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5월 6일 수요일
[(벡)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할례 문제를 두고 공동체에서 분쟁과 논란이 생기자 사도들과 원로들이 모여 논의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풍성한 열매를 맺지만, 그러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할례 문제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5,1-6
그 무렵 1 유다에서 어떤 사람들이 내려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형제들을 가르쳤다.
2 그리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그 문제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신자들 가운데 다른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3 이렇게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파견된 그들은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거쳐 가면서,
다른 민족들이 하느님께 돌아선 이야기를 해 주어
모든 형제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4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교회와 사도들과 원로들의 영접을 받고,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보고하였다.
5 그런데 바리사이파에 속하였다가 믿게 된 사람 몇이 나서서,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고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 사도들과 원로들이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모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삐뚤어질 테다.” 부모나 주변 사람이 내가 바라는 것을 해 주지 않을 때 일부러 반항하겠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망가지는 것을 가장 마음 아파하기 때문이지요. 자녀들은 반항심으로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참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어린 자녀들은 그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깨닫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갖는 관계에서도 “삐뚤어질 테다.”라고 말하는 자녀들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 막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 시련에 아파하다가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경우를 때때로 봅니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시련이 와도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습니다. 성당에 다니며 실망하게 되는 일도 많고, 본당 신부나 같은 단체에서 활동하는 형제자매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지만, 날마다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하며 성당을 떠나지 않습니다. 신앙의 든든한 힘은 거창한 환시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예수님께 의지하는 끈기와 인내에서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이 신앙의 힘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요한 15,1-8 참조). 성당에 꾸준히 나온다고 모두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실망스러워도 예수님께 붙어 있다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화가 나도 예수님 안에서 화내고, 슬퍼도 예수님 안에서 슬퍼합시다. 어떤 상태에 있든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 결국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죄보다는 죽음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은 저희 살레시오회에 참으로 특별한 날입니다. 저희 창립자 돈보스코(1815-1888)에 의해 창안된 독특한 청소년 교육 방식인 예방 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의미 있는 것인가를 만천하에 선포한 기념비적 인물의 축일입니다.
그는 돈보스코의 애제자로서 그가 제시한 교육 노선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살아갔던 도미니코 사비오(1842-1857) 성인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를 일컬어 성령의 걸작이요 돈보스코 교육 방법의 결실이라고 표현합니다.
열두살 되던 해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첫눈에 반한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에게서 착한 목자요 따뜻한 아버지요, 스승이요 친구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한 마디로 홀딱 반한 것입니다.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에 들어온 도미니코 사비오의 시선이 처음으로 향한 곳은 돈보스코의 사무실 문에 붙어있던 작은 현판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Da mihi animas cetera tolle.”(저에게 영혼을 주십시오. 나머지는 다 가져가십시오.)
그 현판을 아무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던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보스코, 저는 알았습니다. 이곳을 이익을 창출하는 곳이 아니라 영혼을 구하는 곳이군요. 저도 돈보스코의 소중한 사업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그후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 안에서 돈보스코의 제자였지만, 또래 청소년들을 선으로 인도하는 돈보스코의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협력자가 되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오라토리오에 살아가던 셀수도 없이 많은 장난 꾸러기들을 하느님께로 안내하는 과정에서 도미니코 사비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도미니코 사비오의 성모 신심은 참으로 각별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토리노 시내를 걸어가던 중 한 친구가 도미니코 사비오에게 물었습니다. “사비오, 여기저기 온통 볼거리들이 엄청 많은데, 어찌 너는 그렇게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니? 너는 그 눈을 대체 언제 써먹으려고 그러니?”
사비오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쓸모없는 곳에 시선을 두지 않는 대신, 내가 천국에 갔을 때, 거룩한 성모님의 모습을 볼 때, 비로소 내 눈을 사용할거야.”
도미니코 사비오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각별했습니다. 그는 수시로 이렇게 성모님께 아뢰었습니다. “성모님, 저는 항상 당신의 사랑받는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제가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죽게 해주십시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죄보다는 죽음을!”
도미니코 사비오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1854년 비오 9세 교황님께서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교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거듭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어떤 고민? “많은 것을 베풀어주신 성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뭔가 꼭 해드리고 싶은데, 시간이 별로 없고...”
고민 끝에 도미니코 사비오는 오라토리오 내 몇몇 마음 맞는 친구들을 모아 작은 모임 하나를 결성했습니다. 모임의 이름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회’였습니다. 회원들은 세세한 규정도 만들면서 자신들을 성모님께 온전히 봉헌하고, 성모님께 매일 사랑과 희생과 봉사라는 꽃다발을 봉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세례 받은 지 30년, 40년, 50년이 지난 아직도 성모님께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졸라대고 투정 부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그 어린 소년들이 성모님께 청하기보다 그분께 해드릴까 고민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니다.
신앙의 깊이는 결코 나이나 연륜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도미니코 사비오는 오늘 우리에게뚜렷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도미니코 사비오처럼,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끊임없이 성장하고 또 성장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꿈을 꾸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함께 있지만, 마음과 방향은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 겸손과 희생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영광과 자리, 명예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율법 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정신, 곧 사랑과 생명을 말씀하셨지만, 율법학자들은 규정과 형식에 머물렀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사람을 안식일의 틀 안에 가두었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큰 ‘동상이몽’입니다.
이 모습은 2천 년 전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특별히 ‘교포 사목’의 현실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사목하다가 미국으로 오게 되면,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다르게 느껴집니다. 신앙은 같지만, 표현이 다르고 공동체의 분위기도 다르고, 기대하는 것도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부담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이곳의 방식이 한국에서 온 사제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했는데 왜 여기서는 다르게 하십니까?”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는 미국입니다. 미국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두 분의 말씀은 모두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서로 다른 기대와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동상이몽’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공동체는 조금씩 지치게 됩니다. 작은 오해가 쌓이고, 서운함이 생기고, 때로는 말하지 못하는 거리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마치 같은 기차선로 위에서 서로 마주 보고 달리는 두 기차와 같습니다. 방향이 다르면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상동몽(同床同夢)’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같은 꿈을 꾸는 공동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서로를 마주 보면 부족함이 보입니다. 고쳐야 할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같은 곳을 바라보면 목적이 보이고, 희망이 보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서로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향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이 되어 오셨고,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하기 위해 낮아지셨습니다. 이것이 ‘동상동몽’의 시작입니다.
초대교회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음식 나눔의 문제로 불평이 생겼을 때, 사도들은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봉사자 일곱을 세워 역할을 나누었습니다. 각자의 은사에 따라 공동체를 섬기도록 했습니다. 또한 할례의 문제로 큰 논쟁이 있었을 때, 사도들과 원로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고 토론하며 식별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상황에 맞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동상이몽’을 ‘동상동몽’으로 바꾸어 갔습니다. 저도 사목을 하면서 한 가지를 늘 마음에 새기려고 합니다. 바로 ‘만남, 경청, 식별’입니다. 먼저 만나야 합니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들어야 합니다. 내 생각을 말하기 전에,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 안에서 식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걸어온 길이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원이 들어오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기능이 아무리 좋아도, 디자인이 아무리 훌륭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전원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떨어지면 말라 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붙어 있는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우리가 있는 곳이 미국이든, 한국이든,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꾸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떨어지면,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결국 ‘동상이몽’이 됩니다.
우리 공동체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분명합니다. 바로 포도나무인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 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같은 꿈을 꾸게 됩니다. 우리 교포 공동체가 ‘동상이몽’을 넘어 ‘동상동몽’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함께 바라보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함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2)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당신
없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사오니
나와
함께
당신께서
몸소
하소서
나
없이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니
당신과
함께
내가
기꺼이
하겠나이다
오늘의 성인
성 요한 사도 라틴 문전 수난
Saint John before the Latin Gate
St. Joannes ante portam Latinam
Saint John Apostle and Evangelist
San Giovanni Apostolo ed evangelista
St. Jannes, Ap. Evangelista
Memorial:27 December (Roman Catholic);8 May (Greek Orthodox)
Died:c.101 at Ephesus (modern Turkey);a church was built over his tomb,which was later converted to a mosque
Name Meaning:God is gracious
교회에서는 성인들을 구별하여 보통 성인은 1년에 한 번 축일로 지내지만 1년에 두 번 이상도 축일로 지낼것을 규정하고 있다.
예컨대 성 바오로 사도만 하더라도 6월 29일 성 베드로와 같이 지내게 하는 것 외에 1월 25일(사도 성 바오로의 개종 축일) 도합 두번이나 지내게 된다.
그와 똑같이 성 요한 사도도 본래의 축일은 12월 27일이지만 5월 6일은 그가 교회를 위해 부글부글 끓는 기름가마에 던져졌지만 하느님의 보호로 말미암아 기적으로 무사할 수 가 있었던 신앙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모두 주님의 교훈이 진리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순교를 당했다.
다만 그 중에서 성 요한 사도만은 순교의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주님의 예언과 일치하는 것이다.
즉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 베드로를 교회의 으뜸으로 삼으신 후 그가 순교할 것과 또한 그상황을 미리 말씀하셨는데, 그 곁에 서있는 요한을 돌아보면서 "그는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내가 돌아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참으로 알아듣기 힘들다. 그러므로 신자들 간에는 요한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때 까지 생존해 계시리라는 소문마저 퍼뜨리게 되었다.
이에 대해 당사자인 요한은 "위의 말씀은 특별히 내가 죽지 않으리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부르시기 전에는 그대로 남아있으리라는 뜻에 불과하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많은 신학자는 이를 요한이 순교하지 않고 자연 죽음을 당하리라는 예언으로 해석하고 있다.
과연 그는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박해시에도 죽지않고 백 살 가량의 고령에 달해서 잠자듯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정신에 있어서는 순교의 고통을 충분히 맛본 것이었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야고보(천둥의 아들)와 요한의 어머니(살로메)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 앞에 나와서"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형제들에게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하고 물어보시게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야고보 형제는 주저치 않고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요한 은 그때부터 순교의 각오를 굳게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이 예상하고 있던 고통이 실제 닥쳐온 것은 로마 황제 도미시아노의 박해에 있어서이다.
그때 그는 에페소에서 로마로 소환되어 그리스도교를 배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본시 이에 응할 그가 아니었다.
한 마디로 이를 거절했으므로 법관은 그를 라틴 문 앞에 끌고 가서 부글부글 끓는 기름가마에 던져 살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옛날 구약 시대에 불이 활활 붙고 있는 가마속에 던져진 세 청년(하나니야, 미사엘,아자리야)을 무사히 구출해 내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보호의 손은 요한에게도 내렸다.
그는 아무리 끓는 기름을 부어도 티끌만큼도 해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런 이상한 현상에 넋을 잃은 간수가 그를 불가마밖에 내놓았을 때에는 그는 마치 목욕이나 한 사람처럼 몸이 마음과 더불어 상쾌한 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리하여 법관은 요한을 잘 대접하는 척 한 후 소아시아 해안에 있는 파트모스라는 적적한 섬으로 귀양보냈던 것이다.
그 뒤 요한 사도께서 수난 당한 로마의 라틴 문전에는 옛 추억을 새롭게 하기 위해 한 성당을 세웠는데,그 봉헌식이 거행된 날이 바로 성 요한 사도의 제 2의 축일이 되었다.
복자 에드워드 존스(Edward Jones)
신분 : 순교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 : +1590년
같은이름 : 애드워드, 에두아르도, 에두아르두스, 에드아르도, 에드
에드워드 존스는 웨일스(Wales) 사람이고, 안토니우스 미들턴(Anthony Middleton)은 요크셔(Yorkshire) 사람이다. 이들은 프랑스 랭스(Reims)의 두에 대학에서 수학하여 사제로 서품된 뒤에 영국 선교 길에 올랐다. 안토니우스는 1586년에 런던에 도착하였고, 에드워드는 2년 뒤에 왔다. 그들은 가톨릭 신자가 되겠다는 어느 배교자의 밀고에 의하여 체포되었는데 죄목은 '반역'이었다. 이들은 재판관 앞에서 가톨릭이 올바른 종교임을 자세하게 설명한 뒤에 순교하였다. 또한 이들은 '우리를 재판하는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복녀 프루덴시아 (Prudentia)
신분 : 동정녀
활동연도 : +1492년
같은이름 : 쁘루덴씨아, 프루덴스, 프루덴씨아, 프루덴티아
이탈리아 밀라노(Milano)의
귀족 가문의 딸인 프루덴티아 카스토리(Prudentia Castori, 또는 프루덴시아 카스토리)는 고향에 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그녀는 코모(Como)의 성 마르코(Marcus) 수도원의 원장을 역임했는데, 그녀의 지혜는 극히 뛰어났으며 코모의 성모 방문 성당을 재건했다고 한다. 그녀는 38년 동안 코모에서 원장으로 지내다가 선종하였다.
Origin & Meaning
Prudence is a feminine given name. The name is a Medieval form of the Latin Prudentia, meaning prudence, i.e. good judgment.
프루덴스는 여성의 이름이다. 그 이름은 중세 라틴 프로덴티아의 한 형태이며 "신중함", 즉 "훌륭한 판단력"을 의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