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봄은 왔지만 아들이 떠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아들을 돌아오지 않는다. 마땅히 갈 곳도 없지만 가슴이 답답해서 집을 나왔다. 애써 마음을 추스리고 경북 청송으로 향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청송을 승용차로 3시간동안 내비게이션 도움으로 찾아 간곳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교도소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꽃들은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흐트러지게 피어있었다. 아들이 태어날 때 남편은 기뻐하며 작 명원 을 찾아가 좋은 이름을 지어 출생신고를 했다. 그런데 2년전 아들 000가 지금 경찰서에 있다는 담당 형사의 전화를 받는 순간 앞이 보이지 않고 온몸이 떨려왔다.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경찰서로 갔다. 아들을 보기 위해 면회 신청서에 이름을 써야 되는데 차마 써지질 않았다 가끔 속을 썩일 때는 호적에서 이름을 지우겠다고 모진 말을 해 놓고 관계에다 엄마라고 쓰기가 부끄러웠다.창살에 비춰진 얼굴이 내 아들인가 도저히 믿을 수 없어 한참을 울었다. 왜 이곳에 있냐고 물어 볼 수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 달 동안 까맣게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살다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알지도 못 한 체 대전 법원에서 푸른 재수 복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판사 앞에 고개 숙이고 있는 아들을 보게 되었다. 아들 이름이 불러지고 형이 정해지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가 아들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의 부축으로 일어나 정신을 차려보니 아들은 없고 텅 빈 법정의 알싸함이 온 몸을 감싸 앉았다. 그 후로 아들은 대전 교도소에서 000이름 대신 평생 지울 수 없는 숫자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그 숫자는 잠을 자는데도 나타났고 세상에 나에게도 이런 일이 있을까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아들을 접견 갔을 때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는데 온 몸이 후들 후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이 찾아 갔다. 무엇부터 어찌 해야 되는지 물어 보기도 창피하고 용기도 나지 않아서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내게 직원이 도와줘서 아들을 볼 수 있었다. 짧게 깍은 머리에 흰 고무신을 신고 나타난 아들과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 울다가 정해진 10분이 지나고 아들은 엄마 죄송해요 라는 말 한마디만 겨우 남기고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들어갔다. 아들은 이틀에 한번 어떤 때는 3일에 한 번씩 편지를 보내 왔다. 지난 일을 깊이 반성 하는 편지를 읽다 보면 편지지 위에 글씨가 번져서 무슨 글씨인지 조차 알아보기 어려웠다. 가끔은 아빠를 생각하는 마음에 등 뒤에 눈물이란 재목으로 글을 써서 보내오기도 했다. 고생하는 아빠에게 투정하고 말썽 피워 놓고 아빠 등 뒤에서 소리 없이 흘린 눈물이 그곳에 있으면서 아픈 기억으로 생각났던 거였다. 햇볕이 들지 않은 좁은 방에서 얼마나 울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다. 서툰 컴퓨터로 글을 쓰는 나를 많이 도와주었고 이곳저곳에 엄마의 글이 실릴 때면 엄마가 자랑스러웠는데 아들 때문에 가슴에 못 박고 기죽고 사는 엄마에게 많이 미안하다는 편지도 보내왔다. 샤워를 하고 피부약을 바르는 아버지는 손이 닫지 않은 등에 약을 바르지 못하고 아들한테 어렵게 부탁해 약을 발라주면서 세월의 흔적인 듯 상해 있는 아빠 등을 보고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애써 속으로 울었다고 했다. 방황하고 있을 때 엄마의 눈물을 보고 죄송한 마음을 들었지만 그것을 깨달지 못하고 죄인이 되었다는 편지도 보내 왔다. 매일 매일 엄마 아빠의 사랑을 기억하며 한 손에는 휴지를 들고 한 손에는 엄마 아빠 이름을 쓰면서 마음속으로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하고 존경 합니다.” 라고 말했단다. 차가운 바닥에 갇혀서 하루하루 얼마나 집이 그리울까 그리운 만큼 잘못을 뉘우치고 있을까? 아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고 남편과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있다가 남편이 한마디 한다. 60년을 넘게 살면서 경찰서에 간 것은 운전 면허증 교부 받고 경찰청장 표창 받으러 간 것뿐인데 하면서 한숨을 쉰다. 교도소 접견 때마다 떨리고 무서워서 혼자 못가고 남편과 같이 가서 남편 이름과 내 이름. 아들 이름을. 쓸 때면 손이 떨려 글씨를 재대로 쓰지도 못했다. 아들은 1년이 지나고 공주 교도소로 이송 갔다. 1년이 지나도 아들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유리창 밖에서 그냥 이름만 부르다 온곤 했다. 한번은 접견 신청을 하고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가져간 신문을 깔고 앉아 있는데 신문 속 자랑스런 이름이 부러웠다. 접견실 안에서 아들 이름이 불러지고 아들을 만날 수 있는 순서가 되었다. 10분 동안 유리창 밖으로 아들을 보고 집으로 오는데 불어오는 바람소리에 아들 이릉이 들려오는듯했다. 아들은 공주에서 6개월 있다가 청송 교도소로 이송 갔다. 초범이기 때문에 제일 약한 1교도소로 갔는데 이것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되나 싶었다. 점점 멀리 가고 있는 아들이지만 새 사람이 되어 다시 거족의 품으로 돌아 올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위로를 삼았다 아들 기다리는 남편은 매월 한 달씩 달력을 미리 넘긴다. 남들은 세월 가는 것을 아쉬워하는데 빨리 시간이 가고 세월이 지나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에서다. 어릴적 아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고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 까지 000이름이 적힌 우등상과 선행 상을 받아와 자랑을 하기도 했다. 가끔은 고생하는 엄마가 불쌍하다는 내용의 편지에 아들 00 올림 이라고 이름을 크게 써서 주었다. 고등학교 때 아빠의 보증으로 집을 잃고 실의에 빠진 부모님을 도와주고자 과감하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육군 부사관 으로 입대를 했다. 아들은 4년 동안 받은 월급으로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형 학비를 보태주곤 했다. 그런 아들이 대견 했었고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아 절대로 어긋나는 행동은 할 수 없다고 믿었다. 큰아들은 메일 청송 교도소를 컴퓨터로 검색해보고 금년에 순천 제일 대학에 신입생 모집이 있다는 정보를 알았다. 큰 아들은 동생을 대학보내기 위해 담당 직원에게 연락을 해서 동생을 위한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동생을 생각하는 형의 마음을 알았는지 아들이 모범생으로 인정받았는지 하늘이 도운 듯 아들은 대학을 가게 되었다. 물론 학교에 있는 캠퍼스를 밟으며 공부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주어진 행운이다. 큰아들은 동생이 형 학비 때문에 대학을 못간 것이 늘 미안 하고 형으로서 돌보지 못해 그곳에 있다는 아픈 마음에 2년 동안 수업료와 책값 영치금 기타 등등 거액의 돈을 입금 시켜 주었다. 2월 말에 순천으로 이송 가서 3월 초 입학식 날 부모님들이 참석해 축하와 위로를 하기로 했는데 예기치 못한 코로나19 때문에 아직 입학식이 미루어지고 있다. 빨리 코로나의 공포에서 벗어나 우리 아들 대학 입학식 날 얼굴을 만지며 꼭 앉아 볼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며칠전 그 이름이 너무 싫고 부끄러워 이름을 개명 해주려고 다른 이름을 지어 주민센터를 찾아 갔다. 순간. 무언가 스치듯 깨달음이 있었다.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해서 그 이름으로 엄마 아빠의 멍든 가슴을 치료해주리라는 믿음이 생겨 등본 한통을 떼어 집으로 왔다. 등본에 아들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아들이 보고 싶고 눈물이 핑 돌았다. 남편은 오늘도 아들의 영치금 잔액을 조회하면서 아들이름이 휴대폰으로 들리는 순간 한숨을 쉬며 휴대폰 누르는 손이 떨린다. 내 어깨에 짊어진 짊은 언젠가는 내려놓을 수 있지만 가슴에 품고 있는 보고 싶은 마음을 무겁기만 하다. 사랑하는 00아 보고 싶다 그리고 앉아 보고 싶다. 하루에도 몇 번을 불러 보는 이름이지만 역시 대답이 없구나. 아들아 삶이 힘들어 피해 갈수 없다면 그냥 못 이기는 척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을 너를 통해서 알았다. 신은 공평하셔서 참고 살다보면 우리의 손을 잡아 줄 것을 엄마는 믿는다. 분명 우리 에게도 어둔 밤이 지나고 훤한 아침이 밝아 오리라 믿는다. 지금 너를 생각해보니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 00아 엄마는 오늘 청송 이 길이 마지막 길이면 좋겠다. 너무 먼 길 이었지만 너의 생각을 하면서 오고가는 길이 그다지 멀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넌 내 아들이고 난 너의 엄마가 분명하구나. 5살 때 돈을 벌겠다고 직장에 가는 엄마를 가지 말라고 우는 너를 새우깡으로 달래며 집을 나설 때 그때가 그립구나. 이런 저런 추억 속에 달리다 보니 어느덧 집에 도착했다. 벽에 걸린 사진 속에 너는 환하고 웃고 있지만 아직은 어디든 누구에게든 너의 이름을 부르기가 부끄럽다. 하지만 내 아들 00아 혹시 이글이 방송 되어서 너의 이름이 불러 진다해도 엄마는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2년 후면 너는 다시 새 이름으로 가족 품으로 돌아오겠지? 그때 나는 다시 태어난 000엄마라고 너에 이름을 크게 불러보련다. 아들아 엄마가 잠깐 남들에게 부끄러운 생각으로 너의 이름을 바꾸려고 했고 지우려고 했던 것이 진짜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