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고구마 밭의 변신
1. 취직 시험
아버지는 큰 집으로 이사를 와서는 두문불출하셨다. 2년간 사회활동을 못하도록 꽁꽁 묶어 놓았으니 또 그럴 수밖에는 없는 처지다. 말도 적은 분이 활동조차 안 하시니 집안은 늘 우중충했다. 해직공직자모임이라는 게 생기자 아버지는 가끔 서울을 다녀왔는데 어느 날은 술도 잘 못하는 분이 엄청 취해서 돌아오셨다. 아버지말로 동지들을 만나 서로를 위로했노라고 했다. 이후에도 신문에 그들의 억울함과 하소연이나 소생할 가능성 내지 보상 등등이 게재되면 아버지는 빠짐없이 이를 모으고 또 그 가능성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객관적으로 판세는 이미 기울어 별 소용이 없는 것인데 아버지는 이에 매달렸다. 이는 아버지가 짊어진 부담이 어떠한 것인지를 달리 말하는 것이다. 나는 나약해진 아버지가 애처로워 더욱 가슴이 아팠다. 생각해 보면 신문에 난 글이란 것도 당시 해직기자가 쓴 글이 아닐까. 아버지는 그렇게 위로를 받으며 조금씩 무너져갔다.
당시 당신은 그들과 전화 통화를 할 때만은 너털웃음도 짓고 말씀도 많이 하셨다. 동지가 가족보다 나은 존재가 되어버린 현실, 철이 없다는 것은 바로 가족의 한 일원으로서 상태파악을 잘 못하고 있음을 말할 때 쓴다. 그 무렵 우리는 어렸고 분명 철이 없었다. 가족이란 모름지기 혈연을 매개로 온갖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순정을 나누는 집단이 아닌가. 그래서 성씨姓氏를 같이 하고 숙식을 같이하는 생활공동체로서 행과 불행을 또 같이한다. 가족은 그러기에 운명공동체이며 유무형의 재산을 공유하는 소유공동체이기도 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만들어진 운명공동체. 어떤 불협화음이 있다하여 가족관계가 단절되는 경우는 없으며 죽은 후에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가족이다.
비록 철은 없었지만 우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 모두들 열심히 살았다. 81년 2월, 000명 신입사원을 모집하다는 현대그룹 광고, 이는 전두환 정권이래 처음으로 난 대기업광고였다. 이 또한 반강제적으로 윽박질러 만든 모집이 아닐까. 아무튼 장안이 난리가 났다. 건국대 필기 시험장은 아수라장 그 자체, 그런 북새통이 없었다. 같이 시험을 보러 간 안양선배도 그러했지만 애인들까지 따라 나서는 바람에 시험장이나 바깥은 만원 사례였다. 김밥을 싸들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애인들 마음이 보다 더 급했다.
당시는 지금과는 달리 결혼 적령 나이가 여자는 24살부터 27살 정도, 남자는 27살에서 32살 정도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 바로 결혼들을 했다. 안양 선배는 애인이 임신까지 하는 바람에 남모를 고초는 더했다. 나는 형 애인 덕분에 차디찬 잔디밭에 앉아 김밥을 갈라 먹었다. 그런데 운이 따르는 것인지 유체역학이라는 과목의 문제는 그 전날 밤 본 내용이 쪼르륵 나왔다. 옆을 보니 반도 채우지를 못했는데 나는 꽉 채우고 검산까지 할 정도였다.
내 공부 역사상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감이 좋았다. 아쉽게도 안양선배는 필기시험에서 낙오가 되고 말았는데 나는 영어 회화 시험을 보러 당시 국제극장 맞은편에 있는 현대사옥에 갔다. 거기서도 행운은 통했다. 나이가 어리니 군대면제에 대해 물어볼 것 같았다. 면제란 말이 영어로 뭔지 나는 사실 그때까지 몰랐다. 사전을 들춘 김에 ROTC가 뭐가 준 약자인지도 같이 살펴보았다. 내 예상대로 미국여성 시험관은 군대문제는 해결되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친구들은 ROTC로 간 친구들이 많은데 나는 아쉽게도 면제가 되어 사회에 일찍 나오게 되었노라고 말을 했다.
그녀는 ROTC가 뭐냐고 또 물었다. 내 떡밥에 걸려든 것이다. 끝으로 정말 아쉽냐고 웃으며 시험관이 물었다. 솔직히 말해 동생들이 대학을 다니는데 돈 버는 사람이 없어 취직자리가 꼭 필요하다고 말을 했다. 나는 회화시험을 마치고 나오면서 당연 합격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또 그 장소에서 최종 면접시험을 보았다. 당시 각 회사의 임원들 10명 정도가 나와 앉아 있었는데 관심이 있는 회사 임원이 집중 문답을 했다. 나에게 질문을 한 사람은 훗날 BUY KOREA라는 광고로 유명세를 탔던 현대증권회장을 한 이익치 상무였다. 그가 물었다. " 자네 아버지는 무직으로 써 있는데 그전에는 뭐를 하셨나."
나는 대답을 했다." 공무원이셨는데 저번 공직자 숙정 때 그만두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중얼거리듯 말을 했다."그렇다면 부정을 했다는 이야기군." 다시 서류를 보는 것으로 보아 굳이 대꾸를 안해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나는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정치상황에 억울하게 희생당하신 겁니다." 그러자 면접관 10명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질세라 고개를 바짝 들고 그들을 응시했다. 문을 나오면서 직감적으로 떨어졌다고 생각을 했다. 군대도 안 갔다 온 처지에 3배수를 뽑았다는 면접에서 항변하듯 말을 했으니 차례가 돌아 올 리가 없다싶었다. 나는 그날 북아현동에 사는 친구집 동네서 꽁치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다가 결국 옆자리와 싸움이 붙어 파출소까지 끌려 갔다. 술에 취해서 나는 험하게 말을 했던 것 같다. "씨팔 놈, 지가 대기업 상무면 상무지 말 함부로 해도 되는거야.그냥 롯데서 껌이나 팔지 뭐."
그리고 그 상무를 정확히 81년 4월 2일 울산에서 다시 만났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아마 내 시험점수가 꽤 높았던 모양이다. 나중 그룹 연수교육 때 호명을 하는데 5번째 안 쪽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엉겁결 그 바람 나는 그룹 연수때 반장을 했다. 그 상무는 당연 서울에 근무할 것으로 알고 기술영업부에 발령까지 냈는데 나는 굳이 울산을 고집했다. 아마 그를 따라 갔으면 내 영어 실력이 바로 들통이 났을 것이다. 군대를 간 셈 치자 하며 울산을 자청했지만 우울한 집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그로부터 나는 거의 2년 가까이 울산 큰 애기로 울산에서 살았다.
2. 고구마 밭은 우리집의 로또였다
큰 집은 당시 유행이던 기름보일러 난방이었다. 이는 낭패였다. 비단 우리 집 뿐 아니라 중형 2층 슬라브 집은 난방의 진보된 방식으로 대개 다 기름보일러를 놓던 그 무렵인데 갑자기 들어 닥친 오일쇼크는 그 명성을 반감하기에 충분했다. 부모님은 거의 보일러를 돌리지 않고 유일하게 연탄을 때는 부엌 옆에 딸린 가운데 방이라 부르던 방에서 기거를 했다. 내가 울산 서 올라 올 때 고작 한 두 시간 건넌방에 불을 지폈을 뿐이었다. 집안 분위기 닮은 그야말로 엄동으로 산 무거운 시간이었다.
그러던 1982년 봄, 여전히 울산 큰 애기로 머물 무렵 우리 집에도 변화가 생겼다. 아버지가 침묵을 깨고 거동을 하신 거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익산에는 고종사촌들이 똘똘 뭉쳐 운수사업을 하는데 아버지에게 용달차 사업을 권유를 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이력에 이를 넣고 싶어 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날이 사업은 번창일로였다. 그 무렵 엄마는 아버지가 숙정을 당해 집에만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발언을 쏟아내셨다. 의 “네 아버지 사주는 천복이라 뭐든 하면 다 돈이 된단다. ” 나는 오랜만에 편안히 웃는 어버지 모습을 그 무렵 보았다.
내가 울산현대를 관두고 대학원을 다닌다고 안양 집에 올라왔을 때 부모님도 익산에서 올라오셨다. 덤으로 포니 2 차 한 대를 갖고 오셨다. 취직이 되셨기 때문이다. 후배들이 챙겨서 아버지는 축산기업중앙회라는 곳에 전무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학업을 다 마치지도 못했는데 장가를 들었다. 삼성에 다니는 동생이 연애를 했는데 재촉이 심했다. 신혼살림을 우리 집 2층에 꾸렸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칠 무렵 용케 지금의 직장에 응모를 했는데 합격을 했다. 아내는 대전여자인데 직장도 대전, 필시 아내의 염력이 대단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대전에 가장동에 연탄을 때는 가장아파트로 분가를 했다.
그때만 해도 대전은 안양보다 못하다 할 정도로 낙후된 도시였다. 그리고 연이어 동생들이 장가를 들고 시집을 갔다. 당연 그 무렵에는 6~70년대 고구마 밭이었고 또 양어장과 풍년원 포도원이었던 곳들이 어느 새 집이 꽉꽉 들어찼던 것이고 집집이 새끼 까듯 세들을 놓아 흡사 김원일 소설의 마당 깊은 집에 세든 사람들의 모습이 흔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대문 안쪽에 너 댓 집이 얹혀사는 그런 풍경 말이다. 그런 서민적 풍경에 그 무렵 곳곳에 랜드 마크처럼 등장한 게 따로 있었다.
이는 나만의 착각이 아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쓸 만한 대도로 변에는 이들이 포즈를 취하며 위세를 드높였다. 교회 아니면 은행 아니면 병원. 동네마다 제일 큰 건물이 이들의 차지였다. 우리동네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 하나가 들어선다 싶더니 그 위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여의도에 순복음교회가 넘쳐나 영등포 아래 시흥이나 안양에 사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남부 순복음 교회. 처음에는 신도수가 그리 많았던 것 같지 않은데 대단한 교세 확장이었다. 주말 예배는 순차별로 새벽 5시부터 오후 늦게 까지 계속되었다. 아침 6시쯤 저벅저벅 골목을 접어드는 행렬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잠을 깬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길 건너 옛 시흥군 군수 사택이었던 곳에 주차장을 만들어놓았지만 턱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바로 그 세를 놓은 집에 그 신도들이 하나 둘 입주를 하더니만 어느새 동네가 순복음 신도 동네가 되고 말았다. 전액을 교회에 기부를 하고 말년에 하느님 가까이 살고 싶어서라는 게 그들의 이유였다. 그런 그들은 교회종소리만 나면 밤이고 새벽이고 집안에서 울어댔다. 으스스하다 싶은데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중이었으며 그 다음 날 밤 새 왜 울었나 싶어 그들의 얼굴을 아침에 보자면 해맑은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런 어느 날부터 그들은 우리 집을 집중공략을 시작했다. 교회를 나오라는 그들의 간곡한 청은 아마 백번도 넘었을 것이다, 절에 다닌다는 표식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새 마음으로 두 세 사람이 성경책을 들고 찾아와서는 빙긋빙긋 웃으며 또 청을 하고, 동네 한 불럭 중 우리 집은 그러니까 그 시절 고구마 밭은 양어장과 풍년원 사이이니 한가운데인데 초입은 이미 순복음 교회에서 샀고 중간쯤인 우리 집을 사면 그들의 대첩은 아마도 손쉬웠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지쳐가고 있었다. 마음 약해진 아버지는 팔자고 했다. 하지만 엄마 생각은 달랐다. 그쯤 그들도 우리처럼 지쳐 있을 것이란 것이었다.
그들이 비둘기파를 보내 부드럽게 팔 것을 권유하면 엄마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곤 했다. 엄마가 부른 가격은 당초 우리가 책정한 금액의 두 배 가까이 되는 금액이니 그 금액으로 살 거라고 우리 스스로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기를 수차례, 어느 새 타협선 가까이 접근이 이루어졌다. 엄마는 금액을 다운 시키는 대신에 다운 계약서를 제시했다. 양도차액이 많으니 양도세는 당연 높을 테고 그러면 많이 받아봐야 의미가 없다. 우리는 개인과 개인이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산 가격이 바로 노출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말한 것이고 그러해서 매매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렇게 하자는 전갈이 바로 왔다. 그 교회의 목사는 내가 기억하기로 조용식 목사님의 셋째 동생인 조용래 목사님. 부모님은 그 목사님의 사모님과 계약을 했다는데 탤런트보다 더 예쁜 귀부인이 나타났었다고 말을 했었다. 아무튼 현찰로 반은 받았다. 지금은 금융실명제로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그 때는 그게 가능했다. 1966년도에 산 가격 기준하자면 수백 배도 넘는 장사가 아닌가. 아버지 친구 분이 이민을 가면서 싸게 판 고구마 밭, 분명 우리는 그 고구마 밭에서 노다지를 캔 것이고 로또에 당첨 된 것이다.
그 돈은 자식들의 집 얻고 기반 잡는데 톡톡히 역할을 했다. 지금 내가 대전서 사는데, 자식들 키우는데 밑거름이 된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부모님은 투기를 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비록 다운계약서를 쓰기는 했지만. 가만있어도 알아서 돈을 벌어주는 세상, 돈이 돈을 번다는 말도 맞고 ‘땅 사서 손해 본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해.못 하는게 바보지.’ 이 말도 맞다싶으니 차라리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해둘까. 그 일대를 모두 사들인 남부 순복음 교회는 지금 동네 일원이 교육관부터해서 거의 왕국을 거느리고 있다. 그 당시 랜드마크인 은행 교회 병원, 그 중 유일하게 현재에도 변함없이 어엿한 것은 내가 보기엔 교회가 유일하지 않나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