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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홍 야고보 신부
대림 제3주간 화요일
마태오 21,28-32
멈춰 버린 자동차
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하느님께 받은 권한을 올바로 사용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 라고 묻는
수석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을 질책하셨습니다.
오늘은 어제 말씀에 이어서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잘못과 그 결과를 알려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왜,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요한의 말을 듣지 않고 믿지 않았을까?’에 대해
부족한 설명이지만, 어제 저의 체험을 통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제 한적한 숲 속 길에 하얗게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걷고 싶은 마음에
제2횡단도로 어리목을 향했습니다.
유명한 도깨비 도로를 지나자, 눈이 내렸을 때, 차량을 통제하는 임시 검문소에서 경찰관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위에 도로가 얼어버려 올라가지 못합니다.’ 라는 말씀에, 저는 ‘저 위에만 갔다가 금방 올 겁니다.’
라고 말하며 경찰관 아저씨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저 뒤를 따라오다가 경찰관 아저씨의 말을 듣고, 방향을 돌리고 돌아가는 차들을 보며...
그리고 길가 옆에 차를 세워놓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쯔쯔... 겁은 많아가지고..’ 라며 거만한 모습을 비웃었습니다.
검문소를 지나, 일방통행으로 들어서니, 눈발이 거세지고 도로가 많이 얼어 있었습니다.
‘이왕에 온 거, 그래도 천왕사까지는 가야한다.’며 욕심을 냈습니다.
그런데, 일방통행에 접어들어 한 300M쯤 가다보니, 차가 빌빌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심 걱정하는 순간, 차가 멈춰버렸습니다.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헛바퀴만 돌았습니다. 금방이라도 뒷걸음칠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바로 뒤따라오는 차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앞으로는 가지 못하고 뒤로 가야하는 상황이 내심, 걱정도 되고 참 막막했습니다.
차가 오래 되어 힘이 없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평소에 어느 정도 속력을 내어주기에,
별 걱정 없이 빙판길을 올랐는데,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싹 긴장하며 후진으로 왔던 일방통행 길을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보면, 저처럼 경찰 아저씨의 말을 듣지 않고 올라오는 차들이 있어서
옆으로 비켜서야 하기에 이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더 위험한 것은 산을 깎아 만든 도로여서 커브길이 참 많았습니다.
한 두 세 번 차가 빙글빙글 돌며 구덩이에 빠질 것 같은 위험한 상황을 맞게 되었을 때,
머릿속으로 경찰관 아저씨가 떠올랐습니다.
분명, 내 의지대로 이곳에 와서, 이런 위험한 상황을 맞이했습니다만,
‘안 됩니다. 가지 못합니다. 돌아가십시오.’ 라고 강하게 반대하지 않은 그 경찰관 아저씨가
못내 야속하기만 했습니다.
순순히 차를 돌려 되돌아간, 그 힘 좋은 고급 승용차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내려왔습니다만, 다음부터는 경찰관 아저씨의 말을 잘 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생각해 봅니다. 제가 경찰관 아저씨의 말씀을 무시한 것은, 어쩌면, 운전에 대한 자신감 때문입니다.
운전을 좀 잘한다는 교만한 마음과 도로 상태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뭐 이정도 얼어붙은 것, 쯤이야!’ 라는 안일함 때문입니다.
그런, 교만함과 안일함이 어제와 같은 위험한 상황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어제, 제가 얼마나 운전을 못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에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가 요한의 말을 듣지 않고 믿지 않은 이유 역시,
자신들에게 있는 교만함과 안일함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교만함, 적어도 이름모를 촌뜨기 요한보다 더 많이 배운
사제요, 원로라는 교만함이 요한의 말을 듣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런 교만함은 우리 삶에서도 종종 체험됩니다.
성당에 더 오래 다녔다는 교만함... 하느님에 대해 남보다 더 많이 배워 알고 있다는 교만함...
남들보다 더 오래, 더 많은 기도를 드린다는 교만함...
자신에게 좋은 말이나, 필요한 충고를 하는 사람보다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믿었고, 더 많이 생각했고,
더 많은 체험이 있다는 교만함이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버려
예수님에 대해 올바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참되게 예수님을 바라보고, 참되게 예수님을 말씀을 듣기 위해
우리도 귀와 눈을 막고 있는 교만함과 안일함을 조금씩 걷어내는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늘 복음의 큰 아들로 살아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매번 둘째아들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그리고 경찰관 아저씨의 말씀을 잘 들읍시다.
서울대교구 이찬홍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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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대림 제3주간 화요일
마태오 21,28-32
하느님의 나라
우리는 하느님나라를 굉장한 곳으로 상상합니다,
아마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일러주신 하느님 나라는 약간 실망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세리와 창녀가 먼저 차지하는 그곳은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들의 나라라고 밝혀 주시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께 꾸중을 듣고 예수님께 지적을 당했던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느님을 알았고 성경을 공부했던 부류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범주를 벗어난 하느님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하느님의 전부를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다는 자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까닭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공부로 지식을 쌓는 일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합니다.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기만 할까요?
알지도 못하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모르면서 제대로 실천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믿음도 사랑의 실천도 결코 주먹구구로 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알되 제대로 깨닫고 받아들이되 그분을 향한 믿음으로 설 때에 그분의 뜻을 살펴 행하는 지혜를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분의 말씀인 성경에 능통한다면 더 굳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일러주신 지혜는 의로운 길을 배워 생각을 바꾸고 끝까지 믿음으로 일관하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작은 아들은 결코 큰 불의를 저지른 죄인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사기 칠 생각도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어떤 급한 사정이 생겨서 포도밭에 갈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사정을 일절 살펴주지 않으시니 너무합니다.
아무리 하느님나라는 작은 아들처럼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라 생각해도 좀 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보면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가끔 하느님의 뜻에 입을 내밀고 더 가끔 하느님의 뜻에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못 이겨서
할 수 없어서 한 발 옮겨보고 다시 물러서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또 두 발 떼어 하느님께로 향하는 우리를 이해하시고 품으시고
‘실천하는 믿음’이라 평하시는 주님이라 싶기 때문입니다.
큰 아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작은 아들의 허세를 놓치지 않고 헤아리시는
주님의 정의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되 철저히 사랑하라는 분부로 새깁니다.
대림은 그분의 쏟아 붓는 사랑이 스스로를 포기하고 우리를 택하시는 모습에 소스라쳐 놀라는 때입니다.
우리 영혼이 그분의 마음에 고와진다면 그분께서는 더 원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아멘
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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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스테파노 신부
대림 제3주간 화요일
마태오 21,28-32
자신을 알아라
초등학교 시절 줄줄이 외웠던 국민교육헌장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우리의 처지를 안다는 것, 나를 제대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운동선수는 기록을 갱신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 상태를 파악하여 부족한 근력·순발력·정신력·판단력을
과학적으로 개선한다.
수험생은 부족한 과목에 좀 더 시간을 배정해야 성적을 올릴 수 있다.
실력으로 승부하는 사회생활에서도 자신이 모자라는 분야에 대한 충분한 개인적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적절한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매일 신세타령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두 아들의 비유에서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침이 된다.
주일미사 때 듣는 복음과 강론을 통해 과연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복음적 삶이 되는지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서로 사랑하여라. 용서하여라. 온유하여라. 겸손하여라.” 등 좋은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과연 이를 실천하고 있는가? 미사 시간에는 그래야지 하면서 반성하고 다짐하지만
성당 문을 나오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오늘 말씀에 또 다른 아들과 같이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와 같은 일이 반복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 실천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신다.
우리도 성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복음을 그대로 살아가는 용기를 배워 실천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마음속에 의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세상 속에서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세상이 보는 눈이 무서워 망설이기 때문에 의로운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복음 생활이
우리가 구원받는 길임을 다시 한 번 명심해야겠다.
전주교구 김영수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