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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19강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바울
말씀 / 사도행전 20:1-38
요절 / 사도행전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오늘 말씀은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에서 돌아가는 길에 일어난 사건과 그의 고별설교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지 20년이 지났고 전도 여행을 시작한 것은 10년이 넘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에서 바울이 겪은 일들은 참으로 파란만장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어떤 심정으로 사역을 섬겼는지 이야기함으로 바울을 계승해 지도자로 섬길 교회 장로들을 돕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바울의 고별설교의 핵심을 살펴볼 뿐만 아니라 바울을 귀하게 쓰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자 합니다.
에베소의 소란이 잠잠해진 후, 바울은 마게도냐로 건너갔습니다. 2차 전도 여행 때 개척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를 다시 방문한 것입니다.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바울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는 아시아와 유럽 교회를 대표하는 일곱 명의 리더들의 손에 구제헌금을 들게 하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고자 했습니다. 이방인 선교의 문을 열어준 예루살렘 교회, 흉년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그들과 하나 되고 연합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자신을 살해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다시 빌립보로 올라가 배를 타고 드로아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드로아에도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을 지나칠 수는 없었습니다. 바울은 일주일 동안 거기 머물며 떠나는 전날 밤까지 성경을 강론했습니다. 그때 유두고라는 한 청년이 삼층 창턱에 걸터앉아 말씀을 졸면서 듣다가 그만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바울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자 왔지만 저녁 늦게까지 일하느라 많이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만일 이런 변고를 지나친 채 다음 여행을 했다면 바울의 마음은 심히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드로아에 남은 제자들도 힘 있게 신앙 생활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유두고를 살리셨습니다. 바울의 눈앞에서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도록 하셨습니다. 우연히 발생한 불행해 보이는 사건도 하나님 안에선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에겐 앞으로 어떤 불행해 보이는 일이 갑자기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려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유두고가 떨어져 죽은 것과 같은 고통과 슬픔의 자리도 기쁨과 위로의 자리로 바뀔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 일행의 발걸음은 가볍고 당당했을 것입니다. 남아 있는 드로아의 성도들도 이 사건을 통해 큰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먼저 갔고 바울은 앗소에서 일행을 만나 미둘레네, 기오, 사모라는 곳을 거쳐 밀레도에 이릅니다. 밀레도는 에베소에서 40Km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초청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하루라도 빨리 예루살렘에 도착해 극심한 기근에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구제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또 오순절을 맞아 각처에서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이 에베소에 있었을 때 큰 소요가 있었으므로 자신이 에베소로 가는 것은 위험하고 며칠이 더 소요되는 여행이었기에 에베소 장도들을 밀레도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어떤 자세와 심정으로 사역을 섬겼는지 말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바울의 삶과 철학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마치 좋은 재료들을 모아 달이고 우려낸 보약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소화한다면 우리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도록 보약 한 첩을 먹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19-21절을 보십시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헬라어 원문을 보면 ‘주를 섬긴 것’이란 구절이 맨 먼저 나옵니다. 주를 섬겼는데 모든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참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겼다는 것은 주님을 의식하고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상을 바라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섬긴다’는 말의 원뜻은 ‘종이 되다’라는 의미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종이 주인을 성실하게 섬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또 주님을 섬기는 것은 사람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자녀와 아내, 남편, 부모를 섬기는 것도 주를 섬기는 것이고, 직장 동료, 상사를 섬기는 것도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동역자들과 양들을 섬기는 것도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허드렛일을 해도 주를 섬기는 것을 지향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너희 중에 있는 작은 소자를 섬기고,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섬기다보면 금방 지칩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한 영혼을 섬길 때 그 한 영혼을 주님으로 생각하고 섬기면 우리의 소망은 주님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 주시는 힘으로 늘 채울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양들을 섬겼지만 바울의 마음은 늘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변화에 기뻐하고 감사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기쁨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고 주님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때 바울은 사람들의 요구나 눈에 보이는 열매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태도나 반응에 상처받거나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감당하고 섬길 수 있었습니다.
19절을 다시 보십시오. 무엇으로 주님을 섬겼는지 매우 인상적인 말을 합니다. 내가 가진 은사와 능력으로 섬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겸손과 눈물과 시험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첫째, 겸손입니다. 종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겸손입니다. ‘겸손’의 원래 의미는 ‘겸비한 생각’입니다. 높은데 생각을 두지 않고 낮은데 두며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참다운 겸손은 하나님과 동등하지만 자신을 비어 종의 모양으로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한 예수님에게서 나타났습니다(빌2:5-8).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 밑에서 공부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을 비우고 낮아져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포기합니다. 동족으로부터, 또 초기 때 사도들과 예루살렘 장로들로부터 잘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목자요, 선교사로 살기 어려웠습니다. 고린도 선교할 땐 동족으로부터 인격이 모독당하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에베소에선 그가 전하는 복음이 전체적으로 부정당하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런 비방은 그의 삶이 부정당하는 것이고 그의 존재가치가 말살당하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내 존재가 깡그리 부정당하고 무시당할 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니 그의 눈에선 자연스럽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겸손과 눈물’이라고 말할 때 이 ‘눈물’은 감사나 기쁨의 눈물이 아닙니다. 서러움의 눈물이고 절망과 고뇌의 눈물입니다.
또 31절과 연관지어 볼 때 이 눈물은 또한 영혼들을 향한 목자의 눈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눈물이었습니다. 연약한 자들, 무지한 자들, 잘 변화되지 않는 자들, 기분과 감정대로 자행자지하며 사는 사람들을 향한 눈물이었습니다. 답답하고 아쉽고 속상하여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이런 감정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눈물을 흘리게 마련입니다. 엄마는 아이를 키우면서 남모르게 눈물을 많이 흘립니다. 아이가 큰 병을 앓으면 슬퍼서 눈물이 나고 아이가 너무 활력이 넘치면 힘들어서 눈물이 납니다. 사춘기에 방황하는 자녀를 보면 마음이 아파 웁니다. 바울이 눈물로 양들을 섬겼다는 것을 볼 때 그는 양들을 만날 때 학생과 스승으로 만나 성경 지식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영적 아버지가 되어 마치 자기 자녀를 양육하듯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권면하고 도왔습니다. 에베소 교회 제자들은 바울의 눈물을 먹고 영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많은 눈물이 있어야 교회가 바로 서게 되고 양들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였던 모니카는 방황하는 아들에 대한 아픔을 안고 오랫동안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너무나 괴로워서 교회에 와서 눈물로 기도하면서 당시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스에게 “아무리 기도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 이제는 포기해야 할까요?”라고 했습니다. 암브로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물의 기도로 기른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암브로스의 말대로 그녀의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자식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방황하던 어거스틴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켰고 위대한 사상가요 기독교 변증가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시험당함이 주님을 섬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글 성경엔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좀더 원어적 의미를 풀이하면 시험을 감내하는 것이 주님을 섬긴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시험은 시련입니다.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유대인들의 음모 때문에 겪은 시련이 한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이 앞에서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은 것 자체가 주를 섬긴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여러분들이 믿음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가는 것이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때로는 굴욕감도 느끼고 눈물도 나고 닥치는 시련으로 속도 많이 상하고 힘들어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믿음의 길로 올라선 것이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힘들었지만 영적으로 유익하다면 그들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면 무엇이든 다 가르쳤고 주었고 베풀었습니다.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효과와 성과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아버지나 어머니, 곧 부모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승이나 선생이 되어 섬기는 것도 훌륭하지만 부모보다는 못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부모님이 여럿 계십니다. 아마 자녀를 위해 못할 일이 없으실 것입니다. 자녀를 위하는 길이라면 영혼까지 갈아 넣을 준비가 되어 있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양들을 섬겼고 어머니가 되어 그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면 그가 부모가 되어 가장 공들여 가르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21절을 다시 보면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고 수레의 양쪽 바퀴에 해당합니다. 두 개가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돌아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바울은 줄기차게 가르쳤습니다. 이 세상에 회개가 필요치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성인군자라 할지라도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살다보면 하나님에게서 조금씩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직선 도로에서 운전대를 정중앙에 맞춰놓는다고 해서 차가 일직선으로만 가지 않습니다. 아주 미세하게 한 방향으로 휘어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핸들을 중앙으로 이동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거 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곧 회개는 하나님을 향해 계속 궤도 수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살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방향을 수정하는 삶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 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열심을 다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시련을 겪어도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고자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그곳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마치 십자가 고난이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기다린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이 피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처럼 바울도 가겠다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려움이 없거나 적어도 어려움이 적은 쪽으로 삶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려움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선택하지 않고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사명을 이루는 길이냐 아니냐로 선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자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24절을 보면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고자 할 때 자기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생명이 귀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온 천하보다 한 생명이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이기에 그 생명은 가장 가치 있는 일에 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명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지금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바울이 받은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곧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도저히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값진 선물입니다.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주어진 ‘생명’이며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전해진 ‘사면장’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몸소 보여 주셨고 이것을 바울로 하여금 온 세상에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바울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모두 다 바울이 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사람을 살리고 키우는 목자라는 직분과 사명을 주신 것이, 또 이런 사명을 가진 교회에 몸 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록 사명인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우리의 전 인생을 드려 헌신해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그 후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바울 목자님이 없으면 장로인 그들이 에베소 목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고 한경직 목사님은 신앙과 인격으로 많은 목회자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분을 찾아가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훌륭한 목회자가 되는 비결이 있을까요? 한 말씀 해주십시오.” 그때마다 한경직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를 잘 믿는 좋은 신자가 되십시오.” 우리는 자신이 먼저 예수님의 좋은 양으로 살고 있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양떼들을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바울은 성령이 그들을 교회의 지도자요, 목자로 삼으셔서 교회를 돌보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때 그들이 직면해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 사나운 이리가 들어와 교회 양 떼를 무자비하게 공격할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당파를 만들어 그릇된 신앙의 길로 인도하며 자기를 따르도록 선동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외부의 공격보다 이것은 더 마음 아픈 일입니다. 마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배반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더 큰 상처가 될 것이 분명하지만, 그런 일이 안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역사요 또 세상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을 당할 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일수록 바울이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며 나 한 사람이 먼저 복음 안에 굳게 서고자 해야 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교회 지도자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점에서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삼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습니다. 바울은 양떼들이 진리에서 어긋난 길을 갈 때마다 그들을 바로잡아주기 위해 헌신적인 수고를 했습니다. 죄에 빠진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눈물의 호소를 하곤 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켜라!” 이제 바울이 떠난 후 에베소 교회의 목자들은 바울 목자님이 가르친 말씀을 굳게 붙들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문제는 발생할 것이고 시련은 계속될 것입니다. 바울이 아무리 당부하고 권면해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것이고 그들 기억 속에서 바울조차도 희미해질 것입니다. 이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주와 주의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들 곁을 떠나지만 주님과 주의 말씀은 영원히 그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그들을 키우실 것입니다. 그들 안에 떨어진 말씀의 씨가 자라 큰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것입니다. 주님과 주의 말씀을 향한 믿음이 있을 때 내게 주어진 역할과 사명으로 만족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에 물질적인 부담을 주지 않고자 했습니다. 오히려 자기 손으로 동역자들의 비용까지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살고자 이날까지 노력했습니다. 이 말까지 한 후 부둣가에서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다 크게 울었습니다. 바울의 삶을 알기에 울었습니다. 그를 붙잡을 수 없어 울었습니다. 울면서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다시 보지 못할 것이란 말에 더욱 근심하여 더 울었고 놓아주기 힘들어하며 배에까지 올라와 그를 전송했습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는 그의 마지막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헤어지기 아쉬워 무수히 흘리는 양들의 눈물은 바울의 삶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줍니다.
바울의 고별메시지는 참으로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감동이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껏 주님을 섬겼습니다. 많은 시련을 감내하며 겸손과 눈물로 섬겼습니다. 아버지가 되어 양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특히 회개와 믿음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자신이 가야 할 사명의 길이기에 아낌없이 자기 생명을 갈아 넣었습니다. 우리가 바울과 똑같이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리더, 또 목자라면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삶이 채워짐을 배우게 됩니다.
이 시대는 선생보다 아버지, 어머니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바른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있어도, 순수한 마음으로 베풀고 자기가 가르치는 대로 살아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영혼들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바울도 아버지가 되어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자신을 갈아 넣어 그 시대 아시아와 유럽 영혼들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 양들은 그 목자와의 이별이 매우 슬퍼 울고 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바울처럼 고별메시지를 전해야 할 때가 옵니다. 그때 바울처럼은 아닐지라도 자녀들에게, 양들에게 신앙의 감동과 본을 남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