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3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마태오 10,16-23 )
You will be given at that moment what you are to say. For it will not be you who speak but the Spirit of your Father speaking through you.
말씀의 초대
호세아 예언서는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와 그에 대한 응답으로 끝난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통하여 회개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며 그들을 격려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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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예언자가 마지막 설교를 한다. 그 목적은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는 데 있다. 불충실한 아내(이스라엘)는 충실한 남편(주님)에게 질책과 제재를 받지만, 참된 사랑이신 신랑을 되찾아 돌아오게 될 것이다. 마지막까지 깨닫지 못하는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며 넘어지겠지만, 깨달은 의인은 주님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박해를 각오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사람들이 법정에 넘기더라도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성령께서 사도들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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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페루에 선교사로 나가 있는 동창 신부가 휴가를 얻어 잠시 귀국했습니다. 저는 그에게서 선교 생활의 어려움과 보람을 들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페루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살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에 페루에 갔을 때에 피부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온몸이 가려워서 한동안 잠도 못 잘 정도였답니다. 피부병의 원인은 벼룩처럼 생긴 벌레 때문이랍니다. 그 벌레는 개에 기생하는데, 아이들이 개와 함께 놀 때 아이들에게로 옮겨진다고 합니다. 동창 신부는 아이들을 보면 반갑게 껴안곤 하였는데, 이때에 아이들에게 붙어 있던 벌레가 그 신부에게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벌레는 현지에 사는 사람들의 옷 속에 살아도 그들을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먹는 음식 속에 벌레를 쫓는 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창 신부도 현지 주민이 먹는 음식에 적응하자 더 이상 벌레가 물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심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러 또다시 떠나는 동창 신부를 보면서 그가 이리 떼가 아닌 벼룩 떼 가운데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익히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에 제자들을 박해와 어려움이 예상되는 곳으로도 파견하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의지할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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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몸소 사도들을 뽑으시고, 함께하시며, 당신의 일터로 보내십니다. 그 일터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따를 수 있고, 그 길에서 벗어날 것을 종용하는 온갖 유혹이 손길을 내미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언제나 위험하고 어렵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주님께서도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시면서 걱정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 걱정은 사도들이 가야 할 길을 걸어가지 못할까 봐 하시는 걱정입니다. 그래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만 믿고 의탁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께 세상으로 파견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사랑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꼭 붙들어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움이나 두려움이나 고통도 다 이겨 낼 수 있습니다. 법정이나 형장이나 이방인들 앞에서 우리는 기쁘고 떳떳하게 주님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충실한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리이신 성령께서 언제나 그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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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텔레비전과 신문은 연일 살기 힘든 세상을 전해 줍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실 마음 졸이고 안달한다고 내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힘든 미래가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저만치 내리는 비를 미리 뛰어가서 맞을 이유는 없습니다. 예전에는 의식주에 관한 걱정이 많았습니다. 먹고 입고 잠자는 걱정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 걱정의 질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삶의 폭이 넓어진 만큼 걱정도 다양해졌습니다. 그러기에 능력 밖의 걱정거리가 생겨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근심거리를 만나기도 합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신께 철저하게 맡기며 살라는 뜻입니다. 미리 대비한다고 두려움이 없어지는 세상도 아닙니다. 주님의 보호를 느껴야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걱정도 습관입니다. 습관이 굳어지면 작은 걱정이 어느새 큰 걱정으로 바뀝니다. 순교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처지로 몰렸기에 자유로웠습니다. 지금은 박해 시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순교의 삶을 살 수는 있습니다. 맡기는 생활의 훈련입니다. 작은 걱정부터 맡기는 실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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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뱀은 지혜로운 동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지혜롭다 못해 간교한 동물로 표현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와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이러한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비둘기는 양순함을 상징합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고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들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간곡히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그런데 걱정입니다. 비둘기처럼 멍청하고 뱀처럼 교활하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슬기롭지 못하면 몸이 고생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미련하여 자기 몸이 고단한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안타깝게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고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증언할 때
- 강신모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박해 상황에서 당신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
좀 더 넓게 이해하자면 ‘박해란 신앙을 버리게 강요하는 모든 상황’ 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한테도 여전히 박해 상황은 존재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성실히 책임을 다하는 생활을 했는데 덜커덕 큰 병에 걸렸을 때, 또는 부도가 났을 때 우리는 충격을 받게 됩니다. 과연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 건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좋으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잃게 됩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냉담해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권고를 해도 아들은 바쁘다는 핑계만 댑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폐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로 옮긴 아버지는 의식이 회복되자 걱정스런 표정으로 곁에 있는 아들을 보았습니다. 아직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제발 성당 다시 나가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아버지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앙생활을 걱정하는 것을 보고 아들은 성당에 다시 나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늙어가고, 건강도 잃어가고, 명예와 자존심도 잃어갑니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슬픔이며 고통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상황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좋으신 하느님’ 께 대한 믿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미국에 가면 자수성가한 재미교포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엄청나게 성공해서 베버리힐즈나 팔로스 버디스에 수백만 불짜리 집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이런 집들은 근사한 수영장까지 가지고 있는 어마어마한 집입니다. 그런데 정작 성공한 재미교포들은 이 수영장에 들어갈 시간이 없다고 하네요. 즉, 돈 버느라 바빠서 수영장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근사한 수영장을 이용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글쎄 멕시코에서 온 가정부들이라고 합니다. 집안일은 대충하고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마시면서 수영장에서 선탠을 하며 그 집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다 누리고 있다고 하네요. 반면 백만장자인 재미교포 주인들은 한밤중에 들어와 소파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대충 쓰러져 잔답니다.
이 중에서 누가 진짜 주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자기 소유는 아니지만, 자기가 있는 곳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기쁘고 즐겁게 사는 멕시코에서 온 가정부가 진짜 주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누리지 못한다면 진짜 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의 모습 역시 진짜 주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세상 안에서 진짜 주인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걱정을 멈추지 못하고 있어요. 이것도 걱정이고, 저것도 걱정입니다. 돈 벌어야 한다는 걱정이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야 한다는 걱정을 합니다. 자녀의 교육 문제가 걱정이고, 집안 문제 역시 온통 걱정입니다. 어쩌면 삶 전체가 걱정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걱정 속에서 과연 주님께서 주신 삶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앞서 자기 집의 편의 시설을 주인은 하나도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이 세상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걱정보다는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이 세상 안에서 진짜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울려 퍼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그래서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지시하시는 은총의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걱정 없이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살아간다면 또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래서 그 모든 걱정을 주님께 맡긴다면, 이 세상 안에서 걱정을 줄여가며 진짜 주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을 내 것으로 만들 것입니다.
신은 운명을 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인연을 지어 줄 뿐이다(아사다 지로).
주님이 보여 주시는 길로 갑시다.
-김기현신부-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의 쌍둥이 빌딩을 폭파했을 때, 그 안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이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물결을 거슬러 건물 안으로 들어간 이들이 있었다. 무거운 방화복과 소방장비를 든 소방관들이었다. 이들은 붕괴되는 건물에 갇힌 사람들을 구조하고 불을 끄려고 뛰어들었다. 이들 중 많은 소방관이 붕괴된 건물과 함께 산화했다.
동료를 잃은 소방관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쉬지도 못하고 밤낮으로 허리가 휘는 고통과 싸우며 한 사람이라도 생존자를 찾고자 또 시신을 찾고자 필사적 투쟁을 벌였다.
소방관들의 희생적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더욱 감동적인 것은 인터뷰할 때였다. 기자들이 소방관들의 영웅적 행위에 대해 인터뷰할 때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 참조)
미국의 소방관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뛰어들어야 할까 말까’를 고민하며 구조를 지체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그런 정체성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세상에 나아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충분한 고민과 신념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주저하고 휩쓸리고 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사회 사목국에 계신 신부님이 오셔서 강의를 해 주셨는데,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억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보았을 때,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즉시 도와줘야 합니다.’ 즉시 도움을 줄 수 있는 신앙인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또 주님의 길을 걷고자 결심하고 다짐한 이들일 겁니다. 반대로 그러한 결심과 다짐이 없는 신앙인은 가난한 이들이나 소외된 이들을 보았을 때 도와주기를 망설이고 지체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모습이 오늘 독서에 나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주님의 길은 명확하고 단순합니다. 사랑하는 길이고 생명을 지키는 일이고 믿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 갈팡질팡하고 비틀거리는 이들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주님의 길과 세상의 길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일 겁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자니 손해가 있을 것 같고 몸과 마음이 고생할 것 같아, 자꾸 뒤를 돌아보고 다른 길을 부러워하며 주님의 길이 아닌 쪽으로 기울어지는 사람일 겁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또 생명을 얻어 누리기 위해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이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지뢰밭을 가로질러 가는 상상을 해 봅시다. 우리 앞에는 지뢰가 묻혀 있는 곳을 탐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를 향해 ‘이쪽으로 오십시오. 저쪽으로는 가지 마십시오.’ 할 때, 누군가 그 사람을 향해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시오. 나는 강요당하는 것이 싫소.’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지시를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하고 집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인도한 길을 한 발자국도 어긋남 없이 따라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인도하는 길만이 우리의 목숨을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대로 사랑의 길, 용서의 길, 그리고 평화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말씀대로 성실히 걷고 있는지 반성해 봅시다.
교회는 담대하고 자유로운가?
-이준석 신부-
며칠 동안 우리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하신 말씀은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의 지상 생활 동안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예수님께서 후대의 교회를 두고 이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 때문에 박해를 받고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분란에 휩싸였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즉 그분의 인격과 그분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내용들이 세상의 가치와 가르침에 반대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파견된 이들이 걷는 사명의 길이란 고통과 박해와 논란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길임을 예수님께서 미리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언제나 반대와 논쟁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세상을 결정적으로 심판하시기 전까지는 적어도 교회는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역경과 논쟁 속에서 교회는 성령의 힘을 받아 담대하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가치들을 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교회는 그 어떤 권력이나 세태에도 흔들림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자유로운 교회입니까? 이는 오늘 하루 깊이 묵상하며 성찰해 볼 질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김찬선신부-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이 말씀은 이렇게 저에게 이해됩니다. “너의 일을 말하고 너의 주장을 필 때는 네가 말하라. 그러나 나의 일을 말하고 나에 대해서 말할 때는 네가 떠들지 마라.”
이 말은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어디에서건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어떤 때 우리는 얘기할 수 있는 자리이고 해야 하는 자리인데도 쑥스러워 또는 두려워 주님을 증거하지 못하고 복음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성호경과 함께 식사기도도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길을 가다가 누구를 돕고 싶어도 남이 볼까 봐 돕지 못합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더구나 반대자들 앞에서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이리떼 가운데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때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지 말라십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해야 하지만 인간의 복잡한 머리 굴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 맡기는 그러한 지혜와 순박함이어야 합니다. 미련스럽게도 하느님의 일을 제가 할 수 있는 것처럼 덤비고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되게 하려고 그악해서는 안 된다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나의 일로 가로채고 하느님께서 하실 것을 내가 하겠다고 설치는, 그런 주제넘고 미련한 짓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중용
-전삼용신부-
저의 동기신부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를 본 의사선생님은 그 신부에게 왜 젊은 사람이 몸을 이렇게까지 만들었느냐며 버럭 화를 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라면 몇 년밖에 살 수 없다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겁이 난 그 신부는 여러 다른 병원에서 같은 검사를 하였습니다. 물론 결과는 거의 같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의사 선생님은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몸이 안 좋은 것은 맞지만 열심히만 치료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신부는 낼 모래 죽는다는 의사 선생님보다 희망과 위로를 주는 의사 선생님께 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무서운 사제보다는 자비롭고 온유한 사제가 되어야 신자들이 편하게 자신에게 올 것이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곧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신부가 여동생의 옷을 사주기 위해 백화점에 들어갔습니다. 한 옷가게에 갔더니 판매원이 그 신부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다짜고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손님은 상체보다 하체가 짧기 때문에 칠보바지는 피하시고 짧은 반바지나 다리를 길게 보이게 하는 바지를 입으셔야겠습니다."
그 친구는 허리에 철심을 박았기 때문에 상체가 더 깁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분이 나빠 다른 가게로 옮겼습니다.
그곳 판매원은 정반대였습니다. 지나치게 친절했고 모든 것에 있어서 칭찬만 해 주었습니다. 동생이 자신이 고른 옷을 입고 나오자 또 매우 잘 어울린다며 마치 동생을 위해 만든 옷 같다고 칭찬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오빠가 볼 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습니다. 그 판매원이 무조건 팔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오빠는 좀 전의 냉철하게 판단해 주었던 판매원이 있는 가게로 가서 옷을 사기로 결심했고 그 판매원의 조언에 따라 옷을 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좋은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결국 가장 좋은 것은 하나의 성격의 두드러지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되는 성격을 다 지니되 중도를 지킬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콘을 보면 어떤 이콘은 예수님의 양쪽 얼굴을 다르게 그려놓은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왼쪽은 자비롭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고 오른쪽은 무섭고 정의로운 모습을 지니게 그린 것입니다. 이는 작가들이 실제로 예수님의 한 얼굴에 자비와 정의를 일부러 그려 넣은 것입니다.
하느님에겐 반대로 보이는 두 성격, 즉 자비와 정의가 공존합니다. 용서와 심판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자비와 사랑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오리게네스와 같은 신학자들이 빠졌던 것과 같이, 마지막 날엔 지옥이 사라지고 마귀들까지도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오류에 빠지게 되고, 정의만을 강조하게 되면 길거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만을 소리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이 두 극단을 조화시킬 수 있는 힘이 바로 예수님을 만든 것입니다. 성모님은 처녀이면서도 어머니셨습니다. 이렇게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성격이 공존하기에 성모님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서도 서로 상반되는 성격이 공존하는데 두 성격을 공존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큰 사람인 것입니다.
제가 이명치료를 할 때 느낀 것인데, 한방에서는 양방에서 이명을 치료할 수 없는 이유를 양방에선 어디가 아프면 그 부분만을 보려고 해서 그렇다며 자신들은 내부와 외부의 전체적 기능에서 오는 이유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치료함으로써 이명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턱과 목과 척추까지 틀어져서 턱 밑의 긴장된 근육이 신경을 눌러 이명이 들리는 것 같다며 전신 척추의 사진을 찍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양방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달라고 했더니 귀가 안 좋은데 왜 척추를 찍느냐며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식으로 한방의 의술을 좋지 않게 말했습니다.
한방에서는 양방의 기술에 도움을 청하였는데 양방은 한방을 이해할 수 없다고만 하는 모습을 보며, 둘이 합쳐지면 더 완전한 치료가 이루어질 것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한 쪽만 옳다고 믿는 것은 다른 쪽의 좋은 점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격이 더 좋고 저 성격이 더 나쁘고 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성격이 옳다고 느끼고 상반되는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할 때 잘못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도 부부가 서로 상반되는 성격을 가졌을 때 더 잘 맞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뱀과 같은 면과 비둘기와 같은 면을 동시에 지닐 것을 명령하십니다. 뱀처럼 슬기로우면서도 비둘기처럼 온순하고, 또 비둘기처럼 온순하지만 말고 뱀처럼 슬기로우라고 하십니다. 뱀과 비둘기가 한 우리에 함께 있다면 둘 중의 하나는 죽어야겠지만, 실제로는 그 두 상반되는 성격을 한 우리 안에 넣는 능력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균형 잡힌 사람이 되어 하느님을 닮게 됩니다. 이 균형은 바로 나와 상반되는 성격을 인정하고 그것 안에서 장점을 찾아내어 나에게 적용시키려고 노력하는 데서 얻어집니다.
세 명이 걸어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성격이 상반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의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성격은 원래 이래!’라고 단정 짓는 것보다 ‘나는 이런 성격도 저런 성격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아.’라고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나무를 심을 때 기름진 땅에 심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반대로 척박한 땅에 심는 것이 옳을까요? 당연히 기름진 땅에 심는 것이 좋은 나무를 만드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몇 년 전 갑곶순교성지에 있으면서 몇 천 그루의 나무를 심었는데, 그때의 경험을 떠올려 볼 때 좋은 땅에 심은 나무들이 훨씬 잘 자랐던 것 같습니다. 척박한 땅에 심어진 나무 중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죽어 버린 것도 참 많았지요.
그러나 태풍이 왔을 때 저는 아주 특이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름진 좋은 땅에 심어진 나무보다 척박한 땅에서 힘들게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거센 바람을 거뜬히 이겨내더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는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해서 일부러 척박한 땅에 포도나무를 심는다고 하네요. 왜냐하면 토질이 좋은 땅에 심은 포도나무는 쉽게 자라서 탐스런 포도송이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땅 표면의 영양분으로도 충분하기에 굳이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토질이 좋은 땅에 심은 포도나무는 병충해도 많고 기온의 변화에도 민감하며 자연재해에도 약하여 결국 포도의 품질이 떨어지게 된답니다.
그러나 척박한 땅에 심으면 자라는 속도는 더디고 열매도 늦게 맺히지만, 생존욕구에 의해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답니다. 따라서 포도 맛도 더 깊고 자연의 변화에 따른 그 품질의 변화도 거의 없다고 하지요.
이 포도나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들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쉬운 일과 쉬운 돈벌이를 찾지요.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오히려 사람을 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척박한 땅으로 상징되는 우리 삶의 고통과 시련이 나를 더욱 더 성장시켜주는 것인데, 항상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려서 편하게 지내기만을 원하는 나는 아니었던 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말씀하시며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를 일부러 고통의 바다 속에 빠져들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척박한 땅에서 뿌리를 깊이 내려 품질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이러한 희망도 전해 주시지요.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 마음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나를 주님의 진정한 자녀로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지혜롭지만 꾸밈없는 순박한 마음을 주님께 청해 봅니다.
고통과 시련이라는 척박한 땅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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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참고 견디면
- 기정희 수녀-
3년 전 방인수도회 차원에서 일본 수녀님들과 문화 교류를 통한 일치를 모색하며 서로의 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성지였다. 거창하게 꾸미기는커녕 폐허 그대로 둔 성지가 초라해 보였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원자폭탄 투하로 성당은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열두 사도의 성상은 부수어져 있었는데, 복원하지 않은 잔해들이 어제 일인 듯 처참한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역사를 그대로 인정하고 보존하면서 그 사건에 담긴 의미를 신앙으로 알아듣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뼈아픈 유배를 잊지 않고 그때를 대대로 되새기는 것과 같은 마음을 보았다. 일본의 박해는 우리나라보다 더 잔인했다는 사실과 긴 역사의 공백에도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신앙의 역사에 대해 들으며 신앙의 신비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성 베네딕토 축일인 오늘, 복음은 끝까지 참고 견디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끝까지 참고 견디기 위해서 현재의 내가 누구이고 내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모진 박해에도 우리 삶의 중심이 바로 하느님일 때 끝까지 견딜 힘이 생긴다. 검증할 수 없는 가짜가 너무 많은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결단을 요구하는가? 그러나 그러한 삶을 보여주신 분들이 성인들이다. 아버지의 영께 민감하게 열려 있어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려 한 이들. 성 베네딕토는 그 영께 민감하게 열려 있기 위해 ‘기도하고 일하라.’고 수도자들에게 권고했다. 창조의 삶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기도하면서 또 다른 창조사업을 이어가기 위해 일상을 비범화하는 노동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끈기도 인내도 부족하다. 하지만 끝까지 참고 견디면 구원받으리라는 확답을 주신 하느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식별할 때 그분은 분명 참고 인내할 힘을 주실 것이다. 성인들처럼 내밀한 자아 안에서 만난 하느님 체험만이 끝까지 참고 견디며 완성에 이르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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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
-양승국신부-
<그분께서 내 뒤에>
서품이나 종신서원을 하고 첫 사목지로 파견되는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지난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오랜 양성 기간을 끝내고 드디어 파견되는 첫 소임지입니다. 그 어려운 신학공부, 오랜 초기 양성기간을 일단락 짓고 새 출발하는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기대감에 밤잠도 설칩니다. 만나게 될 아이들 생각에 가슴도 설렙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두려움도 큽니다.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겠는가?’ ‘혹시라도 사람들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어쩌지?’
짧게나마 예수님으로부터 ‘특별 제자교육’을 받고 전도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의 심정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기쁨, 가슴 설렘, 기대감도 컸겠지만, 갖은 걱정, 불안감, 당혹감도 교차했을 것입니다.
‘나는 말주변이 없는데’ ‘나는 체력이 약한데’ ‘나는 남들 앞에 서면 완전히 쫄아드는데’
이런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조목조목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여러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무엇보다도 모든 근심을 아버지께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무능력, 소심함을 걱정하기보다는 아버지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인데 미리 앞서서 불안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계속되는 불볕더위 가운데 하늘은 장관입니다. 휴식시간에 잠깐 평상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니 강렬한 햇볕과 쪽빛 하늘, 뭉게구름의 조화가 환상입니다.
햇볕이 강하니 온갖 초목들도 제 색깔을 되찾습니다. 완연한 초록입니다.
마찬가지겠지요. 하느님 은총이 강하니 부족한 우리들도 저마다 제 빛깔을 되찾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무한한 은총으로 인해 우리의 나약함이 강건함으로 바뀝니다. 우리의 모든 걱정들이 평화로 변화됩니다. 우리 내면의 모든 두려움들이 담대함으로 변화됩니다.
우리를 파견하시지만, 절대로 홀로 보내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든든한 동반자, 강력한 협조자,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의식, 내 뒤에 그분께서 받쳐주고 계신다는 생각, 그분께서 지속적으로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야말로 복음 선포자가 지녀야할 최우선적인 마음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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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여라, 그러나 두려워하진 마라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이제 복음 선포를 위한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조심하라 그러나 두려워할 것까지는 없다.
남자는 늑대, 여자는 여우. 남자는 다 도둑놈. 통념적으로 형성된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인간관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쓰는 속뜻은 아무리 양의 탈을 쓰고 있어도 정체는 늑대임을 알라는 것이고, 그러니 믿지 말고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주님께서도 그 파견이 양들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걱정하십니다. 이것은 처음 자식을 세상에 내보내는 부모마음과 똑같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신들 보호아래만 있던 자식이, 그래서 지금까지 보호를 떠난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자식이 처음 보호를 떠나는 것이 우선 걱정이고 보호 없이 맞닥뜨려야 할 사람들이 당신들과는 달리 자식들을 잡아먹으려 호시탐탐 노리는 것이 두 번째 걱정입니다.
그러나 걱정의 본질은 자식에 대한 걱정입니다. 아직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보호 없이 살 수 있을까? 사람들이 다 부모와 같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리와 같은 사람을 그렇게 믿었다가 잡혀먹는 것은 아닐까? 좋은 사람이지만 부모와 같을 것이라 믿었다가 실망하고 좋은 사람을 잃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아직 믿음이 가지 않고 걱정이 되지만 세상에 아니 내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내 보내면서 단단히 타이르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만날 사람들은 이리들이고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그러니 조심하여라.
그런데 조심만 해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각오를 해야 합니다. 걱정하고 조심해도 결국 닥칠 것은 닥치기 때문입니다. 각오 없이 조심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다 맞닥뜨리면 감당하기 힘들 것이고 당황하게 될 것이고 끝내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각오하고 준비하면 차분히 맞이할 것이며 해야 할 것을 끝까지 해낼 것입니다. 그 각오가 죽을 각오라면 두려울 것도 없고 못 이룰 것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최악을 각오하라고 하십니다. 이리 같은 사람이 이리 같은 짓을 할 것이라고 각오하는 정도가 아니라 형제와 부모와 자식이 이리 같은 짓을 할 것도 각오하라고 하십니다. 특히 복음 선포를 하는 경우에는 주님 때문에 부모를 포함한 모든 이에게 미움과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죽을 각오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비둘기처럼 닥칠 모든 것을 순박하게 받아들일 용기를 주시고 뱀처럼 해야 할 말을 잘 할 수 있는 지혜 주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왜 나에게!’, ‘왜 이런 것이 나에게!’, ‘왜 그 사람이 나에게 이런 짓을!’을 하고 거칠게 따지지 않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차분히 해야 할 것을 해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왜 이런 일이 닥쳤는지 거부하고 따지고 흥분하다 해야 할 일 하나도 못하는 바보짓을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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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손길 안에
-홍영선 신부-
미사가 끝난 후 내리쬐는 햇빛이 참 곱다고 쳐다보다가 반가운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이는 간 이식 수술을 하고 늘 마스크를 하고 미사에 왔는데 오늘은 환한 얼굴을 드러내고 웃고 있었습니다. 건강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고 하자 사실은 지난주에 몹시 앓았다고 했습니다.
상태가 악화되어 재이식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진정이 되어 왔다면서 옆에 서 있던 부인은 눈물을 글썽입니다. 20퍼센트의 실패율이 있다고 하면 다섯 명 중 하나에, 30퍼센트의 재발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세 명 중 하나에 속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한 순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겪고 나니 오히려 이제는 마음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더 살게 해주시면 더 살고, 일찍 데려가시면 그대로 맡기겠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교만한 마음도 있었지만 사람이 자랑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 교우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풀잎과 같이 연약한 인생을 살고 있지요. 인도하시는 목자의 뒤를 따라 걷고, 어려운 때를 만나면 그분께 의지하며 견뎌나가는 인생이지요. 왜냐하면 인생은 막막한 우주 공간에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의 손길에 싸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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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하는 일.
지난 주일부터 우리는 복음 전파를 떠나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라 생각되고,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불가능이라는 한계가 바로 이 세상 이리떼에게 우리가 먹혀버리는 것이기에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죽음이기도 하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살기위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복음 전파의 길이 어떻게 될지 그 어려움과 위험을 직접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할 때 겪게 될 일들입니다.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매질할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을 조심하여라.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사랑을 해도 죄가 되고, 사랑을 하기에 고문과 위협을 당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에게도 어떤 해도 끼치지 않고, 오히려 봉사와 희생으로 일관한 삶이 의심을 받고, 생명의 위협까지 당해야 하는 일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복음 전파. 그 삶이 그렇게 불가능한 현실을 넘어, 이런 엄청난 결과까지 내 다 볼 수밖에 없다면 그 길을 우리가 과연 걸을 수 있겠습니까? 말씀이 계속 될수록 자꾸만 불가능으로 굳어져 가는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런 길을 누가 걸어가려 하겠습니까? 피해가자, 돌아 가자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하는 길이 아니라고 이리떼 속에 한 무리가 되는 길이라 주님이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님은 이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주님이 우리에게 살아남는 방법으로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어떤 맘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위험의 상황은 현실이 되며, 그것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그 사랑에 반하여 화를 내거나 악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자신의 억울함이라 하더라도 흥분하여 화를 내면 자신이 알려왔던 모든 하느님의 사랑을 일시에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자녀인 자신도 허물어져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있다면, 어떤 상황을 만나도 흥분하거나 겁먹지 말고, 우리의 사랑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물어보고, 그런 그들의 잘못을 오히려 드러낼 수 있도록 냉정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이 주님의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 상황에서조차 주님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 일은 어차피 시작부터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상황에 성령께 모든 것을 맡기라 하시는 겁니다. 사랑을 전합시다. 그러면 고난은 분명히 옵니다. 그러나 각오했다면 그 상황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우리에게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을 자신들을 위해 이용하려 드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형제끼리, 부모자식끼리,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을 위한 사랑으로 싸우는 모습을 목격할 것입니다. 그들 안에 주님의 조건 없는 사랑은 얼마나 좋은 먹이거리입니까?
그러나 끝까지 그 싸움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처럼 십자가를 차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리는 길입니다. 다 빼앗겨도 그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느끼게 함으로써 마음을 돌려놓게 하는 일. 그것이 복음 전파의 목적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책임지시니. 단호한 각오로 하루를 살아갑시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하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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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신부-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불러 권능을 주시고 파견하십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떠나 보내시는 예수님의 걱정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하십니다. 그러면서 목자 예수님은 양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말씀하십니다... 의회에 넘겨져서 매질을 당할 것이요 채찍질 당할 것이며 총독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을 것이며 서로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며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 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슬기와 양순함이 닥쳐올 어려움을 이겨내는 열쇠입니다. 비둘기처럼 양순하여라. 200주년 성서는 "순박하여라"로 번역합니다. 악한 것에 물들지 않는 것, 흠잡을 데 없이 순결한 것, 이것이 양순함의 의미입니다. 죄 없이 순결한 사람. 깨끗한 사람은 닥쳐올 위험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먼저 순결함, 양순함, 깨끗함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슬기로움은 무엇인가? 마태오 복음서는 현명함을 이렇게 3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마태 2, 24) 2.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사람을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마태 24, 46) 3. 신랑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등잔과 함께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준비하고 깨어 있는 것, 그것이 슬기입니다. (마태 25, 2 + ) 순결함, 깨끗함으로 무장하고 말씀을 실행하고 깨어 준비하고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어려움과 위험을 물리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었고,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서 현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고린 4, 10) 그리스도를 믿음이 슬기며 현명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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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박해의 의미는?
-조욱현 신부-
로마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모략하여 선전한 데서 오는 것 이었다. 1. 그리스도인은 식인종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세우신 성체 교리에서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받아 마셔라. 이는 내 피다" 하신 말씀을 악용해서 그리스도인은 식인종이라고 했던 것이다. 2. 신자들을 비도덕적인 무리들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신자들이 집회를 가지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축성한 빵을 떼어 나누어 먹었는데, 이 아가페, 즉 사랑의 잔치라는 것을 불미스러운 행위라고 모략했다. 3. 신자들을 방화범이라고 비난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사람들은 세상 끝날에 불로 망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방화범이라고 했다. 4. 신자들을 가정생활을 파괴하는 자라고 비난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보면 남편이 아내를 떠나고 자식이 아버지를 고발하고 등등의 말이 나오는데 잘 알아 듣지도 못하고 중상 모략하여 박해했던 것이다. 5. 신자들을 당시 사회제도를 파괴하는 자라고 박해했다.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노예문제였다. 당시 로마제국 안에는 6천만명의 노예가 있었는데 로마인들은 이 노예들이 일어나 반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노예를 인간으로 평등하게 한 형제, 자매로 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노예 해방이나 노예제도를 비난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나 교회 안에서 노예를 똑같은 사람으로 평등하게 대했기 때문에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나 로마 사회에서는 사회제도에 대한 큰 도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박해의 큰 원인은 로마 황제를 "주"라고 부르면서 그의 석상 앞에서 분향하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당시 전 유럽을 일인 통치하에 두고 세력확장을 하고 있었고, 또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 이상의 권위있는 신적 존재가 필요했는데 그런 인물로 로마황제를 세웠던 것이다. 로마는 어디를 가나 평화, 신뢰를 받는 정치, 시민의 질서를 꾀하고 해적, 산적, 불량배를 소탕하여 정의로운 혜택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로마 황제의 능력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고 1년에 1번은 향을 드리라고 했는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주"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에 국가 시책에 위배 된다는 이유로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이러한 요인으로 희생되었다면 지금 우리의 믿음의 자세는 어떠한가? 지금의 박해를 우리는 어떻게 이기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살펴보자. 현대에는 이러한 양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없다.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체면을 내세워서, 사회적 지위를 내세워서, 그리고 여러 가지로 하느님의 뜻을 멀리하게끔 유인하는 요인들을 통해서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이것들을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이기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에 대한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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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요섭 신부
세상을 살아가면서 걱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가족의 건강과 생계를 위한 걱정을 하게 되고,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남편과 자식들의 대한 걱정으로 애를 태우게 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지 애들이 무슨 걱정거리가 있느냐 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자녀들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몸소 체험하면서 걱정거리들을 하나씩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특별히 입시라는 관문을 앞두고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학교와 학원 그리고 집을 오고가야 하는 이 땅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걱정과 근심은 말이 아닙니다. 이렇듯 모든 이가 저마다의 관심과 걱정거리가 있듯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도 걱정과 관심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여벌 옷이나 신발, 지팡이 그리고 돈주머니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복음 선포자로서의 몸가짐과 행동 양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복음 선포자로서의 마음가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름으로서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될 고통과 박해 앞에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것을 성령께 맏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걱정은 모든 근심과 슬픔 그리고 고통의 근원입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 미리 걱정을 한다 해서 그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불안하고 초조해서 하루하루가 바늘방석 같고 얼음판 위를 걷는 심정일 것입니다. 따라서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내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시기에 용기를 가지고 걱정과 근심 그리고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욕심을 버릴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마음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을 잃은 사람에게 맹자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십니다. “이절 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 외롭다는 것은 사람이 걸어가야 될 길을 말한다. 그 길을 버리고 걸어가지 않고 그 마음을 버리고 찾을 줄 모른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사람은 닭이나 개를 놓치면 찾을 줄 알면서도 마음을 놓치면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의 길은 그 놓친 마음을 찾는 데 있을 뿐이다.” 기원전 3~4세기의 맹자님과 그 시대의 사람들이 이렇듯 마음을 찾는 일에 몰두했듯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역시 잃어가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되찾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이르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 담긴 메시지도 결국 인간의 마음을 되찾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 신앙인이든 신앙인이 아니든 누구에게나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하루도 만나는 사람마다 하시는 일마다 그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마음을 찾는 하루가 되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걱정과 근심보다는 기쁨과 즐거움,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하루가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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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양승국신부-
< 나만의 감실 하나 >
베네딕토 성인께서 살아가셨던 시대는 전쟁과 혼란, 그로 인한 민족들의 대이동 시대였습니다. 힘겹게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어봐야 허사였습니다. 약탈이 수시로 반복되었습니다. 아무도 내일 일을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백성들의 삶은 불안정했습니다.
이러한 시대 베네딕토 성인은 정주(定住) 수도회를 설립함으로써 시대의 요구에 응답합니다. 높은 산 위에 견고하고 웅장한 수도원을 설립합니다. 더 이상 수도자들이 이곳 저 곳 떠돌아다니지 않고 고요하게 정진(精進)할 수 있는 관상 수도회의 기틀을 닦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수도회를 건립하고, 수많은 수도자들의 참된 영적 지도자로 우뚝 서기까지는 참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때로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속 한 동굴 안에서 3년간이나 홀로 생활했습니다. 그 외로운 나날을 통해 자신의 내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베네딕토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약한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과 대면합니다. 어둠의 세력과 맞붙어 힘겹게 싸워나갑니다. 철저한 고독과도 투쟁합니다. 이런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 베네딕토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점차 확장시켜나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베네딕토의 삶에 매료된 입회자들이 점점 늘어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원리원칙주의자였던 베네딕토를 견디다 못한 수도자들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합니다. 워낙 대쪽 같던 베네딕토였기에 아직 그들의 나약함과 미성숙함을 받아들일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습니다. 베네딕토의 열성을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던지 그를 따라가지 못했던 수도자들은 독살(毒殺)까지 시도합니다. 이처럼 베네딕토 역시 흔들렸습니다. 난관 앞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런 험난한 여정을 거치면서 베네딕토는 서서히 내공을 쌓아나가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자신의 내면 깊숙이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할 자신만의 자리를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영혼의 바탕을 마련한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안에 그 누구도 점령할 수 없는 견고한 성채 하나를 건설합니다. 거룩한 감실 하나를 준비합니다.
이제 베네딕토는 그 어떤 외부의 자극으로부터도 동요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풍파 앞에서도 평화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자신만의 감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뜻만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참 지도자, 참 스승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 안에 참 평화를 확립한 베네딕토에게 있어 주변 환경은 점점 밝고 풍요롭게 변화되어 갔습니다.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 역시 평화롭게 되었고, 내적, 외적 사슬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의 자리를 확고하게 마련한 베네딕토에게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은총을 입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완전한 몰입이 가능해진 베네딕토는 그간 자신을 덮고 있던 막 하나가 사라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과 하나 됨을 통해 세상과도 하나 되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좋은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모든 존재와 쉽게 화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비로운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니 용서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제대로 된 하느님 체험은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킵니다. 하느님 체험은 산더미처럼 쌓인 우리들의 문제와 고통들을 하느님 자비의 바다 속으로 던져버리게 합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하느님 체험을 거친 베네딕토였기에 만년에 다가온 죽음조차도 친구로,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베네딕토는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자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펼쳤습니다. 선채로 열렬히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 품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죽음에 의해 점령당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돌이켜보니 수시로 흔들리는 나약한 우리들입니다. 지나가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심각한 상처를 받습니다. 난 데 없이 다가온 돌 하나에 죽느니 사느니 난리입니다. 외부 환경적 요인에 너무나 민감합니다. 삶이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짜증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베네딕토처럼 우리 내면 안에 우리만의 자리를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그곳에 그 누구도 아닌 하느님 그분만을 모시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그 안에 굳건히 자리 잡고 계시는 한, 그 어떤 세상 풍파 앞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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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짖궃은 질문을 종종합니다. 아마 이런 질문을 어렸을 때 많이 듣지 않았습니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그때 얼마나 난처했습니까? 엄마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또 반대로 아빠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요즘 아이들에게는 이 질문에 대해서 세가지 반응을 볼 수 있다고 하네요. 다음 이야기를 한번 보세요. 이모가 와서 가만히 아이에게 물어 봅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그러면 아이는 아주 오랜 끝에, 이모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인데요. 첫째. 순진한 아이: "아빠가 좋은데, 엄마는 더 좋아.. 그런데 이모! 비밀인 것 알지?" 바로 이때 삼촌이 아주 큰 장난감을 사들고 와서 누가 더 좋으냐고 묻습니다. 둘째. 영악한 아이: "삼촌이 더 좋아~~" 엄마, 아빠가 바로 옆에 계신데, 고모가 들어와서는 묻습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셋째. 발칙한 아이: 아주 크고 당당한 목소리로.. "둘 다 그저 그래." 순진한 아이, 영악한 아이, 발칙한 아이의 모습을 재미있게 묘사한 글이었지요?
사실 우리들 안에는 이 3가지 모습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진한 모습을 할 때도 있고, 영악한 모습을 취할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발칙한 행동을 하기도 하지요. 그래도 순진한 모습과 영악한 모습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발칙한 모습을 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즉, 세상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 그리고 하느님의 일을 처리하는데 지혜로우면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이 세상의 발칙한 모습을 취할 때가 많지 않나요? 그리고는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옹호하곤 합니다.
"나는 너무 주관이 뚜렷해서 그래. 나는 거짓말을 하지 못해. 나는 뒤끝이 없는 사람이야." 그러나 이 세상은 나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또한 내가 남을 배려하지 않는데, 남에게서 배려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커다란 욕심일 뿐이지요.
발칙한 주님의 자녀가 되기보다는 지혜롭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하여 봅니다. 즉, 우리 모두가 나만을 드러내고 나만을 합리화시키려는 마음을 버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을 순수한 마음과 지혜로운 마음으로 실천할 수 있기를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취할 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며…
주님 앞에서 발칙한 아이가 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파견된 제자의 덕목 - 슬기롭고 순박하게 -여성국 신부-
얼마 전 미사 때 성체를 분배하다가 성체 가격(?)으로 바나나와 토마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성체 값을 낸 그 자매는 약간의 정신 지체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미사 때마다 성체를 영하러 나오는 그 자세가 너무 불량했습니다. 어느 날 미사 시작 전에 시간이 남아서 이 자매에게 영성체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 미사 때 성체 값으로 바나나와 토마토를 주는 겁니다. 성체를 분배하는 도중이라 순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내심 사제품을 받은 후 받았던 선물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 중 하나였기에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슬기로움’과 ‘순박함’의 덕목을 갖출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역시 미사 때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습니다. 파견받은 제자로서 우리 또한 슬기롭고, 순박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순박함이 더욱 더 필요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영악스러울 정도로 슬기롭지(?) 않습니까?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백남국 신부-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고 하시면서 가족 안에서까지도 서로 불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복음을 철저히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신 말씀이겠지요. 그런데 한편으로 주님께서는 또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 하시며 무조건 맞서기보다는 조금 더 지혜롭게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뚜렷이 드러나는 박해는 없을지라도 지금 역시 수많은 어려움이 우리의 믿음을 공격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슬기롭고 무엇에 순박해야 하는 것일까요? 주님을 증언하는 데 물러서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우리의 적으로 돌리지 않는 슬기로움이 아닐까요? 또한 성령께서 이끄신다는 믿음으로 온유하게 박해자들 앞에 맞설 수 있는 여유로움이 아닐까요? 믿는 구석이 있으면 우리를 적대하는 자들 앞에서 온유해질 수가 있지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부끄러운 기억이 많이 떠오릅니다. 온유해야 할 상황에서 얼마나 자주 화를 내고 분노를 터뜨렸는지요. 그만큼 자신감이 없었다는 뜻이겠죠. 또 슬기롭게 주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할 시점에 얼마나 무식하게 몰아세우며 그들에게 주님께 대한 반감을 심어주었는지요. 주님을 증언하는 데 슬기로움과 순박함보다 더 효과있는 무기가 있을까요? 주님,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말씀처럼 저의 삶이 슬기롭고 순박하게 성령 안에서 신앙을 잘 증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양승국신부-
<천국에 이르는 꽃길>
큰 도로에서 저희 수도원까지 올라오는 진입로가 있습니다. 산을 마주보며 걷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언덕길이지요.
언젠가 사목활동을 나갔다가 늦게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밤늦은 시간, 기온도 뚝 떨어져 얼마나 추웠는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우산도 없이 그 길을 걸어 올라오자니, 얼마나 멀던지, 얼마나 짜증나던지, 얼마나 또 무섭던지...
반면에 꽃 잔치가 계속되던 4월 말경, 그 길을 올라오는데, 정말 천국이 따로 없더군요. 진입로 왼쪽 언덕에는 노란 개나리꽃이 만발했습니다. 오른쪽에는 벚꽃이 만발했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니 꽃잎들이 흩날렸습니다. 그 향기가 온몸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배경으로 보이는 뒷산은 온통 연둣빛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습니다. 황홀경에 빠질 정도였습니다.
그 길을 올라오자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같은 노래가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똑같은 길인데, 어찌 그리 느낌이 달랐는지 생각해봤습니다.
우리네 인생길 마찬가지겠지요. 나 혼자 걷는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인생길은 외로울 뿐입니다. 두렵습니다. 지루합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반면에 주님께서 내 바로 옆에 동행하신다고 생각할 때, 주님께서 내 앞길을 인도하고 계신다고 확신할 때, 우리의 인생길은 날이면 날마다 천국으로 향하는 꽃길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떠받치고 계신다고 생각할 때, 아무리 악천후의 날씨라 할지라도 찬미의 노래가 우리의 입술에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을 위해 길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특별 정신 교육을 실시하십니다. 걱정이 많이 되셨기에 안쓰러운 마음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몇 가지 특별 당부를 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힘을 주시는 한 말씀을 추가하십니다. 그 말씀에 제자들을 용기를 얻습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여정을 걸어가면서 절대로 두려워할 일 없습니다. 아버지의 영께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손을 꽉 잡고 계십니다. 할 말이 있을 때는 그분께서 대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의 여정에 함께 하십니다.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하라.
-강영구신부-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그대에게
세상은 살벌한 생존경쟁(生存競爭)의 장(場)입니다. 어떤 형태의 힘이든 힘을 가진 사람이 살아남는 곳입니다. 돈과 재물, 권력과 지위, 명예와 지식, 하다못해 완력(腕力)이나 폭력이라도 지녀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새벽부터 밤늦도록 뛰어다는 이유도 이런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스승 예수께서는 이런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마태10,9-10)고 명령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늘나라(天國)는 재력이나 권력이나 학력 따위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벌한 세상 한가운데 보냄 받은 비무장(非武裝) 무소유(無所有)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를 내어줌이거나 잡아먹힘입니다. 사실 하늘나라(天國)는 내어줌과 잡아먹힘으로 도래(到來)합니다. 내어주지 않고 오히려 잡아먹겠다고 서로 덤벼들면 그때부터 지옥(地獄)이 시작됩니다. 이리 떼 가운데 보냄 받은 양이 살아남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이리 떼에게 자신을 비둘기처럼 양순한 모습으로 내어주는 것이 슬기이자 지혜입니다.
세상 한가운데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빵(요한 6,48)으로 이 땅에 오신 스승 예수님을 닮아서 이리들의 밥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당신의 오늘은 송두리째 자신을 내어주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은 행복할 것이며, 당신을 잡아먹는 사람도 행복할 것입니다.(一明)
-장재봉 신부-
우리는 예수님의 사도단입니다. 예수님 께서 손수 뽑아주신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갖고 오신 그 능력을 “세상이 끝날 때 까지” 우리들이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그 힘을 세상에 전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바로 우리들이다’라고 하면 더 적절한 표현이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들은 예수님께 아주 요긴하고 필요한 사람들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모인 우리 교회는 즐기기 위한 사교모 임일 수 없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이해관계로 모인 단체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참된 삶 의 공동체란 그분께서 사시기에 합당한 거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를 중심으로 모여 이룬 이 공동체는 순수한 사랑의 집단이며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심에 잠겨있는 축복의 공동체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당 연합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고 행하는 일이 세상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바는 세상이 바라고 원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는 일이 세상에서 어리석다 하면 틀림없는 예수님의 일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 세상에서 잘나지 않았다 면 더욱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더 닮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 은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세상에서 우리들이 겁먹을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누누이 밝혀 주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뽑으실 때에도 밤새워 기도하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렸다는 것 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하느님 나라를 넓히시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힘 을 쏟아 주고 계심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간구하고 계시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로지 성령의 힘을 믿는 것만으로 “의인”이라 불러 주시 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음을 고백해 드리고 맑은 영혼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맑은 영혼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갑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자유.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느님이기에”, “예수님이기에”, “내 이웃이기에” 비록 나에 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하신 하느님의 뜻을 위해 사랑하는 것. 참 자유입니다. 예수 님이 누렸던 바로 그 기쁨입니다.
오늘 하루, 나를 심판하시지 않고, 자비로 이 용서하시어 구원하시기 위한 그분의 뜻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뜻을 꺾어 바치면서 그 수를 헤아려 보아도 좋겠습니다.
얼마 만큼의 잔 꽃송이를 드렸는지 계산해 보도록 합시다. 못난 내 마 음을 꺾어 그분의 부드러움을 접목시킨 그 자리마다 고운 꽃 한 송이 피어 있을 것입니다. 잠들기 전 그 분 앞에 그 꽃다발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진리로 자유로운 복된 자입니다. ♡
† 약해질 때와 강해질 때 -박상대 신부-
엄격한 선교수행지침(10,5-15)을 하달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파견을 마치 양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에 비유하신다. 이 비유는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암시하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당장에 이와 같은 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 이후에 복음선포자와 신자들이 당하게 될 박해를 미리 예고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 자신이 얼마 있지 않아 받게 될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이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형태의 박해예고와 두 가지 모양의 위로약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박해예고(17-18절)와 성령에 의한 변호보장 약속이며(20절), 둘째는 가족의 고발과 세상으로부터 받게 될 미움예고(21-22절)와 종말론적 구원보장 약속(23절)이 그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빛나는 승리나 커다란 효과가 보장되기 보다는 처절한 박해가 준비되어 있음은 예수님 스스로가 그런 박해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께서 그 길을 걸어가셨고, 제자들도 스승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이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비켜갈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길은 혼자 가야하는 외로운 길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과 예수님의 성령께서 함께 가시며, 그 길 끝에는 아버지의 품과 천상의 월계관이 기다리고 있다.
그 마지막 길을 가는 동안 예수님의 복음은 세상의 무관심과 적대심을 만나게 된다.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 적대심이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더 낫다. 적대심은 박해를 불러일으키고, 박해는 복음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때 복음이 취하는 태도는 박해자의 태도와는 정반대이다. 이것이 바로 양과 이리의 다른 점이다.
복음의 강점(强點)은 오히려 어린양과 같은 약함이다. 이것이 곧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취해야 하는 자세이다. 이는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는 약하지만 청빈과 사랑과 봉사에는 강하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교회는 그 동안 세상과의 법적 조약이나 협정을 통하여 확고한 지위와 특혜를 영위하고 누려왔으며, ‘신성모독’이나 ‘종교적 타부’ 등의 방패를 세상에 내걸고 온갖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왔으며, 지금도 많은 부분 그렇게 하고 있다. 신부(神父)인 나 자신도 그 맛에 젖어가고 있음을 보면서 복음선포자로서 복음 앞에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교회는 자신이 인간적인 인정과 보호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적 권력으로 자신을 보호하면 할수록 약해지고, 무력해지고, 별다른 의미 없는 그 무엇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더 나아가 복음이 지향하는 ‘너희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마태 25,40)에 대한 관심과 연대감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종국(終局)에 가서는 교회와 복음의 결별을 초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마태 10,17-22) -유 광수신부 -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나 때문에" 즉 예수님 때문에 받는 축복도 많고 기쁨도 크지만 또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도 많고 또 해야할 일도 많이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삶의 방법이 다르고 목표가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일지라도 반드시 증언할 것이 있고 해야할 말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말은 자기가 만들어 내는 말이 아니라 성령 즉 아버지의 영이 일러 주시는 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 앞에 끌려 나가 모욕을 받는다든지 어떤 손해를 입는다든지 아니면 불이익을 당하게 될 때 무슨 말을 하게 되는가? 고맙다는 말을 하게 될까? 아니면 기쁘다는 말을 하게 될까? 대개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되거나 피해를 입게 되면 우리 마음에서 쉽게 나오는 말은 결코 고운 말이 아니고 상대방에 대한 욕이나 맞고소 또는 상대방에 대한 복수심에서 나오는 악랄한 말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복수할까를 생각하게 되고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나 험담을 늘어 놓게 되기 쉽다. 우선 분노로 상대방에게 결코 복음 적인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며 좋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할 것이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미워하게 되고 갈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누군가가 자기 비위를 거스리거나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하게 되면 즉시 말 다툼을 하거나 원수까지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절대로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말이 아니다. 그럼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성령께서 하시는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27)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16,13-14)라고 말씀하셨다. 성령께서 일러 주실 말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무엇을 증언할 것인가? 또는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할 때 그 때에 할 말은 내가 만들어 내는 말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모든 것을 말씀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하면 된다. 그런데 평소에 이것이 잘 안된다. 왜 그럴까? 평소에 복음을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생활하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하고 저럴 때는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는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맘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된다.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은 평소에 기도하는 사람이요,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우리는 쉽게 내 감정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기 쉽다.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욕도 하게 되고 심하면 싸움까지도 하게 된다. 이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잘 판단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서 즉흥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에 더욱 기도를 해야한다. 기도를 하면서 자기 감정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할려고 하던 것을 절제하고 예수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하셨는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거기에 적합한 해답을 찾고 그리고 나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감정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평소에도 기도하고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복음을 생활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생활이다. 어떤 특별한 때에만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기도하고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생활하는 것이 생활화된 사람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복음에 어떻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이미 다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평소에 복음을 읽고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더라도 무슨 말을 할까 어떻게 말할까 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것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일러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것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보지 않고 듣지 않는데 어떻게 성령께서 일러 주실 말을 듣겠는가?
성인들이 또는 순교자들이 박해 때에도 꿋꿋하게 하느님을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삶이 늘 기도하면서 말씀을 살았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 교육을 받은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비슷하다."(마태 13,5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자기 마음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사람답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평소에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가 자신도 모르게 그 때 그 때마다 꼭 필요한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법이다. 그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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