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말론적인 삶(벧전 4:7-11)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가리켜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이 종말론적인 삶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말세가 되었으니까 모든 것을 다 팽겨 치고 교회당에 모여서 기도나 하고 성경이나 공부하자 라는 그런 의미에서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론적인 삶이란 말은 매 순간순간을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심정으로 책임있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뜻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종말을 이야기할 때 두 가지 유형의 종말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첫째로, 우주적인 종말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시 오시고 역사가 마지막을 고하는 마지막 날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누누이 계속해서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증언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오늘 하루하루가 그 마지막 최후의 순간을 향해서 더 가까이 임박해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개인적인 종말입니다. 우리가 우주적 종말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개인적 종말이 분명히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가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내 생일을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듯이 마지막 가는 날도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개인적 종말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종말이나 개인적인 종말의 시작을 모르게 하셨습니다. 즉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가리켜서 도적같이 오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적은 예고하지 않고 찾아옵니다. 도적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도적이 어느 순간에도 올 수 있다는 그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서는 안되며 오히려 도적맞지 않기 위하여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이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가르치고 있는 말씀입니다. 지나간 인류의 역사 속에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사건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 있었다면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입니다. 이 사건보다 더 위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은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역사 속에 일어날 모든 사건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그 사실 때문에 그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날이 그리스도인인 여러분과 저에게 있어서는 우리의 삶의 결산의 날이고, 또 우리의 마지막 승리의 날이기 때문에 그날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상적인 교회를 말할 때마다 초대 교회를 말합니다. 이 1세기 교회의 생명력, 그 생동력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폭풍이나 번개가 몰아치면 "주여, 이제 오십니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밤중에 아름다운 별을 대할 때마다 "주님, 이제 오시나요?”라고 말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인사를 주고 받았습니다. "마라나타”(Maranata:“주께서 곧 다시 오십니다")
이러한 마지막에 대한 긴박감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책임있고, 능력있고,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게 했던 것입니다. 기독교교회사에 있어서 어느 시대에나 진지한 영적인 부흥이 그리고 도덕적인 각성이 일어날 때에는 이 재림 신앙이 항상 전제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불평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이 왜 아직도 안오셨습니까?”
여러분! 창세기 3장에서 이미 하나님은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이 세상에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금방 오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때 오셨습니까? 사람들이 이제 구세주라는 분은 어쩌면 영원히 오시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속에서 완전히 그분을 포기하고 있었을 그때에 때가 찬 어느 시각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재림의 사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급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와 우리의 시간표는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시각을 비밀에 붙여 두신 이유는, 어느 순간에도 그 마지막 날이 올 수 있다는 긴장과 긴박감이 오늘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실존적으로 결단하고 살아가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오늘 이 순간이 1세기의 그리스도인이 살았던 그때보다 그 마지막이 훨씬 더 가까이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 베드로서가 씌어진 시대와 거의 동시대인 1세기에 일어난 아주 놀라운 사건 하나가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베스비우스(Vesuvius)라는 산 허리에 약 2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주후 63년 이 마을에 어느날 갑자기 덥수룩한 한 노인이 등장했습니다. 그 노인은 자칭 예언자였습니다.
유달리 술과 성적으로 부도덕한 죄악에 빠져 있었던 이 마을 사람들에게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 화산은 폭발할 것이오. 살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당신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사를 가는 것이오." 그러나 아무도 이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노인의 말을 믿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미친 노인의 광적인 망언이거니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꼭 16년이 지난 주후 79년 8월 24일 그 베스비우스 화산은 폭발하고야 말았습니다. 2천 명의 마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건지지 못하고 다 몰살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마을이 우리가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남부에 있는 폼페이입니다. 그때에 이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의 장군이요 역사가였던 플리니란 사람도 거기서 같이 죽음을 당합니다. 이 예언자의 이야기는 그의 아들이고 나중에 소아시아 비두니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 2세에 의해서 역사의 단편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다가오고 있는 그 날, 그 결산의 날, 심판의 날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 앞에 사도 베드로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네 가지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1. 기도하라(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종말을 앞두고 왜 주님은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종말을 생각할 때 당황하게 됩니다. 혼란해집니다.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날을 맞이하는 마땅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이 종말 때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그 날을 생각하다면 우리가 해야 할 첫번째 일은 바로 기도입니다. 영적인 파수꾼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치 생각지 않을 때 도적같이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재림을 믿고 기다린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25장에서 종말에 대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중에 우리에게 하신 가장 중요한 말씀을 든다면 마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도의 자세를 본문에서 주님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정신을 차린 상태는 무엇입니까? 한 성경학자는 정신을 차린 상태를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분별할 수 있는 정신의 상태.”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위기가 닥칠 때,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당황하면서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지 당황하기 쉽습니다. 바빠져만 가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바쁜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긴급하다고 해서 그 일이 가장 중요한 것만은 아닙니다. 기도할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실제적인 방법으로 응답하시는 기도의 내용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야고보서 1장에 보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보다 기뻐하시는 기도의 제목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이 지혜를 구하여 놀라운 응답을 받았던 인물이 생각나십니까? 그는 솔로몬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시련이 닥칠 때, 고통의 바람이 불 때 우리의 본능 속에서 일어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때에 기도하면서 지혜를 구하십시오.
우리는 거룩해지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엡5:15-18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 성령이 역사하시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기도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그 뜻을 분별합니다. 기도할 때 내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합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할 때의 나의 삶의 보장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인생의 숱한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습니다.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이 정말 가치있는 일인가? 나는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는 마지막에 어떻게 죽을 수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의 대답이 기도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유명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의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너무 바쁘다. 그래서 기도해야 되겠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기도하십시오!
2. 서로 사랑하라.
8절,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여기에서 성경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삶의 자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에 “사랑하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왜 사랑을 강조하였겠습니까? 사랑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있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요일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진정한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어떻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보다 먼저’란 뜻입니다.
또 “뜨겁게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뜨겁게"라는 단어는 본래 운동장의 경주자가 달려갈 때 목표인 골인점앞에 서서 자기의 팔을 펼쳐 그 목표를 붙잡는 모습을 가르칠 때 쓰여지는 단어입니다. 사랑의 목표를 설정하십시오. 사랑하기로 작정하십시오. 정말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작정하셨다면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성경의 최대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신약의 최대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삶이겠습니까? 성경은 사랑을 추상적인 언어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8절,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여러분,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용서하는 첫 단계는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 주는 것입니다. 한 유명한 심리학자가 이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허물과 잘못한 것을 알고도 상대방을 덮어주려 할 때 상대방은 비로소 고백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고백이 치료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런데 "당신 이런 일을 했지”라고 추궁하면서 상대방의 모든 것을 폭로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모멸감과 죄악감을 안겨다 주고 마침내 가식과 중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먼저 상대방의 허물을 덮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칩니다. 창세기 9장에서 믿음의 족장인 노아가 한번은 술에 취했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옷을 다 벗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나체로 잠을 자고 있는데, 그 장면을 세 아들이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 함이라는 아들이 그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밖에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에 노아는 함에게 저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두 아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기 위하여 뒷걸음질하면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덮어 줍니다. 이 말씀 직후에 성경에 이러한 말씀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셈과 야벳을 축복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결국 다 부족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실수도 하고 죄를 범하기도 하고 무지해서 깨닫지 못하고 제길을 고집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으매(롬 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사람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어떤 사람이든지 결국 하나님 앞에 다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용서가 다 필요합니다.
성경은 종말에 가까이 갈수록 사랑이 메말라질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혜를 성경은 "사랑하라 남의 허물을 덮어가며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배우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3. 서로 대접하라
9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여러분, 산상수훈의 유명한 황금률을 기억하십니까?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황금률의 교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남을 대접하면서도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게 되면 상대방이 그것을 알게 됩니다. 이때에 대접을 받은 사람에게 오히려 섭섭하다는 원망을 들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런 이유로 너희가 대접하되 원망듣지 않게 대접하라 자진해서 기쁜 마음으로 대접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런 중요한 특성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집을 방문하면 그들의 집은 언제나 열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 집의 문을 열어 놓고 나그네를 대접하였으며, 성도들을 대접하고, 고아를 대접하고, 과부들을 대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예배당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집이 예배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대접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히 13:1-3)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시고 누가 떠오르십니까? 아브라함이죠.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했는데 알고 보니 그 나그네는 바로 하나님의 천사였습니다.
예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 때, 너희들은 내가 나그네되었을 때에 나를 대접했느냐?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나를 돌아 보았느냐? 내가 목마를 때에 나에게 물 한 잔 준 일이 있느냐?" “아니 선생님이 언제 나그네가 되었고, 언제 배고프시다고 하셨으며, 언제 옥에 갇혔었습니까?"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실천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내 이웃에게 대접하라고 말씀합니다.
4. 서로 봉사하라.
10절,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란 맡은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맡겨주셨습니다. 청지기는 자기의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청지기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물질도, 우리의 재산도, 우리의 지능도, 우리의 건강도, 우리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이것을 가지고 이웃을 섬기며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지기는 어떻게 청지기로서의 삶을 바로 사는 것입니까?
청지기는 철저하게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인데, 이것을 나에게 맡겨 주셨다는 의식이 철저해야 하며, 그것을 자기가 아니라 이웃을 기쁘게 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사명입니다. 진정한 봉사에는 자기가 없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봉사하는 모든 봉사의 유형을 우리는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로 하는 봉사이며 다른 하나는 몸으로 하는 봉사입니다.
이것이 본문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말로 하는 봉사 이것은 설교, 교육, 또는 복음 전하는 일 등에 해당되는 봉사입니다. 이것은 필요합니다. 제가 말로써 설교하는 이것도 봉사하는 것인데, 만일 여러분에게 제가 계속 이 설교를 통해서 저 자신만을 드러내고 저 자신을 자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만일 말하기를 “여러분, 제게 하나님이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과 이 말씀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라고 한다면 그때 이 영광이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또 “너희가 남을 도울 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장학금을 주고, 불쌍한 이웃을 도와줄 때에 “내가” 그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 자기를 강조하기 시작하면 그 도운 사실로 사람을 얽매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도와 보십시오.
“형제여! 이 돈은 내 돈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인데, 이제 이 하나님의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의 목적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내가 이 물질을 쓰기를 원하오." 이렇게 할 때의 그 봉사는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게 됩니까? 우리가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 "나" 또는 자기 자신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봉사는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봉사의 생활에 내가 들어가고 자기가 들어가는 순간부터 우리의 봉사는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봉사입니다. 이런 봉사라야 사랑으로 하는 봉사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봉사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여류 문학가 한 분이 있습니다. 명성이 있는 분은 아니지만 여러 권의 책을 쓰셨고 많은 독자들도 있습니다. 교회의 여집사님이신 이 분이 수년 전, 몸이 이상해서 진찰을 받아 본 결과 간암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 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분은 그 남은 두 달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내 인생의 남아 있는 두 달 동안 어떻게 살면 좋을까요?" 라고 기도하는데 자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제일 커다란 후회는 "사랑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더랍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그동안 벽을 쌓고 살아왔던 사람들의 얼굴이 자꾸만 지나가더랍니다. 그래서 그동안 등을 지고 살았던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그들을 찾아가 용서를 구했습니다.
뚜렷하게 등진 사람은 아니지만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사랑하지 못하고, 격려해 주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찾아가서 일일이 격려해 주고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재산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빚이 없나 생각하면서 지은 빚을 깨끗이 갚고, 그리고 자손들에게 남길 최소한의 것을 제외하고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돈을 한 번도 가치 있는 일에 쓰지 못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선교사들을 위해서 선교 헌금을 하고, 구제 헌금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남길 메세지를 쓰기 위해 성경을 읽으면서 마지막 유언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두 달이 다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몸이 더 악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른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보았더니, 그 결과는 간암이 아니었답니다. 오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돈을 많이 쓰신 것이 후회되지 않습니까?" "아니요, 목사님. 지금까지 저의 생애를 통해서 이 두 달처럼 그렇게 의미있고 가치있게 산 때가 없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남은 시간도 이 마음가짐으로 계속 살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종말론적인 삶이란 오늘을 마지막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심정으로 "하나님 어떻게 살면 좋습니까?"라고 기도하며 주님께서 사랑하신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작정하며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와 달란트를 가지고 봉사하는 일에 나 자신을 바치는 삶,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요즈음 종말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결같이 마지막 시대의 끝에 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도 자꾸 그런 마음이 듭니다.
설령 그날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해도 우리의 개인적 종말은 분명히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와 오고 있다면 내 인생에 남아 있는 시간들을 어떻게 쓰고 싶습니까?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없이 서서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깨어서 기도하고 준비하며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