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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결한 그리스도인
22: 16-24
16. 사람이 정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빙폐를 드려 아내로 삼을 것이요
17. 만일 그 아비가 그로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빙폐하는 일례로 돈을 낼찌니라
18. 너는 무당을 살려 두지 말찌니라
19.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20.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찌니라
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
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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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시내 산 언약에서 도덕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 외에, 사회생활에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시민법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시민법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6절에 “사람이 정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빙폐를 드려 아내를 삼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 ‘꾀어’라는 말은 ‘집요하게 설득하다, 지속적으로 유혹하다, 거듭 속이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처녀에게 남자가 의도적으로 접근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동침할 때까지 여러 번에 걸쳐 집요하게 유혹하였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정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그녀의 아비의 허락 하에 결혼 지참금을 주고 그 여인과 결혼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 여자를 취한 남자는 다시는 그녀를 버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즉 일시적인 감정으로 여자를 취하였다가 감정이 식어지면 버리는 순간적이고 육체적인 결합은 결코 인정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홍학이라고 알려져 있는 풀라밍고는 대단히 부끄러움을 잘 타고 또한 매우 소심한 새로서 도저히 사람이 접근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이 아닌 동물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아서, 누구든지 이 사실을 알고 있기만 하면 말이나 소의 가죽을 둘러쓰고 다가가서 이 아름다운 새를 쉽게 잡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사냥꾼들은 이런 식으로 변장을 하고 접근해서 손쉽게 풀라밍고를 쏘아 죽이는데, 이 새는 외양에 잘 속아 넘어 간다고 합니다. 부끄럼 잘 타고 아름답고 아무런 해도 끼칠 줄 모르는 풀라밍고는 단지 조심성이 부족하다는 결점 하나 때문에 불행하게 잡혀 죽는다고 합니다. 이 풀라밍고와 마찬가지로 많은 여성들이 아름답고 착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조심성이 부족한 나머지 남자들의 외양이나 감언이설에 속아서 불행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만일 그 아비가 그로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빙폐 하는 일례로 돈을 낼 찌니라.”고 했습니다. 딸의 아비 되는 사람이 딸을 범한 남자를 탐탁지 않게 여기거나 혹은 딸과 그 남자가 서로 맞지 않는다고 판단할 경우, 그 아비는 그 남자와 자기 딸의 결혼을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처녀의 아비에게 혼인 시 지급하는 결혼 지참금과 동등한 가치의 돈으로 보상해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가 취한 처녀가 이미 다른 사람과 정혼한 상태이면, 정혼한 처녀를 범한 남자는 돌로 쳐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다만 정혼한 처녀가 성읍 중에서 이런 일을 당했을 때에는 소리를 질러서 도움을 구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는 남자와 똑같이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러나 들판에서 이런 일을 당했을 경우에는 도움을 구할 수 없었으므로 처녀는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결혼의 신성함을 보존하시는 동시에 성적 문란을 예방코자 하셨습니다.
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부부간의 사랑을 확인하고 풍성하게 키워 나가며 자손을 번성시켜 땅을 정복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성을 순간적인 육체의 쾌락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을 인간의 쾌락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관계는 정상적인 부부 사이에서만 갖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사회를 보면 성도덕이 갈수록 문란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혼전에 그것도 사랑이 없이도 쉽게 성관계를 가지며 또 서로 성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해서 서로를 결혼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은 단지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성도덕은 오늘날 사회를 파멸로 몰고 가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성을 쾌락의 도구로 여기는 풍조 때문에 부부 사이에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이로 인해 가장 소중히 지켜져야 할 가정이 깨어지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을 단지 쾌락의 도구로만 여기는 사람들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는 것을 속박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독신자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온 땅에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이 급속하게 멸망한 원인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도덕이 극도로 문란했기 때문입니다. 성을 쾌락의 도구로 사용함으로 결국 그 사회가 병들고 부패하여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덕의 문란은 좁게는 한 가정을 파멸케 하고, 넓게는 한 나라를 파멸케 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런 점에서 갈수록 성을 쾌락의 도구로 여기는 현대 사회의 풍조는, 이 시대가 이미 멸망의 위기에 놓여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성도 여러분입니다. 진정 성도들은 성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해가는 이 시대 속에서 건전한 성도덕의 모범이 됨으로, 이 사회를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찌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무당은 악한 영의 도움을 받아 점을 치고 장래 일을 예언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들은 마치 자신이나 자신이 섬기는 악령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이 세상의 참된 지배자이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래서 무당들이 설치고 다닐수록 그 사회는 점점 영적으로 어두워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지금도 하나님을 거부하고 귀신을 섬기라고 유혹하는 무당들이 수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이 배운 교수나 박사 또는 권력을 가진 정치인이나 엄청난 재산을 가진 부자들까지도, 자신의 미래를 미리 알아 화를 막고 복을 빌기 위해 무당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자들 중에서도 급한 일이 생기면 무당을 찾아가서 점치고 굿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무당은 인간의 미래를 알 수 없고 인간의 길흉화복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미래를 결정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당들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며 무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빨리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무당이 존재하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사회는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철저하게 무당을 멸하도록 규정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규례입니다. 즉 성도들은 비록 사회적인 법이 있어 무당을 종교적으로 처벌할 수는 없지만, 이 사회 속에서 사람들을 불신앙과 우상 숭배로 미혹하는 무당들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사라지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고 했습니다. 고대 근동의 여러 민족들은 신성하다고 생각되는 동물과의 성교를 통하여, 자신들도 신성해지거나 그 동물이 갖는 힘과 왕성한 생식력을 가질 수 있다고 믿고, 하나의 종교 의식으로 짐승과의 수간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당하게 혼인하여 부부가 된 남녀간의 정상적인 성교가 아닌, 짐승과 성관계를 맺는 것은 성과 혼인이란 신성한 제도를 마련하신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위요, 거룩과 경건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일이며, 또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며 자신의 고유한 위치를 스스로 파괴하고 짐승으로 전락시키는 악행이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고 했습니다. 즉 결코 예외 없이 사형에 처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명령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본연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채 타락하고 방탕하게 사는 인생들을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규례로부터 짐승과 행음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쉽게 찾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로서,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먼저 그 일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로서 행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행동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그것이 나에게 유익하고 기쁨을 준다고 해도, 결코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떠한 이익이나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부끄럽지 않게 자신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죄악보다 심각하게 반응하시며 철저한 심판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를 철저하게 멸하라고 명령하실 만큼, 그들에 대해 진노하고 미워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그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희생 제물을 바침으로 그 신의 힘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거나 이루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다른 신의 힘을 더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를 향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그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두고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고 다른 신의 힘을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능을 무시하는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다른 신에게 돌리는 커다란 죄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만큼 크고 무서운 죄도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씀할 수 있습니까? 아마도 거의 대부분이 그렇지 못하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여러분은 가장 먼저 누구에게 찾아갑니까? 만일 평소에 자신이 정신적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나, 돈 있는 사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찾아간다면, 여러분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평소에 여러분의 삶은 무엇으로 인해 평안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가진 돈이나 지식 때문에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라면,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에 가장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로 그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지켜 주시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천지 만물의 창조주로서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들이 믿고 의지해야 할, 그리고 지금도 의지할 만한 유일한 분이심을 확신하고, 내 영혼과, 내 가족과, 내가 행하고자 하는 모든 일들을 다 하나님 아버지 손에 의탁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1절에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애굽에서 나그네 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야말로 애굽 땅에서 이방 나그네로 애굽 왕 바로에 의해 모진 학대와 견딜 수 없는 압제를 받았던 민족으로서, 어떤 민족이나 어떤 사람들보다도 나그네의 설움과 고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은혜로 애굽에서 구원받고, 마침내는 축복의 땅 가나안을 차지할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땅에서 이방 나그네 된 자들을 압제하고 학대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합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 나그네 된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듯이, 자신들도 이방 나그네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마땅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받기 이전에 우리의 신분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본래 하나님 보시기에 이방 나그네와 같았던 자들로서, 애굽과도 같은 세상의 죄악 속에서 방황하다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천국의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방 나그네와 같이 고통과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22-24절을 보면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호의 대상으로 특별히 ‘과부’와 ‘고아’를 지목하셨습니다. 당시 중근동 사회는 강력한 가부장적인 제도와 관습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경제적인 활동이나 재산의 상속 또는 가족 부양의 책임 등은 아버지와 장성한 아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없거나 아버지가 없는 이들은 자연히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고, 사회적으로도 소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회적으로 약자요 경제적으로 빈자인 고와와 과부들에게 사랑의 보호막을 쳐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부와 고아를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하실 만큼, 고아와 과부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배려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즉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의지하고 보호받을 데 없는 연약한 자들인 고아와 과부 같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본 시민법은 모두 정결과 관련된 규례들입니다. 결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빙폐를 드려 아내를 삼을 것이란 말씀은, 육체적 정결을 요구한 말씀입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과 최근 최연희 의원의 여기자 성 추행 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은 온통 타락한 성문화의 범람으로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래서 옛날 같으면 기절초풍할 “나 섹시 하지?”하는 말들을 초등학생들까지 거침없이 사용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타락한 성문화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은 이 세상 풍조를 본받지 말고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무당은 살려 두지 말라는 말씀은 종교적 정결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대로 무당을 찾아가서 사주팔자를 보거나 점을 치고 굿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영적인 간음 행위로서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악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도 신약의 교훈에 비하면 정결과 관련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 1:27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와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고,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한다면 예배와 찬양, 기도와 말씀, 헌금과 전도 같은 일에 열심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주위의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 우리들이 가진 것을 나눠 주는 사랑의 실천을 하도록 하십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거나 우리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 많이 드린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정결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정결하게 살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방탕하게 산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본받지 말고,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되어서 ♪황무지가 장미 꽃 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구속함의 노래 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거기 거룩한 그 길에 검은 구름 없으니, 낮과 같이 맑고 밝은 거룩한 길 다니리♪라는 찬송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