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대한 자세
성경본문 : 잠언 7: 1-5
1.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2.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3.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4.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5.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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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그 사고를 장식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T.페리콜)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고이며 뜻의 표현이며 예정 안에서 역사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다 변하여도 영원 불변하다. 더우기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삶과 생명의 핵으로서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즉 말씀에 있어 거역해서도 않되며 절반의 청종도 않되고 취사 선택의 여지도 없다.
그렇다면 말씀에 대하여 어떵게 처세 하여야 하는가?
1. 말씀을 지켜 간직해야 한다.(잠 7:1)
소유로 삼으란 말이다(잠7:1)
사람은 누구나 갖기를 원한다. 인생이란 소유하기 위하여 사는 것인지 모를 만큼 서로 많이 가지려고 안간힘을 쓰는게 사실이다. 그래서 약육 강식이란 글자는 양식만 바꾸어서 오늘의 사회에도 만연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거나 소유만 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못된다. 즉 무었을 소유하였는가에 따라서 가치가 다르게 평가 될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자기의 소유를 깡그리 팔아 값진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밭을 사게 되는 것(마13:44)이다. 귀한 것을 가진 사람은 그것으로 인하여 칭송을 받게되고 부요케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가진자가 그 무었을 가진자 보다 가장 값진 것을 가진자이며 이 말씀 소유로 인하여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투워 말씀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귀중한 보물처럼 간직하라(잠 2:1-7)
말씀은 은을 구하는것 같이 구해야 하고 감추인 보배를 찾는것 같이 찾아야한다. 한데 항간에는 양식 아닌것을 위하여 귀한 은을 달아 주듯 하는 어리석은 이가 허다하다. 고래로 어느 사회치고 그 사회가 무었에 얼마큼의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역사의 향방이 정하여 지게 마련이었다. 아름다운 주택이나 여러 동의 아파트 혹은 고급 승용차나 화려한 장식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그 사회는 그어디엔가 나사 못이 빠진게 틀림이 없다. 지식의 상징인 교수나 학자가 그가 닦은 지식으로가 아니라 받는 보수로 평가가 되고 국민을 이끄는 선량이 그가 끼치는 덕으로가 아니라 등극 즉시로 영화와 황금의 방석을 꿈꾸어서야 하늘이 웃을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 만치 귀중한 보물이 없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간직한 자는 세상에 비교할 것이 없는 값진 것을 소유하였으므로 깊이 간직하여야 한다.
눈동자처럼 중요히 여겨라(잠 7:2)
간직하는 것은 중요히 여기기 때문이어야 한다. 눈동자가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이중 삼중의 보호 장치가 되어 있음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에 우선되어야 하고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말씀을 소홀히 함은 마치 눈을 잃은 사람과 다를 바가없다. 그러기에 세상을 헤매일수 밖에 없으며 흑암과 죄의 심연을 벗어 날수가 없다. 진실로 이 시대의 소경은 눈이 없어서가 아니라 눈을 가졌으면서도 어두운 곳을 헤매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말씀대로 살아야 하고 그 말씀을 중요히여겨야 한다.
2. 말씀을 지켜 살아라(잠 7:2)
아는대로가 아니라 그대로 실천하라는 말이다(잠 7:2)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몇 십독을 하였다는 사람을 만나면 고개가 수그러진다. 정말 장하고 칭찬과 격려를 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성경 상식화의 일환이 될가 염려스럽다. 알고만 있던 주님 당시의 서기관들의 성경 상식은 주님이 태어 날곳을 악한 헤롯에게 지적함으로서 아기 예수님을 해칠번 했을뿐만 아니라 급기야 베들레헴 지경의 두살 아래의 유아를 죽이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현대 기독교의 안타까운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실로 기독교가 확장이 되는 것으로만 기뻐할게 아니라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탄식해야 한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없어 멸망을 당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이 되었느냐고 숫자만 헤아릴게 아니고 얼마나한 사람이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말씀을 준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 같다(마 7:26)
말씀을 준행치 않는 삶은 사막에 나타나는 신기루에 불과하다.잠시 화려게 보일지 모르나 오래 갈수가 없는 것이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위에 지은 집이 가치가 다름이 없다면 뉘라서 힘든 반석을 깨어 집을 지으려고 비지땀을 흘리겠는가? 비와 창수는 필연적으로 쏟아져서 지은 집의 기초를 판가름하게 해 준다.
신앙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하루 아침에 혜성처럼 나타나는 모래 위의 집들이 잠시후 비 바람과 흘러가는 창수에 휩쓸려 역사의 뒤안길에 흩어진 잔재가 되어 시야를 어지럽게 한다. 진실로 역사의 흐름은 말씀을 준행한 자들의 반석에서 부터 이어가고 있음을 알게 하고 또 말씀을 거역한 자들이 살고 간 모래톱을 바라 보게 한다.
말씀대로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약 2:22)
신자의 믿음의 표준은 말씀 준행에 있다. 주께서 주시마고 약속한 성령을 믿는자는 받아야 하고 증표로 주어진 은사와 표적을 못 가진자 보다 가진자가 백배 낫다. 말세를 당하여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믿음을 지탱하기가 힘들고 반신 반의가 팽배한 시절일수록 은사와 표적은 얼마나 필요한 일이냐? 하지만 신자의 믿음의 유무를 이것으로 판단하려드는 사람이 있으니 안타깝고 극히 위험스럽다. 왜냐하면 스데반과 같이 믿음의 꽃인 순교의 면류관을 얻은 이나 디모데와 같은 순종의 종에게서도 은사나 표적을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참 신자의 관심사는 말씀 준행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씀 준행자에게 주시는 은사나 역사는 하나님의 소관에 있으므로 친히 적절히 주실 것이고 행여 못 받았다고 해서 멸시의 대상이 되거나 불신앙의 표적이 되어서도 않된다. 말씀을 행함으로 온전케 하자. 그리고 믿음 없이 그 무었을 기대하는 자가 되지 말고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자.
3. 말씀을 사랑하여 새기라(잠 7:3)
일생의 반려로(아내처럼) 삼으라(잠 6:22)
일생을 같이 살아가는 아내는 고와 낙을 나누면서 서로 의지한다. 이는 사랑함으로 맺어지고 둘의 사이에는 순결이란 단장으로 돈독해 지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사랑을 주기에 사랑 할수 밖에 없고 순전하기에 일생의 반려로 때로는 용기와 소망과 옳게 함과 곧게 함으로 신뢰의 대상중 대상이며 실족과 허물을 범치 않게 함으로 사귈만하다. 언제나 곁에 두면 아내보다 나은 내조자가 되고 믿어 손해 볼것이 없는 참 좋은 스승이 될것이다.
항상 친구처럼 사랑하라(잠 7:4)
아름다운 친구 사이를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들어 말한다. 하긴 세상에서는 그 같은 친구와 우정을 찾을 길이 없다. 세상에는 참된 치구가 없다는 말도 사실인것 같다. 사겻다가는 낙심케 되는가 하면 되 돌릴수 없는 치명상을 입게 되는 경우가 비일 비재이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강단을 놓고 돌을 던지는 목자의 비도덕이나 감싸야 할 사이에 물고 찟는 현실은 우리 교계에 만연되고 있는 종교 에이즈가 아니고 무었이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가까이 있어 든든하다. 어느 친구도 추종할수 없는 충언을 항상 주며 누구에게서도 찾을수 없는 모사를 담뿍 제공하여 주므로 친구를 사랑하듯 사랑해야 한다.
항상 성구함 처럼 매고 새기라(잠 6:22)
유대인은 성구를 기록하여 함에 넣고 가죽줄로 팔에 일곱번, 가운데 손가락에 세번, 그리고 나머지는 손목에 둘러 매었다. 그리하여 항상 말씀을 상기하는 생활을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고 일하기 전에나 일이 끝나고 난 후에도, 또 나갈때나 들어올 때에도 가깝게 있어야 한다. 말씀은 번쩍이는 보석 보다 나으며 최고의 장식물이기에 성도는 말씀을 가지므로 심령으로 아름다워 지고 말씀으로 인격을 배양하므로 천사같이 된다. 하지만 말씀은 희박하고 세상의 가지가지로 장식을 하려니 아귀 다툼이 일어나며 말씀의 가치 보다 사치의 가치를 위에 두게 되니 한심스럽다.
4. 말씀대로 행한자의 복(잠 7:5)
말씀이 지켜 준다(잠 7:5)
백만 군대로 지키는 것 보다 말씀이 지키는 것이 더욱 낫고 수완 좋은 경호원이 수행하는 것보다 말씀이 따르는 것이 더 훌융하다. 말씀은 국기를 든든케 하였고 백성을 평화롭게 하여왔다. 국경을 넘어 호시탐탐 노리는 외적이 국가를 넘어뜨린 경우보다는 백성이 말씀에 벗어난 행위를 함으로 망국의 슬픔을 겪게 된 경우를 역사는 지적하고 있다. 실로 말씀없이 덤벙대던 당세의 호걸의 비애를 우리는 보았고 말씀에 벗어나 경거 망동을 일삼다가 몰락해간 영웅들의 역사를 우리는 되씹고 살아간다. 말씀대로 살면 말씀이 지켜준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가 말씀대로 살아가면 말씀의 위력은 병력의 위력보다 크다. 말씀대로 살자. 그러면 말씀이 지켜주실 것이다.
말씀이 미혹되지 않게 한다(잠 7:5)
골목에는 미혹하는 음녀가 있고(잠7:5) 거리에는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가 있다(마24:5) 지붕위에 나가면 목욕하는 밧세바가 있었고 사도의 길에는 돈전대가 있어 문제였다.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한대도 사람의 속에는 사탄의 챈널에 맞아 도는 구석이 있기에 미혹에 장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존경과 환심의 정점에서 얼굴 감추는 수치를 당하게 만들고 급기야는 화인을 맞은 심령으로 변하여 범죄를 만드는 숙련공이 되기도 한다.
말씀이 미혹 되지 않게 한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주님도 이말씀으로 승리를 하지않았던가?
말씀은 화가 미치지 않게 한다(잠 8:5)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화를 면하게 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말씀대로 살지 않으므로 화의 선언을 들었다. 일상 생활에서 닥치는 화가 말씀을 경홀히 여김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종말에 닥치는 화를 면할수가 있다. 아무리 믿음이 있노라고 호언을 한대도, 아무리 믿음의 증거를 받았다고 한대도 종말에 가서 화를 면하는 길은 말씀을 믿고 말씀을 지키었느냐에 따라서 판가름을 보게된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백마디 선전보다 말씀대로 믿음이 좋고 천마디의 말보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좋다. 한치의 믿음도 없이, 한호의 실천도 없이 큰 믿음의 소유자 인양 떠벌리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말씀은 화를 면케 한다. 오늘은 보호해 주고 내일은 영화롭게 할것이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