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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의 겨울축제는 막을 내렸다. 우리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즐거움과 자부심을 남겨준 채. 이제 자랑스러운 한국의 젊은이들을 다시 보려면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지난 3월 4일 오전 11시 기자는 서울 서초구 삼성생명 서초타워 15층에서 박성인(朴聖仁) 빙상경기연맹회장 겸 삼성스포츠단 고문과 마주 앉았다.
문득 4년 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기자는 2006년 3월 15일 태평로 삼성본관 14층에서 토리노 동계올림픽 종합 7위(금6·은3·동2)를 기록하고 돌아온 박성인 회장을 인터뷰했다. 그때 박성인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강석, 이규혁, 이상화 선수의 기록은 대단한 겁니다. 토리노 올림픽에서 아시아 선수로서 스피드스케이팅 10위 안에 든 건 한국 선수밖에 없어요. 이런 훌륭한 성과를 낸 우리 선수들을 격려해줘야만 빙상의 저변이 확대된다고 봅니다.” “피겨스케이팅은 중국계인 낸시 콴도 하는데 못할 게 없다고 봤죠. 그때부터 10년 앞을 내다보고 씨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김연아는 밴쿠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04년부터 집중 지원했습니다. 김연아는 밴쿠버 올림픽 때 최고의 나이가 됩니다.”
4년 전 오늘을 예언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했다. 17세의 이상화는 토리노에서 빙상 500m 5위를 기록했고 밴쿠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언론은 모태범과 이승훈을 주목하지 않았다. ‘이번에 우리 선수들을 격려해줘야만 빙상의 저변이 확대된다고 본다’는 박성인 회장의 전망은 현실이 되었다. 모태범과 이승훈은 한국 빙상의 저변이 확대되었음을 증명해 보였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주최국인 캐나다가 1위를 했지만 최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국가는 한국이었다.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 빙상의 그랜드슬램.
한국 빙상의 오늘을 있게 한 출발점은 1997년 2월이었다. 그가 탁구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당시 이건희 삼성 전 회장이 그에게 빙상을 맡으라면서 한 말은 유명한 일화다. “여름 스포츠의 기본은 육상입니다. 겨울 스포츠의 기본은 빙상이죠. 우리나라가 앞으로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면 빙상 종목을 반드시 육성해야 합니다.”
1997년 2월이면 동계올림픽 유치는 꿈도 꾸지 않을 때였는데요. “하루는 이건희 회장이 찾으신다고 해요. 그때 삼성에서 하계올림픽 종목의 6개 협회를 지원하고 있었어요. 동계올림픽 종목도 육성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그래요.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때가 올 텐데 그러려면 경기력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하셨죠. 그래서 제가 알아보니 빙상경기연맹이 아주 어려울 때였어요.”
어떻게 탁구인이 빙상경기연맹을 맡게 되었습니까. “이건희 회장께 상황을 보고했어요. 그랬더니 저보고 맡으라고 해요. 그래서 탁구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어 두 개를 동시에 맡을 수가 없다고 했죠. 다른 분을 추천했습니다. 그랬더니 탁구협회장에게 부탁해 저를 부회장에서 사퇴시켜 버렸어요. 솔직히 동계올림픽 종목을 알지도 못할 때였죠. 제게 탁구를 맡겨 10년 써봤으니까 아셨던 거죠.”
탁구의 성공을 보고 다시 빙상을 맡겨 13년째 지원하고 있는 거군요. “그때 이건희 회장의 그 말씀이 없었으면 이런 발상을 할 수가 없었어요. 탁구할 때도 배웠지만 그분은 선견성(先見性)이 뛰어나시죠. 10년 이상을 내다보고 준비하라고 한 게 지금 결실을 맺은 거예요. 정말 꿈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나는 뒷바라지하는 사람”
선수단장인데도 밴쿠버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요. “단장은 뒤에서 조용히 선수들 뒷바라지하는 사람입니다. 원님 덕에 나팔 부는 격이죠. 선수들이 칭찬 받아야 합니다.”
그는 빙상경기연맹 회장을 네 번째 연임하고 있지만 언제나 조용하다. 자신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는 성격 때문이다. 밴쿠버 현지에서도 그는 선수들 뒤에 서있길 좋아했다.
솔직히 그동안 동계올림픽은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밴쿠버 올림픽을 계기로 동계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진 것 같습니다. “하계올림픽 종목은 많이 알려졌지만 동계 종목은 그동안 부자나라 스포츠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동계올림픽의 꽃은 피겨, 특히 여자 피겨스케이팅이죠. 그동안은 근근이 출전 자격만 얻어왔을 뿐입니다. 우리가 지난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 금메달 6개로 세계 7위를 기록했죠. 하지만 동양 사람들에게 맞는 한 종목에서만 메달이 나왔다는 게 아쉬움이 많았어요.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스피드와 피겨가 주 종목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유럽은 스피드스케이팅 장거리 분야에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아시아 선수가 장거리 10위권이면 상위권으로 봅니다. 감히 넘볼 수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500m와 1만m에서 메달을 따는 걸 보고 관심이 커졌다고 봅니다. 물론 (김)연아가 작년에 세계선수권대회나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잘해 희망을 가졌지만 이렇게 퍼펙트한 경기를 할 줄은 상상 못했을 겁니다. (한국 대표의) 경기력이 미약해서 관심이 덜 했던 거죠.”
문제는 동계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반짝 관심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과거 핸드볼의 경우 올림픽 때만 반짝 관심을 갖다가 얼마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이었는데요. “사실 저도 (그걸) 우려하고 있는 거예요. 꾸준하게 10년 이상을 투자하고 기다려줄 수 있는 시스템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빙상은 삼성화재에서 꾸준히 지원하되 전문가에게 맡겨 간섭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최근 골프에서 ‘박세리 키즈’가 나왔잖아요. 골프장 시설이 좋아졌기 때문에 박세리 키즈가 나올 수 있었던 겁니다. 빙상 전용시설을 국가에서 지어준다면 10년 뒤에 ‘이상화 키즈’ ‘모태범 키즈’ ‘이승훈 키즈’ ‘김연아 키즈’가 충분히 나올 수 있을 겁니다. 정부에서도 말로 끝나지 않고 실질적 성과가 나왔으면 합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김연아 콜로세움’을 만들자고 했는데요.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뜻이 이뤄진다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마련될 것으로 봅니다. 우선 희망이 있는 종목에 배려해준다면 3개의 전용 경기장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기막힌 발상이었죠. 경기인으로서 너무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꼭 그대로 이뤄졌으면 합니다.”
지금 경기인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저는 경기인이죠.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그것밖에 모르는 사람이죠.”
73년의 인생에서 지금 가장 행복하고 보람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 우승 때와 88 서울 올림픽 때 탁구에서 양영자와 현정화가 금메달을 두 개 땄어요. 그때 경기인 겸 협회 이사로서 행복하고 보람을 느꼈지요. 이번에는 관리자이자 협회장으로서 인생에서 누구도 느낄 수 없는 황홀한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에 행복했습니다. 전율할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꿈을 이루고 보람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것이죠. 선수들이 너무너무 자랑스럽고,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이렇게 자부심을 느껴본 일이 없습니다.”
좋은 때 태어난 겁 없는 아이들
빙상 그랜드 슬램을 만들어낸 젊은 선수들과 누구보다 많은 대화를 나눴을 것으로 압니다. 언론에서 이들을 G(글로벌)세대라고 합니다. 이들 G세대의 특징은 뭐라고 봅니까. “저희는 구세대잖아요. 그들은 한마디로 긍정적 열정이라고 해야 하나요? 겁 없는 도전이라고 해야 하나요? 겁 없는 도전을 쉽게 이뤄내는 세대죠. 옛날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무엇을 갖고 있죠. 한국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희망적인 기운을 절실히 체험했습니다.”
구세대로서 손자뻘인 그들과 어떻게 대화하고 격려했나요. “그 친구들은 스스럼이 없어요. 예를 들면 이상화 선수가 (한체대) 교수와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교수가 ‘회장님이 너 버르장머리 없다고 되게 혼내준다고 한단다’고 하니, 상화가 ‘회장님 눈빛만 봐도 나를 예뻐하는 걸 안다’며 내기를 걸었대요. 하루는 상화가 ‘저 예뻐요, 안 예뻐요’라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너 안 예뻐한다. 너는 내가 안 예뻐하는 몇 사람 중의 하나’라고 그랬더니 상화가 말귀를 알아들어요. 작년 7월에 상화가 살이 쪄보여서 감독한테 체중이 불은 것 같다고 얘기했는데 이번에 물어보니 당시에 비해 3㎏을 뺐다고 해요. 태범이와 승훈이는 얼마나 천진난만한지 몰라요. 우리들이 고만할 때는 (어른들에게) 주눅들어 숨도 못쉬었잖아요. 좋은 시대에 태어난 그들이 부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박 회장은 1938년 평양 출생이다. 그는 제국주의, 공산주의, 자유민주주의의 각기 다른 3개 체제를 모두 겪은 매우 특별한 세대에 속한다. 역사책에서만 존재하는 시대를 살아온 자칭 구세대가 지금 G세대와 함께 세계 빙상(氷上) 역사를 새로 썼다.
일제강점기를 경험하고 공산체제를 겪다가 1·4후퇴 때 월남하셨습니다. 누구보다 어려운 현대사를 겪으셨는데요. “광복 이후 평양사범부속인민학교를 졸업하고 1951년에 월남했죠. 평양에서 학교 다닐 때는 이북이 이남보다 모든 게 풍요로웠어요. 공산체제라는 걸 느끼지 못했어요. 여름에는 대동강에서 수영하고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탔습니다. 하지만 조금 커가면서 어른들이 불편해하고 조사받으러 끌려다니는 걸 보다가 결국 피란 내려온 거죠. 평양에 살 때는 아버지가 가장 훌륭한 줄 알았는데 대구에 와서 아무일도 못하시는 걸 보고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죠.” 스키·컬링도 10년 투자하면 돼
1950~1960년대 탁구 대표선수로 일찍부터 해외를 가봤으니 한국의 실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겠지요.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에 탁구 대표선수로 출전했죠. 그때 비행기 타고 한국의 산을 내려다보면 전부 민둥산이었어요. 일본은 울창했는데. 1959년 4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독일 도르트문트에 갔습니다. 그때 숙소에서 주말에 독일 사람들이 단란하게 피크닉 가는 것을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이렇게 잘사는데 우리나라는 왜 저렇게 황폐한가 비교가 됐죠.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가 어떻게 됐습니까? 밴쿠버가 얼마나 풍요로운 도시입니까? 그런데 이번엔 밴쿠버가 부럽지 않았어요.”
빙상 외의 종목 스키, 컬링, 썰매, 아이스하키 등을 앞으로 어떻게 육성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우선 선택을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키점프, 모글, 컬링 같은 종목이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컬링은 집중력과 손재주가 중요해요. 방향을 옳게 정해서 10년 이상 투자한다면 빙상 못지않은 메달을 수확할 것으로 봅니다. 이번에 관계자 분들이 다 오셨기 때문에 방향을 잡았을 것으로 봅니다. 4년 뒤 성과를 보겠다고 하면 안되고요. 10년 뒤를 내다보고 중학교 아이들부터 키워야 합니다.”
썰매(봅슬레이, 루지, 스켈리톤) 종목은 후원기업이 있나요. “너무너무 열악해요. 듣기 민망할 정도예요. 이번에 하이원 스키장에서 처음 직장을 줬다고 해요. 마음 놓고 운동할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국내에 연습 시설이 없습니다. 봅슬레이 선수들이 전지훈련에 가기 위해 70~80㎏ 나가는 썰매를 비행기로 실어나르면 운송비가 비행기 티켓보다 더 비싸요. 기업이나 정부에서 지원해 준다면 정말 고무될 겁니다.”
2014년 소치에서도 동계올림픽 강국의 명성을 이어가려면 빙상의 저변 확대가 중요한데요. “빙상은 두 가지 목표가 있어요. 하나는 대표선수들이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꿈나무를 키워나가야 하는 겁니다. 두 가지가 수레의 양바퀴처럼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한쪽이 삐거덕하면 덜컹거리게 되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표선수에게 먼저 매달리게 되지 꿈나무에 매달리는 건 어렵지요.”
모태범·이승훈 비장의 무기였다
스피드스케이팅의 모태범과 이승훈은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은 선수였는데 아무래도 협회장은 다르게 보았을 텐데요. “(두 사람은) 비장의 무기였죠. 국내의 마지막 대회에서 모태범이 선배들을 다 물리쳤죠. 하지만 이규혁이 없었으면 모태범이 없었어요. 이규혁이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줬죠.”
우리나라 쇼트트랙 대표선수들은 올림픽대회를 2회 연속출전하는 경우가 드문 것 같습니다. 저변이 넓고 경쟁이 치열한 결과인가요. “쇼트트랙은 델리키트(delicate·섬세하다)한 운동이에요. 다른 선수와 부딪칠 수 있는 종목입니다. 그래서 변수가 많아요. 경기 중에 반칙이 들어올 수 있지요. 하지만 그런 게 들어왔을 때 밀리지 않고 같이 싸울 수 있는 담력을 키워야 합니다. 이번에 그 점에 소홀하고 기술에만 의존한 아쉬움이 있었죠.”
일부 젊은이들은 안톤 오노를 비난하지만 저는 참 대단한 선수라고 봅니다. 솔트레이크 이후 3연속 올림픽대회를 출전한다는 게 자기관리를 보통 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경쟁자를 넘어서 대단한 선수죠. 평상시에 착하고 예의 바르고 그래요. 머리가 좋아 의도적으로 자기를 클로즈업 시키려고 그러는 게 아닌가 싶어요. 미국에서는 거의 영웅 대접을 받고 있죠. 개인이 메달 딴 개수가 제일 많아요. 자기관리나 자질로서는 본받을 만큼 뛰어난 선수죠. 비록 적이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쇼트트랙의 부진을 두고 쇼트트랙의 파벌싸움 얘기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토리노 직후에도 그런 얘기가 나왔죠. 진선유 쪽과 안현수 쪽이었죠. 그런데 경기에 들어가서는 선순환을 이뤘다고 봐요. 상대보다 더 잘해야 겠다고 악을 품고 했어요. 연습도 더 열심히 하고 지도자까지 그런 점이 있었고요. 이번에 나온 파벌싸움 얘기는 협회장으로서 인정하기 어려워요.”
일본의 추락은 변화 못한 탓
‘포스트 김연아’를 걱정하는 국민이 많습니다. 곽민정 외에도 선수들이 많나요. “민정이도 기대 이상으로 너무 잘해줘서 다음 올림픽에는 주역으로 뛸 만한 선수라고 봐요. 어제 연아가 떠날 때 민정이도 같이 토론토로 떠났어요. 그 밑에도 너무너무 예쁜 아이들이 또 있어요. 곧 시작합니다. 저는 벌써 그 이름을 다 새겨놓았어요. 뒷받침만 된다면 키울 수 있는 새싹이, 어디서 다 돋아나는 것 같아요.(웃음) 김연아와 똑같을 나이거든요.”
밴쿠버에서의 성공으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가능성은 얼마나 높아졌다고 봅니까. “저번에 평창 유치전 때 프라하와 과테말라에서 우리를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었어요. ‘너희는 쇼트트랙선수권대회만 유치하지 왜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고 하느냐’고 했어요.
하지만 벌써 우리를 대하는 것이 달라졌어요. 어떻게 작은 나라에서 이렇게 잘하느냐며 배우고 싶다고 부러워했어요.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확신합니다.”
동계스포츠의 강국 일본의 추락에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본의 동계스포츠가 무너진 이유를 뭐라고 분석하고 있습니까. “참 설명하기 어렵지만, 일본인의 특징은 정석을 좋아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본은 변화무쌍한 기술이 필요한 상황에서 못 따라오는 게 아닌가 싶어요. 2차대전 후에 갑자기 세계 일류국가가 되어서 (자기 방식에) 고착되어 있는 게 아닐까요. 제가 탁구를 가르쳐봐서 압니다. 중국과 달리 일본은 틀에 박힌 것만 가르치죠. 저희가 옛날에는 그걸 배우고 싶었는데. 그래서 세계 변화에 못 따라오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삼성전자가 소니를 이긴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나요? (우리가 일본을 이긴 건) 배울 거 있으면 배우고 우리 나름의 훈련방식을 개발하고 아이들의 상상력이 결합된 것이라고 봐요.”
4년 전 인터뷰에서 엘리트스포츠는 한번 무너지면 복원하는 데 50년이 걸린다고 했는데요.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일본은 경제가 아주 좋아져서 엘리트스포츠보다 생활스포츠로 가야 한다고 그랬어요. 그 결과가 오래전부터 나타났잖아요. 지금은 우리한테 배워서 트레이닝 센터를 만들고 상금 걸고 대회를 열고 있죠. 박용성 대한체육회장이 늘 하는 얘기지만 중국이 자전거 타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도 사이클로 메달을 못 딴다는 겁니다. 엘리트스포츠와 생활스포츠는 구분해야 합니다. 한번 무너진 것을 일본이 그렇게 육성하려고 해도 잘 안되잖아요.”
엘리트스포츠를 비판하는 목소리 중에는 공부와는 담쌓고 하루종일 운동만 시킨다는 겁니다. “미셸 콴과 미셸 위가 한국에 왔을 때 감동을 받았죠. 미셸 콴이 그런 말을 했어요. ‘운동을 열심히 했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공부를 할 수 있어야 운동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미셸 위도 LPGA투어를 가면서 시험 다 보고 리포트를 냈다고 하잖아요. 저희 때만 해도 운동선수들에게 특혜를 안 주니까 커닝을 해서 대학 졸업했어요. 지금은 대학 들어가자마자 공부를 안 시키잖아요. 애들 잘못이 아니라 어른 잘못입니다. 기본적인 교육은 다 이수해야 미셸 콴이나 미셸 위 같은 그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