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자유가 효도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의 효도라는 것은 잘 봉양하는 것(오직 음식을 바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런 것들은 개나 말에게도 할 수 있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개와 말을 기르는 일과 무엇으로 구별하겠는가?”라고 하셨다.
○ 子游, 孔子弟子, 姓言, 名偃. 養, 謂飮食供奉也. 犬馬待人而食, 亦若養然. 言人畜犬馬, 皆能有以養之, 若能養其親而敬不至, 則與養犬馬者何異. 甚言不敬之罪, 所以深警之也. 자유는 공자의 제자로서 성은 언이고 이름은 언이다. 양은 음식을 바쳐 받드는 것을 말한다. 개와 말은 사람이 주기를 기다려 먹으니 또한 길러주는 것과 같다. 사람이 개와 말을 기르는 것은 모두 그것을 먹여 기를 수 있는 것이니, 만약 자기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공경함이 지극하지 아니하면, 개나 말을 먹여 기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말한 것이다. 불경의 죄를 심하게 말한 것은 그것을 깊이 경계하기 위함이다. |
2 | ○ 胡氏曰: “世俗事親, 能養足矣. 狎恩恃愛, 而不知其漸流於不敬, 則非小失也. 子游聖門高弟, 未必至此, 聖人直恐其愛踰於敬, 故以是深警發之也.” 호씨가 말했다. “세속에서 어버이를 섬길 적에 능히 봉양하면 족하다고 여기고, 은혜와 사랑만 믿고 버릇없이 굴어서 그것이 점차 공경하지 아니함에 흐르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이는 곧 작은 허물이 아닌 것이다. 자유는 성문의 고제였으니, 반드시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겠지만, 성인은 곧바로 그 사랑이 공경을 뛰어넘을까 두려웠기에, 고로 이로써 그를 깊이 경계하여 말해준 것이다.”
問犬馬不能自食待人而食者也 故畜犬馬者必有以養之 但不敬爾 然則 養其親而敬有所不至 不幾於以犬馬視其親乎 敬者尊敬而不敢忽忘之謂 非特恭謹而已也 人雖至愚孰忍以犬馬視其親者 然幾微之間 尊敬之心一有不至 則是所以視其親者 實無以異於犬馬而不自知也 聖人之言 警乎人子未有若是之切者 延平李氏曰 此一段 恐當時之人習矣而不察 只以能養爲孝 雖孔門學者 亦恐未免如此 故夫子警切以告之 使之反諸心也 苟推測至此 孝敬之心 一不存焉 則陷於犬馬之養矣 누군가 묻기를, “개나 말은 스스로 먹지 못하여 사람을 기다려 먹는 것들이기 때문에, 견마를 기르는 것에는 반드시 그것들을 먹여줌이 있어야만 하나, 다만 공경하지 않을 따름입니다. 그러한즉, 제 부모님을 봉양하면서도 공경함에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다면, 견마로써 제 부모님을 보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공경이라는 것은 존경하면서도 감히 소홀히 하거나 잊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지, 단지 공손하고 삼가는 것일 뿐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을지라도 누가 차마 견마로써 제 부모님을 보는 자이겠습니까? 그러나 거의 드러나지 않음의 사이에 존경하는 마음이 한번이라도 지극하지 않게 되면, 제 부모님을 보는 것이 실제로 견마와 다를 게 없으면서도, 스스로는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인의 말씀 중에 사람의 자식에게 경계해줌이 이와 같이 절실한 것은 아직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연평이씨가 말하길, “여기의 한 단락은 아마도 당시 사람들이 습관이 되어 살피지 못하고서, 그저 봉양을 잘하는 것을 효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고, 비록 공문에서 배우는 자들이라고 해도, 역시 이와 같음을 면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공자께서 경계함이 절실한 것으로 알려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마음에 돌이키도록 하신 것이다. 만약 미루어 헤아림이 여기까지 이르고도, 효경의 마음이 한번이라도 여기에 보전되지 않게 된다면, 견마를 기르는 지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子游是箇簡易人 如灑掃應對便忽略了 如喪致乎哀而止 便見他節文有未至處 주자가 말하길, “자유는 간소하고 간이한 사람이었는데, 예컨대 쇄소응대 같은 것은 소홀히 하여 생략하였고, 예컨대 상례에 있어서는 애통해함을 지극히 함에 그쳤으니, 곧바로 다른 절문에도 지극하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或問父母至尊親 犬馬至卑賤 聖人之言 豈若是之不倫乎 曰 此設戒之言也 故特以尊卑懸絶之甚者明之 所以深著夫能養而不能敬者之罪也 혹자가 묻기를, “부모는 지극히 높고 친밀하지만, 견마는 지극히 비천한 것인데, 성인의 말씀이 어찌 이처럼 인륜에 어긋날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것은 가설하여 경계한 말이다. 그러므로 특히 존비가 매우 현격한 것으로써 밝혀준 것이니, 저 봉양은 잘하지만 공경할 줄 모르는 자의 죄를 깊이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能養未必能敬 能敬則不至於不能養也 記曰 仁人之事親 如事天 可徒愛而不知敬乎 경원보씨가 말하길, “봉양을 잘한다고 해서 반드시 공경할 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능히 공경할 줄 안다면, 봉양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예기에 이르길, 어진 사람이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처럼 한다고 하였으니, 부질없이 사랑하기만 할 뿐 공경할 줄 몰라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是謂能養皆能有養 看兩箇能字 便見是說 養親之人與養犬馬之人 言養親之人能養而不能敬 則與養犬馬之人 無所分別 非謂父母與犬馬無別也 集註云 與養犬馬者何異 卽是人字 쌍봉요씨가 말하길, “이는 능히 봉양할 줄 알면 모두 능히 먹여줌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두 개의 能자를 살펴보면, 곧 부모를 봉양하는 사람과 견마를 먹이는 사람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모를 봉양하는 사람이 봉양할 줄만 알고서 공경할 줄 모른다면, 견마를 먹이는 사람과 분별할 곳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지, 부모와 견마를 구별할 것이 없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집주에서 말한 ‘견마를 기르는 자와 무엇이 다른가?’에서 곧 인자다. ○ 『論語注疏』曰: “犬以守禦, 馬以代勞, 皆能有以養人者. 但畜獸無知, 不能生敬於人. 若人唯能供養於父母而不敬, 則何以別於犬馬乎?” 논어주소에 이르길, “개는 집을 지키고 도적을 막으며, 말은 사람 대신 일하니, 모두 사람을 봉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기르는 짐승은 무지하여 사람에 대한 공경심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만약 사람이 오직 부모에게 음식을 드려 봉양할 줄 알고 공경하지 아니한다면, 곧 개나 말과 무엇으로 구별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 『讀論語札記』曰: “如舊說犬馬能養, 則引喩失義, 聖人恐不應作是言. 且能字接犬馬說, 似非謂人能養犬馬也. 蓋言禽獸亦能相養, 但無禮耳, 人養親而不敬, 何以自別于禽獸乎” 속논어찰기에 이르길, “만약 옛 설에 개와 말을 능히 먹여 기를 수 있다고 하였다면, 이것은 비유를 들다가 뜻을 잃은 것이다. 성인께서는 아마도 마땅히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또한 능자를 견마에 이어서 말한 것은 사람이 견마를 능히 먹여 기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금수도 역시 서로 먹여 기를 수 있지만, 다만 예가 없을 뿐이니, 사람이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공경하지 아니하면 무엇으로써 금수와 스스로 구별되겠느냐고 말한 것 같다.”고 하였다.
○ 苞氏曰: “偷懦憚事, 無廉恥而耆飲食, 必曰君子固不用力, 是子游氏之賤儒也” 포씨가 말했다. “남몰래 게으르고 일을 꺼리며 염치가 없이 먹고 마시기를 즐기면서도, 반드시 군자는 본디 힘을 쓰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자유씨 일파의 천박한 유생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