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뮤직music은
그리스어 무시케mousike에서 비롯되었다
어디 단어 하나 뿐이겠는가
서양 음악사의 변천은
그리스를 개켜놓고 혼자 있을 수 없지
처음, 호메로스의 대서사시는
아폴론의 신전神殿만큼 장엄하고
피타고라스의 음정비론音程比論은
파가니니나 윤이상까지, 롤링 스톤즈를 거쳐
김민기까지 마른 뿌리를 적시며
여기서는 그 소식조차 알 수 없으나
아마존의 만강한 장대비와 같겠다
충분히 내리지 않으면, 대륙의 건너편
어린 나무씨앗들은 고사되고 마는...
뮤직의 원原뿌리 무시케는
근대 그리스에 이르러 마노스 하지다키스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등으로
도도한 원류를 전승하였다
1925년 불가리아 아래께인, 그리스로는 북쪽 끝마을
'산티' 라는 소읍에서 출생한 하지다키스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화약냄새로 범벅된 제2차 세계대전과
부친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소년의 가슴은
슬픔의 채보에 바빴고 잠시 보면대를 떠나
아테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지만
입때껏 지켜보던 연극의 신神 디오니소스는
하지다키스를 무시케의 무대로 되찾아왔다
당대의 시성詩聖과 음악장들은 이 돋보이는 천재에
경탄해 마지 않았고, 보답이라는 인사를 알고 있었던
천재는 주옥같은 레파토리를 내놓기 시작하였다
에게해의 가파른 바람과 올리브 나무의
성성한 그늘을 닮은 예민한 노래들
나의 어머니, 우편배달부, 아테네의 흰장미,
그대 귀밑의 카네이션, 달 위의 산책, 기차는 떠나네......
세계가 싸륵싸륵 아파 가던 시절을 매만지며 적어내던
명곡들은 그리스 해안선을 지나 에게해를 건넜다
문화부 장관을 지낸 Melina Mercuri가 주연하고
그녀의 남편 Jules Dassin이 감독했던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로
깐느 음악상과 아카데미 음악상을
동시에 거머쥐는 등 곡성哭聲을 닮은 비잔틴성가를
피다 죽은 맨드라미 곁에서 들었던 사람들은
물새가 들려주는 최후의 파도소리에
차차 휩쓸리기 시작하였다
1966년부터 7년 동안은 뉴욕에 머물며
세계적 작곡가라는 이름 값을 드높였고
그리스 국립라디오 방송국으로 돌아오기까지
조산아였던 뮤지컬과 현대 음악을 성글게 세우며
물새의 호기심과 성취는 무한대의 증폭기였다
그는 인덕이 많았다, 당대 최고의 그리스 미성美聲
마리아 칼라스, 아그네스 발차, 마리아 파란투리,
신비주의의 양감을 잘 표현하던 작곡가 레나 플레토스와
오늘의 신성新聲 사비나 야나토우까지
아테네의 가장 높다란 언덕인 리까비토스와 같은
음악가들의 옴살 맞은 동료가 되어 주었던 시절들
그러나 라까비토스 언덕과 아크로폴리스 언덕만큼
쌍벽을 이루었던 음악 동료 테오도라키스는
작곡가뿐만 아닌 민주화 항쟁 지도자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와 영광을 동시에 얻고 있었다
하지다키스는 우울한 회피와 시류와 버성기는
버금딸림음으로, 두 권의 시집을 펴내고
그 나라에선 '시카' 라 불리우는
무화과나무 아래서 열 일곱 살에 죽은
우편배달부의 안부를 묻고는 하였다
그러던 1994년 6월 14일 오후
천상의 음표를 보려고 올렸던 잠망경을
내리고 하지다키스는 눈을 감고 말았다
물새는 날아갔다, 낯선 초여름
구문舊聞에 부고를 띄우고 전조등 불빛을
따라 어둠 속 자스민 꽃을 만나러 떠났다
수많은 꽃자루들이 그의 무덤을 덮었고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노래들이
괄게 지핀 아궁이 마냥 타닥거렸다
저 하늘의 별들은 몇 와트로 반짝이며
110볼트인지 220볼트인지
어디다가 전기 줄을 꽂았을까
아테네 어디서나 우러러 보면 환히 불을
밝힌 신전神殿, 그리고 좁은 골목마다 들리는
음악소리... 이토록 풍부한 전력電力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으다다 고압전류에
감전해 버린 나, 여관에 박혀 있을 수 없어
밤바람이랑 싸돌아 다녔다, 중앙성당 근처
'메트로폴리스'라는 음반 가게에서
다시 재회한 사비나 야나토우
천상의 악기樂器 '리라'나 '아울로스'나
'부주키'나 '산투리'에다 낯익은 현악기들
게다가 전자음악까지 버무림을 해서
그녀의 목소리는 천공세계를 거닐고 있었다
오늘 그대에게 소개하는 이 음반과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흔하디 흔한 이국의 여자가수들과
삼천리나 동떨어진, 낯설은 색감의 깃털
알무스타파의 새처럼 고고한 날개 짓
나 오래 전 바람결에 들은
어떤 여인의 목소리, 동유럽 민요를 잊지 못했다
그 여가수의 이름을 메모장에 적어두고
간간이 떠나는 여행길마다 음반을 구하기 시작했어
그것이 나와 사비나와의 인연이었다
1959년,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서 태어나
올해로 사십 중턱을 넘은 그녀는
그리스 국립음대를 마치고 런던으로 건너가
길드홀 대학원에 머물며 두레박을 내렸다
1983년부터는 친구들과 함께 악단을 꾸려서
세계를 떠돌며 생수生水 같은 노래를 들려주었다
최근에는 '봄의 향연'과 함께 아메리카를 순회하고 있다
간간이 사운드트랙에 노래를 보태기도 하면서...
바로크 음악과 고古음악을 섭렵했으니
갓 구운 은행 알을 깨물듯 수도원에서
하나둘 귀하게 노래를 건네다가도
재즈풍의 목청으로 빗물 새는 선술집에서
다정한 포도주도 한잔 부어줄 줄 아는
과일이 깊은 가슴에 씨를 품고 있듯
가슴에 깊이 혼을 모은 사비나의 노래를
우두커니 듣다가 돌아오는 밤길
저 멀리서 태고의 신전이 하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아테네는 달보다
별보다 신전이 더 밝게 빛난다
여신女神이 주소지를 두고 있는 아테네는
밤에도 신의 그림자가 뒤를 따라온다
그녀가 나에게 관심하는 것이어서
엉겹결에 사랑을 하고 엉겹결에 버림을 받고
눈을 떴다, 새벽이었고 새가 울었다
나는 은백양나무 아래서 잠을 잤었던
모양이고 나무의자에 가지런히 누운 나를
어떤 여신이 덮어주었는지 향기가
싸아한 모포와 금방 떨어뜨린 새털이
하얗게 놓여져 있었다
기이한 꿈이었다, 물새와 산새가
숨을 나누었던 인연, 은백양나무 아래서
그 언덕의 바닷가에서
한참 앉아 있었다
누구나 저처럼 고요할 수 있고
누구나 저처럼 광폭할 수 있음을
이 바닷가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신전과 예배당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린토 정교회의 하얀 예배당
한국 어느 정교회 성당에 성화聖畵를
그렸다는 아저씨를 고린토교회에서
만났다 그가 선물로 준 달력으로
한해를 보냈다
그런데 공휴일이 우리나라 달력과
달라서 나는 따로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공휴일에는 바닷가에
가곤 했는데 그 아저씨도
공휴일에는 바닷가에 갔겠지
일년열두달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은밀한 슬픔들을 나누며 산다
2. 여자는 바다에 빠져 죽었네
-페리바누 (니코스 가트소스)를 들으며
나는 여행을 혼자서 한다
여자는 일찍 바다에 빠져 죽었고
나는 언제나 혼자서 길을 걸었다
행여 그녀가 못다한 노래는 없었는지
썰물진 꽃밭에 남겨놓은 온기가
아쉽지는 않은지 물어보는
죽은 이들의 사제司祭가 되었다
모나스티라끼에서 춤을 추는 집을
하나 알았다 그래서 거기 종종
찾아갔는데 바닷물에 막 적신
머리카락이었던 종업원 아가씨가
내게 궁금해하며 물었다
"당신은 왜 혼자십니까?"
"내 여자는 저기 에게해에 빠져
죽었답니다. 그러니 어서 술을 주시오"
아가씨는 내게 술을 한잔 사주기까지
했다, 사실 거짓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실도 아니었던 위증僞證
3 크레타 섬의 새 한 마리
-참새 (미노스 아르기라키스)를 들으며
크레타 섬으로 갔다 꽃섬으로 갔다
이라클리온 공항에 내리면 언덕의 건너편에서
재잘거리는 새의 소리를 맨 먼저 듣게 된다
크노소스 왕궁에 있는 어느 방에서
나는 파랑새를 보았다 벽화 속의 파랑새
그림이 되어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노래하는 파랑새 한 마리
백합 왕자를 만나고 싶었던 파랑새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길을 떠나는 자는 전화번호를 챙긴다
오로지 목소리 하나로 안심하고
목소리만 믿고 찾아가고 또 헤매곤 한다
여행자는 목소리만 가지고 있다
목소리는 얼굴이 아니어도
모든 그리움이다 섬은 보이지 않아도
지도에 그려져 있듯이
연락선 마도로스는 지도를 따라서 가면 그뿐
목소리라는 지도 하나로 우리는
대체 어디까지 떠돌 수 있을까
베토벤의 목소리 합창은 미리내 저쪽까지
위성에 담겨져 날아갔다지
누구를 그렇게 만나고 싶었으면
4. 춤을 춰요! 등잔불 아래서
- 만돌린 (마노스 하지다키스)을 들으며
그리스는 물가가 서유럽보다는 쌌다
유로화가 들어오며 바가지요금들이 늘었어도
아직 인심은 흉흉하지 않고
악착같이 사기를 쳐보려는 얼굴도
흔하지 않다 순박한 청년과 처녀들이
안주인 칼라말리아와 헬레닉 알콜을
한 소쿠리 이고 와 잔치를 베풀고는 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잔치를 자주 연다
아니 삶 전체가 아마 잔치인지도 모른다
밤에는 어울려 춤을 췄다, 등잔불 아래서
신부님도 춤을 추고 목사님도 춤을 추고
아이들도 춤을 추고 여자들도 춤을 추고
거지도 춤을 추고 들개도 춤을 추고
버스도 춤을 추고 비둘기도 춤을 추고
블라카의 기념품상과 손님들도 춤을 추고
선인장 숲속의 거북이도 춤을 추고
조그만 항구 피레우스의 밤배도 춤을 추고
만돌린 소리에 부주키 소리에 흥이 올라서
5 아테네 역에서 기차를 탔네
-기차는 떠났네(마노스 하지다키스) 를 들으며
숙소가 있던 모나스트라키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아테네 기차역을 찾아갔다, 난 거기가
아테네역인줄 정말 몰랐다 너무도 초라하고
너무도 조용해서 그냥 어디 간이역인줄로만
알았다 그건 신축건축물로 국력을 과시하려는
겉두름의 허세와는 상관없는
그리스인 특유의 진솔한 존재방식이었다
고속기차가 들어가는 서울역과 용산역과
우리집 근처 나주역과 목포역과 광주역은
아마도 여행자의 기억에 오래 남아있지
않을 그런 기차역이다 그렇게 비까번쩍한 것은
고색창연과 순박한 미적 감각에 맞설수가 없다
새똥으로 범벅된 유리창의 독일 만하임역과
넓은 공원을 끼고 있는 체코의 프라하역은
아, 얼마나 아름답던가, 집시들의 천국!
그러나 그보다 더 아름다운 역이 바로
아테네 역이었다 복숭아 캔을 꺼내먹으며
봄의 여신 페르세포네를 바라보았다
봄꽃이 피고 있었다 조그만 역에
조그만 꽃이 방글방글 피어나고 있었다
대륙으로 가는 항구 빠트라로
향하는 낡은 기차에
고작 몇몇의 떠돌이별이 모여들고 있었다
걱정이 없다 관광버스도 아니고
기차는 어김없는 시간에 발차할 것임으로
이런 역에서는 당신과 작별키스를 하고
기차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6. 이별이 내 심장을 찔렀다
-사랑, 그 양날의 칼이여 (미카엘 카코이아니스)를 들으며
고린토에서 하룻밤 여관잠을 잤다
바울 선생님이 고린토교회에 보낸
[사랑의 편지]를 읽으면서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숙소의 주인은 그리스식 진한 커피를
권했고 이국의 형제들은 아침 시장에서 사온
포도와 호두를 권했다 주정뱅이가 안주를 보고
어찌 가만 있을손가
점심때는 무조건 문을 닫는 '시에스타' 풍습에도
굴하지 않고 맥주를 사러나갔다 목사는 본래
하늘나라 시인 하늘나라 주정뱅이 아닌가
수피즘 시인들처럼 취해서 빙글뱅글
춤을 추려고 사랑에 술독에 황홀에 빠지려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까 하느님이
무조건으로 용서해주리라 믿고
나는 잔뜩 취기가 올라 시를 써댔다
감옥에서 보낸 바울 선생님의 애절한 편지보다
더 심오한 내용의 편지를 써댔다
그러나 나는 다만 편지를 보낼 주소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나의 비극이요 절망이다
목숨을 바치자던 사랑도 양은냄비처럼 식고
용기를 내어 찾아간 집에선 문전박대를 받았고
편지는 고작 일상의 다정한 안부말고는
쓰지 못하는 신세, 도를 넘는다해도
취기의 미친 짓 밖에 더는 아닐 테니까
사랑도 한때여서 이별이 내 심장을 찔렀다
7 자스민꽃처럼 웃으며 살고 싶어요
- 모든 혈기 넘치는 젊은이는 (마노스 하지다키스)을 들으며
오륜기가 눈부신 올림픽항공에 올랐던 시간은 오후
데살로니케로 가는 비행기는 반도를 거쳐
아폴로 금마차의 노을 꼬리와 함께 저물어 갔다
택시는 20분 정도 걸려서 시내로 입성했다
성聖소피아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바쳤다
혈기 많은 목사가 간절히 고개를 숙였다
성모 마리아의 키스가 필요한 시절
나는 더 이상 노잣돈도 없고 희망도 없는 여행자
어제는 날마다 죽어갔고 오늘도 금방 죽어갈
것이고 내일은 살아서 웃을 수 있을까
여행이 지쳤다, 은행나무침대의 천년같은 여행
전라남도 땅끝에 은거하여 변방의 말투로 글을 쓰고
꾸꾹꾸꾹 울며 날아온 철새를 기다리며 보낸
지난 십년 세월동안 나는 정말 깊이 침잠했었다
뉴요커의 혈기를 누르고 칼을 더 이상 갈지 않고
스스로 주눅들고 스스로 절망을 깨물으며
가엽게도 꽃만큼 환히 웃어본 일이 드물었다
나는 웃으면 참 예쁘다던데...
올림푸스 산 앞에서 소피아 성당 제대 앞에서
자스민꽃처럼 환히 웃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용난꽃처럼 목을 세워 웃게 해달라고
혈기 넘치는 생애를 빌고 빌었다
8. 북두칠성 점을 지니고 태어난 아기장수
- 케말 - 신밧드의 전설 (니코스 가트소스)을 들으며
비잔틴 대제국의 위대한 명성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으로 그 큼직한 깃발이야
휘날렸지만 변방은 반란이 그치지 않았다
잊지 말 것은, 김유신과 강감찬과 이순신이
전부가 아니라 민중의 해방을 위해 도끼를 들고
일어났던 농민 장수들이다 겨레를 오랑캐로
부터 왜구로부터 지키고자 일어섰던 의병장이다
알렉산더왕의 백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키만 껑중한 지붕 없는 기둥들 뿐이고
주먹을 편 어린 소년은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오게 해달라고 구걸을 하고 있었다
오래 전에 저 소년은 주먹을 불끈쥐고 알렉산더에게
덤벼들었을 것인데 세월은 무서운 것
나무가 천그루나 있다해서 '천그루숲'이라
불린다는 데살로니케 변두리 숲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노중에 아이의 눈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아이의 등에도
북두칠성 점이 새겨져 있을 텐데
천그루의 나무를 심어 웅대한 숲을 이룰
희망이 새겨져 있을 텐데
9. 꽹과리를 울리며 함께 싸워나갔다
-악동들(마노스 하지다키스)을 들으며
인디언의 땅을 정복한 앵글로색슨족은
도처에 학교를 지었다, 그리고 인디언 아이들을
모아 교육하고 처음 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시험은 책걸상을 더욱 떨어뜨려 혼자서 보는 법
그런데 인디언 아이들은
교실 가운데로 모여 회의를 하는 게 아닌가
"아니 시험을 안보고 이게 무슨 짓이냐?"
"부모님이 그러셨어요.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다함께 의논하라고요."
무려 400년동안 터키의 발 밑에 엎드려야 했던
그리스는 굳은 신앙과 협동으로 그들의 절개를
지켜나갔다 정교회 시골본당 신부들은 결혼을 하여
전사를 낳았고 썩어빠진 고위층 종교인과 위정자들은
황금을 숭배하며 조카뻘인 어린 전사들을 죽여 갔다
절망하지 않고, 농민들은 민중의 교사들이 만들어
퍼트린 민요를 배우기 시작했다
잡혀 들어가 혀를 잘리우고 이빨을 모두 잃은
어떤 사내는 달빛아래서 칼을 갈았다
그들은 함께 싸워나갔다
마침내 그들은 장대한 전통과 심묘한 문화와
희망까지 외세로부터 되찾았다 한푼의 손해도 없이
뿐만인가 5월 아테네봉기에서도 젊은 학생들은
탱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숭고한 예술과 철학은
군홧발과 제국의 야심에 무릎 꿇지 않았다
2004 그리스 올림픽은 자본의 놀음으로
휘청거리겠지만 그리스인들이 보여줄 문화적 감동마저
휘청거리지는 않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
그리스 사람들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인류와 더불어 춤을 추고 싶어
우리나라 조상들도 마을공동체를 이루어
사장나무 아래서 꽹과리를 울렸다
무리지어 함께 싸워나갔다, 온갖 거짓에 맞서
펠로폰네소스반도를 기차를 타고 싸돌아댕겼다
그윽한 야경, 적절한 등불, 청초한 들꽃, 그리고 밤에는
달빛 달빛 달빛 나를 홀리던 달빛...
내가 사는 강진만 아름다운 갯벌은
무자비한 간척 공사로 죄 사라져버렸다
지금 그 자리는 썩은 물내와 농약냄새가 진동한다
상류에 흐르는 탐진강도 댐으로 죽어가고 있다
엄마수달도 아기수달도 죽고 버들치도 죽고
환경부 보호희귀종이라는‘대추귀 고둥’도
살날이 별로 남지 않았다
그래도 철새가 날아왔다 고마운 철새들, 그런데!
최근 철새관찰지점 근처에다 철새떼들을 잠못자게
고문하자는 것인지 라스베가스식 조명이 등장했다
군郡에서 심혈을 기울여 설치한 작품이란다
반짝반짝 밤중에도 깜박거리는 야자수 가로등 불빛
니나노판 관광객을 끌어들이려는 생각인가
철새와 시인을 추방하려는 모의인가 알 수가 없다
달빛에 홀려 시를 썼다는 다산초당의 유배자는
오래 전에 초당草堂을 떠났다지만
경박한 오색등불로 강진만 달빛을 거두어버려
이제 이 땅에 더이상 정나미가 떨어져
서러운 심정을 머금고 있다, 달빛이 없이는
어떤 시도 어떤 노래도 부를 수가 없는데
참으란다, 너 혼자 싫지 다른 사람들은 좋아한댄다
11. 첫눈 내린 날 같이 듣고 싶은 노래
-종이 달 (니코스 가트소스)을 들으며
첫눈이 내렸다 7월의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는지
헤세의 노래에 나오는 새빨간 양귀비들은
땅속에 꼭꼭 숨었는지 7월의 생명들은
첫눈이 내렸다 당신의 사랑으로
세상은 너무도 커서 반대편의 7월 말고
여기는 12월의 엄동설한
어떤 이에게는 7월의 햇살을
어떤 이에게는 12월의 눈발을
허락하시는, 흥미진진한 은총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캄캄한 진눈깨비로
달은 보이지 않아 내 방에 종이 달이라도
만들어 걸고 잠잠히 누워 볼란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노래를 들려줄 것이다, 종이 달
12. 하얀 벽에다 사랑을 새기고 있다
-헌시 (클리프톤 니비시온) 를 들으며
전쟁 때 표류를 하다 구출된 어떤 병사가 말했다
"깨달은 것은 이것뿐입니다
충분한 양의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이 있다면
내 남은 여생은 충분히 행복할 것입니다."
맞는 말이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런데 난 아이리쉬 커피라도 한잔 더 먹었음
좋겠다 욕심인가 커피에 위스키 한잔 띄워서
목을 축이고 싶다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축 늘어진 몸을 달래며
런던에서 아이리쉬 커피를 마시고
아테네 블라카에서 먹었던 핑 돌던 '오주'를
그리워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돌아오는 길은 아쉬운 길이니까
옴모니아 광장에서 오렌지를 까먹고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포즈를 취했던
기억은 모두 일기장에 남겨놓았을 뿐이다
사랑도 그처럼 일기장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여생에 필요한 '모든 것'은 사실 '별 것'이
아닌데 나는 왜 모질게도
수많은 기억들로 못박히려 하는지
오늘밤에도 녹슨 기타줄을 퉁기며
사랑노래를 새기고 있다, 하얀 벽에다가
13. 다음 역에서 만날 수 있을까
-어딘가에 내 사랑이 (마노스 하지다키스)를 들으며
파리의 지하철에서 나는 어떤 방랑자가
메트로 벽에다 새겨놓은 글을 보았다
"다음 역에서 만날 수 있을까"
그래 다음역에서 부디 그를 만날 수 있기를...
어딘가에 사랑이 살고 있기를...
나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살 수 있을까
절반을 살았는지 10분의 9를 살았는지
알 수 없기에 나는 오로지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싶구나, 일찍이 나는 신神에게 모든 의지와
모든 경우의 수數를 갖다 바쳤다, 감금된 여생!
그런데 이제는 그랬던 것을 후회한다
종교 집단에서 숭배되는 신은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지 못하는 자들의
위선적인 대용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오로지 사랑하는 일 외에는 예배가 없고
완전한 공부가 없고 지고의 성공이 없다는 것을
사랑이 혁명이고 사랑이 평화며 또한 진화라는 것을
새로 지어올리던 올림픽 스타디움과 길게 뻗은 새길을
따라 그리스를 떠나왔다 비둘기는
열시간이 넘는 비행을 마치고
한반도에 착륙했다
아테네성당에서 만난 그리스 신부님 친구가
선물로 준 모자를 눌러쓰고 어딘가에 이 검은 모자를
쓰고 살아가는 친구들이 있다는 생각에 살핏 웃으며
"다음 기회에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눈을 감으면 아른거리는 벗들과 벗들의 동네 풍경
그린내의 목소리와 그린내의 입술이여
오로지 사랑에 목숨을 건 높은 파도와 섬들이여
싯푸른 지중해와 중력을 이긴 신들의 도시여
올리브 나무 아래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땀을 식히던
열일곱살의 우편배달부여
다음역에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