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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동명천제단입니다.
대한제국 애국가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저희는 대한제국 재건회(大韓帝國 再建會)입니다. 대한제국의 재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장충단(獎忠壇)에 제향된 많은 우리의 순국 군인(殉國軍人), 순국 열사(殉國烈士)들에 대한 자랑스러운 현충(顯忠)과 기념(紀念)이라고 할 것이라고 저희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Japan)으로 비교하여 설명한다면 장충단(獎忠壇)은 바로 정국신사(靖國神社)와 같은 대한제국의 성지(大韓帝國聖地)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장충단(獎忠壇)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의 허접하고 비참할 정도로 허술한 공원으로 남아 있고, 덧붙여서 심지어 말도 안되는 엉뚱한 서울신라호텔(The Shilla Hotels & Resorts)에 황당한 장충체육관(The Jangchung Arena)까지 정말 기가 막혀도 말도 안나오는 시설까지 존재하면서 자리를 잠식(蠶食)하고 있지만,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모든 정신과 이념이 함축적으로 담겨있는 성지가 바로 장충단(獎忠壇)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 공화국에서 서울신라호텔과 같은 엉뚱한 시설이나 짓고 체육관, 공원 등으로 일본식 공원 개념(Japanese style park concept)으로 만들어 현재까지 유지시키고 있다는 점은 대한민국 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 자체가 바로 우리 동이족(東夷族)과는 정통성(正統性)이 전혀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대한제국 재건회(大韓帝國 再建會)가 존재하게 된 배경이고, 또 대한제국의 복원(大韓帝國復原)을 위해 매진(邁進)하고 또 노력(努力)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4년 전, 1900년에 장충단이 남소영(南小營)터에 건축되면서 가장 중심이 되는 주신(主神)에 대한 선정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전사하신 군부대신 홍계훈(軍部大臣洪啓薰) 장군과 갑오년(甲午年) 동학농민혁명(Donghak Peasant Revolution) 당시 동학농민군(Donghak Peasant Army)과의 교전 끝에 전사한 영관 염도희(領官廉道希) 장군, 영관 이경호(領官李璟鎬) 장군을 주신으로 제향하게 된 것이 바로 장충단의 시작이었습니다.
갑오년(甲午年)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존재하고 또 평가에 대한 입장이 학자마다 조금씩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만, 저희 대한제국 재건회(大韓帝國 再建會)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과연 혁명(革命)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보는 입장에 있음을 먼저 밝힙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측에서 밝힌 내용을 먼저 보면 소위,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올바른 역사인식을 정립하기 위해 교과서 용어 변경을 추진하여 동학농민운동을 동학농민혁명으로 바꾸었다며 마치 자랑스럽게 홈페이지(homepage)를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측에서도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의 혁명(未完革命)으로 끝났다고 자체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동학농민운동을 동학농민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아마도, 만약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말처럼 동학농민운동이 혹시 성공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지금의 역사가 아닐 것입니다. 엄청난 역사의 변화(歷史變化)가 있었을 것이고 일본제국(日本帝國)에 의한 한일합방(韓日合邦)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맞는 이야기입니까?
즉, 혁명이라는 단어가 명명(命名)되려면 운동의 결과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어야 하는 당위성(當爲性)이라는 것이 반드시 존재하여야 함에도 역사적으로 보면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한 운동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계의 정설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학농민운동을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명명하는 문제는 다소 문제점이 있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운동을 동학농민혁명으로 교과서에 수록하여 학생들에게 교육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학생들에게 잘못된 교육을 실시하는 것으로 반드시 지양(止揚)해야 할 사안이라는 점 우선 밝히는 바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은 건국 이후, 비교적 최근인 2004년 3월 5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으로 2004년 9월 17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 회복 심의 위원회 출범을 하였고, 곧이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명칭이 명명되어, 2019년 2월 26일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일까지 제정이 되었는데, 황토현 전승일인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선정한 바 있습니다.
만약, 동학농민혁명이 혁명이 맞다면 3.1운동(3.1運動) 역시 3.1혁명(3.1革命)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왜 같은 성격의 운동을 어떤 운동은 혁명이라고 명명(命名)하고 또 어떤 운동은 그냥 운동이라고 명명(命名)하는 것은 역사를 보는 시각의 문제가 있음을 자인(自認)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도 동학농민운동으로 맞게 호칭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지적을 저희 재건회는 아울러 밝히는 바입니다.
또한, 동학농민운동의 경우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사회 개혁 운동을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물론 애국심(愛國心)의 발로(發露)에 의한 순수함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동학농민운동이 동학(東學)이라는 소위 천도교(天道敎) 세력이 주동이 되어 있었다라는 점이 있고, 또 지역적 특성과 인원의 차이도 분명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주동 세력의 한 주축이 천도교 계열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 것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동학농민운동의 명칭에서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이 첫 번째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 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 본다면 동학농민운동이 완전히 천도교를 따르는 순수 동학교도들이었냐고 지칭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의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농민들은 물론 북접지역(北接地域)의 동학교도들도 있었지만, 남접지역(南接地域)의 농민들은 동학교도들과는 거리가 먼 일반 농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두 번째 핵심 요소인 정권 장악(政權掌握)에 관한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동학농민운동측이 흥선헌의대원왕 전하(興宣獻懿大院王殿下)께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최종적으로는 손자분이신 이준공 저하(李埈公邸下)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을 살펴 볼 때, 두 번째 요소 역시 순수한 농민 운동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다소 문제점이 있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 번째 핵심 요소는 바로,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導火線)이 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청일전쟁의 경우는 일본제국(日本帝國)측에서 대청제국(大淸帝國)에 대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제국이 고의로 일으킨 전쟁이다로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결정적인 배경은 바로 동학농민운동이라고 하는데 이의는 없을 것입니다. 애초,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일 양국이 조선 영토내로 진입을 하였고, 곧이어 일본제국군(日本帝國軍)이 대청제국군(大淸帝國軍)에게 기습을 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청일전쟁에서 일본제국이 크게 승리하면서 역설적으로 일본제국에 급속히 조선이 귀속(歸屬)되는 악영향이 미치게 되었다는 점에서 과연 동학농민운동을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너무 큰 이견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결국,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성과 또 애국심의 발로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일부 수긍할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일본제국에 더욱 조선 정부가 예속(隸屬)되는 가장 안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던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저희는 본 카페(cafe)를 통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목표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이 당시에도 지도부에서 서로 의견이 분분하여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 아울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운동 흐름의 가장 우선적인 큰 목표는 무엇보다 명성태황후 폐하(明成太皇后陛下)의 타도(打倒)였다는 점이 지금까지 동학농민운동의 흐름에서 드러나는 진상입니다.
결국, 당시 조선 정부의 무능함이나 부패함에 대해 지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하여 명성태황후 폐하(明成太皇后陛下)를 물러나게 하고 흥선헌의대원왕 전하(興宣獻懿大院王殿下)를 다시 정권에 옹립시키기 위한 시도는 결국, 고종태황제 폐하(高宗太皇帝陛下)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었고, 결국 청일 양국의 군대가 조선 영토로 들어오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는 점에서 결코 동학농민운동은 성공한 운동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이며, 뿐만 아니라 청일 양국의 군대를 막아야 할 관군(官軍)이 오히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는데 동원되면서 엉뚱한 피해자가 발생되었다는 점에서 안타깝고 아쉬운 점이 적지 않다는 말씀을 함께 드리는 바입니다.
금일 언급하게 된 영관 염도희 장군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분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조선 정부에서 당시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설치한 특별 지휘부(特別指揮部)인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에서 남긴 기록물인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염도희 장군은 갑오년 10월 9일, "병영 영관 염도희가 병정 80명을 거느리고 연산(連山)과 진잠(鎭岑)을 나누어 순찰하고 돌아오다가 공주(公州)와 대전(大田) 지방에 이르러 비도(匪徒) 10,000여 명을 갑자기 만나 사로잡혀서 불타 죽었다고 합니다. 해당 영관은 달포 동안 순행을 하면서 고생이 많았고 결국엔 비적(匪賊)을 만나 죽었다고 하니 놀랍고 슬픕니다. 나랏일을 위하여 죽었으므로 포증(褒贈)이 있어야 하니, 다시 실상을 조사하여 빨리 시행해야 합니다. 싸우다가 죽은 병정들은 해당 병영에서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주거나 시체를 거두고 그 가족을 무휼(撫恤)하는 등의 은전(恩典)을 베풀되, 공전(公錢) 가운데에서 넉넉하게 제급(題給)하게 하며, 생전의 신역(身役), 환곡(還穀), 군포(軍布)는 모두 탕감(蕩減)해야 합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결국, 1900년 장충단에 배향되었고, 1905년 청주 병영 근처에 갑오전망장졸기념비(甲午戰亡將卒紀念碑)를 세운 뒤, 1907년 모충사(慕忠祠)를 세워서 배향하여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
대관(隊官) 이종구(李鍾九)
교장(敎長) 박춘빈(朴春彬)
규칙(糾飭) 임쾌석(林快錫)
십장(什長) 임영석(林榮錫), 이경문(李京文), 채윤오(蔡允五), 우성보(禹聖甫), 김치도(金致道), 정환용(鄭煥用), 백운철(白云哲),
박규칠(朴奎七)
병졸(兵卒) 김장석(金長錫), 함세현(咸世鉉), 김종록(金宗錄), 정원준(鄭元俊), 정말용(鄭末用), 손계헌(孫啓憲), 나용석(羅用石),
임기용(林基容), 이용성(李龍成), 오양오(吳良五), 문흥복(文興福), 장병철(張丙哲), 정대복(鄭大福), 이업동(李業同),
권응서(權應瑞), 박해운(朴海云), 정시동(鄭時東), 신상용(申尙用), 임철용(林哲用), 엄중근(嚴仲根), 김재수(金在壽),
박윤동(朴允東), 장금석(張今石), 오영진(吳榮鎭), 송철이(宋哲伊), 최수업(崔壽業), 조운철(曺云哲), 강병학(姜丙學),
권덕원(權德元), 이홍석(李弘石), 김삼만(金三萬), 전화진(全和辰), 임재홍(林在洪), 최호석(崔浩石), 박화진(朴化辰),
김재진(金在辰), 곽명흠(郭明欽), 이석봉(李石奉), 김복만(金福萬), 김재동(金才東), 조진철(趙辰哲), 박명준(朴明俊),
양성일(梁成日), 김치준(金致俊), 이정석(李正石), 양성래(梁成來), 김수학(金水學), 정기홍(鄭基弘), 이상근(李相根),
고영식(高永植), 전의길(全儀吉), 이일환(李日煥), 이순이(李順伊), 김천귀(金千貴), 유석환(兪石煥), 유성삼(柳聖三),
황희운(黃希云), 김선오(金善五), 정덕순(鄭德順), 오춘삼(吳春三), 곽기하(郭基夏)
위의 명단은 모충사(慕忠祠)에 배향되어 있는 순국군인들의 명부를 기록한 것이며, 명칭은 모충사 갑오전망장졸씨명록(甲午戰亡將卒氏名錄)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을 본 카페(cafe)에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친군영(親軍營) 체제를 세우면서 지방까지 군영(軍營)을 설치하는 제도를 실시합니다. 1887년에는 경상 감영(慶尙監營)에 남영(南營), 전라 감영(全羅監營)에 무남영(武南營), 함경도 경성(咸鏡道鏡城)에 북영(北營), 강원도(江原道)에 진어영(鎭禦營 ), 그리고 충청도 청주(忠淸道淸州)에 진남영(鎭南營)을 설치하였는데 지금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영관 염도희 장군이 재직하고 계셨던 군영이 바로 진남영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언급한 모충사(慕忠祠)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진압 군인(鎭壓軍人)들에 대한 제향 시설로는 유일하게 존재하는 사당입니다.
국가에서 설립한 장충단조차 유지시키지 못하는 대한민국 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에서 그래도 모충사라도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그만큼 역사적인 유적으로 영구히 보존해야 할 대표적 유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한가지, 불행 중 다행이라면 서울특별시 중구에서 매년 10월 8일 장충단 공원에서 장충단제(獎忠壇祭)를 열고 있다는 점은 불행 중 다행입니다. 알려진 것은 1996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을미사변 당시 명성태황후 폐하(明成太皇后陛下)를 보호하다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宮內府大臣李耕稙), 군부대신 홍계훈(軍部大臣洪啓薰), 시종 임최수(侍從林最洙), 참령 이도철(參領李道徹), 진남영(鎭南營) 영관 염도희(領官廉道希), 무남영(武南營) 영관 이경호(領官李景鎬), 통위영(統衛營) 대관 김홍제(隊官金鴻濟), 장위영(壯衛營) 대관 이학승(隊官李學承), 진남영(鎭南營) 대관 이종구(隊官李鍾九) 등 모두 9인의 선열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10월 8일 제례를 하고 있는 점은 정말 불행 중 다행이다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이러한 장충단제가 더욱 크게 확대되고, 또 시설도 제대로 갖춰져서 명실공히 완벽한 복원으로 안타깝게 희생되고 순국하신 많은 우리 호국영령(護國英靈)들의 위령(慰靈)과 함께 위대하신 혼령(魂靈)으로 모시는데 조금의 소홀함도 없도록 전 국민의 각고 노력(刻苦努力)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대한제국 만세! 존왕양이 만세!
감사합니다.
대한제국 재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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