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 출애굽기 6:2-8
제목: 정통성 : 가나안 땅을 약속받은 자
일시: 2019. 11. 24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출애굽기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그린 성경이다. 그 핵심인물이 모세인데 그가 이스라엘백성들 앞에 섰을 때 백성들은 누가 너를 세웠느냐고 그의 “정통성”에 대해 묻는다. 그때 모세는 “여호와” 곧 “스스로 있는 자”(창3:14-15절)가 보내었고 그는 이스라엘 조상들의 하나님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을 이삭과 야곱 등 조상들이 물려받았고 이제 모세가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 호렙산 떨기나무불꽃 가운데서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백성들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모세의 미션은 “정통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받았던 가나안 땅의 약속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어나가기 때문이었다.
II.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약속” “언약”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신 땅이다. 계약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졌기에 그 땅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정통성 있는 약속의 땅이다. 이 땅을 약속받은 사람들은 약속의 백성이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그 말은 그 계약관계가 세대를 거듭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아브라함의 계보에 속하기만 한다면 그 약속의 땅의 상속자로서의 정통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 DNA속에는 가나안으로 회귀본능이 있었다. 어디를 가도 다시 돌아와야 할 내 본향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 언약의 땅을 그렇게 사모하고 정통성의 축복을 얻고자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야곱이다. 그는 형 에서의 축복을 사모했다. 그 축복은 장자로서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가장 귀하게 여긴 “가나안땅 상속자”라는 정통성의 축복이었다. 즉 야곱이 사모했던 축복은 우양이나 초지가 많고 물이 많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었다. 호시탐탐 그 축복을 노리던 야곱은 마침내 형 에서로부터 그 축복을 가로채게 된다. 자신이 속은 줄 알게 된 에서는 진노하여 야곱을 죽이겠다고 그의 생명을 찾는다. 이에 야곱은 형의 진노를 피해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도망한다. 그곳에서 14년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거기서 재산도 증식시키고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는다. 하지만 하란에서 안정된 삶을 뒤로 하고 다시 기를 쓰고 가나안으로 기어들어 오고자 한다. 마치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부모 형제 친척이 있는 안정된 그 하란 땅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약속의 땅, 그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간 것과 같다. 약속의 땅이기에 형이 생명을 요구한다고 해도 머리 내밀면서 들어오려는 것이다.
야곱이 처음부터 바랐던 장자의 축복은 아비의 정통성을 이어받는 것이었다. 그가 하란으로 떠날 때 아비 이삭이 그를 가만히 불러 이렇게 축복한다.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자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28:4).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야곱이 비록 사기꾼 같이 그 약속을 가로챈 것 같았지만 이삭은 자신이 아비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려받은 가나안 땅 거류민으로서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세상적인 물질의 축복으로 따지면 에서와 야곱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 야곱이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려고 목숨을 걸고 얍복강을 건너 형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400명의 사병을 데리고 오고 있었다. 그는 죽었다 싶어 “몸을 일곱 번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창33:3) 갔다, 이런 모습을 본 에서는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고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창33:4). 당장에 한 대 얻어 맞을 줄 알았던 야곱은 우는 형의 마음이 풀린 것을 보고 형에서에게 드릴 많은 재물을 보인다. 그때 에서가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라고 물으니 야곱은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라고 한다. 그때 에서가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창33:9)이라고 한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창33:10)라고 하며 야곱이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라 하고 강권하니 받는다. 에서가 야곱이나 다른 축복은 동일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바로 정통성이다. 에서가 갖지 못한 축복은 정통성이다.
이후 야곱은 기근으로 인해 가나안땅을 떠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먼저 애굽에 가 있고 총리가 되어 있는 잃은 아들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가게 된다. 야곱이 바로 앞에 섰을 때가 130세였다. 그리고 17년을 애굽의 고센에서 살다가 임종을 맞게 된다. 임종을 앞두고 그는 유언을 한다. 나를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으로 묻어달라는 요청이다. 그의 매장지는 가나안 땅 막벨라 밭에 있는 굴이다. 그곳은 아브라함이 헷사람에게 돈을 주고 산 곳이다. 그 고향땅에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할머니 사라가 묻혀 있다. 또한 거기에는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가 묻혀 있다. 거기에 또한 야곱은 이스라엘의 계보를 잇는 유다의 어미 레아를 묻었었다. 야곱은 죽음의 자리도 그 정통성을 잃지 않았다. 야곱은 정통성 있는 약속의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것이다.
III. 이렇게 조상들로부터 받은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이스라엘백성들은 역사 속에서 체험하게 된다. 그것이 출애굽 과정이다.
애굽에서 총리가 된 요셉을 따라 애굽 땅으로 간 야곱과 이스라엘백성들은 고센에서 머물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고센지역에서 이스라엘에게 익숙하고 오랜 정착지가 되었다고 해도 돌아가야 할 곳은 약속의 땅이었다. 마침내 때가 왔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기로 언약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때가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출6:5)고 하신다. 모세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역사의 현장 속에서 입체적으로 이루게 된다.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의 정통성 있는 계승자로 인정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는 이스라엘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3:15)고 말씀하실 때 그에게 정통성의 권위를 부여하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가나안 땅의 약속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가는 사람이 되었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백성들은 삶의 현장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자신들의 누구인지를 체험하게 된다. 출애굽의 하나님, 광야의 하나님, 가나안 땅 입성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약속에 따라 사는 사람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첫째, 난민이었다. as a refugee. 애굽은 약속받은 사람들이 살 곳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으로 있었고 그 압제에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애굽은 절망의 삶이었다. 애굽은 죄의 짐을 지우는 세상을 상징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죄의 종으로 있는 것이다. 죄에 매이고 사망에 매이고 나를 노예로 얽매이는 바로의 법에 매여 있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refugee로 있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Savior이다. 모세를 통해 히브리노예를 출애굽시킨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애굽에서 불러 내신다. 애굽은 머물러 살 곳이 아니라, 떠나야 할 곳이다. 아무리 부추가 있고 마늘이 있고 매력이 있어도 그곳은 떠날 곳이다.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돌아가셨다”라고 한다. 갈 곳은 황천길이 아니라 약속의 땅이어야 한다. Refugee가 가장 먼저 건너야 할 곳이 홍해이다. 그 홍해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바울은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고린도전서 10:1-2). 홍해를 통해서 거듭나게 되면 더 이상 쫓기는 자의 모습이 아니다.
둘째, 우리는 순례자이다. as a pilgrim 그 삶은 광야의 삶이다. 우리는 나그네로서 광야를 걷고 있다. 광야의 특징은 길이 없다는 것이다. 위험하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행색이 말이 아니다. 하지만 순례자의 삶은 절망적인 뒤를 보고 사는 피난민의 삶이 아니요 앞을 보고 걷는 삶이다. 순례자의 삶은 빠져나오기 급급해 하는 삶이 아니라 약속의 땅을 보고 사는 삶이다. 비록 지금의 형편과 상황이 광야와 같다고 할찌라도 말이다. 이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Lord 이시다. 홍해를 통해 태어나게 했으니 광야에서 우리를 양육하신다.
셋째, 광야를 지나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때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는 이미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계약서에 있는 대로 약속받고 들어가는 곳이니 당당한 정복자로 들어간다. as a conqueror warrior 그때 하나님은 King이 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는 그가 통치하시는 그의 백성 people이 된다. 그가 왕 되시기에 전쟁을 하시고 승리를 주신다. 약속의 땅을 주시는 것이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이제 순례자에서 정복자요 전사이다.
IV. 역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계시의 도구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가나안 땅은 모세와 이스라엘백성들의 출애굽의 역사를 통해서 구체화시키셨고 이제 그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자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 가나안 땅의 약속을 성취하신다는 것이다.
구약은 옛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신약에서 성취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이 되시는 것이다. 모세가 이끌었던 이스라엘백성들의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모습이다.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인도하여 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애굽으로 굳이 내려갔다 오셨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헤롯이 그의 생명을 찾았다. 그때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급히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마태2:15)라는 애굽여행 버킷리스트를 완성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모세의 출애굽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savior 로서, Lord로서 그리고 King으로서 우리의 왕 되시고 우리를 백성 삼으신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왕으로 오셨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증거를 한다. Koenig 혹은 점성가라고 하는 동방박사들이 빠졌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의 증언이 없었을 것이다. 고대 전승에 의하면 동방박사들은 바빌론 아라비아에서 온 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별을 발견했다. 이들이 올 때 빈손으로 오지 않고 세 가지 예물을 가지고 왔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다. 황금을 가져온 박사의 이름은 수염이 지긋이 난 나이 많은 “멜키올”이라고 한다. 황금은 왕을 상징 한다고 말한다. 유향을 가져온 왕은 용모가 수려한 청년 “가스파르”라고 하는데 유향은 제사의식 때에 사용되는 것으로 예수께서 대제사장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몰약을 가지고 온 “발타사르”는 늠름한 풍채를 지니고 둥근 터번을 머리에 두른 중년의 남자라고 한다. 그 몰약은 예수께서 당하실 수난과 죽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동방박사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 되어 죄된 애굽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광야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당신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주님은 죽으실 때도 왕으로서 죽으셨다. 예수님은 33년을 이 땅에 사시면서 모든 사역을 하신다. 왕으로 오신 그분은 왕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기에 민란을 일으켜 로마에 반란을 한 주역으로 예수님을 고발했다. 그래서 유대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데 예수님은 아무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총독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는 말에는 “네 말이 옳도다”라는 말씀만 딱 한마디 하셨다. 주님은 죽으려고 작정하신 것이 분명하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빌라도는 예수님을 그냥 놔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에 예스라고 말씀하심으로 적어도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처리할 정치적인 명분과 보고거리를 얻게 된 것이다. 이로써 이제 빌라도가 로마황제에게 유대 땅에 일어난 이 소란스러운 일에 대한 보고를 위해 공식적인 죄목을 붙일 수 있었다.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마태27:37). 주님께서 사형 당하신 죄목이 유대인의 왕이었다. 예수님은 죽으실 때도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신 것이다.
V. 다음 주 아드벤트를 앞두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소망하는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통성의 유산을 갖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인 것이다. 모세의 출애굽 역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여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모세 역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그를 불러 미션을 주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그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시고 이루신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 savior 이요 주님이요 Lord 요, 왕 king 되신다. 아드벤트와 크리스마스가 있는 올 한해의 마지막 달을 맞으면서 온 교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유업으로 받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사는 정통성 있는 축복을 받은 자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