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말숙(李末叔) 묘갈명(墓碣銘) - 송인(宋寅)
공의 휘(諱)는 말숙(末叔)이요, 자(字)는 신원(愼原)으로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증손(曾孫)이다. 후궁(後宮)인 신빈(愼嬪) 김씨(金氏)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원(金元)의 딸인데, 이 분이 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을 낳았으니, 공에게 조고(祖考)가 된다.
공의 선고(先考)는 이의(李義)로 길안 도정(吉安都正)이고, 선비(先妣)인 한씨(韓氏)는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충성공(忠成公) 한명회(韓明澮)의 딸이다. 공은 정덕(正德) 정묘년(丁卯年, 1507, 중종 2)에 태어나 신사년(辛巳年, 1521, 중종 16)에 규례에 따라 선휘 대부(宣徽大夫) 은계수(銀溪守)에 제수되었는데, 이해에 가형(家兄)인 이정숙(李正叔)이 사림(士林)의 앙화(殃禍)에 걸려들었으므로 공도 연좌되어 외방(外方)에 유배 당하였다.
가정(嘉靖) 을유년(乙酉年, 1525, 중종 20)에 풀려나 돌아왔고, 무술년(戊戌年, 1538, 중종 33)에야 비로소 복직되었다. 공은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정성과 효심으로 섬겨 능히 환심을 얻었으며, 형제들과 더불어 우애하는 마음도 독실하였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반드시 종족(宗族)들을 모아서 헌수(獻壽)하였는데, 갑인년(甲寅年, 1554, 명종 9)에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예법에 따라서 치르고 삼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자인(慈仁)하고 관서(寬恕)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또한 활쏘는 법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였으며 특히 음률(音律)에 밝았다. 평생동안 산업(産業)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고 남을 상대할 때에는 한결같이 성의로써 대하였으며, 비록 우환이나 곤궁을 당하더라도 걱정하는 뜻이 없었고 오직 시주(詩酒)로써 자오(自娛)하면서 멋진 산수(山水)를 만나면 즐기느라고 집에 돌아가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
동교(東郊)에 별장(別莊)을 두고 한가롭게 소요(逍遙)하면서 노년(老年)을 보내다가 만력(萬曆) 정축년(丁丑年, 1577년 선조 10년) 2월 정묘일(丁卯日)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운명할 무렵에 손을 내저어 부녀자들을 방에서 나가라고 한 뒤에 금세 숨을 거두니, 향년 71세였다.
아들이 2품 벼슬에 올랐기 때문에 추은(推恩) 받아 정의 대부(正義大夫) 은계군(銀溪君)에 추증되었다. 그해 3월 계유일(癸酉日)에 양주(楊州)의 치소(治所) 남쪽에 있는 광제원(廣濟院) 뒷동네의 술좌 진향(戌座辰向)의 묏자리에 장사지냈다.
공의 부인 최씨(崔氏)는 해주 현부인(海州縣夫人)에 수봉(受封)되었는데, 충무위(忠武衛) 부사맹(副司猛) 최덕윤(崔德潤)의 딸이자 행김해 부사(行金海府使) 최준(崔浚)의 손녀이며, 모친은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부호군(副護軍) 홍자량(洪自良)의 딸이다.
부인은 정덕(正德) 갑술년(甲戌年, 1514, 중종 9)에 태어나 나이 16세에 공에게 시집왔는데, 아내로서의 도리를 깊이 터득하여 일생동안 공의 뜻을 받들려고 힘썼고 집안 살림의 유무(有無)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았으니, 대체로 부인의 선세(先世)에 충후(忠厚)를 숭상하여 가풍(家風)에 젖어든 것이 진실로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화목하게 지냈고 몸종이나 하인들에 대해서도 일찍이 한번도 악담(惡談)을 한 적이 없었으니, 부인의 덕을 대체로 상상할 수 있다. 계미년(癸未年, 1583, 선조 16) 3월 계사일(癸巳日)에 침실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0세였다.
그해 5월 임진일(壬辰日)에 공의 묘소 왼쪽에 합장(合葬)하였다. 공은 1남 6녀를 두었다. 아들 이휘(李徽)는 처음에 원천 부수(原川副守)의 작위(爵位)를 받았는데, 독행(篤行)과 명경(明經)으로 종실(宗室) 중에서 칭찬을 받았으며, 재차 시예(試藝)에 일등으로 뽑혀 품계가 정의 대부(正義大夫)에 올라 원천군(原川君)에 봉하여졌다.
사위는 현감(縣監) 이광정(李光庭), 군수(郡守) 강성(姜晟), 감찰(監察) 최영(崔韺)과 사인(士人) 강백룡(姜伯龍)ㆍ안효흥(安孝興)ㆍ이송복(李松福)이다. 공의 아들인 원천군은 감찰 여세평(呂世平)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1녀를 낳았는데, 진사(進士) 황신(黃愼)에게 시집갔고, 부실(副室) 소생의 두 아들은 이경침(李景沈)과 이경연(李景淵)이다.
공의 맏사위인 현감 이광정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증제(李曾齊)ㆍ이유제(李有齊)ㆍ이안제(李顔齊)ㆍ이원제(李原齊)이고, 맏딸은 이언광(李彦光)에게 시집갔고 작은 딸은 참봉(參奉) 김윤신(金潤身)에게 시집갔다. 공의 둘째 사위인 군수 강성은 1녀를 낳았는데, 홍중성(洪仲成)에게 시집갔다.
공의 셋째 사위인 감찰 최영은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공의 넷째 사위인 강백룡은 1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고, 공의 다섯째 사위인 안효흥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안승명(安承命)과 안철명(安哲命)이다. 공의 막내 사위인 이송복은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공은 또 측실(側室) 소생의 딸이 있는데, 김윤반(金潤胖)에게 시집갔다.
공의 아들인 원천군이 내가 부자(父子) 사이에 교제하게 된 것을 이유로 가장(家狀)을 맡기면서 묘갈명(墓碣銘)을 청하기를, “자네는 나의 선군자(先君子)를 잘 알 것이다.”고 하므로 나는 사양할 수가 없어서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세종[英陵]의 삼세(三世)에 재능 있고 현명한 후손이 있어서,
효우(孝友)하고 관락(寬樂)하다가 천명(天命)을 마쳤네.
배위는 화순하고 아들은 어질어서 가도(家道)가 매우 온전하였고,
또 장수(長壽)까지 누렸으니 견줄 만한 사람이 드물었네.
저기 양주의 남쪽 경계에 새 묘지를 골라서 덕인(德人)을 장사지냈으니 물과 산이 구불구불 서려 있네.
내가 짤막한 명을 짓고 돌을 갈아 새겨 비석을 만들어 세우니, 천년토록 전해지기 바라노라.
-------------------------------------------------------------------------------------------------------------------------------------------------------------------------
[原文]
宗室贈銀溪君墓碣銘。
公諱末叔, 字愼原, 我世宗大王之曾孫也。 後宮愼嬪金氏, 僉知中樞元之女。 寔生寧海君諱瑭, 於公爲祖。 考諱義, 吉安都正。 妣韓氏, 領議政、上黨府院君諡忠成明澮之女。 公生於正德丁卯。 辛巳, 例授宣徽大夫銀溪守, 是歲家兄正叔罹士林之禍, 公坐謫于外。 嘉靖乙酉, 放還, 戊戌, 始得復職。
公少孤, 事母誠孝, 能得歡心, 與兄弟友愛亦篤。 每月朔望, 必會宗族獻壽。 甲寅, 母歿, 喪祭從禮, 廬墓三年。
公天性慈仁寬恕, 好讀書, 亦解射法, 尤善音律。 平生不事産業, 待人接物, 一以誠, 雖當憂患窮困, 無戚戚之意, 唯以詩酒自娛, 遇山水之勝, 樂而忘返。 置莊于東郊, 逍遙終老焉。 萬曆丁丑二月丁卯, 終于寢將終, 揮婦女出, 翛然而逝, 享年七十一。 以子爲二品, 故推恩贈正義大夫、銀溪君。 越三月癸酉, 葬于楊州治南廣濟院後洞戌坐辰向之原。
公配崔氏, 受封海州縣夫人, 忠武衛副司猛德潤之女, 行金海府使浚之孫。 母南陽洪氏, 副護軍自良女。 夫人生於正德甲戌, 年十六, 歸于公, 甚得婦道, 一生惟務奉承公志, 不復計有無, 蓋其先世尙忠厚, 濡染家風者固如是。 故與隣里皆雍睦, 下至婢使, 亦未嘗以惡言加之, 其德蓋可想也。 癸未三月癸巳, 寢疾終, 享年七十。 五月壬辰, 合葬于公墓之左。
公有一男六女: 男曰徽, 始受爵爲原川副守, 以篤行明經, 見稱宗室中, 再魁試藝, 資陞正義, 封原川君。 女壻曰李光庭, 縣監; 姜晟, 郡守: 崔韺, 監察: 姜伯龍、安孝興、李松福, 皆士人也。 原川娶監察呂世平女, 生一女, 適進士黃愼。 副室二子: 曰景沉、景淵。 縣監有四男二女: 男曰曾齊、有齊、顔齊、原齊。 女李彦光, 次適參奉金潤身。 郡守有一女, 適洪仲成。 監察有二女, 皆幼。 伯龍有一男三女, 皆幼。 孝興有二男: 曰永命、哲命。 松福有一女, 幼。 公又有側室女, 嫁金潤胖。
原川以寅獲交父子間, 乃屬家狀而請銘曰: “子宜知先君。” 寅不得辭。 銘曰:
英陵三世, 有孫能賢。 孝友寬樂, 以終其天。 配順胤良, 家道孔全。 又得於壽, 人鮮侔焉。 維楊南界, 爰卜新阡。 德人攸藏, 流峙蜿蜒。 我爲短銘, 礱石以鐫。 言樹作表, 垂祀期千。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