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6.10 민주항쟁 29주년입니다. 6.10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를 바꾸고 1987년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을 제6공화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6월 항쟁 때문입니다. 1987년 6월 항쟁에서 중요한 사건이 이한열의
죽음입니다.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22세 청년’
최루탄에 맞은 이한열의 모습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이한열의 쓰러진 모습을 촬영한 사람은
로이터통신 한국지사 사진부장으로 있던 정태원씨였습니다. 정씨는 1980년 광주에서도 광주민주화운동을 15일간 독점 취재하는 등 베테랑
외신기자였습니다.
<이한열군의 모습을 촬영했던 정태원씨가 말하는 1987년 6월 9일의
상황>
그때는 학교마다 집회가 안 열리는 날이 없었는데, 유독 그 날만 연세대 밖에 없었어. 매일 출근하자마자 학교쪽으로 전화를 걸어
집회가 있는지 확인하는데, 다른 학교는 없는데 연세대만 오후에 집회가 열린다고 그래. 아마 다음날인 6월10일에 큰 집회가 잡혀 있어서 그랬던
거 같아.
기자들이 연세비치라고 부르는, 연세대 정문 건너편 철길둑 위에서 기다리면서
정부가 항복하든 학생이 그만두든 이제 싸움이 끝날 때도 됐지 않나 이런저런 얘기를 기자들 끼리 주고받았는데, 이상하게 그날은 느낌이 안 좋았어.
그러다가 4시쯤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내려갔지.
내려와서 보니 학생 수에 비해 경찰이 너무 많이 왔어. 한 학교만 시위를 하니
서울시내 경찰이 다 모였나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최루탄 발사기를 든 경찰들이 학생대열을 삼면에서 에워싸는 모습이 보여. 학교 안으로 대열을
밀어넣고 말겠지 싶었는데 강하게 진압할 모양이라고 여겼지. 경찰이 삼면에서 최루탄을 쏘자 학생들이 학교 안으로 도망쳤고 나도 학생들을 따라서
뛰어들어가면서 촬영하고 있는데 뿌연 최루탄 연기 사이로 한 학생이 쓰러지는 게 보였어.
그리고 다른 학생이 그 쓰러진 학생을 일으키고 있는 모습을 계속 찍었어.
부축하던 학생이 혼자는 힘에 부쳤는지 다른 학생과 함께 데려가는 모습까지 찍고 나는 사무실로 들어왔어. 사무실에 오자마자 학생 한명이 다쳐서
세브란스병원으로 실려 갔으니, 병원에 빨리 연락해보라고 했지. 전화 연결이 된 담당의사가 이미 뇌사상태라고 알려줬어. 그래서 로이터는 오후
6시30분발로 학생 한명 사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어. (출처: 월간 사진 “슬픔을 딛고 선 사진기자의 냉엄한 시선”)
전경의 직사 최루탄을 뒷머리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은 연세대학교 병원으로 옮겨집니다. 이한열의 뇌 속에는 1~2mm
크기의 금속성 이물질이 4~5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수술할 경우 뇌조직이 더 큰 손상을 입을 수 있으므로 병원 측은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6월 11일 오전 10시, 병원 측은 기자회견을 갖고 이한열의 병세는 좌측후두부두개골 골절, 골절부위 뇌좌상,
뇌출혈, 두개강 내 이물질함유 등이라고 밝히고 호흡정지로 인해 인공호흡기를 사용 중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의 모습을 통해 6월 18일 서울과 전국 14개 도시에서는 ‘최루탄 추방 대회’가
열렸습니다. 7월 5일 0시 10분쯤 갑자기 혈압이 떨어지면서 상태는 급격하게 악화됐고, 혈압상승제 투입과 심폐소생술 등 응급조치가 취해졌지만,
새벽 2시 5분 22세의 젊은 나이로 이한열은 끝내 사망합니다.
‘최루탄 신데렐라 삼양화학 한영자, 1987년 개인 소득 1위’
6월 항쟁 때 ‘우리 자식 죽이는 삼양화학 한영자,85년 개인소득세 4위’라는 피켓이 등장했습니다. 최루탄에 맞아
죽고 다친 시민이 부지기수였던 상황에서 국민들은 도대체 누가 이 독한 살인 무기를 생산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이 피켓이 나오기 전까지
최루탄을 생산하는 기업이나 경영자가 누구인지 국민들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최루탄을 생산하는 삼양화학공업은 1975년부터 최루탄 개발에 들어가 1979년 방위산업체로 지정을 받았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이 있기 직전인 1986년 삼양화학공업의 매출은 499억이었습니다. 삼양화학이 최루탄으로 얼마나 많은 수익을 벌어들였는지,
한영자 회장의 소득세 순위는 1982년 16위, 1983년 17위, 1984년 11위, 1985년 4위, 1986년 2위까지
올라갔습니다.
6월 항쟁이 있던 1987년 한영자 회장은 52억 5,300만 원의 소득으로 소득세만 28억 7,800만원을
납부했습니다. 국내 굴지의 기업 오너를 제치고 소득세 랭킹 1위가 됐습니다. 최루탄이 얼마나 많이 생산돼 판매됐고 사용됐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미래한국은 ‘방신비리 의혹 삼양화학 한영자 회장, 그녀는 누구인가?’라는
기사에서 1987년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각각 100억 원씩 총 200억 원을 제공한 사람이 삼양화학공업의 한영자 회장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전두환 둘째 누나의 장남 허모씨가 삼양화학공업의 이사로 재직하는 시기에 성장했고, 한 회장이 허씨에게 목동 아파트를 사주기도 했다는 발언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는 최루탄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 최루탄을 생산한 기업은 삼양컴텍이라는 자회사를 통해 2014년부터
2025년까지 총 2700억여 원 상당의 신형 방탄복 30만8500개를 국방부에 독점 공급하면서 아직도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돌 대신에 장미꽃을’
최루탄으로 목숨을 잃고 경찰의 강력한 진압작전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다쳤지만, 시위대 중에는 전경에게 장미꽃을
주기도 했습니다. 간혹 해외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게 꽃을 주는 모습이 1987년 한국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민가협이나 여성 시위 참가자들은 ‘당신들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라는 말과 함께 꽃을 줬습니다.그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권력을 쥐고 폭력 진압을 지시하는 전두환이었지, 군대에 끌려가 어쩔 수 없이 진압봉과 최루탄을 쏘는 젊은이들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6월 항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거리에 나섰던 대한민국 국민들의
용기와 6월 항쟁 이후 나타난 정치, 사회 변화를 통한 대한민국의 발전입니다. 그러나 29년이 지나면서 국민들의 용기는 점점 사라지고 정치와
사회는 오히려 퇴보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1987년 22세 학생 이한열은 최루탄으로 죽었지만, 2016년 19세 노동자 젊은이는 돈 때문에 죽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독재 권력과 싸웠다면 2016년은 자본과 싸워 노동자의 권리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싸워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