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 그대는 물 위를 걸을 수 없는가?
1). 물 위를 걷는 믿음
그대는 물 위를 걸을 수 없는가? 물론 그대는 걸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 스스로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믿는 그 믿음이 그대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그대는 예수께서 그대에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실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새벽 미명의 갈릴리 바다를 살펴보자. 희뿌연 회색 빛을 뚫고 다가오는 희미한 존재가 있다. 배 위에는 무서워 떨고 있는 열두 명의 남자들이 있다. 그때, 파도를 가르며 상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니 두려워 말라! 갑자기 생기를 얻은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만일 당신이시거든 나로 물 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하소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라. 베드로는 차갑고 시퍼런 파도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과 예수님과의 거리를 측정해 보았다. 그는 생각하기를,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어떻게 물 위를 걸어. 그는 망설였다. 순간적으로 의심이 그를 삼키어 버렸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도 물 위를 걸었던 적이 없었어.
이 장면은 베드로에게 일어난 사건이었다. 만일 베드로가 파도 위로 그의 발걸음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가 물 위를 걷는 장면을 통해서 믿음에 관한 놀라운 교훈을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2). 길들여진 가짜 믿음
서커스단에서 길들여진 코끼리는 어릴 때부터 쇠사슬에 묶어 놓는다고 한다. 한쪽 다리를 얇은 쇠사슬에 묶여 자유스럽게 다니지 못하며 자란 코끼리는 커서 거대한 코끼리가 되어도 한쪽 다리에 얇은 쇠사슬만 묶어 놓으면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그 한 곳에만 매여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코끼리는 모든 구속력, 즉 울타리와 쇠사슬을 극복하고 도망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소유하고 있지만, 자신이 그런 일을 결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어릴 때부터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커서도 쇠사슬과 말뚝을 힘없이 뽑아버리고 달려나갈 수 있지만, 그렇게 하기엔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힘이 너무나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에 있어서 코끼리는 쇠사슬과 말뚝에 의해서 구속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에 의해서 구속 당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작고 연약한 쇠사슬과 말뚝이 코끼리의 자유를 빼앗은 것처럼, 그들의 삶에 있어서 반신반의 하는 믿음으로 인해서 죄에 대한 승리를 빼앗기고 있다. 다음에 서술하는 한 사람의 경험은 자유를 빼앗긴 코끼리의 모습을 우리에게 연상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는 20살이 채 되기 전인 소년기에 침례를 받았는데, 그 당시 나는 매우 신실하여서 100%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원했었다. 나는 다니엘서까지 연구를 했으며, 그 공부는 예수님에 관한 믿음과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나의 이름은 교회의 녹명책에 기록되었으며, 자아와 죄에 대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사단의 강력한 동맹자인 자아와 죄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나의 결심을 쉽게 허물어뜨렸다.
환멸과 실망이 그 뒤를 이어서 찾아왔다. 나의 젊은 시절 동안, 나는 계속 교회 안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동안 나의 실망과 좌절의 곡선은 위 아래로 오르내렸다. 어떤 때는 심하였고, 어떤 때는 약하게.... 그러나 여전히 나는 신실하였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나의 소원은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신학교의 학생이 되었고, 후에 목회자가 되었다. 내가 성경을 연구할 때에 때때로 나는 모든 죄를 정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지만, 유혹에 대한 만성적인 패배감으로 인한 고통과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의 신앙 상담에서 들은 말 - 죄, 즉 이기심, 질투, 불인내 등등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우리 생애에서 계속될 것이라는 위로의 말 - 은 죄를 승리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하도록 확신시켰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투쟁하겠다고 결심했지만, 실제적인 생애에 있어서 죄에 대한 충실한 승리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쇠사슬은 만들어졌으며, 말뚝은 땅에 꽂혀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죄에 대한 승리를 약속하는 성경절들을 읽었지만, 그 약속의 글은 오히려 나를 혼돈케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그 글이 말하고 있는 바는 다른 의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승리의 가능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성경의 글들은 자유를 약속하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는 믿음일지라도 죄를 승리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나의 신조에 의해서 나는 묶여지고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3). 지식보다 먼저 가는 믿음
다시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물 위로는 걸을 수 없다고 단정지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나도 걸을 수 있다는 충분한 증거를 보았을지라도, 나는 그것들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약속과 증거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과거의 나의 육적인 경험을 통하여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나는 성경의 약속과 증거보다는 내 자신의 경험과 신조를 더욱 신뢰하였다. 오랜 후에 많은 연구와 갈등을 거쳐 진리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을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믿음이 지식을 앞서간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행함으로써 믿음을 활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지식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지식을 얻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이와는 다른 길을 요구한다. 인간은 항상 먼저 나에게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증거를 주겠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성경을 통해서 되풀이되고 있는 장면이다.
성경을 보면, 두 명의 눈먼 자들이 예수님을 소리질러 부르며 따라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태복음 9:27). 예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그들에게 치유를 베풀기 전에 그분께서는 그들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이끌어 내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상동 28절).
한번은 귀신들린 소년의 아버지가 예수께 나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마가복음 9:22) 라고 말하는 가운데 자신의 가진 의심을 드러내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이 부족함을 보여주시면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상동 23절) 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의심이 자기 아들을 치유 받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깨달은 소년의 아버지는 열정적인 갈망으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상동 24절) 라고 예수께 외쳤다. 그 장면에서 믿음이 포기되거나 취소되었다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행사하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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