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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감정 조장의 원흉들
조선시대 최악의 약탈자는 조선왕과 양반
여러 연구들에 의하면 일본에 병합되기 이전까지 조선에서 성을 가진 인구는 전체 인구의 10%, 90%가 성이 없는 노예였다. 세종대왕은 ‘노예종모법’을 제정해 태어난 아이들을 모두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노예로 만들었다. 양반은 여러 여성들을 취했고, 수많은 노예 여성이 출산한 아이들 모두가 노예가 된 것이다. 노예는 노동력을 가진 동물에 불과했고, 당나귀 값의 30~50%에 거래됐다.
궁전에서는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들이 없고 당파 싸움만 계속했다. 양반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서로를 모함했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져 파 싸움을 벌였다. 조선왕조 518년 동안 1,000건 이상의 역모 사건이 발생했다. 1년에 평균 2회의 역모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역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수많은 양반집 식솔들이 사돈의 팔촌까지 피를 흘렸고, 그들이 거느리던 수십 수백의 식솔들이 모두 관노비와 사노비로 전락했으니 노비의 수가 줄어들 수가 없었고, 사회는 그야말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 거짓말, 모략, 음모들이 뒤엉켜 굴러가는 원시사회요, 혼돈의 사회였다.
‘수탈’은 양반들의 생리였고 양반의 대명사였다. 왕과 양반은 수탈을 일삼는 일종의 산적이요 해적과 같은 존재였다. 먹거리 산업이 없던 시대의 노예들 입장에서는 양반이 약탈하든, 일본이 약탈하든, 청나라가 약탈하든 무슨 차이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조선의 노비들이 어떻게 일본에 직접 약탈당했다고 수선을 떠는가? 조선 양반은 100원을 약탈해도 괜찮고, 일본 경찰이 1원을 약탈하면 그것만 약탈이라는 말인가?
조선 노예들이 당한 고통은 약탈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수백 수만 배 고통스러웠던 것이 고문이었다. 검사도 없고, 판사도 변호사도 없이, 아무런 죄도 없는 노예를 끌어다 곤장 때리고, 불타는 인두로 지지고, 감옥에 가두고, 동물 이하의 취급을 당한 것이다.
조선의 왕들은 백성을 부려 먹기 위해 우민화 독재를 했다. 1504년 연산군은 언문(조선글)을 배우거나 가르치거나 사용하는 사람은 엄벌에 처할 것이며 이를 눈감아주는 이웃까지도 벌을 주라는 엄명을 내렸고, 이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됐다. 언문을 쉽게 배워 상소를 많이 올리는 것이 귀찮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개화 정책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어떻게 해주었는가? 1912년 ‘조선인사령’을 내려 조선인의 사유재산을 보호해줌으로써 양반들의 착취를 금지시켰다. 1921년 3월 12일자 동아일보에는 총독부가 조선어를 장려하기 위해 조선어 시험을 치르게 하고, 합격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선어 수당을 지급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1922년에는 ‘조선호적법’을 공표하여 성도 이름도 없는 노예들에게 독립적 호적을 만들어주었다.
1925년에는 매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지정해 어린이를 중시하는 문화를 만들어주었고, 1928년에는 매년 10월 3일을 ‘한글날’로 지정해서 한글을 장려했다. 조선왕과 일본 총독 중 어느 쪽이 조선 백성과 조선의 앞날을 유익하게 만들어주었는가?
조선의 개화에 빼놓을 수 없는 기여자는 1835년에 일본에서 태어난 후쿠자와 유키치다. 그는 일본 개화의 선구자다. 그래서 그의 초상이 일본 은행권 최고액인 1만엔 권에 1984년부터 2023년까지 40년 동안 올라 있었다. 그는 수많은 유학파들을 TF(Task Force) 팀으로 꾸려 옥스포드 영영사전을 영-한문 사전으로 전환하는 대업을 이룩했다. 그리고 일본에 유학한 유길준 등 조선 개화파 청년들에게 영한문사전을 영한사전으로 전환하여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 아파트, 빌딩, 커피, 티, 넥타이 등은 외래어다. 經濟, 社會, 民主主義, 自由, 家族, 個人, 自然, 學校 등 이와 똑같이 당시에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창조한 외래어였다. Democracy를 어떻게 한문으로 번역할 것인가? 후쿠자와 팀은 고민을 했다. Democracy는 1215년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에서 유래했고, 마그나 카르타는 하극상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下極上으로 번역을 했다가 民主主義로 낙착이 되었다. 이처럼 한자를 조합하여 어휘와 단어를 조립한 사람이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한문을 사용하는 동양권 국가들인 한국, 대만, 싱가포르 중국 같은 나라들은 모두 후쿠자와 유키치의 혜택을 철저히 입고 있는 것이다. 이 영-한문 사전으로 인해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렇다면 그는 한국-대만-중국-싱가포르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돼야 할 인물이 아니겠는가?
식민지론
조선이 2,000여 년 동안 중국의 속령으로 살아온 것도 사실이고, 일본의 식민지로 36년 동안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중국으로부터도 물적, 정신적 유산을 형성했고, 일본으로부터도 그러했다. 이는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된다.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영국과 전쟁도 했다. 미국이 영국을 증오하는가? 영국은 프랑스의 식민지, 독일도 프랑스의 식민지, 러시아는 몽골의 식민지, 핀란드는 러시아의 식민지,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 브라질은 포르투갈, 멕시코는 스페인, 이집트는 터키의 식민지였다. 특히 조선은 2천 년 동안이나 중국과 몽고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다. 이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럽 열강,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자기 나라 사람을 지배자로 심고, 말, 글, 종교, 문화를 전파하는 대신 광물(금, 은, 동)과 식품(커피, 차, 사탕수수 등)을 개발하여 본국으로 송출하는 방법으로 식민지를 경영했다. 하지만 중남미 국가들은 식민지배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적대시하지 않고, 역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로 인해 개화되고 문명화를 앞당겼기 때문이라 한다. 인도의 경우 인도인이 영국의 총리를 하고 있지 아니한가. 서구 열강의 식민지 노선이 식민지를 열강국의 나라로 통합시키지 않고 개화와 물질을 맞교환하는 방식이었다면, 일본은 조선을 병합시켜 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조선을 일본화시키는 내선일체화 통치를 했다. 일본의 교육제도를 그대로 도입시키고, 일본 동경제대와 똑같은 수준의 서울국립대학을 세웠고, 농업, 광공업, 철도, 도로, 항만, 전력, 수도, 전신전화, 치산, 치수, 산림녹화, 수리 등을 일본 본토에서 하는 것처럼 똑같이 개발하고 건설했다. 서구 열강처럼 조선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조선을 일본국과 똑같이 만들어 같은 국민이 되게 한 것이다. 서구의 식민지 개념과 일본의 식민지 개념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교육이 전혀 없던 국민이 교육을 받아 정신적으로 근대화가 되었다. 조선왕 27명이 518년 동안이나 통치한 결과는 겨우 4억 달러어치의 논과 밭, 그리고 오염된 지하수, 전염병, 초가집뿐이었는데 일본이 36년 동안 통치한 결과는 23억 달러어치의 학교, 철로, 도로, 광업, 항만, 수도, 전신 등 사회간접자본과 기업들이었다.
2천여 년 동안이나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서 얻은 것이 무엇이었는가? 조선왕 27명의 지배를 받아서 얻은 것이 무엇이었는가? 36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아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선이 굵어야 성취도 굵다. 그동안 주입된 소소하고 소아적인 모략물들을 내던지고, 선입견 없이 제로 베이스에서 사실들만 가지고 다시 평가를 해보자. 조선왕들 밑에서 노예 신분으로 수탈만 당했던 시절이 유익했는가? 아니면 일본의 개화가 유익했는가? 아무리 대차대조표를 써보고 손익 계산서를 써봐도 조선 왕들보다는 일본 총독들이 더 유익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이 곤장을 때렸는가? 조선 같으면 일본의 수상을 사살한 안중근을 어떻게 다루었겠는가? 칼춤 추는 망나니를 시켜 만인을 불러 놓고 그 앞에서 목을 쳤거나, 시뻘건 인두로 눈을 지지고 가슴을 지져 가면서 고통스럽게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안중근은 지금과 똑같은 재판 과정을 통해 인권을 존중받으면서 재판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과 그 의미
일본을 원망하고 증오한 가장 대표적인 정치인은 이승만과 김일성이었다. 두 사람은 혼돈에 빠져있던 민중들로부터 호응을 얻어야만 정치적 닻을 펼칠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민족’을 내걸었고, 민족의 정통성을 ‘조선’에 두었기 때문에 조선을 미화시켜야 했고, 조선을 미화시키기 위해서는 일본을 악으로 규정해야만 했다. 일본이 악인 이유는 조선을 강제로 빼앗고, 수탈했고, 고통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승만 대통령의 인식에 대해, 아니 주장에 대해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첫째, 만일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지 않았다면 청나라나 러시아가 병합하지 않았을까? 일본, 중국, 러시아 중, 어느 나라에 먹히는 것이 더 비참했을까? 둘째, 만일 36년 동안 조선왕이 더 통치했으면,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노예들의 삶이 향상됐을까? 23억 달러어치의 근대화 자산이 생겼을까? 셋째, 조선왕과 일본총독 중 누가 더 조선을 근대화시켰는가?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 논리는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국민 정서를 거스를 수 없어 반일의 표현을 했지만 그는 그의 지상 목표였던 ‘조국 근대화’의 에너지를 일본에서 얻어냈다. 전두환 대통령 역시 반일에 대한 국민 정서를 거역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보다 연상인 나카소네 총리로부터 40억 달러라는 어마무시한 차관을 받아내 88올림픽을 치루고, 시궁창이었던 한강을 지금의 정화된 호수로 아름답게 가꾸고, 전자, 통신, 반도체, 한국형 원자로 산업을 육성하며 오늘날의 먹거리를 제공해주었다. 일본돈 40억 달러가 대한민국을 획기적으로 중흥시킨 통큰 자금이었다. 여기까지만을 살펴보아도 일본은 대한민국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유익한 나라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어째서 국민들은 일본을 적대시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가장 쉽게 표현하자면, 반역의 악귀들에 놀아났기 때문이다. 반역의 악귀, 대한민국에서 호의호식하고 정치사회적으로 떵떵거리고 살면서 대한민국을 도끼로 찍어내리는 반역들이 바로 반일의 악귀들인 것이다. 미국을 증오하는 반미주의자들이 자기 자식들은 미국에 유학보내고, 미국에 영주시키고 있다. 소니 제품에 열광하면서 일본을 증오하는 발언을 일삼고 있는 정치인들이 많다. 낮에는 일본의 오염수를 문제삼는 정치인들이 밤에는 회 접시를 앞에 놓고 일본 사케를 마시고 있다. 이런 자들이 만들어내는 괴담에 국민들이 여과 과정 없이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자들이 해방 직후부터 장악한 역사교과서 주권, 언론 주권, 문화 주권에 대책 없이 노출된 국민들이 이들의 모략과 괴담을 역사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암덩이, 김일성 종교
김일성 종교, 북한에서 김일성은 단군과 같은 존재다. 김일성 신화는 항일 유격전 신화다. 솔방울을 던지니 수류탄이 되었고, 나뭇잎을 던지니 배가 되어 일본군을 물리친 백두산 신령이 바로 김일성 장군이라는 신화다. 따라서 김일성 신자들은 김일성을 빛내기 위해 일본을 깔아뭉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을 더 많이 격하할수록 김일성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지고 고과 점수가 올라간다. 김일성 종교의 코란은 주체사상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외세를 배격하고 주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탈을 썼다고 다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 등 노동력을 가진 무산계급만이 ‘사람’이라 한다. 노동자, 농민이 행복하게 살려면 그들을 착취하는 외세와 외세의 앞잡이인 남조선 괴뢰 정부, 그리고 자본가들을 배격하고 쳐부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 투쟁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사람’이라는 뜻이 남에서와 북에서 너무 다르다. ‘민주화 운동’이라는 뜻이 남에서와 북에서 매우 다르다. 이를 언어선점혼란전술이라 한다. 남한 사람들에게 거룩하게 들리는 ‘사람’, ‘민주화 운동’이 북에서는 살인과 파괴를 의미하는 이념 용어인 것이다. 여기에 남한 국민이 속아서 저들의 장단에 부화뇌동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온갖 부와 자유를 향유하면서 자나깨나 대한민국을 파괴할 생각만 하는 사람들, 미국에 자식을 유학 보내고, 영주권을 따게 하면서 미국을 증오하는 소리를 내는 사람들, 일본의 첨단제품을 사용하고, 일본 내복을 입고, 일본 술을 마시면서 일본을 욕하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도지사가 되는 어지러운 사회가 대한민국이다. 조상이 공산 혈통이어서 북한의 노예가 된 사람들, 돈과 여자라는 미끼에 걸려들어 약점 잡힌 사회 인사들, 북에 가서 약점 잡혀 협박당하는 사회 인사들, 멋모르고 세뇌되어 부화뇌동하는 소시민들, 이들을 모두 합치면 아마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은 넘을 것이다. 이들이 가장 열렬한 반미, 반일주의자들이고, 나머지는 교과서와 언론과 영화, 드라마, 서적, 학교 교사들에 의해 반일사상을 주입당한 사람들이다.
해방 후의 남한 역사는 구소련과 북한이 주도하는 대남공작의 역사였고 끝없는 폭동과 간첩사의 역사였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여름 전라남도 김대중 고향인 하의도에서 미군정에 반대하는 농민 폭동이 일어났고 이어서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미군정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 화폐를 찍어냈지만 발각되는 바람에 폭동 자금을 소련이 댔다. 1946년 9월 총파업은 1개월 내내 전국 경제와 통신과 교통을 마비시켰고, 10월 1일부터 3개월 동안 지속됐던 대구폭동사건은 3남지방 전체에 피를 뿌렸다.
좌익들은 9월 총파업과 대구폭동을 미군정의 폭압정치, 약탈정치에 항거한 정당방위적 ‘민주화 운동’이라고 몰고 갔지만, 1995년 비밀 해제된 구소련 문서 ‘스티코프 비망록’에는 소련이 9월 총파업에 일화 200만 엔, 대구폭동에 300만 엔을 지원했다는 기재가 있다. 이후 좌익들은 9월 총파업과 대구폭동에 대해 일체 함구했다. 일화 500만 엔이라면 10:1만 쳐도 5천만 원이 아닌가? 1946년의 500만 원이면 그 30년 이후인 1980년 화폐로 얼마나 될까? 1980년 200만 원이 강남 30평형 아파트 한 채 값이 아니었던가? 강남 아파트 수백 대 값이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대구폭동을 배후 조종한 인물이 간첩 ‘이석’이었고, 4.19를 배후 조종한 인물도 간첩 ‘이석’이었다.
친북 반역 세력의 뿌리
1919년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이 창설되자 전 세계에 공산주의 바람이 불었다. ‘세계의 모든 노동자들은 국경을 초월하여 국제공산당이 되자’는 달콤한 선전 선동에 양심을 자랑하는 어설픈 지식인들이 이른바 진보세력을 자처하면서 호응했다. 1924년, 안동공고 출신 김재봉이 코민테른 밀명을 받고 서울에 와서 ‘조선공산당’을 지하에서 창당했다. 일본 경찰이 이들을 체포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감옥을 들락이면서 지하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해방을 맞자 공산주의자 여운형이 재빨리 나서서 일본 총독으로부터 치안과 행정을 인수받겠다며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을 조직했지만, 곧장 박헌영에게 조직을 빼앗겼다. 박헌영은 ‘건준’을 ‘인공’(인민공화국)으로 바꾸었다. 붉은 완장을 찬 인공 요원들이 대세를 굳히며 세도를 부렸다. 미군정이 통치에 나서고 이승만이 귀국하면서 이 ‘인공’은 지하화하여 남로당으로 성장했다. 제주도에서는 팔로군을 모태로 하는 무장병력 350명이 인민군을 자처하면서 마을로부터 지원을 받아 장기 유격전을 폈다. 당시 제주도는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열악하여 제주도 사람들끼리만 결혼하다 보니 동성결혼이 만연했다. 모두가 친척이기 때문에 마을의 한 사람만 남로당에 포섭되면 마을의 80% 이상이 포섭됐다. 마을 전체의 지원을 받는 한라산 무장 유격대를 토벌한다는 것은 장기 소모전일 수밖에 없었다.
북조선은 소련군이 먼저 진주함으로써 1946년 2월에 이미 김일성을 간판으로 하는 소련의 위성국이 돼 있었다. 이승만은 소련의 지능적인 방해를 극복하면서 남조선에 대한민국을 건국하기 위해 헌법을 기초하는 제헌국회부터 설치하려고, 1948년 5월 10일을 선거일로 정했다. 소련과 김일성은 이를 방해하기 위해 살인과 폭동을 전국적으로 주도했다. 선거 방해를 위한 폭동은 제주도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1948년 4월 3일 새벽, 무장한 한라산 유격대가 12개 경찰서 및 파출소를 일시에 공격하며 수많은 경찰과 가족들을 학살했고, 마을 유지들을 학살했다. 초대 인민군 사령관 김달삼(23세)이 북한 황해도 해주로 잠입한 후 뒤를 이은 2대 사령관 이덕구는 갓 출범한 대한민국을 상대로 반란 전쟁을 선포했고, 이에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육지에 있는 경비연대들을 투입했다. 갓 태어난 국가에 무슨 군대가 있었겠는가?
미군정은 각 지역에 마다 연대 단위를 설치하여 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주도 사람들로 구성된 제주도 제9연대는 그 80% 정도가 남로당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연대장 김익열 중령은 한라산 사령관 김달삼의 졸개역할을 했다. 인력을 공급해주고 무기와 탄약까지 공급해준 것이다. 1948년 10월 4일, 여수에 있던 제14연대를 제주도에 투입시키려 하자 연대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총구를 거꾸로 향해 연대 간부들을 살해하고 이어서 여수와 순천의 공무원과 경찰 가족을 잔인한 수법으로 학살한 후 백운산으로 도주하여 장기 유격전 단계로 돌입했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에 충격을 입은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4차례에 걸쳐 숙군작업을 하여 7천여 명을 숙정하였지만, 공비토벌 사령관이었던 송호성 준장은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자 즉시 인민군 복장으로 갈아입고 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했다.
6.25 직전의 한국군을 간첩이 지휘했다는 의혹이 매우 짙다. 이 의혹은 군번1번 이형근 대장의 회고록 55~57쪽에 ‘10대 불가사의’라는 제목으로 제기돼있다.
① 일선부대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적정 보고를 군 수뇌부가 계속 묵살했다.
② 전쟁 발발 2주 전, 전후방 모든 사단장과 연대장을 모두 일시에 교체했다.
③ 전후방 모든 부대를 부대 이동시켜 낯선 지형에서 6.25를 맞게 했다.
④ 6월 11일부터 발령 중인 비상경계령을 6월 24일 00시에 해제했다.
⑤ 6월 24일, 전 장병 50%를 휴가보냈다.
⑥ 전후방 중령급 이상 장교들을 6월 24일 육군본부 장교클럽에 불러 밤을 새워 양주와 댄스를 즐기게 했다.
⑦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적진을 향해 병력을 살라미식으로 잘게 분리하여 축차 투입시켜 쉽게 사살당하게 했다.
⑧ 6월 25일부터 27일까지 국군이 계속 밀리기만 했는데도 국군이 반격하고 있다는 허위방송을 해서 군과 국민을 혼란시키고, 한강변에 피난차 나와 있던 유지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남로당원들에게 학살당하게 했다.
⑨ 병력과 군장비와 대포와 군수품이 한강 이북에 있는데도 한강교를 조기 폭파했다.
⑩ 명령을 받고 한강교를 폭파한 최창식 공병 대령을 1950년 9월 21일 비밀리에 처형하여 증거를 인멸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이 무모한 행동을 지휘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는 불가사의이기도 하지만 있을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이변 중의 이변이었다. 이런 상식 이하의 돌출적 행동을 하는 집단이 따로 남한사회 요소요소를 장악하고 있는 공산주의자요 간첩들이다.
1965년에는 간첩들이 버젓이 '통혁당'(통일혁명당)을 창당했다. 통혁당 요원들은 1967년 목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김대중을 당선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선거운동을 했다. 통혁당 당수 김종태는 북한에서 공공연히 영웅으로 떠받들리고 있다. ‘김종태 전기기관차공장’이 대표적인 상징이다. 통혁당 조직국장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조기 석방되어 한국 사회에서 버젓이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2017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문재인은 북한의 내각 총리 김영남과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을 청와대로 초청해 사진을 찍었다. 사진의 배경은 청와대 벽을 가득 채운 초대형 그림이었다. 신영북의 서화와 한반도기가 그려진 그림이다. 이 벽화를 배경으로 찍은 문재인과 김여정의 사진 한 장 그리고 같은 벽화 앞에서 찍은 문재인–김영남–김여정의 사진 한 장이 김정은을 향한 충성 맹세였다. 이것도 모자라 문재인은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국빈들의 만찬 행사에서 분위기와 격에 어울리지 않게 뜬금없이 신영복을 극찬 찬미하는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은 올림픽 참가자들에 하는 연설이 아니라 김정은에 보내는 충성의 연설이었다. 문재인은 또 너무나 유명한 거물 간첩 윤이상(작곡가)의 묘가 있는 독일에 부인을 보내 동백나무를 심는 퍼포먼스까지 펼쳤다. 이 역시 김정은에 보여주는 충성 메시지였을 것이다. 얼마 후에는 아예 윤이상 유골을 독일에서 파다가 통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동산에 묻었다. 그 동산에는 윤이상 음악당 컴플렉스가 대형건물들로 장식돼있다. 통영시 전체가 윤이상의 고장이 돼버린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북을 위해 충성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대통령 노무현은 차라리 김정일의 직속 부하라 해야 적절한 표현이 될 것이다. 노무현은 김정일을 만나 NLL을 무력화시키고 있다고 충성심을 표했고, 주한미군을 서울에서 지방으로 추방시켜버렸다고 자랑도 했다. 국가보안법을 폐기하려고 애를 쓰는 중이고, 미군과의 작전계획 5027를 폐기시켜버렸다고 자랑을 했다. 이런 노골적인 반역자를 ‘민주화 대통령’이라고 추종하는 인구가 너무 많다.
대통령 김대중은 또 어떤가? 2000년 6월 15일의 정상회담 댓가로 4억 5천만 달러를 국민 몰래 주었다. 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자 단 한 푼도 준 적이 없다고 엄포를 놓다가, 미국이 발견해주니까 침묵했다. 유명한 저널리스트 손충무 씨는 그의 여러 저서에서 10억 달러를 주었다고 폭로했다. 이는 몰래 준 돈이고 공개적으로 통치 행위임을 가장해 북에 넘겨준 달러가 수십 억 달러가 될 것이다. 개성 관광 사업과 금강산 관광 사업을 통해 국민 주머니를 털게 했고, 금강산 독점사업권이라며 현대상선에 9억4천2백만 달러를 건네주라 했다. 쌀, 비료를 합쳐 10만 톤 규모를 보냈고, 기업들을 닦달해 북한에 조공을 바치라고 강요했다. 드디어는 연평제2해전을 통해 대한민국 해군 장병 6명의 귀한 생명을 김정일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기 위해 바쳤다. “북한 경비정이 보이면 500m까지 다가가서 기동만 하고 절대 먼저 쏘지 말라"는 참으로 유치한 명령을 내려 대한민국 해군 장병의 목숨을 김정일 기분 좋아하라고 바친 후, 바로 그날 일본으로 윌드컵 축구 구경한다며 골수 공산주의자 임동원을 데리고 비행기 타려고 손 흔들며 나갔다. 이런 저질 반역자가 대한민국 민주화의 화신이 돼 있는 이 기막힌 사실에 절망하고 분노하는 국민이 왜 대한민국에 많지 않을까?
좌파는 왜 숙명적으로 반일전쟁을 해야 하나?
좌파의 절대신은 김일성, 김일성의 신화는 항일유격전이다. 따라서 좌파의 숙명은 일본을 끝없이 모략하여 격하시키는 것이다. 일본을 야만으로 격하시키려면 조선은 아름다운 나라가 돼야 하고, 조선왕들은 훌륭해야만 한다. 조선왕들이 훌륭했는데 어째서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는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이완용이라는 매국노가 필요했다. 왕 모르게 이완용 등 을사5적이 나라를 도둑질해서 일본에 넘겼다는 것이다.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병합조약 문서의 서명자는 조선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양쪽 서명자 모두가 각국의 왕으로부터 위임받은 외교장관들이다. 이후 1주일만인 8월 29일 순종은 조선을 일본에 바친다는 칙서를 발표했다. “왕이 능력이 부족하여 조선 백성을 행복하게 해줄 도리가 없으니 백성은 이후 문명이 발달한 일본국의 통치를 받고 일본법을 준수하면서 행복을 도모하라”는 요지의 국가이양 선언이었다.
당시 고종황제의 외교 고문이었던 미국 선교사 Homer B. Hulbert는 [대한제국, 최후의 날]에서 이 장면을 설명했다.
“1910년 8월 22일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오후 1시 창덕궁 대조전의 홍복헌에서 순종이 대신들과 함께 어전 회의를 열었다. 그의 마지막 어전 회의였다. 더위에 눌린 듯 한참 침묵이 흐른 다음 순종은 다음과 같은 조칙(詔勅)을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짐은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한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써 서로 합하며 일가(一家)가 됨을 서로 만세의 행복을 도모하는 소이로 생각하고 이에 한국의 통치를 통틀어 짐이 매우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어 순종은 전권을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일임할테니 통감 데라우치를 만나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러는 동안 대신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궁중에서 물러난 이완용은 오후 4시에 데라우치 통감을 만나서 다음과 같은 조약 문서에 조인했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前條)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날은 이처럼 어이없이 저물어갔다. 그러나 나라가 망한 것은 이때가 아니다. 1907년의 정미(丁未) 신조약으로 사법권과 행정 인사권을 넘겨줬을 때 조선은 이미 국권을 상실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1905년 4월의 을사 보호 조약을 맺기 이전부터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1884년 겨울 고종을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본 미국인 퍼시벌 로웰은 고종과 순종을 본 인상을 기록했다. “고종의 얼굴은 뛰어나게 부드러워 보였다. 첫눈에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황태자였던 당시의 순종에 대한 첫인상도 기록했다. “그가 나를 접견했을 때 두 대신이 그의 양옆에 서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대신들이 허리를 굽히고 그의 귀에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를 속삭여주곤 했다. 그러면 그는 동상처럼 무표정하게 서있다가 앳된 목소리로 대신들이 속삭여주는 말을 그대로 따라 외우는 것이었다.”
합병 당시 고종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고종은 궁내 대신 이재극에게 “정부 대신들과 잘 협의하라, 합병은 천명이다. 지금은 다른 도리가 없다.” 이렇게 말했다. 당시 두 임금(고종, 순종)과 이완용은 오로지 왕실에 대한 예우와 고관대작들의 처우에 대해서만 일본과 흥정했을 뿐이었다. 백성에 대한 운명에 대해서는 그들이 낯 뜨거워서라도 왈가왈부할 처지가 못 되었다. 이런데도 역사책들은 ‘순진하고 무기력한 순종’이 매국 대신들에 놀아났다고 매우 편협하고도 근시안적인 평가만 담고 있다. 왕은 훌륭한데 이완용 등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하고 해괴하고 유치한 이런 해석이 정사로 자리잡아 온 것이다. 마치 1980년을 전후하여 최규하 대통령이 바지였고 전두환과 신군부가 국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최규하가 재가(결제)한 것은 모두 전두환의 책임이라는 1997년 좌파 대법원이 내린 판결과 판박이인 것이다. 왕이 바지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약육강식 시대에 왕이 바지였다면 그 어느 열강국으로부터라도 먹히는 것이 자연의 순리가 아니겠는가? 당시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세계 열강들이 다 만만한 나라들을 식민지로 삼았다. 다른 식민국가들은 다 식민통치국과 문화가 맞아서 잘 지내는데 왜 유독 이 땅의 공산주의자들만 일본을 원수로 생각하는가?
멸망 당시의 조선왕은 주변 신하들과 경호 인력을 믿지 못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아관파천)을 하기도 하고, 영국 공관과 미국 공관에 안전 대책을 구걸하면서 국가는커녕 일신의 안전마저 의탁할 곳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만주로 도망가자고 신하들을 조르지 않았던가. 이런 처지가 되다 보니 조선왕은 자신과 왕족의 안전을 담보해주겠다는 일본이 믿음직하고 고마웠을 것이다. 조선왕 27명 중 정말로 훌륭한 왕이 있었다면 518년 동안이나 이씨가 정권을 대물림해 왔는데 어째서 왕이 사는 서울이 사람과 동물 등의 배설물로 질척거렸고, 악취 나는 우물물을 마시면서 전염병에 시달려 시체를 시구문 밖에 내다 버리는 것을 일상화해 왔는가? 조선왕이 훌륭했는데 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적장에 절을 여러 번 하였는가? 조선왕이 훌륭했는데 어째서 백성의 90%를 노예로 삼아 짐승처럼 일 시키게 하고, 짐승보다 싼값으로 거래하게 하고, 양반으로부터 늘 물질과 성을 수탈당하게 만들고, 곤장 맞게 하고, 불타는 인두로 고문당하게 했는가?
이런 나라를 주운 것이 순리인가, 범죄인가? 조선은 구조적으로, 운명적으로 일본에 먹히게 돼 있었다. 이씨 성을 가진 27명의 왕이 518년 동안 누적시켜온 구조적 적폐에 대한 책임을 이완용이라는 한 개인에게 홀딱 다 뒤집어 씌우는 이 야만이 어찌하여 역사의 정사로 대물림해 왔는지, 그것이 불가사의하다.
이 언어도단의 논리는 오로지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데에서 파생된 억지다. 조선왕은 개화를 적대시하여,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기른 개화파 유길준, 김옥균, 서재필 등 유학생들을 비참하게 탄압하고 학살했다. 조선에 호의적이었던 그래서 조선 병합을 반대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에 격분하여 ‘조선 왕조를 멸망시켜야 조선 백성을 구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우리는 조선 백성들의 생물학적 후예들이다. 아마도 우리의 90%는 조선 왕들과 양반들에 신음했던 조상님들의 후예들인 것이다. 조선왕들과 양반들에 신음했던 조상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다시는 동족의 세도에 신음하지 않는 삶의 터전을 만들어 후대에 전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옳다. 일본과 사이좋은 나라로 공동협력하여 경제와 안보를 공동 도모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일 것이다.
우리의 적은 일본을 격하시키고, 반일감정을 부추겨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남한 내의 좌익 세력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일본이 아니라 일본을 모략하는 남한 공산당이고 북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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