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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여러 대덕스님들과 소중한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 불자님들과 같이 한 자리에서 하게 된 깊은 인연에 대해서 충심으로 감사의 합장을 드립니다.대단히 감사합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자리를 미처 차지를 못하시고 서서 계신 분도 있고 또는 앉으셨다고 하더라도 좌복도 부족하신데 저는 이와같이 이중 삼중으로 높은데서 말씀을 드리게 되어서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부처님 법을 설하신 분들은 부처님 법을 존중하니, 조금도 오류가 없이 말씀해야 하는 책임때문에 이 자리를 원래 사자좌獅子座라, 부처님을 인중人中사자獅子라, 사람 가운데 사자라고 이름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앉으시는 자리가 이 자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올라 앉을 때는 누가 앉든지간에 꼭 부처님 사상, 부처님의 그런 바른 정법正法을 그대로 말씀해야 한다는 지중한 그런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훌륭해서 그런게 아니라 부처님 법이 소중해서 이렇게 높은 자리에 잠시간 빌려서 앉은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양해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더러는 우리 불교를 말씀들 할 때에 부처님 가르침 즉 불교는 교리를 주로 한문으로 표현되고 내용도 갈래가 많아서 너무나 난해하다. 어려워서 들어가기(입문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말씀들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상당히 오랫동안 이 불문佛門중에서 지나왔지만 어렵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부처님 법의 요체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계행을 지키는 계율戒과 또 참선 염불하는 선정定과 또 모든 인간의 본질과 우주만유의 근본성품인 그러한 본체를 아는 지혜慧와 이 3가지(삼학도三學道)가 불법의 3대 요체가 아니겠습니까. 헌데, 3가지가 다 우리 마음을 제일 편안하게 하고 또는 우리 몸이나 사람사람끼리 교제나 모든 것을 가장 순탄하게 하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우선 계율戒律만 놓고 본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이 지켜야할 도덕률 가운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계율같이 합리적이고, 또는 우리 사회생활에 있어서 꼭 지켜야할 우주의 질서란 말입니다. 우리가 우주의 질서 우주의 도리를 지키지 않고 살 수가 없듯이, 또는 한 가정을 놓고 보더라도 가정에는 반드시 가정윤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그런 가정윤리라던가 또는 사회윤리라던가 모든 것의 핵심이 부처님의 계율관戒律觀에 다 들어있습니다. 유교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 그러한 유교의 오상五常이라던가 또는 기독교의 10계명이나 말입니다 또 이슬람교의 10계명이나 그러한 각 세계적인 종교의 우수한 도덕률이 불교의 계율 가운데에는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계율만 지킨다 하더라도 그때는 자동적으로 우리 마음도 편해지고 몸도 편해지고 또는 이런 계율이 없으면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참선 염불로 해서 이른바 명상, 깊은 명상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계율이 전제가 안 되어서는 절대로 명상에 못 들어갑니다. 흉내만 낼 뿐인 것이지, 마음이 정화가 안 됩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마음의 정화를 도모하는 것인데, 계율이 기본이 안 되면은 명상으로 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마음의 정화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또는 참다운 지혜智慧, 참다운 지혜는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 반야의 지혜가 참다운 지혜입니다. 바른 지혜는 이것은 세속적인 분별지혜 사전적인 지혜 이런 것은 세속적인 우리 인간의 의식의 범주내에서 분별시비하는 것이지 소위적인 모든 존재의 본질을 말하는 지혜는 못 됩니다.
따라서 좀 재주가 있고 또 학문적인 그런 수련이 깊어서 분별지혜는 어느정도 얻는다 하더라도 이른바 분별을 떠난 현상적인 문제라던가 또는 소위적인 문제라던가 이른바 형이상학形而上學 형이하학形而下學적인 문제 이런 것을 통틀어서 하는 지혜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을 떠나서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기독교의 그런 예수님도 굉장히 위대한 선배(성인)로 숭배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말하는 기독교의 인용은 제가 기독교를 폄하하는 의미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현행된 교리로 해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반야바라밀이 상당한 중요한 점이 빠져있다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현상적인 세간적인 문제 눈에 보이는 세계의 문제 그런 윤리도덕은 많이 들어있다 하더라도, 부처님 불교 가르침으로 해서는 이른바 무위법無爲法이라, 무위법이라. 또는 무루법無漏法이라, 아시는 바와 같이 무위법無爲法 이것은 인연에 따르지 않는 인연생으로 해서 모양이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모양을 지양한 진리 자체 또는 생명 자체의 가르침 이것이 무위법입니다. 무위법이란 말입니다. 그 자리는 바로 번뇌煩惱가 있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없을 무無자 셀 루漏 자 번뇌가 없는 무루법無漏法입니다.
따라서 번뇌가 없는 상대적인 그러한 상相을 떠나버린 지혜 이것은 방금 말씀드린 무위법이고 또는 무루법인데, 이러한 가르침은 다른 종교는 그런 것을 교조가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 같이 명확히 구분을 못합니다.
그러면은 일반 세간적인 때묻은 그런 도리 또는 우리 인간적인 분별시비하는 가르침과 부처님의 무위법이 어떻게 다르게 표현될 것인가. 어떤 다른점이 있는 것인가.
가령 우리가 어느 누구한테 물질이라던가 여러가지 것을 보시도 하고 또는 봉사활동을 한다고 합시다.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유의법有爲法의 그런 범주내에서는 '나'라는 관념도 떠날 수 없고 '너'라는 관념도 떠날 수가 없고 내가 물질을 많이 한다 많이 보시한다 적게 보시한다 그러한 상相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상을 떠나는 그런 행위 이것은 그 생각으로나 행위로나 그런것은 해탈解脫이라 하는 참다운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해탈인데 해탈이라 하는 불교의 궁극적인 도리 동시에 우리 인간의 본래적인 그런 도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미흡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남한테 우리가 많은 재물을 보시한다 하더라도 상相을 여의고서 '나'라는 상 또 '너'라는 상 또는 물질이 많다 적다는 상 그런 상을 여의고서 보시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이 도업道業이 되어서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제가 말씀드리는 이 도업道業과 우리 세간해서 보통 착한 일을 하는 선업善業과 이런 구분에 대해서도 그런 개념을 외워두시면 참 편리하십니다.
우리 중생이 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때는 이것이 선업입니다. 착한 일입니다. 선업 이것은 우리 번뇌를 모조리 모조리 다 소멸을 시켜서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그런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선업 이것은 항시 지옥이나 또는 아귀나 축생이나 우리 인간이 사는 이런 욕계欲界나 말입니다. 또는 더 올라가서 천상天上 하늘이라던가 무색계無色界 하늘이라던가 이런데 가는 것은 선업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삼계초월三界超越이라, 욕계欲界를 초월하고 또는 색계色界를 초월하고 또는 무색계無色界를 초월하고 말입니다. 천상도 다 초월하고서 정말로 대 자유인, 참다운 자기 말입니다. 참다운 자기인 대아大我라, 또는 참 진眞자 나 아我자 진아眞我라, 이런 경계까지 올라가야 그래야 참다운 자유인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해탈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와 같이 해탈에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커녕 아직 선업도 못쌓아거니와 그때는 어림도 없는 문제가 되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비관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비록 우리가 세속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우리 생활은 인간의 몸이니깐 욕계의 굴레 가운데 있습니다만 (우리가) 욕계의 굴레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우리 마음자체, 우리의 불심佛心자체는 조금도 오염이 안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해탈해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던가, 또는 달마스님이라던가 위대한 그런 도인스님들 이런 스님들하고 비교해 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자리만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유마경維摩經에, 부처님 당시에 유마거사惟摩居士는 여러분들께서 아실 분들은 아십니다만 불지佛地 부처님 지위에 오르신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상수제자上首弟子 사리불이나 목건련이나 그분들도 다 유마거사의 가르침을 받고 하셨습니다. 헌데 유마거사가 말씀하신 가르침을 모은 경전이 유마경維摩經이라, 유마경이어서 특히 재가불자님들은 유마경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또는 참선하는 분도 중요시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유마경은 주로 상相을 떠나버린 그런 경계에서 말씀한 법문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참선하는 분들이나 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의 반야바라밀을 알려고 하시는 분들은 상당히 중요시 경문입니다.
그 경문經文가운데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입불이법문이라, 이것은 들 입入자 아니 불不자 두 이二자 말입니다. 둘이 아닌 그런 수승한 법에 들어가는 법문이란 말입니다. 꼭 오늘 입불이법문에 대해서는 아주 확실히 인식을 가지고서 입불이법문에 입각해서 모든 행동을 하시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은 무엇인고 하면 이때도 역시 사리불이나 부처님 상수제자가 사리불 목건련 아닙니까 사리불 목건련을 위시해서 32대사 32의 아라한들한테 유마거사가 한 법문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입불이법문인데, 유마경에 내에서, 그것은 모든 존재가 둘이나 셋이나 이원론二元論도 아니고 삼원론三元論도 아니고 말입니다. 오직 일원론一元論이란 말입니다.
말로 하면 우리가 일월론을 알뚱말뚱 하니 그래도 제법 좀 감이 잡히지만은 우리가 실질로로 증명證明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입불이법문은 '나'나 '너'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또는 달마스님이나 또는 우리나 이 현상적인 상相으로 봐서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본체상 본질에 있어서는 조금도 호리불차毫釐不差라, 조금도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남도 미워도 하고 이따끔 짜증도 내고 하는 나 같은 사람과 석가모니 부처님같이 그와 같이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분과 왜 차이가 없다고 하는가 이렇게 또 의심도 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을 품는 그것은 차이가 있는 모양(상相)에서 의심을 품을 수 있는 것이지, 모양을 떠나버린 불교말로 해서 상을 떠나버린 더 구체화 시키면 '나'라는 상(아상我相) 또 '너'라는 상(인상人相) 말입니다. 또는 중생이라는 상(중생상衆生相) 또는 우리 수명이나 시간이 짧다 길다는 그런 상(수자상壽者相) 그런 상을 다 떠나버린 그런 경계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조금도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공부를 잘 하시는 분들은 많이 하시지만은 잘 안하시니깐 우리 스님네나 그런 어른들이 대체로 그 상의 범위 내에서 말씀들을 많이 하시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상의 내에서, 상의 구속된 그런 범주내에서 하는 이것은 다른 종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불법佛法인 점은 상을 떠나버린 가르침이 되어야 그래야 불법다운 것입니다.
그래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해탈이 되는 것이고, 공덕도 무루공덕無漏功德이라, 때묻지 않은 성불의, 이른바 도업道業이라, 그래야 도업이란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상적인 상에 얽매여서 행동하다가 죽어버리면 그때는 평생동안 때묻은 선업만 짓다가 만다 말입니다. 이런 것은 또 역시 죽은 다음에는 다시 또 역시 자기 업業에 딱 구속이 되어가지고서 업業의 그런 정도에 맞추어서 업에 상응하게 지옥도 갔다가 아귀도 갔다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상相을 어떻게 여읠 것인가? 상相을 여의는 법문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유마거사의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모두가 다, 모두가 다 하나의 생生(생명)이란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다. 우리 중생과 성자의 차이는 무엇인고 하면 성자는 모두를 다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이고, 우리 중생들은 천차만별로 우리 중생의 업장에 가려서 보는대로 본다 말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은 것도 있고 궃은 것도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평생 구분하고 분별시비하다가 판나(끝나) 버립니다.
더구나 요즈음은 그 무시무시한 정보의 홍수, 정보의 홍수가 되고, 중생이 되어서 좋기는 좋고 서로 피차 교류가 되어서 상당히 편리한 점도 많이 있으나 그러나 상을 떠나야 하는 그런 우리 불자들, 불교수행자로 해서는 굉장히 장애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복잡한데, 이 정보화 시대의 정보라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더구나 컴퓨터, 컴퓨터도 분명히 문명의 이기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걸로 해서는 물질적인 혜택을 접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자체인 우리 마음자체에서는 그것이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혼란만 더 많다 말입니다.
우리 젊은시대를 보십시오. 그 순수한 사람들이 우리 여러분같이 순수한 불자님들이 낳으신 아들이요 딸이요 다 그런 것이니깐 참 순수하니 마음씨가 좋고 선량한 아들이나 딸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엉뚱한 행동을 한다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생명의 본질, 생명의 본 고향을 떠나서 모양(상相)만 가지고서 모양만 가지고 따진다 말입니다.
우리 인류문화가 새로운 차원의 차근차근 좋은 쪽으로 발달되어 간다고들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모양은 조금 발달되어 가겠지요. 그러나 정작 우리 마음으로 봐서는 발달은 커녕 차근차근 퇴화되어 간다 말입니다. 이 지구상에 참다운 성자가 몇이나 있을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야말로 아주 참 한심스럽기가 한에가(한이) 없습니다. 하도 모양을 따지니깐, 모양을 상을 떠나야 할 그런 종교도 역시 거기에 매몰되어 간다 말입니다. 절도 그냥 큰절을 짓기 위해서, 큰절을 지을려면 또 상을 무수히 많이 내어야 겠지요.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절대로 겉을 꾸미는데, 자기 몸 치장이나 말입니다. 또는 붓 치장이나 또는 절에 시주를 하신다 하더라도 정말로 속들이 있게 하셔야지, 속들이 없이 한다고 할 때는 우리 부처님 법을 빛내는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른바 상을 떠나버린 모두를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는 것은 그냥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주 만유가 모두가 다 본체, 본체인 불심佛心뿐이라는 뜻이나 똑같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상으로 봐서는 하나가 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상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천千이요 만萬이요, 그런 구분적인 생각을 해서는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으로 해서 제 아무리 많은 현상이 있다 하더라도 근본자리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란 말입니다.
화엄경이나 우리 불가에서 그런 근본자리하고 현상하고 그런 비유를 항시 수파水波의 비유라, 물과 물결(파도)에 비교됩니다. 근본자리는 이것은 물에 비유하고 말입니다. 또는 현상적인 문제는 그런 물에서 바람 따라서 일어나는 파도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 몸이나 또는 눈에 보이는 세계는 모두가 다 모조리 물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똑같다고 비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은 물 자체는 보지를 못한다 말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그것을 마음 절실하게 느껴야 됩니다. 우리는 지금 현상에 눈에 보이는 세계, 우리 중생의 업장에 여과되어서 업장으로 보는 그런 세계만 보는 것이지, 나의 본질도 못 보고 너의 본질도 못 보고 만유萬有의 본질을 못 봅니다.
불심佛心이나 불성佛性 이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의 본바탕일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든존재 두두물물頭頭物物의 본 바탕이 바로 불심인 것입니다. 사람 마음이기 때문에 불심佛心이라고 하는 것이고, 일체존재의 본질(성품)이기 때문에 불성佛性 그러는 것입니다. 또 다시 바꿔서 말하면 법성法性, 실상實相, 도道, 또는 열반涅槃, 여래장如來藏, 여래如來 다 같은 뜻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각 중생 근기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거기에 맞겠시리 하신 법문이기 때문에 표현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근본내용은 똑같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람에 있어서의 그런 불심이나 또는 만유萬有에 있어서 그런 불성이나 말입니다. 또는 우주의 만법계萬法界, 우주의 법계에서 있어서 그런 본질이나 말입니다. 모두가 똑같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이 생각하기에는 아주 이름이 많으니깐 거기에서 혼동을 느낀다 말입니다. 진여眞如나 불심佛心이나 불성佛性이나 법성法性이나 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분명히 알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모두가 하나다. 이런 것은 불심자리 불성자리 우주의 본질자리 여기에서 하나란 말입니다. 성자는 그 자리를 체험을 다 해가지고서 성자는 그 자리와 똑같이 하나가 딱 되어버렸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그 자리가 지금 보이지가 않습니다. 다행히 우리가 성자 가르침 따라서 그대 마음은 본질이 불심이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지, 믿음으로 아는 것이지, 우리가 현실로는 모른다 말입니다. 현실을 모르는 것이니깐 자기 습관성 따라서 보이는대로 생각하고 보이는대로 행동한다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특히 우리 한국은 지금 어려운 경제공황에 처해서,(IMF시절) 다 모다 여러모로 참 고민도 하고, 또 더러는 비극적 사례가 생기고 하지 않습니까.저 같은 사람도 아주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특히 미국에 있으면서 그때그때 한국에서 보시를 해주신 그런 덕을 많이 입은 사람으로 해서는 더욱더 가슴아프게 죄스럽게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원인은 어디가(어디에) 있는가. 학자는 여러모로 분석들을 많이 하겠지요. 경제학자는 경제학자대로, 또는 철학자는 철학자대로 해서 그 원인을 분석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고 하면, 사람이 참사람, 사람이 자기의 본바탕을 모른다 말입니다. 자기의 본 바탕을 확실히 모르거니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인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그런 것도 알턱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한 말로 세속적으로 말하면 그때는 철학의 빈곤이란 말입니다. 철학이 없습니다. 철학이. 칸트철학, 니체철학 그런 철학만 철학이 아니란 말입니다. 일체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 이것을 아는 것이 철학 아닙니까. 물론 각 철학 따라서 그때그때 철인의 자기가 구명한 자기 연구성과에서 차이가 있다고 볼 수가 있다 하더라도 하여튼 목적만은 모두가 인생과 우주의 본 바탕을 밝히는 것이 철학이란 말입니다. 또는 본바탕을 밝힌 분들은 모두가 다 우리 인간의 본질이 뭣인지 안다 말입니다.
가사 소크라테스나 또는 플라톤이나 그런분들은 다 아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런 위대한 철인들은 그분들은 벌써 성자의 지위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체계가 보다 더 완벽한가 완벽하지 아닌가는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그런 분들 말씀이나 석가모니 말씀이나 예수 말씀이나 대체로 방향성은 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아무리 불경을 참 통달을 할 정도로 많이 불경을 보고 외이고 한다 하더라도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본질자리, 우리 불심자리에 대해서 큰 이해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를 아직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걸로 해서는 자기 마음도 바꿔지지 않고 자기 건강도 바꿔지지 않습니다.
모든 행복이, 장사하는 사람이나 또는 농업을 짓는 농부나 말입니다. 또는 회사원이나 또는 어머니나 아버지나 또는 아들이나 딸이나 누구든지 간에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가장 좋은 어머니, 좋은 아버지 가장 바른 딸 바른 아들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또는 가장 위대한 종교인이 되기 위해서라도 꼭 철학이 필요합니다.
그 철학은 그냥 누구철학 누구철학 교리를 많이 안다는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본바탕이 무엇인가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저 사람과 나하고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말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바른 관계가 선정된다(이루어진단) 말입니다.
그 정객政客(정치인)들이 말하는, 정객 그래서 오죽 구변口辯이 좋고 웅변이 좋습니까. 그러나 그분들 말씀을 듣고 있어 놓으면 저분한테 철학이 있구나 없구나 그냥 짐작할 수 있단 말입니다. 어떤 구분이 있는가 하면 철학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절대로 자기 정적政敵이라고 하더라도 정적의 인격을 모독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그 정적과 내 마음도 본래가 한 마음이란 말입니다. 자기한데 대게 짖궃게 구는 그 나쁜사람, 원수같은 그 사람도 역시 자기와 '나'와 한마음입니다. 다만 겉만 다를뿐입니다. 그러면은 겉하고 그 알맹이 불심, 이 본체하고는 그 다른 것인가.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겉은 죄를 많이 지었으니깐 더러울 것이고 마음은 마음대로 또 다르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만, 사실은 겉과 속은 똑같습니다.
요새 경제나 뭣이나 모두가 거품을 걷어라, 그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은 지금 거품을 가지고 삽니다. 거품가지고 모두가 다. 겉은 이것은 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몸을 단정하고 좋은 양복을 입고 몸에다가 여러 가지 금붙이를 많이 붙혔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그림자에다가 그림자를 붙힌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당체當體가 즉공卽空이라, 몸뚱이 이대로 몸뚱이뿐만 아니라 일체물질 이대로 모두가 다 사실은 텅텅 빈 것입니다. 여러분들 아까 반야심경般若心經 다 외이셨지요. 색즉공色卽空이라, 이것은 무엇인고 하면 색色은 여러분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물질을 말하지 않습니까. 물질 그대로 공空이란 뜻입니다. 즉 과학자같이 물리학자같이 물질을 분석하고 분석하고 하면 그때는 공인 것이 사실이지 않는가. 물리학자같이 물질을 다 분석하고 공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석공析空) 당체즉공當體卽空이라. 여기 마이크가 있으면 마이크 이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꽃이 있으면 꽃 이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공이란 말은 물질이 아니란 뜻입니다. 다시 뒤집어서 말하면 그때는 물질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불교에서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 삼계유심이라. 삼계三界(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라는 것은 우리 중생이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모든 세계가 삼계 아니겠습니까. 삼계유심이라, 삼계가 오직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순수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순수생명(진여불성眞如佛性)이외에는 다른 것은 그때는 헛것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다. 그 금강경 도리가 다 그런 도리입니다.
그런 도리가 우리 눈에 보이는 중생의 때묻은 눈에 보이는 그런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초기에는 중생들 그릇에 맞추어서 있다 없다. 내가 없고 네가 있다. 이렇게 중생들 보는 도리에 이른바 유루법有漏法이라, 그 인연법의 그런 범위내에서 말씀했지만, 부처님의 본 뜻은 중생의 고苦를 다스리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고를 다스릴라고 생각할 때는 역시 우리 번뇌煩惱를 해탈해야 한다 말입니다.
번뇌를 해탈할려면 그때는 무루법無漏法이라, 또는 무위법無爲法이라, 그런 초월적인 본래적인 본체의 자리 그 자리에 안 들어가면 절대로 해탈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중생이 잘못 알아먹지만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사람이 보는, 일반 중생들이 보는 모든 법은 꿈이요 헛깨비요 그림자요 또는 아지랑이다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불자님들께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여실히 짐작을 잘못 하시겠지요. 그건 당연합니다. 우리 같이 법의法衣를 입고서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내 몸뚱이가 이것이 몽땅 비어있다. 내 몸뚱이가 비었거니 내 집이나 내 재산도 결국은 내것이 아니다. 잠시간 이것은 인연 따라서 나툰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한다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을 못하니깐 종단 가운데도 감투가지고 싸우고, 뭣가지고 싸우고 좋은걸 차지할려고 싸운다 말입니다. 부처님대로 부처님 법대로 살면 제일 편하고, 그러면 순식간에 이 세계가 다 극락세계極樂世界가 바로 됩니다.
성자의 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당체가 즉공이기 때문에 이 세계 이대로 다 공입니다. 공의 알맹이가 무엇인가, 그 주체가 뭣인가. 바로 불성(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광명찬란한 만능을 갖춘 불성이 우주에 지금 충만해 있습니다. 사람 몸도 역시 지금 나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의 때묻은 눈, 상을 보니깐 나쁘고 좋다 하는 것이지, 본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때묻은 그 사람도 역시 바로 부처님 몸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좀 어려우셔도 그래도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말씀한 도리만은 여러분들이 꼭 확신을 하셔야 그래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때묻은 법이 아니고 말입니다. 세간적인 법이 아니고 불세간적인 해탈의 법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좀 어려우시더라도 금생에 못가면 내생에 가고, 정말로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라, 몇 만생을 우리가 뱅뱅 헤멘다 하더라도 본래 부처기 때문에 꼭 부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천체우주도 부처님 법에 따르면 성겁成劫이라, 형체가 이루어 지고 말입니다. 그 다음에 또 역시 생물이 사는 살 주住자 주겁住劫이란 말입니다. 지금은 주겁입니다. 주겁은 우리 생물체가 산다 말입니다. 모양으로 지금 삽니다.
그러나 드디어 몇십 억년 지나면 또 역시 우주의 법칙 따라서 우주의 자연적인 법 따라서 다 파괴가 됩니다.(괴겁壞劫) 파괴가 되면은 어떤 것이나 같이 파괴가 되어 버리고 말겠지요. 빨리 우리가 파괴의 참화를 참담한 재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파괴가 되기 전에 공부를 해가지고서 파괴의 그런 재해를 입지 않을만큼 천상으로 올라가야 된다 말입니다. 다행히 부처님 법은 대자대비한 법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이 차근차근 공부를 해서 천상에 다 올라간 뒤에 파괴가 됩니다. 기독교 그런 최후의 심판 같이 사람 그대로 태운채로 그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지 않는다 말입니다.
그래서 파괴가 된 담에는 다 텅텅빈 공무변空無邊이라, 그때는 공겁空劫이 됩니다. 공겁은 그때는 몸뚱이는 전혀 없고 마음만 있는 식識만 존재하는 그런 중생으로만 잠시간 머문다 맙니다. 또 오랜 세월이 수백 억년이 지난 다음에는 또 역시 우주의 자연법으로 해서 또다시 우주 형체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부처님 법입니다. 그래서 사겁四劫(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우주가 텅텅빈데서 모양이 이루어지고, 또 생물이 사는 주겁이라, 또는 모두가 파괴되는 괴겁이라, 다시 또 텅텅 비어집니다. 이와 같이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영겁회귀永劫回歸라,
위대한 철인이나 또는 위대한 물리학자들은 대체로 부처님 법대로 지금 증명이 다 되어갑니다. 부처님 법은 일체를 초월한 영생의 법이기 때문에, 부처님 법에서 말씀한 것은 현대 물리학도 온전히 못한다 하더라도 점차로 차근차근 증명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법은 정말로 진실로 가장 투철한 과학인 동시에 가장 궁극적인 철학이고 또 동시에 영생해탈永生解脫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해탈解脫의 길입니다. 해탈의 길로 가기위해서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생적인 세간법을 지양을 해서 제법諸法이 다 비었다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내 몸뚱이나 내 절이나 내 감투나 말입니다. 모두가 다 꿈이요 헛깨비요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기 위해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른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꼭! 모두가 다 꿈이요 헛깨비요 그림자요 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불자님들께서 여실하게 그렇게 보실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실인 것이니깐, 그것이 옳은 것이니깐 말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나 자기 아들을 위해서 자기 딸을 위해서나 무엇을 위해서나 그렇게 봐야 됩니다. 그렇게 봄으로 해서 우리 업장業障이 나날이 가벼워집니다. 그래야 잘하면은 금생에 성불이 되어서 우주의 본성인 불성과 하나가 딱 될 것이고 더디면은 내생에 말입니다. 성불 않고서 만다면 모르거니와 게으름 부리면 또 다시 태어나고 태어나고 죽고 낳고해서 잘못 살아서 지옥으로 갔다가 조금 잘 살면 사람으로 왔다가 더 나아지면 천상 갔다가 말입니다. 천상도 역시 한계가 있는지라, 세월 지나면 다시 또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복福 떨어지면 그때는 천상에서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꼭 마음을 가다듬어서, 우리 길은 내 행복을 위해서나, 우리 민족의 세계적인 웅비雄飛를 위해서나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경제공황을 위해서나 어느 길로 보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는 길이 가장 지름길입니다.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계행戒行을 지키기가 제일 쉽습니다. 계행을 지키면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습니다. 몸이 가볍고 마음이 가볍다는 것은 우리 피가 맑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항성이 강해서 왠만한 병은 절대로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꼭 음식 함부로 자시지 말으십시오. 음식 그것이 많다고 해서 절대로 살로 안 갑니다. 영양이 과다게 되면 공연히 문명병文明病만 생깁니다.
우리 불자님들 정말 사랑하는 자기 아내를 위해서 자기 남편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위해서, 꼭 가정의 풍토를 말입니다. 가족의 풍류를 부처님에게 꼭 맡기십시오. 그러면 아들한테나 딸한테나, 아들 공부를 위해서나 뭘 위해서도 훨썩 좋으신 것입니다. 채식을 하고 음식을 적게 먹으면 머리도 훨썩 영특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냥 우리 마음 닦으라는 법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몸에도 제일 좋은 묘방입니다. 몸이라 하는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라 하는 우리생명의 핵이라는 위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거품같은 존재인지라, 마음이 정당할 때는 몸의 그런 긴장이나 그런 것도 될 수가 없습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나한테 짓궃게하는 원수도 원수가 아니거니 남한테 좋게 하면 바로 그것이 나한테도 도움이 되거니 이렇게 생각할 때는 사람사람끼리 긴장이 되겠습니까.
계행을 지키되 그냥 지킬 것이 아니라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반야바라밀. 유마거사 말씀하신 입불이법문이라, 우주는 오직 하나의 생명체이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계행을 지켜야 그래야 잘 지켜지고, 그렇게 되어야 때묻지 않은 영생해탈의 법으로 우리 생명이 차근차근 정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천도를 받으실 영가들이시여!
오늘 모이신 우리 불자님들 조상이라던가 또는 형제 친척이라던가 또는 이 도량을 지켜오신 도량의 여러 영가라던가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사생자부四生慈父라, 눈에 보이는 생명체나 눈에 보이는 않는 생명체나 모두를 다 이루는 법입니다.
사람이 죽어지면 그냥 천상이나 극락으로 바로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꼭 우리 업 따라서 업이 다할때 까지는 항시 뱅뱅 윤회하는 것입니다. 업이 다 끝나버려야 극락에 태어나 영생하는 것이지, 업이 끝나지 못하면 영구히 업 따라서 지옥으로 갔다가 어디로 갔다가 헤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삼계윤회三界輪廻 아니겠습니까. 삼계윤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인과법因果法이라고 하는 것은 삼계 내에서는 적용되는 하나의 도리기 때문에 그 도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영가들이시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죽어지면 잘못 살면 꼭 저승이라, 저승은 불교말로 중음계中陰界, 중유中有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헤매는 것입니다. 원한이 많으면 원한 때문에 구속되어서 헤매는 것이고, 남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미련 때문에 헤매는 것이고, 오랫동안 헤매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생각하시오. 영가들이 갈 곳은 영생해탈의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극락세계에 못 가면 삼계윤회가 있을뿐입니다.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서는 영가들이시여, 꼭! 반야바라밀을 굳건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은 무엇인고 하면 이것은 상相이 없는 지혜입니다. '나'라는 상(아상我相), '너'라는 상(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모든 현상적인 것에 걸리지 않는 지혜가 반야바라밀의 지혜입니다.
반야바라밀의 지혜를 믿고, 또 극락세계는 광명정토光明淨土입니다. 극락세계는 중생과 같은 몸이 있는 중생은 못 태어납니다. 청정한 중생들, 업이 없는 삼독심三毒心을 다 녹여버린 그런 사람들이 태어나는 영(영생)의 세계입니다. 극락세계極樂世界는 그러니깐 참다운 진리의 광명光明으로 충만한 세계입니다. 극락세계 중생은 몸도 광명이고 또 산천도 모두가 다 광명으로 장엄된 세계입니다.
따라서 영가들이시여, 반야바라밀을 굳건히 믿고서 그 광명정토인 극락세계에 대한 간절한 흠모欽慕를 가지고서, 극락세계의 교주敎主는 아미타 부처님(阿彌陀佛)입니다. 아미타 부처님 또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25보살이 거기에서 항시 우리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해서 원력願力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 원력이 48원願이라, 간추리면 발사홍서원發四弘誓願이라, 사홍서원이란 말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바로 불심佛心이기 때문에, 우주 자체가 모든 중생을 극락세계로 해탈시키고자 하는 원력이 본래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업業 때문에 가려서 한사코 극락에 지금 안 갈려고 애쓴다 말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반야바라밀을 굳건히 믿으시고서 또는 극락세계, 광명光明으로 빛나는 극락세계를 관찰하시면서 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불을 간절히 생각생각에 염念하시면서 극락세계에 왕생往生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여기 주지스님인 혜산惠山스님(가평 반야사 회주, 2017년 원적)은 저하고는 굉장히 인연이 깊은 스님입니다. 어려서 고향도 같고, 또 아버지들도 같은 친구였습니다. 친구여서, 저도 혜산스님 아버지한테 사랑도 받고 혜산스님도 제 아버지한테 사랑도 받고 그런 셈이고, 또 혜산스님 그 형이, 그 형님은 아주 머리가 굉장히 수재秀才였습니다. 수재여서 저 시골 구석에서 서울법대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한 분입니다. 그래서 저보다 나이가 좀 적어서 저를 항시 형님이라고 해서 그렇게 친히(친하게) 지낸편이고,
또 혜산스님은 저희들이 고향에다가, 거기가 아주 구차한 고향인데, 고향에다가 세운 중학교(망운중학교)에서 제가 선생질 할 적에 혜산스님은 거기에서 배웠습니다. 그러니깐 아버지대에서부터 친구대로 내려왔고, 저한테 또 중학교는 배웠고 말입니다. 또 승려도 역시 나중에 저보다 나이가 훨썩 적은지라 대학 나온 뒤에 저한테 와서 제 상좌로 해서 또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혜산스님이) 세속에 좀 인연이 있어서 잠시간 고등학교 선생으로 계시다가 다시 또 승려가 되셔서 이렇게 그야말로 이런 성지聖地에다가 말입니다. 원래 심성이 맑고, 참 훌륭한 분이기 때문에 또 이런 성지를 만나서 단시일내에 이렇게 여법한 도량을 만들어놔서 참 제 마음은 여러분들과 더불어서 환희심歡喜心에 충만해 있습니다. 이 터는 굉장히 아주 참 수려한 터입니다. 그러고 참 기운이 사방을 둘러봐도 모두가 다 이 절을 이 터를 해코치하려는 그런 부정적인 기대(기운)는 조금도 없습니다. 이런 돌 하나에도 부처님 정기精氣가 아주 충만해 보입니다.
(반야사에서) 이런저런 기도 모시면 기도도 속 빠르고 참선하면 참선공부 해탈도 속빠르고 합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자주 내왕하셔서 우리 혜산스님을 잘 도우셔서 기도도 모시고 참선도 하셔서 정말로 하여튼 부처님 법을 바르게 닦아나가시길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 19980518 청화큰스님 가평 반야사 증명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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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반야사 증명법회가 큰스님의 주옥같은 법문입니다만 기존 텍스트가 없는 법문입니다.
유튜브 영상작업으로 녹취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