크기는 유인원을 빼고는 가장 큰 동물에 속하며 유인원 정도의 의식 수준에 견줄 만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 조류 뇌 전문가들은 원시적이라는 뜻이 담긴 새의 뇌 각 부분의 용어를 인간의 대뇌피질이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의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지능이 별로 없다고 생각해왔다. 허나 새의 지능은 신피질과는 다른 구피질(paleocortex)의 조직적인 성장으로 생겨났다 한다. 이런 근거는 기억력이나 물체의 영속성, 도구를 이용하는 새들의 모습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북아메리카 잣까마귀는 늦여름에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백송 씨앗 3만 5000개를 파묻고, 봄이 오면 씨앗이 묻힌 장소를 대부분 찾아낸다고 한다. 또한 꿀잡이새는 100제곱마일 내의 모든 벌집을 다 기억해낸다고 한다.
먹이를 파묻어서 저장하는 새들은 상당한 수준의 기억력뿐만 아니라 물체의 영속성, 즉 어떤 물체가 보이지 않더라도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채는 능력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 독수리들은 타조 알에 돌을 떨어뜨려 내용물을 먹는다. 갈매기도 이와 비슷한 요령으로 조개를 깨뜨리고, 까마귀 또한 같은 방법으로 딱딱한 견과류를 깨드려 먹는다. 시골에서 키우는 ‘집닭’에게도25~30종류나 되는 자신들만의 신호를 가지고 있다.
또한 누군가를 속이는 소위 ‘잔머리’라는 것도 쓸 줄 안다. 수컷은 보통 먹이로 암컷의 환심을 사고 짝짓기를 한다. 자기 혼자 먹어버릴 수 있는 작은 먹이를 암컷에게 주고 잘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이다. 낯선 지역에서는 태양과 머리 속의 나침반을 이용 정교한 방법으로 비행을 한다고 한다. 철새는 어디로 날아가는지 언제 날아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나는 것이다.
새가 날아가는 곳도 모르면서 자꾸만 날아간다 라고 노래하는 것은 우리의 무지를 들어내는 것이다. 새는 먹이를 찾거나 이민을 가기 위해 뿐만 아니라 나는 것이 즐거워 날기도 하는 것 같다. 왜 나느냐고 물으면 새들은 웃으며 “사람은 왜 산에 오르나요?” 라고 되물을 것 같다. 목소리를 통해 노래를 하는 짐승은 새와 고래밖에 없다. 알에서 나온 지브라 핀치라는 새는 25일 가량 지나면 어른 수컷 새를 따라 노래를 배우기 시작한다.
새가 노래를 배우는 과정은 사람이 말을 배우는 과정과 아주 비슷한데 처음에는 아이들이 옹아리 하듯 하다가 어른의 소리를 조금씩 흉내 내며 노래를 배운다.
이 새들 중 노래를 더듬는 새와 안 더듬는 새의 머리를 자기 공명 영상법(MRI)의 영상을 통해 비교를 한 결과 말을 더듬는 사람과 안 더듬는 사람의 머리의 MRI 영상의 차이와 아주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발성 과정을 이해하고 언어 장애를 극복하는 연구에 새의 노래는 없어서는 안될 연구대상이다. 왜 노래하는가 하고 새들에게 물으면 새들은 ‘사람은 왜 노래를 하나요?” 라고 되물을 지도 모른다.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다시 송창식 시인의 <새는>으로 돌아가보자. 시는 과학이 아니므로 명제의 진위를 가를 수는 없다. 그러면 이 시에서 ‘새’는 누구일까? 새의 이미지를 써서 시인이 노래하고자 했던 ‘새’는 ‘당신’이 아닐까? 아마 옛날 내가 아는 ‘당신’이 저기 보이는 새와 비슷하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새가 노래하는 의미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노래하는 의미도 모르고 자꾸 노래를 하고 있고 당신이 날아가는 곳도 모르고 자꾸 날아가는 것이 된다. 당신이 무심히 하는 노래를 듣고 사랑에 빠졌던 나. 자유롭게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던 나. 내 마음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나에게 가까이 왔다 멀어지는 당신을 생각한다. 당신의 덧없는 마음까지도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는 노래한다. 새는…
새는/ 노래하는 의미도/ 모르면서/ 자꾸만/ 노래를 한다// 당신의 초롱한 눈망울을/ 닮았구나//
<미주문학 2009 여름호>
고대진,어거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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