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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여기서 말하는 가난(헬라어 프토코스)은 절대적인 빈곤을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절대적인 빈곤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 가난을 벗어나기 힘든 그런 빈곤을 말하는 것이다. 즉 빈곤하게 된 과정보다 다시 일어서기 힘든 지경이 된 가난에 의미가 있는 그런 가난함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난함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말씀하고 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가난해서 마음도 가난해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 곧 마음과 영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어떤 것을 자기 안에 채워 넣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으로 대변된다. 사람은 누구나 끊임없이 자기 안에 뭔가를 채워서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어지기를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 뭔가를 끊임없이 채워야 하는 사람의 그 마음이 가난해지면 천국이 저희 것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앞에서 이 가난함은 스스로 채울 수 없는 가난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 상태라는 것은 자신이 그 빈곤을 채울 수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뭔가를 끊임없이 채우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에 사람 스스로 채운 것이 없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끊임없이 자기 안에 뭔가를 채우려고 하는 사람의 속 심령 안에 어떤 것도 스스로 채우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바로 그런 사람이 천국이 저희 것이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공허함, 살면서 끊임없이 사람을 공허하게 하는 '왜 사는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하는 그 공허함이 스스로 채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야 천국이 저희 것이 된다는 것이다. 천국이 자기의 것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왕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천국의 모든 것으로 자신의 가난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천국이라는 것이 달리 천국이 아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한 복음서라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보다는 천국이라는 표현이 많은데, 이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것을 자기 안에 마음껏 채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의 공허함, 사람의 심령의 가난함은 원래가 하나님 나라의 의가 채워져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다. 하나님의 의,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의로 다스려지듯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채워지는 것, 그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말씀은 뭔가를 끊임없이 채우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사람에서 비롯된 유흥이나 재물이나 명예와 같은 것으로 채워질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빈곤과 같이 사람으로는 어떻게 채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가 채워진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천국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나라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가난, 사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사람의 공허함이 원래 채워져야 하는 하나님의 의로 채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다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가 몇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펜데오라는 헬라어는 헬라어 중 가장 극심한 슬픔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애통하고 슬픈 이유는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서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수고한 노력의 결과로서의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와 같이 사람이 자신의 일부로 자신의 사랑으로 여기던 것을 잃어버려서 이제 함께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은 애통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가장 애통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 그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연인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이긴 하지만 어쨌든 사람에게 있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 삶의 의미야 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함은 그 인생의 의미가 없어진 애통함, 그 극심한 애통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삶의 의미를 돈이나 명예와 같은 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에 두고 있다가 잃어버린 그런 애통함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사람이 왜 사는지, 왜 존재하는지, 이 삶 자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그 애통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왜 존재하는지, 자신의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애통한 사람 그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를 가지고 계시고 그것을 알지 못하여 애통한 사람은 자신의 창조주를 찾을 것이고, 자신이 비롯된 뿌리를 찾고자 할 것이며, 그것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자신으로는 그것을 회복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이 너무 애통한 그런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한 자인 것이다.
그런 사람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위로>라는 것은 등을 두드려주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위로는 <가까이 부른다.>는 의미를 가진 팔라칼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혹은 예수님께서 가까이 부른다는 것은 같은 자리로 부르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자리라는 것이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는 공간에서의 자리가 아니라 정체성의 자리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같은 정체성으로 부른다는 말씀인 것이다.
애통하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알지 못함으로 느끼는 애통함이다. 이런 애통함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극심하게 느껴야 하는 애통함이지만 알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하여 애통해 하지 않는다. 팔복에 나오는 것들이 알고 보면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만한 것이 그렇게 누구나 다 아는 것이 아님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만민을 위한 복음이라는 보편성과는 다른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에 관한 것이라 보면 된다. 모두는 위한 복음이다.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하여 순종하는 모두이어야 하고, 그 순종에 관해서 사람이면 가능한 것이기에 모두를 위한 복음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삶의 의미에 대하여 애통해 하는 것 보다는, 돈이 없는 것이 더 애통한 것이 일반적이다.
사람이 자기 정체성에 대하여 공허함을 세상의 것으로 채운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지 않음과 같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원래 하나님이 그 형상대로 만드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기(명)가 되었을 때 온전한 존재인데, 사람이 육신으로 뭔가를 얻을 수 있어 그릇과 같은 자기 안에 세상에서 사람이 만들고 구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을 채우면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 또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세상에 있는 재물과 명예에 두면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없다는 것을 애통해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가까이,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하는 자리에 부르시지 않는 것이다. 즉 위로함이 없는 것이다.
애통하고 위로하는 것은 육신을 가졌기에 육신에 관한 것으로 애통해할 수 있다.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것, 사람이 왜 살고,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는 가난함과 그것이 없어 애통한 마음 그것이 있어야만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부르는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를, 존재의 의미를, 삶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에 복음을 전하시면서 그 말씀으로 시작하시는 것이다.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성경공부에 있어 성경에 사용된 원어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보편성이 부족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성경은 누가 읽어도 자신의 말씀이 되도록 말씀하신 것이지, 원어나 신학적 지식이 있어야 알 수 있는 말씀이 되면, 그것은 만인을 위한 복음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원어의 의미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되긴 한다. 그 원어가 주는 의미가 어떤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언어가 있고, 그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어 읽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그 언어로 읽어도 하나님을 아는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경영하시기 때문이다.
이 온유라는 것은 헬라어로 '프라워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 단어는 흥분을 진정시킨다는 의미가 있어 진정제의 약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단어의 통상적인 용법은 '자신을 평가 절하하고 부당하게 대우하고 해롭게 하는 사람을 용납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건 정말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온유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정말로 부당하게 취급한 행동의 경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한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하고, 또 유대인 곧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의 왕이신 이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고 죽이려고 처형한 형틀이 바로 십자가고 그것을 억울하게 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땅을 얻는다는 것은 정말로 단편적으로 정의하면 그것은 '사람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그렇고, 사람이 자신이 교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서 어디서든 사람과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넓은 땅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당하게 십자가를 지시는 온유함을 보이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 얼마나 넓은 땅을 얻는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온유한 자가 땅을 얻는다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확실히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삶이 그러해야함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온유함이라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죄인에게 의인이 죄인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앙이 더 좋고, 말씀의 계시가 더 밝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했을 때, 신앙 없는 사람을 훈계하려 한다면 그것은 온유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그 신앙 없는 사람(땅)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을 얻으려면, 때로 계시가 어두운데 주장하는 것에 의하여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따라가는 수고를 감당하는 것, 그것이 온유함이다.
그렇게 한다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더 밝은 것인지를 알게 하실 것이고, 어두우면서 밝은이를 끌고 간 사람이 그것을 깨달을 때 자신보다 더 밝고 분명히 알면서 자신의 주장 앞에 죄인이 되고, 그것을 맞는 것으로 여겨 수고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사람에게 순종하는 그런 관계, 곧 그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보이신 온유함인 것이다. 그리고 그 온유함을 아는 사람들은 다 예수님이 얻으신 땅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에서 가르치시기를 그런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 복인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을 얻는 일이 자신의 기업, 자신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사람 앞에서 더 아는 것을 주장하거나 안다고 모르는 이들을 심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깨달을 때 까지 그들의 주장에 수고하는 희생을 보이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구하신 하나님의 일이 자신의 일과 기업이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인 것이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여기에 사용된 의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라는 말인데, 이는 신학적 성격이 강한 단어라고 한다. 이 '의'는 신적 본질에 속하는 속성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그 단어의 의미에서 보듯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주리고 목마른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마귀가 예수님께 돌로 떡을 만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먹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의 먹을 것, 사람의 고픈 배를 채우는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즉 이 배고픔은 육신의 배고픔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신의 베고픔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으며 육신의 배가 불러진다는 의미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육신의 배가 부르다는 것은 한 마디로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이 배부르게 채워진다는 의미인 것이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성 여인에게 '네가 네게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면 네 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서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목마름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에 대한 목마름이고, 예수님을 제대로 알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목마름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성경을 잘 아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가 문자로 표현된 것이다. 성경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행간을 읽듯 해야 하는 것이다. 심청전을 문학적으로 연구한다고 심청전을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심청전을 읽고 효자가 되는 것이 심청전을 제대로 읽은 것이듯, 성경을 읽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성경을 바로 아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가 배부르게 채워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그렇게 본질적인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즉 그것에 순종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알려고 할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인 것이다.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은 '하나님의 자비', '불쌍히 여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엘레에몬'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긍휼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을 베푸신 것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구나 알듯이 죄에 빠진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것은 누누이 강조하듯 죄는 사람이 짓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그런 구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와 자신들의 존재 목적을 알기 위하여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물론 따지고 들면 대속하신 것이지만,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러니까 원래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사는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보이신 것이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반복되게 이야기하듯,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이것은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없다고 모욕을 당하는 것이고, 수학박사가 낙제생에게 수학을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그런 구조라는 것이다. 그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표현한 긍휼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단지 나보다 안 좋은 형편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하게 생각하여 돕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긍휼,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긍휼은 나 보다 못한 사람이 나 보다 더 잘난 줄로 알고 나를 가르치고 심판하려 하는 것에 나를 내어줌으로 그 사람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때 까지 수고하는 그런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법도 그러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쉬울 것 같지만 무지 어려운 것이다. 어려운 것은 사람에게 감당할 수 없는 경지가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즉 원래는 쉬운 것인데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는 의로움이 있다 보니 그렇게 하는 것 힘든 것이다.
어떤 공동체, 무엇을 추구하는 모임에서는 그 추구하는 바에 대하여 앞선 사람이 늘 있고, 그것을 배워가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사회도 마찬가지고, 세상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공동체가 추구하는 의에 대하여 더 아는 사람이 아직 배워야 하는 사람을 심판하거나 부족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더 나아가서 알 때까지 그 사람보다 더 아는 것이 어린 사람을 위한 수고가 되는 것, 희생이 되는 것 그것이 긍휼인 것이다.
그런 긍휼을 보이는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는 사람이라는 것이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어떤 것이 청결(헬 : 카다로스)하다는 것은 비었다는 뜻과는 좀 다르다. 청결하다는 것은 있을 것이 깨끗한 상태로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비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안에 채워져야 할 것, 그리고 그 채워진 상태가 하나님이 보실 때 청결한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았는데 그 귀신이 돌아다니다가 원래 있던 곳(사람 속)이 깨끗하게 치워진 것을 보고 이전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간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 12장, 눅 11장) 즉 사람이 그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어떤 것을 채워야 하는가 하는 것이 청결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무엇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그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깨끗한 것에 무엇인가를 담기 위함이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하셔서 깨끗하게 하신 것은 우리 안에 무엇인가를 채우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채우고자 하시는 것이 채워졌을 때 그것이 바로 청결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채워져야 할 것, 우리 안에 채워졌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서 청결하다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그 안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채워져서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형상(이미지)을 나타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처음 존재가 누구신가 했을 때,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라고 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을 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온전하게 있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서 정말로 깨끗하고 청결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상태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보았다는 것은 자기 안에 그 영상과 이미지가 각인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알아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깨끗하고 청결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안다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또한 그런 사람을 알아보기에 그런 사람을 보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본래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본체를 본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으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 본다는 것이다. 즉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도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라 대접하였고, 야곱도 에서를 만날 때에 하나님을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의와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있어서,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며, 그런 사람은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듯이 마음 안에 있어 삶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이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없는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하나님을 만난 기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인생의 목적, 하나님의 형상과 말씀과 의가 그 사람 안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러한 것이 온전히 마음속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요, 그런 사람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복을 누릴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에 나오는 화평은 헬라어로 '에이레네'라는 말이다. 히브리어로는 다들 잘 알고 있는 '샬롬'이라는 말인데 그 뜻은 잘 아는 바와 같이 평화인데 그 의미는 평화라는 것은 서로 균형이 맞춰진 상태일 때 평화이기 때문에 이 말은 하나가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이후에 '평안하뇨?'라고 하실 때 그 평안이 바로 이 에이레네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그러니까 형체가 없으신 분이신데 그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로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하셨다. 그 형상이란 영어로 image이다. 즉 그것은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떠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첫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이미지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과 생명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바로 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사람을 지으셨을 때와 같이 육신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생명(유전자)이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표현되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었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고, 그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지시고 동일한 육신을 가지셨기에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시려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평안이고 화평인 것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이 평안이 되는 상태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義)가 육신을 가진 사람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상태, 그것이 바로 화평이고 평안인 것이다. 에이레네라는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여기에 나오는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티오코'라는 단어라고 하는데, 이는 '뜻을 따르다,' '좇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렇다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라고 하는 것은 '의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의를 따라 간다는 것은 어떤 핍박이 수반되어도 따라 간다는 것이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은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의를 따라 간다는 것은 그 의를 옳다고 여기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북한 주민이 탈북하여 남쪽으로 오는 것을 의로 표현해 본다면, 사람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안에서 사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탈북하여 남쪽으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탈북 과정도 의를 좇아 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는 방송이나 매체를 통해서 우리가 들은 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당연히 하나님의 의다. 즉 하나님의 의를 좇아가는 사람은 천국, 곧 하나님 나라가 저희의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북한을 탈출하여 대한민국의 의인 민주주의를 좇아 온 사람은 대한민국이 자신들의 것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좇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흔히들 핍박이라고 하면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하여 괴로운 일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의를 따라 가는 과정에서 겪는 곤고함이라는 것은 핍박이 맞지만, 예를 들어 길 가는 사람 붙잡고 예수 믿으라고 떼를 쓰다가 그 사람들이 한 소리 하는 것은 핍박이라 할 수 없다. 그건 핍박이라기보다 자초한 일이고 어떤 면에서 보면 벌을 받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는 낮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다. 또 십자가는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법이다. 그 의를 좇아가면서 겪는 곤고함은 수고와 희생의 곤고함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괴로움이 아니라, 의를 따라가다 보니 감당하는 곤고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 곤고함이 바로 다른 사람이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 괴로운 일을 당하는 것이지, 그런 원인인자 없이 당하는 곤고함, 그리고 다른 사람을 능동적으로 자극함으로 받는 반사작용을 핍박이라 하면 곤란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핍박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핍박을 받으셨는데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능동적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잡히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늘의 군사들로 물리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잡혀서 처형당하신 그런 핍박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핍박이다. 그것이 의를 따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케 하러 왔다고 하니, 예수님의 이름과 성경 말씀으로 사람의 마음을 시끄럽게 능동적으로 자극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겪는 육신의 수고와 비난과 괴로움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과정이 표준이다. 그렇게 할 때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