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9월 18일부터 23일까지 일본장보고관계유적지답사차 다녀왔습니다.
자료들을 정리하고 공부를 좀 더 하여
좋은 여행기도 한 번 쓰보려 합니다.
그리고 자료들은 씨디롬으로 제작하여 학교 수업에도 이용할 거고요.
대신 9월 문화재교실과 22일 정기 법회에 참석하지 못하여,
무척 아쉽군요.
문무왕과 만파식적, 우리나라 미술사학의 아버지 우현 고유섭선생의 체취까지 묻어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운치있는 조약돌 소리 구르는 바닷가
짭조름한 바닷 내음
너무나도 아름다운 감은사지 석탑들,
신비로운 전설이 서린
역사의 길을 함께 못하여...
더구나 우리학교 손제득이의
대금 청성곡이나
퉁소곡 천년학
단소곡 영산회상곡을
만파식적의 현장에서 들었다면
그 얼마나 환상적이었겠습니까?
이번 일본 답사 중에 스친 인상들을 생각키는대로
대강 늘어 놓겠습니다.
나중에 같이 배낭 여행 한 번 갑시다!
우리나라의 김옥균 등 젊은 개화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일본근대화의 기수
<<문명개화론>>을 쓰고 민간인으로서
대중강연과 토론, 쉬운 문체로 서양의 지식과 과학을
흡수하는데 앞장섰던
인물,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초상이 박힌 10,000엔 지폐와
일본 다이쇼시대의 대표적인 자유주의의 사상가, 농정학자, 교육자
국제연맹 부총재로
명성을 날리고, 타이완과 우리나라 식민정책들을 입안하였던 인물
삿포로 농학교에서 미국인 클라크로부터 감화(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랴! Boys Be Ambitious!라는 명구가 이 인물에게서 나왔던가요?))를 받았던
인물
니토베 이나조(1862-1933)의 초상이 박힌 5,000엔 지폐와
소설가, 평론가 영문학자로 도쿄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다가 영국에 유학하고 <<마음>>, <<우미인초>> 등의
대작을 낳았던 인물, 윤리적 배경이 강한 인간의 에고이즘을
깊이 추구하는 산문적 작풍을 보였던 인물
나쓰메 소세키(1867-1916)의 초상이 박힌 1,000엔 짜리
지폐를
전통시대의 인물들인
세종대왕, 율곡선생, 퇴계선생,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박힌 우리나라 돈으로 바꾸어 쓰면서 여행하였습니다.
르네상스식 국립쿄토박물관 건물 앞에서
모더니즘(근대화)을 완벽히 흡수한 일본에 의하여
좋건 싫건 간에 강요된 근대화와 식민지 수탈의 역사를
밟은 우리의 자화상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서울역과 남대문,
조선총독부와 경복궁
덕수궁석조전과 덕수궁,
최남선, 이광수와 한용운 스님, 김구 선생을
대비하면서 말입니다.
돌아다닌 이번 일본 여행 중에
빽빽한 삼나무숲과 어마어마한 넓이를 가진 비파호 위의
개혁적인 일본 천태종 불교 성지
히에이잔의 연력사에서
여행 중 처음으로 비로자나부처님께 합장 삼배 올렷습니다.
그리고 주지스님과 장보고 기념비 앞에서 촬영을 하기도 하고
포항 신광 법광사터 금당의 고식 목조 2층 건물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문수전 속을 가파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보기도 하였습니다.
높이 30미터 정도의 거대한 5층목탑과 담징의 금당벽화로 유명한 2층 금당이 있는, 나라의 호류지에서
우리의 황룡사를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선방에서 하안거를 끝내고 만행 중이신 우리나라의
스님과도 호류지에서 반갑게 만나서 기념촬영하기도 하였습니다.
돌아오는 배에서 생각하니
스님께 만행의 노자로 쓰시라고 보시를 못해드린게
무척 아쉽군요.
전 언제나 진실한 철든 불자가 될른지요.
황병기 선생은 일본에서 신라인들이 썼던 침향을 만나고
그 상상력으로 가야금 창작곡 '침향무'를 지으셨다지요.
불교의 법열과와 인도의 관능적인
열락을 표현한,
최승희의 보살춤을 생각키게 하는
명곡 '침향무' 말입니다.
과연 향 중에서 가장 그윽한 침향이 있더군요.
일제시기에 만들어져 사용하는 인조화학향은
모기나 쫓는데 쓸 일이지 법당에서는
쓰서는 안되겠지요.
우리나라의 천연약재로 만드는 향도 비교적 괜찮긴 합니다.
그래 죽림사 종문스님 생각에 호류지와 연력사 경내에서
1통씩 사왔지요.
여행중에 신라민정문서와 함께 신라시대의 가야금등 많은 일본왕실의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는 쇼쇼인(정창원)이 있는 도다이지 금당안의
관광상품가게에서 우리의 단소와 모양은 꼭 같지만 종적이 아니고
횡적인 대난무 관악기 하나와
지금은 연주의 맥이 끊긴 비파가 새겨진
나전칠기를 구입하기도 하였지만 자기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일본인의 모습은 참 보기가 좋더군요.
이들에 의하여 주권을 빼앗긴 자기배반의 역사경험을 가진
우리는 우리의 전통을 얼마나 처절히 배신하고 사는지
이즈음에야 조금 느끼고 사는지요?
전 아쉬운 마음에 청소년수련관에서 가장 인기 없는 강좌인
가야금반에 우리집 선아를 꼬득여 보내는데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모릅니다.
제가 일본에 다녀오니 첫 가야금 수업에 정원 20명 반인데
5명만이 왔다고 하더군요.
마누라님의 확고부동한 허영심과 교육열로 결국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피아노를 사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정서를 담는 그릇은 또한 우리의 악기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플릇도 좋고, 클라리넷도 좋고, 바이올린, 피아노도 좋지만 말입니다.
잃어버린 우리 고대 문화유산을 고스란히 잘 보존하고 있는
도시, 자연환경이 우리의 경주분지와 너무 흡사한 옛도읍 나라에서
쇼토쿠태자의 꿈과 너무나도 아름다운 백제관음상과
성덕대왕 신종의 비천이나 석굴암의 사리푸트라존자가 들고 있는
청동향로의 실물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오늘 개천절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성덕대왕신종의 18번 타종 소리를
듣고, 비천상(축소 모형) 탁본도 하였지만,
영락을 휘날리면서 하늘나라여인이 부처님께 공양올리는
그 향로를 다시 유심히 보고 왔지만,
중국이나 우리나라에는 현전하는 실물이 없지요.
백제관음상은 박물관의 뜨락에 있는 석조관음보살입상과
거의 유사하였습니다.
억불숭유의 시대인 조선시기에 파괴되어
낭산 서쪽 기슭 땅에 묻혀있다가
1997년 박물관으로 옮겨지면서 일제시기에 박물관으로 가져온
불두와 재결합하여 지금도 중생을 굽어보고 계시지요.
석굴암 탄생을 예고하는 대작 중의 대작으로 제 생각으론
국보로 지정하여 박물관 실내로 옮겨야 할 것으로 여겨지네요.
호류지(법륭사)가 일본 최초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
10주년인데 그 기념전을 성보각에서 보고
동쪽 가람(5층목탑과 금당은 서쪽 가람)인 몽전 중심의 동가람까지 밟으며 드넓은 호류지에서
토쿄에서 수학여행 온 여중생들과 말을 나누면서
저는 우리의
서라벌 불국사나 황룡사의 가람을 밟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더군요.
우리의 삼국인들이 찾아간 신세계가 아스카 나라이고
고대는 어차피 지금처럼 내셔널리즘, 국가 개념이 희박하였던
귀족중심의 사회이었으니까요.
화장실이 급하여 종무소에 들러 화장실을 묻는데,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길래 한국 경주에서
왓다고 하였더니 경주와 나라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고 하며
반가워 하더군요.
15미터가 넘는 <<화엄경>>의 노사나청동대불을 모시고 있고
사슴이 노닐고,
푸른 잔디가 깔리고 안압지를 닮은 연못의 정원이 좋은 도다이지의
금당은 장육존상을 모셨던 황룡사 2층 금당을 눈앞에서
다시 보는듯 하였습니다.
1258년 몽고 침략의 병화로 불타고 터만 남아 있는 황룡사
터만 남아 있고 치미조각만 박물관에 있는데,
도다이지의 햇빛에
번쩍이는 황금 치미는
자못 낭만적이기까지 하더군요.
아마도 그 옛날 장육존상을 모셨던 2층 금당의 황룡사 금당이
저러 했을테지요.
오늘도 박물관에서 180센티 높이의 거대한 치미와
모형을 보고
먼발치에서 황룡사터를 보고 왔지만요.
매화곷송이 무늬와
짤막한 몽당빗자루같은 꽁지
빼딱구두를 신은듯한 발굽을 가진
사슴들에게 센빼이 과자를 먹이고
사찰 경내의 관광상품가게에서
장인 어른 생각에 일본 토속 청주 1병을 사고
교무실 동료 선생님들 생각에 그림엽서 1뭉치를,
마누라 생각에 벽옥 목걸이 하나를 사 왔지요.
그리고 집에 있는 아이들 생각에
수채화가 그려진 고급 종이의 책갈피(북마크) 한 셋트를 사고
우표를 꺼내어 침발라 붙이고 우체통을 책받침 삼아
옆서 한장 써서 부쳤습니다.
한편으로
도다이지를 방문하고 나오는 인도인 할머니와 그 아들들의
일가족을 만나니 지난 겨울 인도성지순례 때 생각이 나더군요.
사무치던 부처님의 숨결, 여행 후 몇 달 동안이나
그립고 그립게 하던 인디아 그 땅의 긴 여운........
나마스테!
법수(부처님 진리의 물줄기)가 동류하여
다다른 동녘끝 해뿌리나라에서
만나는 인도 할머니.
부처님 최초 설법지 사르나트 녹야원 사슴동산에서
만난 사슴들을
여기서 다시 만날줄은 꿈결에도 생각못하였지요.
쿄토의 긴가쿠지의 금빛 찬란한
금당보다도 그 앞의 연못 정원은 안압지를 다시 보는듯
예가 바로 신선이 사는 선경인듯,
서방정토 극락세계인듯 하여
한없는 마음의 평화로움을 맛보았습니다.
또 사찰 내의 다다미 방에서 차를 마시며
다선일미가 무엇인지도
일본문화의 밑바탕에 깔린 선문화를 접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찰마다 남아있는 목탑과 금당 강당 회랑 등의
사찰공간배치는 우리가 잃어버린 고대의 사찰공간을
다시 확인해주었습니다.
사찰의 예배공간이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기에(원래 신도들은
금당내에는 출입할 수가 없고 회랑에서 예배를 하였으나,
지금은 법당안에서 예배가 이루어진다. 포항 신광 법광사의 금당터가
이런 사실을 명확히 보여줌.)
그만큼 불자들에게 주는
부처님께 대한 공경심, 거룩함, 신비로움 등의
감정이 달랐음도 알 수 있었답니다.
신라 미륵신앙의 화신 화랑의 모습을
구현한 지고 지순한 예술이요
신라인의 종교심의 최극치인 코오류지의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보지 못하여
아쉬웠긴 하여도 정말 좋은 공부를 한
여행이었습니다.
사천왕사에 잠시 갓다가 오사카역사박물관 9층에서
내려다 보니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성이
한 눈에 조망되더군요. 봉건시대 영주(다이묘)의 성의
전형을 보여 주더군요. 높은 다락집, 성곽과 깊고 넓은 해자의 물길.
귀무덤, 코무덤, 포르투갈의 노예상인에게
단돈 10원에 팔려간 20만명의 노예가 된 우리들 아버지 어머니
누나 형들,
생이별로 울음천지가 되었던 강가, 포구.
자식과 생이별하고 잡혀온 어머니의 영혼이
자식의 어머니를 위한 사찰 수륙도량 중에 홀연히 나타났다는 기록이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올 정도로
참혹하였던 임진왜란시 왜군의 출발지가 바로
오사카성이었겠지요.
<<난중일기>>를 윤두서의 <동국여지도>와 함께 샅샅이 읽은 지
여러 해 만에 지리산 화엄사, 쌍계사, 칠불사에 갔다가
고려대장경 남해분사도감이 있던 남해섬을 갔던
지난 여름 섬진강 하구와
광양제철 사이의 바다, 조명연합군이 퇴로를 차단하고
필사적으로 왜군을 섬멸하다가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전사지 노량진 관음포 생각이 나더군요.
타케타신켄이 새벽 안개 속에서 비밀리에 수장되는
드넓은 비파호수가 나오는 세계적인 영화감독 쿠로자와아키라의
'카케무샤'란 일본영화에서 본
바로 그 성이었지요.
한글로된 박물관 어린이 고고학 발굴 실습 워크시트를
챙겨주는 친절한 직원과 부모와 함께 박물관에서
고고학 발굴 실습의 학습을 하는 모습에
현대 일본의 힘이 저에게도 전율쳐 오더군요.
돌아오는 길에 기따큐슈를 들러
일본대외업무를 관장하였던 관청이었던
다자이부(태재부)터와
백촌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패배하고
신라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급박하게 쌓은 백제유민들의
수성과 대야성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고오로우칸에서 신라의 토기와
아라비아 아바스왕조의 녹유자기들을 보고
9세기의 바닷길을 장악한 장보고선단의 해상세력의
힘도 보았습니다.
긴 후쿠오카성 성벽을 차창으로 내다 보면서
저는 착잡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일제말기 이 곳으로 징용 당하여
탄광 속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배고픔 속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였던 선친생각에
말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사지에 보내고
아들과 남편을 기다리며 뒤안간 감나무 아래의
장독대에 정화수 한그릇 하얀 사기그릇에 떠놓고
천지신명께 무사귀환만을 빌고 또 빌었을
할머니와 어머니 생각에 말입니다.
순결한 조선의 영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모든 죽어가는 생명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 선생이
생체실험을 당하며 죽어갔던 후쿠오카감옥도
이 곳이었지요.
시모노세키에서 부관훼리를 타고 오면서
파도에 멀미하다 결국 토하고 뱃전에서 새우잠에
들고 말았지만
쿄토역 지하도 서점에 쌓인 그 많은 신간서적들과
개교 130주년을 맞은 후쿠오카 다이자이부 옆의
시골소학교를 생각하면서 저는 더욱 서글펐답니다.
하지만 저에게 서글픔만 안겨 준 여행은 결코 아니었어요.
어릴적 어머니가 해주던 무 넣고 찌진 꽁치와
무 생채를 김대중-김정일 두 분이 손 맞잡고 환히 웃는
사진이 들어간 벽시계가 달린 오사카의 교포식당에서 먹을 수 있었고
올해로 개교 30주년을 맞은 대동고등학교에서
제가 89년에 초임으로 교사 생활할 때 인연 맺었던 제자를
이번 여행 내내 일본 현지 가이드로 만났기 때문이죠.
전국의 초 중 고 대학 교수님들 60여명 중 하필이면
저의 제자라뇨?
30년 교육이라는 역사의 힘을 실감하는 보람, 즐거움
우리 역사의 희망찬 햇살을 본 듯한 그런 감정을
느끼기도 하였지요.
벼가 양글맞게 잘 익은 추수를 시작하는 다락논과 농가,
지도로는 감이 전혀 오지 않던
시모노세키에서 오사카까지의 세토나이카이(지중해)의
존재를 비로소 인식하였고,
강수량이 많고 습기 높은 일본의 아름다운 숲들도
오사카의 메갈로폴리스,
아기자기하고 정성을 다하는 관광상품과 인사를 하는 관광산업,
확연한 지방분권화,
'젊은이에게 일자리를'이란 일본공산당 표어가 인상적인
시골의 선거벽보,
붉은 신궁과 충군애국을 외치는 맹목적인 우익단체와의 조우와
작은 충돌.....
이번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실감하였지요.
이런 것들은 지리선생인 마누라와 호기심이 많으나 견문이 짧은
집 아이들과 같이 와서 보고 느끼고 생각할 부분이더군요.
조용필의 힛트곡처럼 내 형제 내 부모가 끌려가면서
보았던 해운대 오륙도 앞 바다에 새벽 2시에 돌아왔습니다.
이번 여행은 장보고관련일본유적지 답사이었는데,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김문경 역주)를 읽어보시고
포항의 신광 법광사 3층석탑이
장보고의 도움으로 왕이된 신무왕의 할애비 김균정의
원탑이라는 것도 아시면 도움이 되겠지요.
문화재 교실에 참가한 학생들의 관심이 자라서
앞으로 인도 아프칸 실크로드 중앙아시아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스리랑카까지 자라나가겠지요.
일본은 목탑이나 목조건축물, 목불이 주종을 이루지
석탑이나 석불은 거의 없고
단청이 없으며 스님들의 순수한 불교 수행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우리 경주 남산의 돌부처님들,
아름답기 이를데 없는 조형미를 가진 돌탑들,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간화선 수행의
전통,
아름다운 성덕대왕 신종,
단청이 아름다운 우리의 사찰 건물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소중한
겨레의 문화유산이고
인류의 보배인지를 새삼 절감하겠더군요.
문화재교실 정말 소중한 일입니다!
한국의 불자 정말 위대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우선 일본여행기로 귀국 인사 올립니다.
참, 좋은 소식 하나 알려드립니다.
<10월 3일 개천절(올해로 세번째 개천절 행사, 예전처럼 섣달그믐날밤이 아님)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성덕대왕신종이 18번 타종>되고
부대행사로 비천상 탁본, 사물놀이, 종소리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대한 강연회 등의 행사가 있답니다.
누구나에게 무료로 개방되고
시간은 <오전 9시에서 12시>까지 입니다.
박물관에서 불교문화기획전시회까지 있답니다.
갈바람 억새 줄기 사이에서 영혼이 드높아지는
멋드러진 가을을 소매자락 가득 담고 오세요.
저도 가족들 데리고 가서 꼭 듣고 싶네요.
오시기 전에 황병기 선생의 수필집
<<깊은밤, 그 가야금 소리>> 속에 실린
<일승원음을 듣고>를 읽어 보시면 더욱 좋겠지요.
첫댓글 포항교사불자회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사이트 찾아들어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