退溪學派의 形成과 展開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吳 錫 源
<目次>
Ⅰ. 安東地域의 名儒
Ⅱ. 退溪思想의 特徵
Ⅲ. 退溪學派의 形成
Ⅳ. 退溪學派의 展開
Ⅴ. 安東儒學의 特徵과 意義
현재 안동은 한국에서 전통문화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 가운데의 하나이다. 고래의 불교문학에서부터 구비문학(口碑文學)이나 민속놀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독특한 곳이다. 그러므로 「안동문화권」이라는 독자적 문화권의 설정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많은 전통문화의 잔존 속에서도 안동지역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퇴계학의 연수(淵藪)이며 조선조 유교문화의 중심지라는 점이다. 그만큼 현재와 가장 근접된 시대에서, 가장 오랜 기간동안 사회 전반에 끼친 문화적 충격이 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불려지는 안동유학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이나에 대하여는 많은 이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특히 퇴계 이후 계속 이어진 학맥의 개인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답보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조선유학사상사에서 퇴계학파가 차지한 비중을 고려할 때, 이에 대한 정심(精深)한 탐구(探究)와 체계화는 한국유학사상의 올바른 정립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학문적 활동의 기초 작업을 위하여 일단 안동지역에서 배출되거나 관련있는 인물들만을 중심으로 하여 퇴계학파의 맥락과 안동유학의 특징을 고찰하고자 한다.
안동이라는 지역의 명칭은 신라시대의 「고타야군(古陀耶郡)」 에서부터 「안동부(安東府)」, 「영 군(永 郡)」, 「길주(吉州)」, 「복주(福州)」,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현대의 「안동시(安東市)」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고 그 행정범위 또한 복잡다단하여 크게 확대될 때는 경상도 동북부 17개 군을 포섭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행정단위를 기준으로 사상적 맥락을 이해한다는 것은 문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현대의 행정구역인 안동시와 안동군(1읍 13면)을 중심으로 하였다.
Ⅰ. 安東地域의 名儒
안동지역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수많은 명사(名士)와 현철(賢哲)들을 배출시킨 인재(人材)의 보고(寶庫)이다. 옹색하고 협소한 1개의 군 지역에서 그렇게도 많은 현사(賢士)들이 쏟아져 나온 경우는 타 지역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경우라 하겠다. 특히 유학의 거장들이 연이었을 뿐만 아니라 입신(立身)이나 양명(揚名)을 외면하고 향리(鄕里)에 은거하여 도학(道學)의 실천에만 주력하였던 사림(士林)들이 고을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인재(人材)가 그 수를 압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의 이해를 위하여 많은 인물들이 군거하여 문향(文鄕)을 이루었던 지역을 선정하여 명유들의 개략을 살펴 보고자 한다.
도산면(陶山面)의 온혜(溫惠)와 토계(土溪)는 진성이씨(眞城李氏)의 노송정 이계양(老松亭 李繼陽: 1424~488)이 전거(奠居)한 이래 시문(詩文)에 뛰어난 송제 이우(松齊 李堣 : 1469~1516)와 온계 이해(溫溪 李 瀣: 1496~1550)가 나오고, 유학의 종장(宗匠)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이 배출되므로서 유교문화의 결정지(結晶地)가 되었다. 그 뒤 퇴계(退溪)의 후손들은 토계(土溪)에 세거(世居)하면서 몽암 이안도(蒙菴 李安道: 1541~1584),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 1842~1910), 육사 이원록(陸史 李源祿: 1904~1944)등의 명사(名士)들이 있으며 그 외에도 문집(文集)이나 유고를 남긴 학자들이 30여 명에 이르고 있다. 또한 분천(汾川)에는 영천이씨(永川李氏)가 세거(世居)하면서 국문학사에 우뚝한 암 이현보( 岩 李賢輔: 1467~1555), 퇴계(退溪)의 문도인 간제 이덕홍(艮齊 李德弘: 1541~1594, 록보리 원천(祿輔里 元川)) 등이 나옴으로써 명문(名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예안면(禮安面)의 오천(烏川)은 산수가 수려한 고현(古縣)으로서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세거(世居)하여 예안파(禮安派)를 형성하였다. 운암 김록(雲岩 金綠: 1488~1544), 탁청형 김수(濯淸亨 金綬: 1491~1552)형제가 크게 문운(文運)을 일으켜 후조당 김부필(後凋堂 金富弼: 1516~1577), 읍청형 김부의(揖淸亨 金富儀: 1525~1580), 산남 김부인(山南 金富仁: 1512~1584) 등 이른바 오천(烏川)의 칠군자(七君子)를 배출하였다. 또한 그 후손들에서 근시재 김해(近始齋 金垓: 1555~1593), 계암 김령(溪岩 金玲: 1577~1641) 등 학행(學行)이 뛰어난 현사(賢士)들이 줄을 이어 문향(文鄕)의 융성(隆盛)함이 지극하여 마을 전체를 군자리(君子里)라고까지 하였다. 또한 봉화금씨(奉化琴氏)가 함께 세거(世居)하면서 매헌 금보(梅軒 琴輔: 1521~1585), 일휴당 금응협(日休堂 琴應夾: 1526~1589)등의 명유가 있었다. 또한 부포(浮浦)는 성성재 금란수(惺惺齋 琴蘭秀: 1530~1599), 월천 조목(月川 趙穆: 1524~1606) 등이 살았으며, 고려 후기에는 역동 우탁(易東 禹倬: 1262~1342)이 만년(晩年)에 은거하였던 지역이다.
임하면(臨河面)의 천전(川前: 내앞)은 의성김씨 청계파(義城金氏 靑溪派)가 전거(奠居)한 지성(地城)으로 청계 김 (靑溪 金 : 1500~1580)이 약봉 김극일(藥峰 金克一: 1522~1585), 귀봉 김수일(龜峰 金守一: 1528~1583), 운암 김명일(雲岩 金明一: 1534~1570),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1538~1593), 남악 김복일(南岳 金復一: 1541~1591)등 5형제를 배출하므로 일시에 명문세가(名門世家)로 중흥(中興)되었다. 이들은 모두 문장과 학행(學行)이 뛰어나 사림(士林)에서 오룡(五龍)이라 칭하였으며, 약봉(藥峰)의 후손에서 지촌 김방걸( 芝村 金邦杰: 1623~1695: 임동면 지예(臨東面 知禮)), 제산 김성탁(霽山 金聖鐸: 1684~1748), 구사당 김악행(九思堂 金樂行: 1708~1766) 등이 있고, 귀봉(龜峰)의 후손에서 운천 김용(雲川 金涌: 1557~1620), 경와 김휴(敬窩 金烋: 1597~1628), 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 1878~1937) 등이 저명하다. 학봉(鶴峰)의 후손은 서후면 김계(西後面 金溪)로 이거(移居)하여 많은 인재(人材)들이 이어졌다. 또다른 의성김씨 일파(義城金氏 一派)는 일직면 귀미(一直面 龜尾)에 전거(奠居)하여 귀와 김굉(龜窩 金竤: 1739~1816), 척암 김도화(拓菴 金道和: 1825~1912) 등의 학자가 나왔다. 가히 인물들의 숲을 이루었다고 할 만한 의성김씨 문중(義城金氏 門中)은 문집(文集)이나 유고를 남긴 명유가 90여 명에 이르고 있다.
풍천면(豐川面)의 하회(河回)는 하회유씨(河回柳氏)가 전거(奠居)한 이래 입암 유중영(立岩 柳仲郢: 1515~1573)이 겸암 유운룡(謙菴 柳雲龍: 1539~1601)과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형제를 낳음으로서 단연 으뜸의 명문세가(名門世家)로 기반을 굳혔다. 그 후손에서 수암 유진(修岩 柳袗: 1582~1635: 상주(尙州)로 이거(移居)), 졸재 유원지(拙齋 柳元之: 1598~1674), 학서 유태좌(鶴棲 柳台佐: 1763~1837), 계당 유주목(溪堂 柳疇睦: 1813~1872)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문집(文集)이나 유고를 낸 학자는 40여 명에 이른다.
임동면(臨東面)의 수곡(水谷: 무실)과 박곡(朴谷: 박실) 등에는 전주유씨(全州柳氏)가 세거(世居)하면서 많은 인물을 낸 곳이다. 저명한 학자로 기봉 유복기(岐峰 柳復起: 1555~1617), 양파 유관현(陽坡 柳觀鉉: 1692~1763), 노애 유도원(蘆厓 柳道源: 1721~1791), 삼산 유정원(三山 柳正源: 1702~1761), 동암 유장원(東岩 柳長源: 1724~1796), 일곡 유범휴(壹谷 柳範休: 1744~1823), 대야 유건휴(大埜 柳健休: 1768~1834), 정재 유치명(定齋 柳致明: 1777~1861) 등이 있고, 삼산(三山)의 후손은 예안면 주진(禮安面 舟津)으로 이거(移居)하여 호고와 유휘문(好古窩 柳徽文: 1773~1832), 서파 유필영(西坡 柳必永: 1841~1924), 동산 유인식(東山 柳寅植: 1865~1928)등이 배출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줄을 이어 문한이 흥성한 전주유씨 문중(全州柳氏 門中)은 문집(文集)을 저술한 인물이 40여 명을 넘는다.
풍천면(豐川面)의 가곡(佳谷)에는 안동권씨(安東權氏)가 정거(定居)하면서 화산 권주(花山 權柱: 1457~1505), 병곡 권 (屛谷 權 : 1672~1749)등이, 서후면 송파(西後面 松坡)에는 송암 권호문(松菴 權好文: 1532~1587)등이, 와룡면 가구(臥龍面 佳邱)에는 회곡 권춘란(晦谷 權春蘭: 1539~1617)등이 길안면 용계(吉安面 龍溪)에는 감담당 권희학(感談堂 權喜學: 1672~1749) 등이 북후면 도촌(北後面 道村)에는 옥봉 권위(玉峰 權暐: 1552~1626) 등이 배출되었다. 또한 예천군 감천(醴泉郡 甘泉)이나 봉화군 유곡(奉化郡 酉谷)에 군거(群居)하고 있는 안동권씨 문중(安東權氏 門中)도 문한이 뛰어나 저술을 이룬 학자가 70여 명을 넘어선다.
그 외 일직면(一直面)의 소호(蘇湖)에는 한산이씨(韓山李氏)가 전거(奠居)하여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 靖: 1710~1781), 소산 이광정(小山 李光靖: 1714~1789), 면암 이우(俛菴 李禹: 1739~1810) 등의 대유를 배출하였으며, 풍산읍(豐山邑)의 오미(五美)에는 풍산김씨(豐山金氏)가 세거(世居)하면서 학조 김봉조(鶴潮 金奉祖: 1572~1630) 등의 학자를 배출하였고, 풍산읍(豐山邑)의 소산(素山)에는 안동김씨(安東金氏)가 세거(世居)하면서 동야 김양근(東埜 金養根: 1734~1798),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등의 명유를 배출하였다.
이처럼 안동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인재(人材)들을 잉태시킨 영가(永嘉)의 고장으로서 문집을 남긴 학자가 400여 명에 이르러 가히 문흥(文興)의 고장이라 하겠다.
Ⅱ. 退溪思想의 特徵
안동이 영남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유교문화의 요람지로서 일컫게 된 것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부터이다. 물론 이때의 유교는 고려말에 전래된 송(宋)의 주자학(朱子學)으로서, 종래의 유교가 단순히 실천적이고 전장제도적(典章制度的)이었던 것과는 달리 이론유학으로서의 성리학이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즉 인간 존재의 본질을 규명하고, 선악(善惡)과 정사(正邪)의 의리문제와 인간행위의 준칙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를 통하여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실천하는 데 참된 의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의 윤리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이론무장과 함께 도통적 역사의식(道統的 歷史意識)을 기반으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숭상하는 정신무장까지 갖추게 되었다.
조선조에 유교가 유일한 국가 이념으로 확립되고 조선왕조의 기반이 공고하게 되면서부터 학습의 단계를 거친 주자학은 신진 사림(士林)들에 의하여 정치 현실에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적극화되었다. 이것이 곧 15세기의 도학사상이다. 도학(道學)이란 윤리도덕의 당위성을 밝혀 안으로 끊임없는 자기수양을 통하여 정도(正道)를 실천하고, 밖으로 도덕정치로서의 인정(仁政)을 구현시켜 정의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천이(天理)에 근거한 실천적 성리학이다.
대의(大義)를 위하여 생명까지 초월하는 전통적인 도학사상은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1482~1519)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계속된 사화로 인하여 도학정신을 실천하려는 수많은 선비들이 희생되자, 사림의 기운은 크게 위축되어 정계 진출보다 산수에 은둔하여 학문에만 전념하는 경향이 크게 일어났다. 그러므로 조선유학은 15세기 도학사상의 실천화 단계를 거쳐 16세기에 들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한국 성리학으로서의 독자적 이론을 창출하는 원숙한 경지에 들어섰다. 당시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주자학의 사상 체계를 전반적으로 빠짐없이 구명하고 분석하여 한국 성리학사의 황금시기를 이루어 놓은 거봉이 퇴계 이황(李滉)이다. 주자학을 단순히 답습하여 고수하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스스로 사유하고 자각하며, 또한 끊임없는 철학적 논변을 통하여 유학의 본질을 정확하게 체득한 경지에서 새로운 한국철학의 장(場)을 개척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우뚝한 것이다. 이러한 퇴계사상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성리학의 우주론적 본체론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태극론(太極論)이다. 퇴계(退溪)는 태극을 이(理)로 파악하여 창조적 기능으로서의 능동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理)의 능동성(能動性)을 중시하여 ‘기발(氣發)’ 뿐만 아니라 ‘이발(理發)’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천리(天理)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을 밝힌 것으로서 주자의 이론체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理)의 자발성(自發性)을 논리화시킨 특징이 있다.
둘째) 본질과 현상의 관계를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한 것이 이기론(理氣論)이다. 현상의 입장에서 보면 이(理)와 기(氣)는 공존되나 논리의 입장에서 보면 분별하여 논할 수 있다. 퇴계(退溪)는 이(理)와 기(氣)의 공존성을 이해하면서도 이(理)와 기(氣)를 업격하게 구별하려는 입장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理)의 순수성을 확보하려는 ‘이존설(理尊說)’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는 절대순선(絶對純善)의 이(理)가 현실의 구체적 인간행위와 정서를 통하여 실천되어야 한다는 가치관에서 나온 것이다.
셋째) 퇴계(退溪)의 학문은 무엇보다도 인간학적인 면에 최대의 중점을 두고 있다. 인간은 내재된 순수성과 그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여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선(善)한 본성(本性)을 확충시켰을 때 인간다움을 다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퇴계(退溪)의 학문적 목표는 성인(聖人)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퇴계(退溪)의 학문은 성학(聖學)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성학(聖學)은 인간학과 종교학의 영역이 동시에 포함된다. 따라서 퇴계(退溪)의 성학(聖學)은 중국의 유학에 비하여 더욱 인성론적(人性論的) 성리학으로 전개시킨 특징이 있다.
넷째) 성학(聖學)에 접근하는 구체적 수양 방법으로 경(敬)을 강조하였다. 경(敬)이란 항상 깨어있는 상태(惺惺)에서 주어진 일에 전일(專一)하는 주일무적(主一無適) 마음공부이다. 퇴계(退溪)는 이 경(敬)으로 인욕(人欲)을 극복하여 인간의 주체성을 확립하여야 참된 인간의 본성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섯째) 퇴계(退溪)는 자연(自然)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지극하였다. 자연에 침잠(沈潛)하여 인간의 정서를 함양하였다. 진리를 추구하는 도학적 정신(道學的 精神)으로 자연을 완상(玩賞)하여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이루고자 하였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비롯하여 「금보가(琴譜歌)」, 「악빈가(樂貧歌)」, 「상저가(相杵歌)」 등의 많은 시가(詩歌)를 지어 자연의 미감(美感)을 도학(道學)의 세계로 흡수하였다.
여섯째) 퇴계(退溪)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학문적 사변에만 그치지 않고 전 생애를 걸쳐 끊임없이 실천한 점에 있다. 성리학이 자칫 관념의 세계로 내닫기 쉬운 문제점을 극복하여, 끊임없이 실행(實行)했던 그의 삶은 바로 지행(知行)의 겸전(兼全)을 요(要)하는 유학의 본질을 가장 올바르게 체득한 것이라 하겠다. 이는 곧 주자학(朱子學)의 한계를 극복하여 발전시킨 퇴계(退溪)철학의 진수라고도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주자학(朱子學)의 전모를 정확하게 파악한 기반 위에서 인성론적(人性論的)인 성리학으로 더욱 심화(深化)시켜 인간의 인격형성의 논리체계를 정립하였고 가까운 일상생활 속에서 구체적인 경(敬)의 수양방법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몸소 실천적인 생애를 통하여 생생하게 보여준 퇴계(退溪)의 높은 인격은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그러므로 후인들이 퇴계(退溪)를 만세(萬世)의 사표(師表)로 존숭하였던 것이며, 그 영향은 멀리 중국이나 일본까지 파급 되었던 것이다.
Ⅲ. 退溪學派의 形成
퇴계(退溪)의 제자들을 수록한 「도산급문시현록(陶山及門諸賢錄)」이나 「전고대방(典故大方)」에 나타난 퇴계 문인(退溪 門人)의 수(數)를 보면 310명과 306명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바, 이는 역대 유학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문도를 길러낸 것이다. 조선 명종(明宗)과 선조 대(宣宗 代)의 많은 현량(賢良)들은 지성(地域)과 당파를 초월하여 퇴계(退溪)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다. 그중에 영남출신의 문도(門徒)는 190여명에 이르며, 또 안동(安東) 출신의 학자가 105명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당시 안동지방(安東地方)의 문흥(文興)을 짐작할 수 있다. 월천 조목(月川 趙穆), 간재 이덕홍(艮齋 李德弘),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齡), 매헌 금보(梅軒 琴輔), 성성재 금란수(惺惺齋 琴蘭秀), 송암 권호문(松岩 權好文), 회곡 권춘란(晦谷 權春蘭), 근시재 김해(近始齋 金垓), 후조당 김부필(後彫堂 金富弼)를 비롯한 오천(烏川)의 칠군자(七君子) 등 제제다사(濟濟多士)한 인물들이 모두 안동 출신이다.
이처럼 많은 퇴계의 제자들 가운데 퇴계문하(退溪門下)의 삼령수(三領首)로 월천(月川), 학봉(鶴峰), 서애(西涯)를 들거나 이에 백담(栢潭)을 첨가하여 경상좌도의 사대문인(四大門人)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문적 계보를 형성한 제자로는 학봉(鶴峰), 서애(西厓) 및 한강 정구(寒岡 鄭逑), 죽천 박광전(竹川 朴光前) 등을 들기도 하지만, 그 문맥(門脈)의 왕성함으로 인하여 통상 서애(西厓), 학봉(鶴峰), 한강(寒岡) 등의 계열을 손 꼽는다. 이 세 계열의 특징과 학맥(學脈)을 약술(略述)하면 다음과 같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 : 1543~1620)는 문과(星州) 출신으로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의 외증손(外曾孫)이다. 처음 덕계 오건(德溪 吳健: 1521~1574)에게 배우고, 뒤에 남명 조식(南冥 曺植 : 1501~1572)과 퇴계(退溪)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다. 예학(禮學)에 대단히 밝았으며, 경학(經學)과 의학(醫學)이나 병학(兵學)에도 뛰어났다. 학문과 덕행이 훌륭하여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으며, 교우(交友) 및 문인(門人)으로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송암 김면(松菴 金沔), 동계 정온(桐溪 鄭蘊) 등 60여 명이 있다. 그의 학맥(學脈)은 미수 허목(眉叟 許穆 : 1595~1682)에게 이어져 나가면서 기호(畿湖)지방에 퇴계학파(退溪學派)를 형성하면서 그 뒤 성호 이익(星湖 李瀷) 등의 실학파(實學派)로 이어진다. 한말(韓末)의 학자로서 영남출신인 방산 허훈(舫山 許薰 : 1836~1907) 등이 이 계열에 속한다.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 1542~1607)은 안동(安東)의 하회(河回) 출신이며 선조(宣祖)때에 재상으로 임진왜란을 극복한 대정치가이다. 그의 문집에는 성리학보다 시사(時事)와 경세(經世)에 관한 것이 많아 이론체계를 구명하기 어려우나 대체로 퇴계학(退溪學)을 계승하여 이(理)를 강조하고 수양의 첫 단계로 마음의 주재를 세우도록 하였다. 문인으로는 창석 이준(蒼石 李埈), 학호 김봉조(鶴湖 金奉祖) 등 10여 인이 있으나 상주(尙州)출신으로 예학(禮學)에 밝은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 1563~1633)가 으뜸이다. 우복의 문하(門下)에 수암 유진(修岩 柳袗)과 백졸암 유직(百拙菴 柳稷) 등이 있고 뒤에 활재 이구(活齋 李榘 : 1613~1659)로 이어지고 한말(韓末)의 학자(學者)인 계당 유수목(溪堂 柳疇睦 : 1813~1872)에 이르렀다.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 1538~1593)은 안동(安東)의 천전(川前) 출신으로 임진왜란때 보주성(晋州城) 방어에 힘쓰다가 순절(殉節)하였다. 일본(日本)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다녀와서 병화(兵禍)가 없을 것이라는 주장으로 후대의 평가가 분분하나 그의 강직한 지절(志節)과 일본 사행(日本 使行)에서의 주체적(主體的) 외교 활동 등은 칭송되고 있다. 문집이 있으나 대부분 시문(詩文)이나 언행록(言行錄)이고 학문에 관한 구체적 내용이 있어 그 사상적 특징을 밝히기 어렵다. 그러나 독행(篤行)이 뛰어나고 문인(門人)들이 흥성(興盛)하여 그 학맥(學脈)이 연면하게 이어짐으로서 퇴계학맥 정맥(退溪學脈 正脈)으로서의 지위를 확보 하였다.
그의 문도에 운천 김용(雲川 金涌), 기봉 유복기(岐峰 柳複起) 등 수인(數人)이 있으나 서후면 성곡(西後面 城谷)의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 1564~1633)가 뛰어나고 그의 학맥(學脈)은 갈암 이현일(葛菴 李玄逸)에게 이어져 퇴계(退溪)학파의 융성기(隆盛期)를 이룩하였다.
Ⅳ. 退溪學派의 展開
성리학은 인간의 존재와 우주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태극론(太極論), 이기론(理氣論), 심성론(心性論) 등의 철학적 문제를 그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인간존재의 규명에 중점을 두고 있는 한국유학에서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 주요과제가 되어 왔다. 이러한 인성론(人性論)의 문제는 결국 이기론(理氣論)과 관련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문제해결을 위하여,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라는 양대학파(兩大學派)의 분입(分立) 속에 수많은 논변(論辨)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퇴계의 학설을 비판한 율곡 이 (栗谷 李 : 1536~1584)의 등장 이후부터 더욱 적극화되었다.
퇴계는 이(理) 중심의 논리로 우주의 본질을 규명하고, 천인(天人)관계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존재의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이(理)와 기(氣)로 분속(分屬)시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강조하는 이론 체계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본래적인 순선(純善)을 계발하여 도덕적인 삶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학적 가치론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율곡은 인간의 가치론적 입장보다는 존재론적 입장에서 인간문제를 분석하였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논리적 모순을 배제하고 객관적 입장에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칠정(七情)가운데 선일변(善一邊)만을 택(擇)하여 사단(四端)을 말하는 「칠정포사단설(七情包四端說)」과 이기(理氣)에 선후(先後)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율곡의 학문세계는 이기(理氣)의 어느 한 쪽에 편중하지 않는 가운데 「이기지묘(理氣之妙)」를 강조하며 인간의 외재적 현실성도 무시하지 않는 실학적 경향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 특징이라 하겠다.
결국 퇴계와 율곡의 사상적 상이성(相異性)은 인간존재를 규명하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후대의 학자들은 퇴계를 주리(主理), 율곡을 주기(主氣)로 고착시켜 놓고 치열한 논쟁을 전개하여 나갔다. 대체로 퇴계를 중심으로 하는 퇴계학파가 주리적(主理的) 바탕으로 주관적 성실성에 치중하였다면, 율곡을 중심으로 하는 기호학파는 주기적(主氣的) 바탕에서 객관적 실제성에 치중하였음이 그 두드러진 특징이라 하겠다.
율곡이 퇴계의 「호발설(互發說)」을 비판하였던 초기에만 하여도 퇴계학파 자체에서는 이에 대한 논란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기호지방의 서인(西人)학자들이 율곡설을 지지하면서 퇴계설을 비판하는 경향이 확대되자, 영남지방의 남인(南人)학자들도 퇴계설을 옹호하고 율곡설을 비판하는 학풍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즉 서애계열의 졸재 유원지(拙齋 柳元之)는 예송(禮頌)에서 율곡설을 비판하였고, 활재 이구(活齋 李榘 : 1613~1654)등은 율곡의 문묘배향을 반대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비판운동은 당론의 격화와 함께 점차 고조되어 당파의 분열이 극심하던 숙종시대에 이르러서는 맹렬한 기세로 확대되었다. 퇴계 몰후(沒後) 100년이 되는 이 때, 당파성보다는 학문적 입장에서 율곡의 학설을 비판하여 퇴계학파의 확고한 이론적 기반을 최초로 마련한 학자는 갈암 이현일(葛菴 李玄逸)이다. 그의 학맥은 퇴계학의 정퉁파로서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계속 이어져 내려 갔으며, 그만큼 주리론(主理論)의 내용도 더욱 치밀하게 정립되어 나갔다. 여기서는 퇴계학의 정맥을 형성한 중심인물들만을 뽑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한다.
갈암 이현일(葛菴 李玄逸 : 1627~1704)은 현재의 영덕군 창수면 인량동(盈德郡 蒼水面 仁良洞)에서 출생하였으나 만년에 안동의 임하면 금소동(臨河面 錦韶洞)에 정거(定居)하여 후진양상에 힘써 안동지역의 학문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일찍이 외조부(外組父)인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에게 수학하였으며,도덕적 실천을 위한 성리학에 힘써 그 이론을 더욱 심화 시켰다. 그는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에서 이(理)는 도덕사회의 가치기준이며 만물생성의 근원이 된다고 하였다. 즉 천지만물의 변화가 모두 이 이(理)에 의하여 주재되므로 마땅히 이(理)로서 인간사회의 도덕적 기초를 삼아야 한다고 보았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도 그 소종래(所從來)의 근본이 다르므로 이(理)가 위주(爲主)되는 칠정(七情)과 대립시켜 보아야 한다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심(人心)과 도심(道心)도 비록 같은 심(心)의 지각(知覺)에서 비롯되지만 인욕(人欲)과 천리(天理)의 분별이 있으므로 마땅히 나누어 보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율곡설을 비판하였다. 그의 많은 문인들 가운데 당시 안동출신의 학자로는 권두경(權斗經), 권두기(權斗紀), 권구(權榘), 김성탁(金聖鐸) 등이 저명하나 그의 학통은 밀암(密菴)으로 이어진다.
밀암 이재(密菴 李栽 : 1657~1730)는 갈암의 3자(子)로 영양(英陽)의 수비(首比)에서 출생하였다. 퇴계와 갈암(葛菴)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하여 더욱 철저한 분변(分辨)에 힘써 선현(先賢)의 미발처(未發處)까지 언급하였다.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이었으며 이발(理發)에 대한 근거를 주자(朱子)의 이동(理動)에서 찾아 이(理)는 기(氣)의 작용에 의하지 않고 이(理: 태극(太極))만으로도 일용동정(日用動靜)의 체용(體用)이 갖추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즉 이(理)에는 기(氣)가 동정(動靜)할 수 있는 동정인(動靜因)이 있기 때문에 개별물의 제약없이도 이발(理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퇴계의 호발설(互發說)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율곡의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을 비판하였다. 문인으로 이광정(李光靖), 김락행(金樂行) 등 60여 명이 있으나 그의 학통은 대산(大山)으로 이어진다.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1710~1781)은 일직면 망호동(一直面 望湖洞) 출신으로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후예이며 당시 영남학파의 거봉(巨峯)이었다. 퇴계학의 정통을 계승하여 그 이론을 더욱 심화시켜 소퇴계(小退溪) 라고도 불리어졌다. 그는 이기(理氣)의 관계나 동정(動靜)의 문제에 대하여 객관적이면서도 종합적인 입장에서 이해하였다. 즉 이기(理氣)의 분개설(分開說)과 혼륜설(渾淪說)은 각각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가지 현상을 보는 두 가지 측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 이기(理氣)의 동정(動靜)에 있어서도 동정(動靜)하는 현상 그 자체로 볼 때는 「기동정(氣動靜)」이요, 동정(動靜)하게 하는 주재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유동정(理有動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원(本原)의 이(理)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물을 주재하므로 스스로도 능히 발용(發用)할 수 있는 활물(活物)이라는 새로운 학설(學說)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이기(理氣)의 동정(動靜) 가운데 이(理)의 묘(妙)만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즉 이(理)는 무위이위(無爲而爲)요 불재이재(不宰而宰)로서의 묘(妙)가 된다는 입장에서 이(理)의 능동성(能動性)을 말한 것이다. 그의 문인은 유도원(柳道源), 정종로(鄭宗魯), 이야순(李野淳), 유장원(柳長源), 이종수(李宗洙), 김종덕(金宗德) 등 200여 명을 넘으나 학통은 상주(尙州) 출신의 손재 남한조(損齋 南漢朝: 1744~1810)를 거쳐 정재(定齋)로 이어진다.
정재 유치명(定齋 柳致明 : 1777~1861)은 대산의 외손으로 외가인 일직(一直)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종조(從祖)인 유장원(柳長原)에게 수학하고 20세 때 손재(損齋)의 문하에 들어갔다. 대산의 「활물설(活物說)」을 더욱 발전시켜 주리적(主理的)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理)에는 능히 동정(動靜)할 수 있는 신묘(神妙)한 작용이 있다고 보아 이(理)의 자발적(自發的)인 동정(動靜)으로부터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기(氣)가 생긴다고 하였다. 즉 이(理)는 우주생성(宇宙生成)의 주체가 될 뿐만 아니라 마음의 본체가 된다고 하여 기(氣)가 없는 이(理)의 동정(動靜)만으로 천도유행(天道流行)을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기(氣)를 잡박(雜駁)한 것이나 무능(無能)한 것으로 그 가치를 격하시키고 이(理)만을 강조하는 입장으로서의 가치의식을 보였다. 그의 문인은 김도화(金道和), 김흥락(金興洛), 이진상(李震相), 유필영(柳必永) 등 150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 1818~1886)은 성주(星州)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독자적 학문 계보를 형성하여 한말 도학파(韓末 道學派)의 한 줄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재(定齋)의 학파(學派)은 서산(西山)으로 이어진다.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 : 1827~1899)은 서후면 금계(西後面 金溪) 출신이다. 정재(定齋)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퇴계학파의 정맥(正脈)을 계승한 한말의 마지막 거봉(巨峯)이 되었다.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주이적(主理的) 입장을 취하였으나 사칠론(四七論) 등의 순수 이론보다는 도덕적 인격 완성을 위하여 자기성찰에 힘쓰는 실천적 학문태도를 위주로 하였다. 그러므로 「팔학오도(八學五圖)」를 지어 도학정신에 따른 학문방법을 체계적으로 구성하여 밝혔다. 또한 경학(敬學)에 심취하여 「경재잠집설도(敬齋箴集說圖)」를 작성하여 내면적 수양에 힘썼다. 그의 문인은 권상익(權相翊), 조긍섭(曺兢燮), 김동진(金東鎭), 이상룡(李相龍) 등이 저명하며 그 중에서 석포 김동진(石圃 金東鎭)이 그 학파(學派)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외세(外勢)가 밀어 닥치는 한말(韓末)의 상황에서 학문전념의 길을 버리고 구국(救國) 활동으로 항일의병(抗日義兵)에 가담하거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던 것이다.
Ⅴ. 安東儒學의 特徵과 意義
성리학이 한국에 들어온 이후 조선 초기 사림파(士林派)의 형성과정에 이르기까지 그 주된 역할은 길재(吉再),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등 영남출신의 인물들이 담당하였었다. 그 중에서도 16세기 이후 퇴계의 학설을 계승하여 지지하였던 학자들에 의하여 퇴계학파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는 그 중심지가 안동이었다. 이로서 볼 때, 안동유학이 조선유학사상사에서 차지한 위치는 매우 지대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안동지역의 유학사상을 개관할 때, 그 학문적 특징은 우선 퇴계학설을 계승하여 「주리설(主理說)」이 강조되어 온 점이다. 이(理)는 인간존재의 보편원리이자 당위성의 근거이다. 이와 같은 이(理)의 강조는 인간의 본성을 신뢰하는 가치기반 위에서 도덕정신을 고양하는 장점이 있다. 즉 주리철학(主理哲學)은 천이(天理)에 근거한 인간 심성(人間 心性)의 해명을 통하여 의리사상이나 주체적 인간성 회복의 이론을 확립하였음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주체적(主體的)사고방식을 자칫 명분론적(名分論的) 가치에 집착하여 보수화(保守化)되거나 절대주의로 고착되기 쉬운 단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理)는 추상적 보편성에 근거하므로, 비록 구체적 보편성일지라도 도덕성에 제한되기 때문에 실학정신이 부족하기 쉽다. 그러므로 자칫 관념적 세계에 몰입하여 객관적 현상이나 현실의 물질세계를 무시하기 쉬운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안동유림들의 대부분이 정계(政界)에 나서기보다는 산림(山林)에 은둔하여 내생(內省)과 덕행(德行)에 힘썼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원인은 안동지역이 타 지역에 비하여 사림(士林)이 은거하여 쉽게 정착할 수 있는 지리적, 경제적 사회적 여건도 무시할 수 없으나 무엇보다도 도학(道學)을 강조하고 끊임없이 벼슬에서의 은퇴를 자청(自請)한 퇴계의 영향이 크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현상윤(玄相允)은 「조선유학사」에서 퇴계 이전에는 선비들이 다투어 조정에 서기를 힘썼으나 퇴계 이후에는 그 영향을 받아 국가의 징소(徵召)에도 쉽게 응하지 않는 것을 도리어 명예로 여기는 소극적 사풍(士風)이 생겼다고 지적한 것이다. 윤리도덕을 강조하고 내면적 수양에 힘쓰는 이러한 기풍은 물질적 명리(名利)에 타락하지 않는 청렴결백한 인품이나 인격을 형성하고, 또한 의리구현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자칫 신분주의와 형식적인 명분주의 등에 얽매여 사회문화의 침체와 경화현상을 자극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안동은 선현(先賢)들의 유풍(遺風)속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한 것도 사실이다. 전통문화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현대문명에 대한 반발이 클 수 있으며, 그러한 보수와 배타성이 오히려 많은 문화유산을 온축(蘊蓄)시킬 수 있는 힘이라는 점에서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이 동시에 있는 것이다.
현대는 첨단과학을 바탕으로 한 물질 문명이 압도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과학문명에 의하여 인간생활의 편리성은 엄청나게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풍요와 안락은 끝없는 물욕을 조장하고, 올바름의 여부를 무시한 방임(放任)된 물욕은 개인적 이기주의(利己主義)로 치달아 더욱 정신적 황폐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인간은 물질과 정신의 조화를 이루고 그 가운데서 참된 인간다움의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중심의 유교사상에는 풍성한 인격성과 도덕성이 담겨 있다. 현대의 물질중심의 사회에서 점차 상실되어 가고 있는 정신적 가치를 이러한 유교문화에서 보충할 수 있는 바, 전통문화가 잘 간직되어 있는 안동지역의 유학사상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