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사53장1-12)
교부 폴리갑(Polycarp)은 이사야 53장을 가리켜 ‘복음 기자의 황금 같은 장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석가 델리취(Delitzsch)는 이를 가리켜 ‘구약성서 예언의 가장 중심부요, 가장 깊고 가장 높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 유명한 ‘메시야’를 작곡한 헨델(Handel)은 이사야 53장의 ‘수난의 어린양’을 작곡하던 중 펜을 멈추고 울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말하기를 ‘…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고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 53장 6절을 중심으로 하여 생각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Ⅰ.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양같이 다 제 길로 가버린 인생, 곧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양이라고 하는 짐승이 제멋대로 목장(우리)을 떠나고 목자를 떠나서, 마침내 사나운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불행한 처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나타내신 비유 중에서 ‘잃어버린 어린양’이라고 하였습니다(눅 15:1-4). 사도 베드로도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25).
이 말은 바로 인류가 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떠난 비참함을 말하고 있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처음 아담이 에덴에서 하나님의 금하신 선악과를 범한 이후에, 저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하나님을 등지고 도망을 갔습니다(창 3:1-8).
그 이후로 모든 인류는 그 죄의 유전을 받아 한결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출생하였습니다(엡 2:1-2).
그래서 죄악의 본능대로 행동하는 길을 걷고 말았습니다.
모든 인류의 걸음이 양처럼 각기 제 길로 가버리는 그릇 행함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27장 17절 중에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어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열왕기상 22장 17절에는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졌는데」라고 하였습니다(대하 18:16).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인생이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외가 없이 모두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생이 하나님을 떠남이 전체적인 동시에 각 개개인이 개인적으로 떠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생을 개인, 개인창조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는 인생의 타락도 개인, 개인적이라는 말입니다.
시편 14편 1-3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3장 10-12절에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인생이 죄인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정의하신 죄인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셔야 할 그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한 결과 사탄(마귀)을 모시고 온갖 저주와 비참함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롬 1:28-32).
그래서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렘 17:9). 이 죄를 가리켜 ‘불신앙’이라고 주님은 정의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6장 9절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갖고 있는 죄 중에 큰 죄, 본질적인 죄, 진노받을 죄는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다 양처럼 각기 제 길로 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는 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죄,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 하나님 대신에 그 자리에 다른 신을 하나님으로 대치해버리는 죄, 그것은 실로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를 버리는 죄요,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기는 죄요, 멀리하고 물러가 버리는 패역한 죄라고 하였습니다(사 1:2-5).
이러한 인간의 타락과 배신과 배역과 반역과 불신앙을 가리는것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사 53:6).
그러므로 인생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은 바로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Ⅱ. 하나님은 우리 죄를 예수께 담당시켰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우리 본문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 편에서 인생이 범한 죄 문제 해결을 시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 「여호와께서는」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는 원인동사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떠나 각기 제 길로 가버렸을 때 하나님께서 인간을 먼저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구원종교로서의 기독교의 특색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자랑이 있는 것입니다.
원래 양이라고 하는 동물은 한번 길을 잃으면 자기 힘으로 되돌아오지 못하는 연약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목자 편에서 각기 제 길로 가버린 길 잃은 양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9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시며 아담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이후 전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 편에서 길 잃고 방황하는 인생을 찾아오신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을, 모세를, 사무엘을, 이사야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구원문제는 하나님 자신 편에서 주권적으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고 하였습니다(요나 2:9). 전적으로 자율주의가 아닌 타율주의 계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2. 마침내 그 아들 예수를 통하여 인생을 찾아오셨습니다.
히브리서 1장 1-2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족장시대 이전에는 주로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찾아오셨습니다. 창세기4족장에게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 그 이후 시대에는 주로 이적이나 꿈이나 우림이나 둠밈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왕정시대로 접어들면서 선지자의 마음과 입에 말씀을 담아주어 예언으로 인생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다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 아들을 사람으로 나게 하시어 세상에 직접 보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요, 예수님 자신이 이적이요, 예수님 자신이 예언자였습니다. 그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인생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려면 인생이 하나님을 떠난 죄 문제와 그 죄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곧 죽음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였습니다.
바로 그 방법이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기 ‘우리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는 말은,
①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한곳으로 모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인류의 죄악을 한곳으로 집중시켰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 이방인의 죄, 본방인의 죄, 남자의 죄, 여자의 죄, 늙은이의 죄, 아이들의 죄, 원죄, 자범죄 등 인생이 하나님을 떠나서 각기 제 길로 가버려 그릇 행한 모든 죄를 예수에게로 모으셨다, 집중시켜 버렸다는 뜻입니다. 예수에게로 인류의 모든 죄를 묶어버렸다는 뜻입니다.
② 그 죄와 죄 값인 사망의 형벌에 대하여 책임을 물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 아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시대는 백성들이 지은 죄를 속죄받기 위해서는 잡혀 끌려온 양이 죽임(희생)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제사장은 그 양의 머리에 손을 얹고 모든 백성이 지은 죄를 그 양에게 전가시키는 기도를 올리고, 그를 잡아 붙태우고, 그 피를 성소에 뿌렸습니다. 이것이 속죄양이고, 속죄제사였습니다.
실로 그 양은 죄라고 하는 말도, 뜻도, 내용도 모릅니다. 물론 사람이 범한 죄를 짓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양이 된 것뿐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속죄 제사는 바로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예수에게 담당시키는 신약의 영원한 속죄제사를 보여주는 예언적인 모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29).
모든 인류의 죄가 예수의 머리와 몸으로 모아지고, 그 죄값이 그에게 적용되어 사망의 값을 지불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인이 받는 멸시를 받았습니다. 간고와 질고를 겪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는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았습니다.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괴로워하면서,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사 53:6, 10). 그래서 그는 십자가 위에서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사 53:12).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눅 23:34). 「다 이루었다」라고 속죄성취의 개가를 선언하였습니다(요 19:30).
3. 하나님이 왜 그렇게 예수에게 책임을 물었습니까? 어찌하여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까?
①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의 계획이었습니다.
필연적 계획이었습니다.
그 아들 예수에게 인류의 죄를 담당시킴으로 자기의 의로우심(공의)을 나타내고, 또 예수 믿는 우리도 의롭다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롬 3:21-26). 그리고 이것을 죄인 사랑의 확증물로 삼았습니다(롬 4:8-9). 창세 전에 예정하신 영원하신 계획이었습니다(엡 1:3-14).
② 성자 예수님의 자원적인 희생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8절에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③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마 1:21). 예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 13:1). 그는 하나님의 택자를 위하여 저들의 기업을 무르러 오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를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 예수에게로 올 것이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리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요 6:38-40).
④ 그는 둘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사망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마지막 아담) 예수의 속죄 희생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롬 5:16-19). 그래서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된 것입니다(막 10:4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조 이래 지상 최대의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일입니다. 그리고 죄없이 33년을 이 지상(팔레스타인 땅)에서 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신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알려주신 일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대속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건입니다. 실로 역사의 구심력이 되고 중심내용이 된 사건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킨 일입니다.
인류의 소망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멸망받을 죄인들에게 나타났다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함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심에 있습니다(요일 4:9-10). 예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이 인류의 산 소망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양같이 길을 잃었으나, 이제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로 돌아온 행복입니다(벧전 2:25).
여호와께서 인생(나)이 죄인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가버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예수)에게 담당시켰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한평생 살 동안 우리는 그 분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를 믿는 믿음 외에는 구원의 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보다 천 배나 더하는 인생의 행복은 십자가만이 그 원천이라고 고백합니다.- 아 멘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죄/사53:6-
세상에서 아름답고 가장 감탄하는 행위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부인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신 고통을 당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져야하는 짐을 대신 지고 다른 사람이 당해야 하는 고통을 대신 당하며 그 고통을 아예 없애버리는 사랑의 행위일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종에 관한 말씀"입니다. 종에 관한 이 말씀은 이사야서의 후반 전체에 흩어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모든 민족 가운데서 하게 될 역할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당하시게 될 고난의 의미를 미리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에 입각하여 자신의 사명을 알고 계 셨습니다 (마 3 : 17,사 42 : 1). 본문 6절은 인생의 잘못과 해결책 을 말해 줍니다.
1.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그릇 행하여."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는 양들이 어떻게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1) 양들이 유혹을 받듯이 우리도 유혹을 받습니다.
먹을 것을 배불리 먹은 양들은 제한된 구역을 넘어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서 먹어서는 안 되는 곳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곳의 풀 그 자체는 나쁘지 않겠지만 그 지역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금지되어 있는 구역의 풀은 허락되고 있는 지역의 풀과 꼭 같이 보입니다. 그리하여 양들은 그곳으로 나가서 쉬이 길을 잃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본능적인 욕망과 의욕을 주셨습니다. 그러한 욕망과 의욕은 죄가 아닙니다. 욕망을 느끼고 의욕을 달성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욕망과 의욕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명과 사회의 규범을 지나쳐 유혹을 받아 다른 길로 나가기가 쉽습니다.
(2) 우리는 양이 길을 잃듯이 죄를 짓습니다.
때로 양은 개별적으로 길을 잃습니다. 예수님도 양떼로부터 길을 잃어 나간 한 마리의 양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양은 떼지어 곁길로 나갈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 또한 함께 잘못할 때가 많습니다. 의복, 머리 모양, 자동차, 집, 오락 등에 있어서 우리는 유행을 따라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를 교묘하게 유혹하여 악으로 끌고 가는, 어떤 믿을 만한 것처럼 들려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조금이 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양은 왜 길을 잃게 됩니까? 목자에게 환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직접 적인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양이 길을 잃게 되는 이유는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는 말에 우리는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자들에게 유혹을 받아 길을 잘못 들게 됩니다.(3)양이 길을 잃고 고통을 당하듯이 우리도 불순종하면 고난을 당합니다.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우리의 원수들에 아무런 방비 없이 자신들을 드러내어 놓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영적 재난의 위험에 서 있읍니 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겠다던 사탄의 그 처음 유혹은 한낱 헛소리였던 것입니다. (잠 16 : 25).
2.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 게 담당시키셨도다. "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행동으로 보여 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행동하신 것이었습니다(요10:18).이는 죄 악이 불러 올 수 있는 가장 심한 형벌에 자신을 내어 맡긴 사랑이었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죄인이 되셨던 것입니다 (고후 5 : 21). 칼빈은 "예수님이 정죄받고 잃어버린바된 사람의 두려운 고통을 자신
의 영혼 속에서 참아내셨다" 말했습니다. 이 예수님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2)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한 그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롬 3 : 25) . 십자가를 볼 때 우리는 유혹의 위험, 죄악의 가증함, 그리고 길 잃은 재난이 어떠함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랑에 대하여 우리가 할 말은 “참으로 놀랍고, 참으로 신성한 그 사랑은 나의 영혼, 나의 생명, 나의 전부를 원하네 "입니다
번성의 상징 종려나무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시 92:12-15)
종려나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과실나무로서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식물 중 하나이다. 성경에 나오는 종려나무는 히브리어로 '타마르'(tamar)인데, 이 나무에는 우리나라 대추와 비슷한 열매가 달리기 때문에 대추야자나무라고도 불린다. 그래서 종려나무의 공식적인 학명은 'Phoenix dactylifera'이다. 성경 역사와 관련된 내용으로는,
여사사였던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 거하며 이스라엘 자손들을 재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삿 4:5)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종려나무 아래에 있다는 표현은 정직과 정의, 그리고 공정한 삶을 시적인 상징으로 나타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종려나무 가지는 초막절을 위한 '네 종류의 나뭇가지' 중의 하나였다(느 8:15). 신명기 8:8에 언급된 '일곱 가지 소산물' 중 분명하게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꿀'이 대추야자 열매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직 덜 익었을 때의 대추야자 열매는 녹색을 띄고 단단하지만, 늦여름이 되면 잘 익게 되고 색깔도 황갈색 혹은 적색으로 변한다. 열매의 살은 달고 연하며 그 맛이 마치 꿀과 같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꿀은 때때로 종려나무 열매로 표현되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2-13)
세계에서 가장 오랜 도시인 여리고는 종려나무 숲으로 유명하였기 때문에 성경에서 '종려나무 성읍'이라고 지칭되었다.(신명기 34:3) 오늘날에도 여리고는 울창한 종려나무 숲과 여기에서 생산되는 맛좋은 열매로 잘 알려져 있다.
종려나무와 그 가지는 솔로몬 왕 때에 건축한 성전의 벽화와 장식품에도 나타난다. 그리고 기원 후 3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가버나움 회당 건물에서도 종려나무가 장식으로 조각된 것이 발견되었다. 주전 2세기 마카비 왕조는 승리의 상징으로 자신들이 주조한 동전에 종려나무를 새겨 넣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기원 후 1세기 이스라엘을 점령한 로마는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의 상징으로 종려나무 아래 앉아 있는 여인을 동전에 새겼다.
종려나무는 성경에서 영적인 의미와 상징을 보여줄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열매는 귀중한 식량이 되었으며 나무의 즙은 원기를 돋우고 음료가 되었다. 줄기의 위쪽을 자르면 시럽 같은 즙이 나온다. 나무줄기는 목재로도 쓰였고,
나뭇잎은 지붕을 만들거나 울타리를 만드는 재료로 활용되었으며, 깔개, 바구니,그릇 등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그물망과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는 나뭇가지의 외피는 줄을 만드는 데에 사용되었다.
..Waiting for Jsus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아가서 7장 7절) 주님을 기다리는신부는 키가 종려나무같으며 가슴은 종려나무 열매송이와 같다
대추야자는 원래 사막 오아시스 주변에서 자라는 나무이었다.
대추야자가 재배된 가장 오래된 흔적이 근동지방의 열대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주전 4000년경의 청동기 지층이라고 한다.
야생 대추야자는 소금기 있는 강이나 샘 주변에 넓게 퍼져 있으며 대서양 연안에서 페르시아만에 걸쳐 형성된 사하라 사막을 따라 식염성 식물군으로 오아시스 주변에 서식하였다. 이스라엘에서는 계곡과 평지에서 서식하는 나무로 요르단, 아라바 계곡, 사해 근방, 해안평지 그리고 엘 아리쉬와 가자지구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재배되고 있다. 대추야자는 현재 이스라엘에서 대추야자는 열대성와 온대성 지역에 걸쳐 두루 재배되는 중요 농업 생산품으로서 각 지역의 기후특색에 맞게 개량되어 다양한 종류로 재배되고 있다.
특징
종려나무는 곧고 높게 자라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이사야 9:14에서는 이스라엘의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종려나무에 비유하면서 낮은 신분의 갈대와 대조시키고 있다. 그리고 나무줄기의 꼭대기 부근에는 2-3m의 깃털모양의 나뭇잎들이 퍼져 자라게 되는데, 줄기와 나뭇잎이 갈라지는 지점에 열매가 맺힌다.
종려나무는 매년마다 새로운 줄기가 나오는데, 새로 나온 어린 가지들은 접혀져서 마치 막대기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나무는 5년 정도 자라면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데 봄에 나무에 꽃이 피고 여름 하반기에 열매가 익기 시작한다. 열매의 길이는 2-4cm 정도이며, 달고 육질의 과실 살을 가지고 있으며 씨가 큰 것이 특징이다 .
호 산 나
찬송하리로다
●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2-13).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마 21: 7- 21)
종려나무는 번영과 아름다움과 승리의 표징입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나그네에게...
종려나무는 한 줄기가 곧게 약 30M까지 자라며 그 꼭 대기에는 늘 푸른 잎이 큰 다발을 이루고 있는 것이 장관입니다.
잎새가 크고 굵기 때문에 잎이라고 부르지 않고 종려나무 가지라고 불렀습니다(요12:13;느8:5,;아7:8절). 또 종려과에 속해 있는 야자수는 사막의 오아시스에 있기 마련인데, 그 뿌리는 물 근원에 닿아있고 줄기 꼭대기에 피는 잎과 꽃은 다발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뜨겁고 끝없는 사막을 여행하는 나그네들에게는 종려나무나 야자수가 있는 오아시스는 생명의 샘이요, 고달픈 나그네들의 휴식이요, 구원의 표상이 되는 것입니다.
종려나무의 수명은 약 200년이며 높은 키와 그 꼭대기에 다발을 이루고 있는 장관스런 운치와 풍성한 열매는 아름다움과 번영의 상징이었습니다.●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며 "네 키는 종려나무 같다"고 하였으며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아7:7-8)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시 내외소 사면 벽과 문짝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 형상을 아로새겼습니다(왕상 6장29,32절).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을 지킬때에도 종려나무 가지와 감람나무, 화석류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를 취하여 초막을 짓고 즐거워 하기도 하였다(레23:40; 느8:15절).이와 같이 종려나무는 아름다움과 즐거움의 상징이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종려나무는 승리의 징표입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의인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의인)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며"(약5:16),"의인의 집에 복을 주신다"(잠3:33절).
그리고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한다"(시92:12). 특히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 마지막 유월절에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는 만왕의 왕으로서의 대관식이었습니다.
"무리의 대부분은 그 옷을 길에 펴며"(마21:8)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12:13절)하고 외쳤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절에는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이 말은 예수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과 능력이며 세세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며. 사탄을 옥에 가두고 승리의 영광이 어린양 예수에게 있다고 고백입니다.. 그리하여 종려나무는 승리의 표징입니다.
첫댓글 1부...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