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취 산책/靑石 전성훈
칠순이 넘으니 혼자 또는 둘이서 사는 사람이 많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은 대부분 부부가 함께하고 있다. 40년 이상 오랜 세월을 함께한 노부부 집에 명절이라고 찾아온 자식과 손주들이 각자의 집으로 떠나고 나면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잠깐 찾아왔던 아이들과 손자녀 이야기를 끝내고 나면 노부부에게 딱히 가만히 속닥거릴 이야깃거리가 없다. 서로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늙으면 무엇보다도 건강이 최고라고 한 마디하고, 그마저 할 말이 궁해지면 또다시 쥐죽은 듯이 고요함이 찾아온다. 어찌할 줄 모르는 적막한 분위기를 깨뜨리기 위해 애꿎게 리모컨을 찾아서 TV를 켜고 시선을 돌린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하는지 모르지만 나와 비슷한 모양새를 꾸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구세주는 뭐니 뭐니 해도 친구나 지인의 반가운 전화 한 통이다.
나흘 설 명절 연휴 마지막 날, 친구들이 낮에 중국집에 모여 술 한잔하고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두 달에 한 번 정기적인 모임을 하지만 가끔은 각 가정의 행사 또는 이런저런 핑계 삼아 갑작스럽게 모이기도 한다. 이번 설 모임이 바로 그런 번개 모임인데 서울에 사는 친구들은 다 모였다. 평소 식사를 하면 술은 대게 소주와 맥주이지만, 중국집에서 모임을 하면 술 종류가 달라진다. 맥주나 소주를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소주와 맥주를, 나처럼 40도가 넘는 독주를 즐기는 친구를 위해서 누군가 술을 가져오거나 비싼 중국 술을 주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은 고량주 또는 중국 집에서 가장 저렴하면서도 알코올 도수가 57도인 ‘이과두주’를 주문한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마자 확 취기가 올라오고 금방 깨는 그야말로 뽕 갔다가 살아 돌아오는 술이다. 술이 너무나 독하여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중국 술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중국 고급술 중에는 가짜가 많지만 제일 저렴한 이과두주는 가짜가 없다는데, 가짜를 만들어 팔 만큼 찾는 이가 적고 고급술이 아니라서란다. 주말 낮에 모이면 식사하면서 낮술을 하고 당구장에 가서 당구를 치다가 술이 깨면 함께 걸으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당구 칠 줄 모르는 나는 그냥 당구대에서 ‘게임돌이’ 역할로 만족한다. 시내에서 만나면 술 한잔 걸친 채 종종 창경궁, 창덕궁 그리고 종묘까지 걷기도 한다. 입장료가 무료이니까 부담이 없고 한두 시간 정도 걸으면서 지나간 시절 그리고 앞으로의 우리 삶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운다. 어슴푸레 저녁 기운이 들면 먼저 자리를 뜰 사람은 제외하고 다시 발걸음을 돌려서 수다 떨 곳을 찾기도 한다. 고궁 나들이를 생각하니 작년 11월 초순 멋진 고궁 나들이 추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몇 년 만에 고등학교 동창인 재미 교포 부부가 귀국하였을 때, 부부동반으로 12명이 시끌벅적하게 고궁 나들이를 하였다.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50년도 넘은 오래된 중국집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으며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학창시절의 짓궂은 장난이나 행동, 잊을 수 없는 일을 이야기해서 아내들의 시선을 모으고 눈총을 받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깊어가는 가을 창경궁과 창덕궁을 걸으면서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사진작가 친구의 안내로 포토존을 찾아서 부부끼리, 남자끼리, 여자끼리 그리고 모두가 함께 이런저런 장난기 가득한 포즈를 취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단체방에 올라온 솜씨 좋은 사진을 보면서 이구동성으로 멋지다고 한마디씩 하기도 했다.
여러 번 고궁 산책을 하면서도 창덕궁 비원에는 가보지 못해 아쉽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비원에 들어갔던 게 고등학생 시절 소풍 갔던 것 같다. 최소한 50년도 넘는 옛날 옛적의 일이다. 사전 준비를 잘해서 언젠가는 비원에 들어가 보고 싶다. (2024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