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씨(姓氏)의 정의(定義)
성씨(姓氏)란 일정한 인물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단계혈연집단(單系血緣集團)의 혈통(血統)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개인에게 붙이던 겨레붙이(족속(族屬))를 칭하는 표지(標識)나 부호이다.
이는 족적 관념(族的觀念)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대로 거슬러 올라 갈수록 더욱 밀착되어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 오늘날에는 성(姓)과 씨(姓)의 구분이 없어져서 성씨(姓氏)라고 붙여 부르며, 이것은 성(姓)의 높임말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성씨(姓氏)가 쓰이기 시작하던 초기에는 성(姓)의 뒤에 발생한 씨(氏)는 동성(同姓)의 갈래를 나타내는 등 서로 구별되어 사용하던 개념이었다.
●성씨(姓氏)의 기원(起源) 과 발전(發展)
학자들은 성씨(姓氏)의 시작을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적 형태를 볼 때, 국가(國家)라는 개념 보단 부족(部族)이란 성향이 강한 즉, 약 5 ~ 6000년 전 모계(母系)사회였을 때 부터 시작한 것으로 여긴다.
그 당시(수렵 내지 유목)에는 "일부다부제(一妻多夫制: 한명의 처가 남편을 여러 두는 제도)"에 가까워 여성이 여러 남성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의 아버지를 일일이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갓난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는 모르나 그들을 낳은 어머니는 확실시되므로 그들은 모두 한 어머니(모계)의 혈통에 귀속시킬 수밖에 없었으므로 어머니의 성씨(姓氏)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는 성(姓)이라는 한자(漢字)가 여자[女: 계집 녀]가 낳았음[생: 낳을 생]을 의미하는 글자라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허신(許愼: 후한 때 학자)이 그의 저작인 책《설문해자 (說文解字:한자를 파해 설명한 책)》에 성(姓)을 풀이하여 [성인지소생야(姓人之所生也)]라 한 것도 이를 반영한 것이다.
이처럼 동일한 모계(母系) 혈족(血族)을 구분하기 위해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초기의 성(姓)에 "희(姬: 주(周)나라 왕족들의 성)ㆍ사(?: 하(夏)나라의 왕족들의 성)ㆍ규(?:순임금이 평민으로 있을 때 요(堯)임금이 두 딸을 그에게 시집 보내어 규예(?汭)에 살게 하였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그것을 씨성(氏姓)으로 삼았기 때문에 규씨(?氏)가 되었다. )ㆍ강(姜: 제나라 군주들의 성)ㆍ영(?: 진(秦)나라 군주의 성) 등"에는 [계집 녀(女)] 부수의 글자가 많이 사용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 주 무왕(周 武王) 희발(姬發)의 자손들이나 친척들이 성(姓)과 땅(본봉)을 하사 받은 나라의 시조들..
주공 희단(周公 姬旦): 노(盧)나라 시조
소공 희석(召公 ?奭): 연(燕)나라 시조
숙진 희탁(叔振 姬鐸): 조(曹)나라 시조
강숙 희봉(康叔 姬封): 위(衛)나라 시조
관숙 희선(管叔 姬鮮): 관읍(菅邑): 관나라 시조), 후에 삼감의 난(三監-亂)을 일으킴),
채숙 희도(蔡叔 姬度): 채읍(蔡邑): 채나라 시조), 후에 삼감의 난(三監-亂)을 일으킴)
주 무왕(周 武王) → 성왕(周 成王: 2대 왕) 희송 → 당숙 희우(진-晉나라 시조) →진(晉)나라는
위(魏: 위씨), 조(趙: 조씨), 한(韓: 한씨)나라로 분리.
※. 삼감의 난(三監-亂): 주나라 초기에 상(商)나라의 유민을 관할한 무경 녹보(武庚 祿父: 상나라의 마지막 와 주왕(紂王)의 아들)와 녹보의 감시 · 보좌를 맡은 삼감(三監) 관숙 희선(管叔 姬鮮), 채숙 희도(蔡叔 姬度):, 곽숙 희처(霍叔 姬處) 등이 서주 성왕을 보좌한 주공 단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이다. 관채의 난(管蔡-亂), 무경의 난(武庚-亂)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곽숙희처(霍叔姬處)는 확실치 않다.
《사기》 관채세가와 《상서대전》 금등조며, 사기의 노주공세가 · 송미자세가 · 위강숙세가 등에도 관련 내용이 조금씩 등장한다. 이들을 한데 엮어서 정리하면 삼감의 난의 서사과정은 다음과 같다.
서주 무왕이 상나라를 멸한 후 상나라의 마지막 임금 제신의 아들 무경 녹보에게 상나라의 유민들을 맡겨 상나라 왕실에 대한 제사를 계속 드리게 했다.
또 녹보와 상나라 유민이 주나라에 완전히 복속되지 않았다고 여겨, 동복 아우인 관숙 선과 채숙 도를 각각 관(管)나라와 채(蔡)나라에 봉하고 녹보의 보좌 · 감시를 맡겼다. 무왕은 8년 만에 죽고 서주 성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해 숙부 주공 단이 섭정하자, 관숙과 채숙은 주공의 전횡을 꺼려 무경(武庚: 은나라 마지막 왕의 주왕(紂王)의 아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는 회이(淮夷: 회하강(중국 3대 강중 하나 양자, 황하, 회하) 지역의 여러 동이족)와 서융(徐戎: 서이(徐夷)라고 함.)도 가담했다.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관숙은 여러 동생들과 함께 “주공이 성왕을 죽이고 천자의 자리를 대신하려 한다.”라고 소문을 퍼트렸다.
또 무경에게는 엄(奄)나라의 임금 박고(薄姑)가 녹보에게 무왕이 이미 죽고 소공이 어리며 주공은 의심을 받고 있다는 점을 들어 주나라에 대항할 것을 권유했다.
주공은 관숙 등이 자신을 모함하자 태공과 소공 석과 협력했고, 또 자신의 임지에 아들 노후 백금을 파견해 다스리게 했다.
무경 · 삼감 세력과 협력한 회이와 서융은 노후 백금이 힐(?)에서 격파하고, 노나라를 안정시켰다. 회이에 대한 전역은 이후 주공의 동정(周公-東征)으로 이어진다.
주공 단은 성왕의 명령을 받들고 반란군과 싸워, 무경은 목을 베고, 관숙은 죽이고, 채숙은 추방했다. 주공은 3년을 소모하여 삼감의 난을 철저하게 토벌했다. 이를 주공의 동정(周公 東征)이라 한다.
삼감의 난을 진압한 후, 주공은 삼감을 폐지하고, 무경이 다스리던 상나라 유민들이 살던 땅에 위(衛)나라를 새로 봉건하고 자신의 아우 강숙 희봉(康叔 姬封: 위나라 시조)에게 다스리게 했다.
강숙의 봉읍은 황하와 기수(淇水) 유역이다. 또 상나라 유민 일부를 이주시켜 무경(武庚)의 숙부 미자계(微子啟)에게 맡기고, 미자계(微子啟: 송나라 시조)를 송(宋)나라 공작으로서 옛 상나라 왕실에 대한 제사를 이어나가게 했다.
《사기》와 《상서대전》의 전승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사기에서는 여러 편에 걸쳐 일관되게 주동자를 무경과 관숙, 채숙이라고 하고 삼감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서대전에서는 무경과 삼감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지목했다.
또 사기에서는 관숙과 채숙이 모두 제후로 봉건되었다고 하나, 상서대전에서는 관숙과 채숙의 봉건 여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이 차이는 삼감이 제후인지, 제후에 배속된 속관인지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성(姓)이라는 글자는 이러한 관습이 보편화된 훨씬 이후에 만들어졌으므로 이에 관한 증거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성(姓)은 부락의 이름이나 부락의 수령 등을 나타내는 말로 지어졌으나 종족(宗族)에 따라 자신들의 거주지나 숭배 물 등을 성(姓)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혈족 계통이 미천한 일반인들에게는 성(姓)을 가질 수 없었거나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극히 소수의 특수한 신분층에 국한되어 있었다.
사회가 차첨 변하여 유목생활이나 수렵생활에서 정착생활로 변해감에 따라 자연히 가정과 부족의 힘은 여성에서 남성으로 자리 이동이 시작하였다.
즉, 모계(母系)에서 부계(父系)로 바뀌게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姓)도 부계(父系) 혈통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성(姓)은 곧 힘이였다.
성(姓)의 주요한 역할은 씨족이 서로 같거나 같지 않음을 분별하는 것이었다. 또 이에 기초하여 서로 간에 통혼을 하는데 이용되었다. 곧 동성끼리는 서로 통혼하지 않는 금기에 연결되었던 것이다.
동성끼리 결혼할 수 없는 것은 이 금기는 현대에 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전통이 점차 타파되고 줄어들고는 있지만 아직도 한자 문화권에 속한 허다한 지방에서 동성끼리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성씨(姓氏)의 분화(分化)
성(姓)과 씨(氏)는 구별이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하(夏)ㆍ은(殷)ㆍ주(周) 중국 고대 3대(三代)와 춘추시대(春秋時代)였다.
당시 이미 성(姓)을 가지고 있던 제후국의 군주 또는 그 가족들 등 귀족들은 제후에 봉해져 토지를 하사받은 뒤에 씨(氏)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분봉(分封) 받은 국읍(國邑)의 지명(地名)이나 관직(官職), 조상의 자(字)나 시호(諡號), 작위(爵位), 거처(居處) 등을 씨(氏)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성(姓)이 없는 일반인들은 씨(氏)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부자(父子) 사이에도 성(姓)은 같지만 씨(氏)가 다른 경우가 생겼고, 성(姓)이 다른데도 씨(氏)는 같은 경우도 나타났다. -->
(엄마는 같지만 아빠가 다르고, 아빠가 같지만 엄마가 다른 경우..)
성(姓)이 같으면 결혼을 하지 않았고, 씨(氏)가 같아도 성(姓)이 다르면 결혼을 할 수 있었다.(엄마가 같으면 결혼 하지 않았고, 아빠가 같아도 엄마가 다르면 결혼 할 수 있다.)
●성씨(姓氏)의 통합(統合)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러 종법(宗法) 제도가 무너지면서 성씨(姓氏) 제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종족(宗族)의 유대와 연결 관계가 약해지면서 성과 씨의 차이가 점점 모호해진 것이다.
씨(氏)가 성(姓)처럼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전국시대 이후에는 귀족의 몰락과 함께 평민(平民)의 지위가 상승해 그들도 성(姓)을 지니기 시작했다.
결국 진(秦)ㆍ한(漢) 시대 이후에는 성(姓)과 씨(氏)의 구별이 점차 사라져 하나의 의미로 쓰였으며, 백성(百姓)이 민중(民衆)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는
[김씨(金氏)], [이씨(李氏)]라 하고 중국에서는 [김성(金姓)] [이성(李姓)]이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