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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서...예루살렘 공방전
[ 영화, 킹덤 오브 헤븐 ]
"현대에 부활한 거대한 역사의 현장, 중세 예루살렘, 창조적이고 핵심적인 두뇌가 모여 당대의 생활상과 향기마저 기록하다!!" 이 영화에 대한 당시 평입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감히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역량이 집대성된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서사 액션 대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발리안
십자군 전쟁은 그동안 수많은 제작자와 감독들이 영화화를 꿈꿨지만, 그 방대한 스케일을 소화해낼 자신이 없어 감히 누구도 도전하지 못했던 금단의 소재였습니다. 그러나 리들리 스콧 감독은 달랐습니다.
개인의 휴먼드라마에 이 방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차용, 중세 황금기에 일어났던 이슬람과 기독교도들 간의 지난한 전쟁을 생생하게 담아냈을 뿐 아니라, 영화사상 가장 웅장하고도 완성도 높은 스펙터클로 역사를 신화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 스케일과 세부까지 리얼하게 담아낸 대규모 전투씬, 여기에 화면을 압도하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가슴을 적시는 사랑,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사랑과 평화의 의미를 묻는 심원한 테마까지 무엇 하나 놓칠 수 없습니다.
종교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이 민감한 뇌관을 건드린 <킹덤 오브 헤븐>이라는 영화를 지배하는 두 가지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종교의 허무함', '반기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세기 십자군 전쟁을 그린 이 영화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가 이슬람에 도발함으로서 전쟁이 발생합니다.
기독교 기사단의 뤼지냥이 이슬람 대상을 습격함으로서 다마스커스에서 전쟁이 일어날 뻔 한 일, 아랍군의 총사령관 술탄 살라딘의 누이를 공격해서 죽임으로써 결국 예루살렘 공성전이 벌어진 일, 100년 전 기독교 세력이 예루살렘의 아랍세력을 학살해서 이 모든 분쟁이 씨앗이 된 것 모두 기독교의 과오였습니다.
영화의 주 무대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예루살렘. 영화 내내 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이라는 작은 곳을 위해 목숨을 버려가며 지키고 공격합니다. 영화는 말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돌무더기는 종교가 남기고 간 빈 껍데기에 불과한 곳이라는 것을... 지금 자신이 살아있고 살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천국(Heaven)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종교가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에게 무슨 의미인지, 왜 싸우는지 다시 한 번 물어봅니다.
십자군을 이끄는 주인공 발리안과 아랍군을 이끄는 살라딘이 영화의 종말부에 협상을 끝내고 헤어지기 전의 문답에는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 살라딘
발리안 : "What is Jerusalem worth?"
"예루살렘이 무슨 가치가 있소?"
살라딘 : "Nothing"
살라딘 역시 발리안과 같이 '성지(聖地)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일말의 가치를 두지 않는 합리주의자입니다.
이 말을 마치고 뒤돌아 걸어가던 살라딘이 되돌아서서 또다시 말합니다.
살라딘 : "Everything"
하지만 아랍 세력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예루살렘은 그에게 있어서 정치적으로 'Everything'인 것입니다.
살라딘은 발리안을 향해 싱긋 웃으며 다시 뒤돌아섭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십자군 전쟁 제2차와 제3차 사이의 기간을 그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실제 인물들이지만 살짝 살짝 픽션을 가미했습니다.
* 발리안과 살라딘
[ 간략한 줄거리 ]
아이를 사산하고 자살한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서 주인공 발리앙이 수도원에 감금 되어 있던 중 한 예루살렘으로 가던 한 무리의 십자군이 마을을 방문합니다. 그 덕에 대장장이인 발리안은 풀려나 기사들의 장구류를 손봐주게 되는데 그 무리 안에 발리안의 어머니를 버리고 십자군에 참전한 아버지 고프리가 있었습니다.
고프리는 발리안에게 용서를 구하고 같이 가길 원하나 아내를 잃고 삶의 의미를 잃은 발리안은 동행을 거부합니다. 기사들이 떠난 밤 아내를 묻은 형제인 수도사가 찾아와 그에게 떠날 것을 종용합니다.
그 때 그의 목에서 아내에게 걸어준 십자가를 보고 분노하자 수도사는 자살은 죄악이고 발리안의 아내는 자살했기에 목을 자르고 묻었을 뿐이라 항변합니다. 그러나 발리안은 그를 찌르고 화덕에 밀어 넣어 태워 버립니다.
발리안은 즉시 말을 타고 먼저 길을 떠난 고프리를 찾아가 자기는 죄를 지었기에 예루살렘에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배를 타기위해 가던 중 고프리의 조카가 습격을 하고 그 싸움에서 이겼으나 고프리 역시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항구에서 고프리는 예루살렘의 왕을 지켜줄 것을 부탁하며 아들인 발리안을 기사로 서임합니다. 그리고 그가 다스리는 이벨린의 영주자리를 물려주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배가 풍랑을 맞아 뒤집어 지고 홀로 해안에 도착한 발리안은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아버지의 부하들을 만나 왕을 알현하고 이벨린에 가있던 중 예루살렘의 공주 시빌라와 사랑을 나누며 잠시 행복감을 맛봅니다. 십자군 기사단을 이끄는 악당 레날드와 뤼지냥의 이슬람 상선대 공격에 살라딘이 나서게 되고 나병으로 점점 쇠약해져가던 왕도 살라딘을 막기 위해 군을 이끕니다.
요새로 간 발리안은 시빌라를 요새로 들여보내고 남은 피난민이 대피할 시간을 벌기위해 살라딘의 선봉으로 돌격하고 포로가 됩니다. 살라딘의 부대와 예루살렘 왕의 부대가 도착하고 예루살렘 왕은 살라딘에게 레날드를 처벌할 것이니 군을 물리라 요청합니다. 살라딘이 군을 물리고 레날드는 감옥에 갇힙니다.
* 문둥병 환자였던 보에몽 4세
무리한 출전으로 죽어가고 있던 왕은 발리안을 불러 시빌라와 결혼할 것을 바라나 발리안은 뤼지냥의 기사들이 떠나는 것을 염려하여 거절합니다. 왕은 시빌라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시빌라는 아들 역시 선왕과 같은 나병인 것을 알게 되고 아들 역시 오빠와 같이 고통받을 것을 슬퍼하여 결국 아들도 신의 품으로 떠나보냅니다.
* 참으로 무능했던 뤼지냥
뤼지냥은 시빌라와의 결혼에 방해가 되는 발리안을 죽이러 암살자를 보내고 레날드를 시켜 살라딘의 누이를 죽입니다. 살라딘의 위협을 이용하여 시빌라와의 혼인한 뤼지냥은 왕이 되고 살아 돌아온 발리안과 예루살렘 왕의 기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끌고 살라딘을 치러 나갑니다. 그러나 그는 대패하면서 포로가 되고 살라딘은 레날드의 목을 베어 복수하고 뤼지냥에게 치욕을 줍니다.
* 시빌라 공주
남은 병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발리안은 살라딘의 대군을 대비해 예루살렘에 대한 수성전을 준비하면서 살라딘의 대군을 맞이하게 됩니다. 발리안과 휘하 부하들의 처절한 분투에도 불구하고 성벽은 무너지고 밀려드는 대군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습니다.
이에 살라딘은 회담을 요청하고 발리안은 이에 응합니다. 살라딘은 관용을 베풀어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해안가로 이동하는 동안의 안전을 보장하고 예루살렘은 살라딘의 손에 떨어집니다. 시빌라와 함께 할 것을 약속한 발리안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예루살렘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아무 것도 아니오. ......하지만, 모든 것이기도 하지.”
[ 십자군 전쟁 ]
인류 역사상 200년이라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치러진 전쟁이자 세계 2대 종교가 격돌한 십자군 전쟁은 인류 역사의 대사건입니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교황의 이 위력적인 한 마디로 촉발된 십자군 전쟁은,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인간이 일으킨 전쟁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인간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200년에 걸쳐 총 9차례 치러졌는데, 이 중에서 제1차 십자군 전쟁(예루살렘 함락), 제3차 십자군 정쟁(사자심왕 리차드 1세와 전설적인 이슬람군 지휘자 살라딘과의 격돌), 제4차 십자군(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눈여겨 볼 전쟁들입니다. 아래에서는 주로 이 3개의 전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갈 예정입니다.
* 1차 십자군 원정로
* 만지케르트 전투와 카노사의 굴욕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 1077년의 ‘카노사의 굴욕’. 이 두 가지 사건이 없었다면 십자군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은 11세기 초까지는 바실리우스 2세를 비롯한 용맹한 군주들의 지휘 하에 동유럽과 중동에서 막강한 세력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1025년에 바실리우스 2세가 죽은 후 약 반세기 동안 13명의 황제가 난립하며 혼란과 쇠퇴를 가져왔고, 동쪽에서 셀주크 투르크가 노도와 같이 밀려오면서 제국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는 술탄 아르슬란이 이끄는 셀주크 군이 로마누스가 이끄는 비잔틴군을 격파하고 로마누스를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로써 니케아, 안티오크 등 터키 반도의 대부분이 셀주크의 손에 들어갔고, 셀주크 투르크는 이집트를 제외한 중동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 후 6년 뒤에는 유럽에서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교황과 독일 황제의 극한 대립을 상징하는 이 사건은 독일 지역 사제들의 서임권이 황제에게 있느니, 교황에게 있느니 하면서 하인리히 4세 황제와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이 서로를 부정하면서 빚어진 충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일단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에서 교황에게 머리를 숙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교황권이 최종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절치부심하며 클레멘스 3세를 대립교황으로 내세운 뒤 1082년에는 로마를 공격하여 그레고리오 교황을 내쫓아 버립니다. 원한 속에 숨진 그레고리오를 이어 1088년에 선출된 우르바노 2세도 클레멘스 3세와 대립하는 한편 하인리히 7세 황제와 프랑스 왕 필리프 1세를 파문하는 등 세속군주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이처럼 동과 서의 로마(동로마 제국과 로마 교황)가 모두 위기에 처한 가운데, 양측에서 서로 힘을 합쳐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이미 1073년에 그레고리오 교황이 비잔틴에 사절을 파견하여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발칸 반도, 팔레스타인에 이르기까지, 이교도들을 몰아내는 일에 협력하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 십자군 운동을 제창하는 우루바노 교황
* 우르바노 2세
그 뒤 비잔틴에서는 1081년에 알렉시우스가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그는 제국의 위기에 때맞춰 등장한 영명한 군주였습니다. 그는 나중에는 자력으로 셀주크를 물리치고 아나톨리아(터키 반도)의 영토를 대부분 수복하게 되지만, 당시는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을 받고 있던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유럽 쪽에서 용병을 얻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알렉시우스가 보낸 사절이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 참석하여 ‘이교도와의 전쟁에 힘을 빌려주기 바란다’는 뜻을 전하자, 우르바노 2세 교황은 이를 황제와의 주도권 쟁탈에 있어서 절호의 기회로 판단합니다.
자신이 치켜든 깃발 아래 전 유럽의 봉건영주와 기사들이 움직인다면, 세속군주들과 대립교황의 압박으로 권력과 권위가 모두 위협받고 있던 교황의 입지를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8개월 뒤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마침내 ‘십자군 운동’을 제창합니다.
* 클레르몽 회의
“기독교를 위해 싸우는 자는 의복에 십자가를 표시하라. 그래서 내면의 신앙에서 일어나는 사랑을 표현하라. 주님의 은혜와 성 베드로의 후계자가 갖는 권한으로, 십자가의 전사들은 모든 죄를 면제받음을 선언한다. 이 사실이 그들의 원정길 수고를 위안해 주고, 그들이 죽은 후 순교자로 축복받으리라는 점에 만족하기를. 그리하여 기독교도들은 죄를 면제받고 이 나라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으리라. 가라,
그리고 그대들끼리 다투는 데 써온 용기와 지혜를 고귀한 싸움에서 발휘하라. 가라, 전사들이여. 가는 곳마다 명성을 떨치고, 이 겁쟁이들의 나라를 정복하라. 선봉의 프랑스인의 용맹, 그 뒤를 따르는 나라들의 용맹은 단번에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리라.”
실제 우르바노의 이 연설은 정확한 원문이 없고 오늘날은 기억에 의존해 재구성한 여러 가지의 판본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가 ‘이교도들이 성지를 빼앗고 그곳을 찾는 순례자들을 박해(이는 대체로 과장이었다)하고 있다’ ‘그곳의 이교도 군대는 유럽 군대에 비해 허약하며 땅은 유럽보다 풍요롭다’ ‘그곳에 넘치는 성유물을 얻고, 성전 참여의 공으로 이제까지의 죄를 면제받을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하여 십자군의 동기 부여를 한 점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교황이 굳이 프랑스 땅인 클레르몽에서 가서 십자군을 부르짖고, 프랑스인이 앞장설 것을 촉구한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황제의 영향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비잔틴이 아나톨리아를 잃지 않았다면 굳이 유럽을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교황이 황제와 대립하고 있지 않았다면 비잔틴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황제에게 일임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아마도 실제 있었던 십자군보다는 훨씬 소극적인 대응이 있었을 겁니다. 이렇게 만지케르트 전투와 카노사 사건이 2백년의 십자군 전쟁을 불러 온 것입니다.
* 민중 십자군(거지떼 십자군)
우르바노의 연설은 곧장 큰 반향을 일으켰고, 각국의 군주와 영주들이 출정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은자 피에르”라 불리는 수도사의 선동에 따라 일반 농민과 유랑민 위주로 ‘민중 십자군’이 이루어져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변변한 무기도 식량도 없이 출발했기에 현지에서 보급을 받아야 했는데, 헝가리에서 그 문제로 현지인들과 충돌을 일으켜 “십자군 사상 첫 싸움”을 같은 유럽 기독교도들과 치렀다는 불명예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어찌어찌 비잔틴의 경계로 들어가서부터는 제대로 된 보급을 받았으나, 용병을 기대했던 알렉시우스 황제로서는 이런 거지떼같은 군대를 보고 사실 당황스러웠습니다.
더구나 전쟁목표조차 이들(그리고 이후의 십자군들도 마찬가지)은 자신과 조금 달라서, “셀주크의 침략을 격퇴한다”라기보다 “성지를 탈환한다”가 주목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알렉시우스는 계속해서 십자군을 후원해 주었는데, 적의 적은 우리편이라는 식으로 서유럽인들이 이슬람을 물리치게 하고 보급을 미끼로 정복자들에게 중동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요구하거나, 이슬람인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동안 자신은 천천히 힘을 기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옳은 전략이었으나, 장기적으로는 비잔틴 제국에 재앙을 가져오게 됩니다.
아무튼 이 거지같은 민중 십자군은 셀주크 투르크 군에게 1096년에 허무하게 격파되었는데, 이것은 한편으로 이슬람 쪽에서 십자군을 우습게 보게 만듦으로써 이후 전개되는 십자군과의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 제1차 십자군(1096~1099)
* 십자군 원정도
마침내 그 해 하반기에 벨기에 남부의 부용의 고드프루아, 그의 동생인 볼로뉴의 보두앵, 툴루즈의 레이몽, 블루아의 스테판, 타란토의 보에몽 등 주로 프랑스 출신의 영주들이 이끄는 군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모여들고(제1차 십자군), 1097년에는 니케아를 점령합니다. 허를 찔린 투르크군은 도릴라이온에 약 3만의 병력을 집결시켜 습격을 시도했습니다.
이번에는 십자군 쪽이 허를 찔렸으나, 약 1만을 이끌고 앞서 진군 중이던 보에몽은 침착하게 방어전을 전개했고 결국 고드프루아와 레이몽의 군대가 도착해 셀주크군의 측면을 찌를 때까지 버텨냈습니다.
하나로 합친 십자군은 매섭게 역습했고, 투르크군은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십자군은 아나톨리아로 거침없이 진격할 수 있었고, 1098년에는 보두앵이 시리아 지역의 에데사를, 보에몽이 안티오크를 공략해 모두 점령했습니다.
마침내 1099년 6월, 성도 예루살렘의 성벽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셀주크가 아니라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파티마는 ‘십자군의 이제까지의 획득 영토를 모두 인정받는 대가로, 팔레스타인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치부되었습니다.
* 영화에서...
한 달 정도 계속된 공성전에서 보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십자군은 고통이 심했으나 성서의 여리고 공성전을 흉내 내어 맨발로 예루살렘 성벽 주변을 돌며 찬송가를 부르는 퍼포먼스를 하는 등, 사기를 북돋웠고, 마침 제노바의 보급선이 도착하여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수비대는 일종의 화약인 ‘그리스의 불’까지 동원하며 악착같이 저항했지만, 7월 15일에 십자군의 공성기에서 처음으로 두 명의 기사가 성벽 안쪽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홍수가 제방을 무너뜨리듯이 성스러운 도시는 십자군 군병들에게 함락되었습니다.
이어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노인도, 여자도, 어린애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무슬림은 물론 유대인들도 십자군의 칼부림에 쓰러졌습니다. 이슬람 최초의 사원인 알 아크사 모스크에도, 유대인들의 예배당인 시나고그에도, 천 년 전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넘었다는 길에도, 예외 없이 수없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쏟아지고, 넘쳐흘렀다. 피가 무릎까지 차고 넘쳤다고 기록은 말하고 있습니다.
낯선 땅에서 오랫동안 힘든 싸움을 하며 쌓인 울분과, ‘이들은 이교도다’라는 의식이 정복자들의 이성을 마비시켰을 겁니다. 광란의 학살극은 불과 몇 백 명의 생존자들을 남겨둔 채 일주일 만에 가까스로 멈춘 듯했으나, 그들은 도시를 뒤덮은 몇 만 구의 시체들을 치우는 일에 동원되었습니다.
일이 끝나자 그들 역시 시체더미 위에 쓰러졌다. “주님의 심판은 공정하며, 위대하시도다!” 현장을 지켜본 어느 성직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1차 십자군 전쟁 이후 판도(연녹색 외에는 모두 십자군 지배하에...)
* 십자군 위력의 비밀
이렇게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손에 넣었고, 본래의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부용의 고드프루아가 “성묘의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파티마 이집트가 성지 재탈환을 위해 공격해 왔으나, 아스칼론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십자군의 예루살렘 지배는 당분간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병력도 적고, 현지에 익숙하지도 않으며, 보급도 어려웠던 십자군이 거듭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먼저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들 수 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는 중동을 제패하며 대제국을 건설했으나 1092년에 말리크샤가 죽은 후부터는 여러 왕족들이 각자 술탄을 내세우며 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나톨리아를 지배하던 룸 셀주크의 아르슬란은 십자군이 처음 침공해올 때 다른 투르크족과 싸우느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알레포의 리드완과 다마스쿠스의 두카크도 형제였지만 서로 견제하기에 바빠 안티오크를 제 때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 영화에서...예루살렘 공방전
또한 수니파였던 셀주크에 대항하는 시아파의 ‘아사신’ 세력이 알라무트에 버티고 앉아 수시로 자객을 보냈으며, 파티마 이집트 역시 시아파로서 셀주크와 손잡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십자군 내부에서도 분열이 없지 않았지만 적어도 초기에는 전투 때만은 손을 잡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군의 전술과 장비도 한몫을 했습니다. 11세기 후반은 유럽 기사도와 전법이 완성된 시기였습니다. 그때까지 가벼운 가죽갑옷이나 사슬갑옷을 입고, 곧잘 말에서 내려 전투했던 유럽의 기사들은 차차 튼튼한 철판 갑옷으로 온 몸을 감쌌으며 말에게도 갑옷을 입히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런 장비는 단점도 있었는데, 몸이 무거워져 말에서 오르내리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낙마하면 그야말로 목숨이 위험해졌습니다. 또 그 무거운 몸으로는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무기가 제한된다는 점도 문제였습니다.
* 십자군
그러나 이런 단점을 덮을 만큼 방어력이 좋아졌으며, 말에 올라 창을 잡고 마치 작은 전차처럼 적진에 돌격하면 웬만해선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방어력과 돌파력을 두루 갖춘 점에서 옛 그리스의 팔랑크스(중장보병대)와 비슷했는데, 이 중장기병이 중장보병보다 나은 점은 기동력까지 갖추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에 맞서는 이슬람 전사들은 대체로 경장기병과 보병이었습니다. 특히 본래 유목민인 투르크군은 능숙한 승마술로 적진 주변을 돌며 활을 쏴서 적진을 어지럽힌 다음 돌격하는 전법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말 위에서 날리는 가벼운 화살로 프랑크 기사의 철갑옷을 뚫을 수는 없었습니다.
십자군에 대항하는 전술은 퇴각과 반격을 반복하며 공격하기 유리한 지형으로 유인하거나, 그 측면(팔랑크스와 마찬가지로, 민첩성이 떨어지는 중장기병은 측면이 약했다)을 기습하거나, 아예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 이슬람군
그러나 십자군에서도 이에 대응해 측면과 후면을 경장기병과 보병대로 둘러싸서 기사들을 보호하는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이런 유리함에다 이교도를 무찌르고 성지를 되찾는다는 사명감과 열정이 더해지면서, 전쟁의 초기 국면에서 십자군은 불리한 조건에서도 수적으로 앞서는 적을 거의 매번 격파해냈습니다.
잔인한 학살자이자 침략자로 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제1차 십자군에 참여했던 기사들은 신의 정의를 실현한다는 믿음에 불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더욱 잔인할 수 있었습니다.
* 십자군의 요새들과 외교술
* 시리아에 있는 크락 드 슈발리에 십자군 성
적을 격파하기에 유리했던 십자군의 중장기병이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격파에만 유리할 뿐이기도 했습니다. 적의 경장기병이 퇴각하면 중량에 따른 속도 차이와 소진된 체력, 그리고 지형에 밝지 못한 점 등으로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군은 한동안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적의 총 병력은 그다지 줄이지 못했습니다. 승리하고 바로 귀환할 게 아니라 빼앗은 성지를 지켜야 하는 한, 그것은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고민을 십자군은 성을 쌓는 것으로 일부 해결했습니다. 아직까지도 일부 남아 있는 십자군 당시의 성들은 요충지마다 빠짐없이 들어서서 적의 대규모 공격을 요격하고 필요할 때는 힘을 모아 반격하는 보루가 되었습니다.
* 현재 남아있는 십자군 요새
본래 유럽의 성들은 영주의 최종 근거지로서 견고하고도 방어에 유리하게 지어졌는데, 싲자군은 그것을 요새로 활용했습니다. 유럽식 성곽 공략에 익숙하지 않던 이슬람 측에서는 한동안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해결책은 십자군의 본래 대의와는 많이 동떨어지지만, 정복한 왕국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게도, 외교술을 발휘해 이슬람 세력끼리 서로 견제하게 하고, 때로는 그들 중 일부와 손을 잡기도 하는 등 합종연횡을 펼치면서 십자군판 전국시대를 살아나가는 것이었습니다.
* 영화에서...문둥병 환자였던 예루살렘 왕 보두엥 4세
1108년에는 보두앵 뒤 부르(고드푸르아와 보두앵 왕의 사촌)가 모술의 자왈리와, 안티오크의 탕크레드가 알레포의 리드완과 각각 손을 잡고 텔 바시르에서 격돌했습니다. 1115년에는 바그다드에서 칼리프가 보낸 군대에 프랑크인과 시리아의 무슬림 지도자들이 힘을 합쳐 맞섰습니다. 1140년에는 모술의 지도자 장기의 공격에 프랑크 예루살렘과 이슬람 다마스쿠스가 함께 대응했습니다.
또 초기에는 대학살을 벌이기도 했지만,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인 땅에서 뿌리를 내리려다 보니 십자군 출신의 군주가 무슬림 주민들도 백성으로 여기고 통치하는 것이 불가피했습니다. 세월이 지나며 프랑크인(이슬람 측에서는 십자군을 프랑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십자군 전사들이 프랑스 출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과 아랍인의 혼혈아들도 늘어났습니다.
이런 현지적응과 세력균형 유지 전략으로 십자군 지배가 200년 가까이 유지될 수는 있었지만, 한편 그에 따른 한계도 있었습니다. 초기의 종교적 열정과 단합이 스러지면서, 일부 이슬람과 제휴해 다른 이슬람의 공격을 막아내기도 했지만, 반대로 기독교 세력끼리의 불화 때문에 이슬람의 공격을 막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 제2차 십자군(1147~1148)
1144년에 유능한 이슬람 지도자였던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에데사를 공격했을 때 지도자인 조슬랭은 다른 왕국들에 구원을 청했지만, 평소 조슬랭과 사이가 나빴던 데다 스스로의 방어가 중요하다고 여긴 이들이 팔짱을 끼는 바람에 에데사가 덧없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유럽에서 제2차 십자군이 결성되었으나, 그 지도자들인 독일 황제 콘라트 2세와 프랑스의 루이 7세는 시종 반목했으며 비잔틴의 마누엘 황제 및 십자군의 지도자들과도 계속 삐걱거렸습니다.
그래서 1148년, 이들은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서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지 못하고 장기의 후계자인 누르 알 딘에게 참패했습니다. 십자군을 일으킨 두 기획자 중 하나인 비잔틴과의 불화는 아주 일찍부터 빚어졌는데, 1108년에 유럽에 돌아가 있던 안티오크의 보에몽이 비잔틴을 공격하다가 패배했으며 그 직후에는 알렉시우스 황제 쪽에서 안티오크를 공격하려고 바그다드의 칼리프와 동맹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내부분열과 통일된 리더십의 부재 때문에, 유럽 세력은 알렉산드로스의 영도 아래 중동 전역을 제패했던 역사를 재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군의 정복지는 내내 레반트의 해안지대에 한정되었으며, 1124년에 티레를 점령한 이후에는 계속 수세에 몰리기만 했습니다.
이슬람 쪽에서 볼 때 이런 이방인들의 왕국들을 몰아내는 데는 두 가지가 필요했습니다. 십자군 못지않은 종교적 열정에 힘입은 감투정신, 그리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이슬람 세력을 하나로 묶어 십자군에 정면충돌하도록 만들 통일된 리더십이었습니다.
* 이슬람측에서도 성전의 불길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듣도 보도 못한 학살이 벌어졌을 때부터, 이슬람 민중들 사이에는 신의 이름으로 이교도 침략자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의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마스쿠스의 카디 알 하라위가 바그다드에 달려가 예루살렘의 소식을 전하며 ‘지하드(성전)’를 촉구했을 때도 운집한 민중은 눈물과 함성으로 이에 호응했으나, 바그다드뿐 아니라 다른 여러 이슬람 도시의 지도자들은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십자군이 당장 쳐들어오지 않을 바에는 눈앞의 이슬람 세력들끼리의 분쟁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1111년에 바그다드에서 카디인 이븐 알 카샤브가 다시 한 번 지하드를 부르짖었을 때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어, 이듬해 벌어진 십자군의 티레 공략이 이슬람 세력의 단결된 힘으로 좌절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이슬람의 힘을 하나로 모아 십자군을 쳐부술 지도자 후보가 잇달아 나타났습니다. 다니슈멘드 튀르크의 일 가지, 모술의 일 부르수키 등이 잠깐 주목을 받았다면 모술의 이마드 앗 딘 장기는 에데사와 알레포를 탈환하고 예루살렘 왕 풀크를 한때 사로잡음으로써 단연 유력한 후보가 되었습니다.
* 살라딘
하지만 그는 잔혹하고 야심적이어서 십자군 뿐만 아니라 이슬람 도시들도 가리지 않고 공격했고, 그래서 오히려 프랑크와 이슬람의 단결까지 초래했습니다. 그리고 1146년에 부하에게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은 장기의 후계자, 누르 알 딘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제2차 십자군을 격퇴하고 1154년에 시리아를 병합했으며, 1169년에는 이집트로 시르쿠를 파견해 카이로를 점령, 사실상 중동 세계를 하나로 묶어 기독교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전선을 구축해냈습니다.
장기처럼 정복 사업을 펼치면서도 잔인하지 않았고, 공정하고 경건하다는 평가로 두루 인망을 모았으나 1174년에 병사하고 맙니다. 그의 뒤를 이어 마침내 ‘이슬람의 재정복’을 제대로 성취할 지도자가 바로 살라딘이었습니다.
* 전설적인 지도자 살라딘의 등장
* 살라딘
쿠르드족 출신의 살라딘은 열네 살 때부터 누르 알 딘의 군대에서 복무했으며, 1169년에 삼촌인 시르쿠를 따라 카이로를 점령했다가 두 달 만에 시르쿠가 죽자 그를 대신해서 파티마 왕조의 재상이 되어 이집트의 실권을 쥐었습니다.
2년 뒤에는 파티마 왕조를 폐하고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으며, 다시 3년 뒤인 1174년에 누르 알 딘이 죽자 1186년까지 시리아와 이라크를 병합하여 중동을 제패했습니다.
살라딘이 중동을 통합하는 동안 십자군의 사정은 점차 나빠졌습니다. 1176년에는 비잔틴의 마누엘이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당분간 십자군을 도울 힘이 없게 되었고, 예루살렘에서는 문둥병 환자였던 보두앵 4세와 5세가 잇달아 숨지고 보두앵 4세의 매제인 기 드 뤼지냥이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지도부의 혼란이 있었습니다.
살라딘은 1175년에 예루살렘과 휴전협정을 맺었으나, 본격적 전쟁만 자제했을 뿐 서로 적대행위를 그치지 않아 오던 중 1187년 초에 자신의 누이까지 포함된 대상(隊商)이 약탈되는 일이 벌어지자 마침내 그 해 3월 지하드를 선언합니다.
* 중동에 있는 살라딘 동상
1187년 7월, 살라딘이 갈릴리 호숫가의 티베리아스를 공략하자 기 드 뤼지냥은 대군을 동원하여 원정에 나섰다. 이는 중대한 실수였는데, 병력 집결지인 아크레에서 티베리아스까지의 길은 불과 30킬로미터 정도였지만 한여름에 사막을 가로질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군 특유의 전술대로 요새에 진을 치고 적의 침공을 막는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곧 십자군은 살인적인 더위와 갈증 때문에 진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길가에 매복해 있던 살라딘군은 덤불에 불을 붙여 연기를 뿜고, 화살을 날리며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더위와 갈증에 견디다 못해 말이 쓰러져 죽고, 나동그라진 기사는 갑옷을 벗어던지고 허우적거리며 달아나다가 이슬람 병사들의 칼에 쓰러졌습니다. 결국 십자군은 북쪽으로 길을 돌아 ‘하틴의 뿔’이라 알려진 고원 지대의 샘물에서 한숨을 돌리려 했습니다.
* 하틴 전투
하지만 이를 내다보고 있던 살라딘은 구릉지에서 십자군들을 사방팔방으로 포위했으며,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화살을 퍼부었습니다. 전의를 상실한 기 드 뤼지냥의 군대는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 영화에서...하틴 전투
오직 트리폴리의 레이몽이 이끌던 병력만이 대열을 허물지 않고 포위를 뚫으려 했는데, 살라딘은 그들에게는 일부러 길을 열어준 다음 남은 주병력에 총공격을 가했습니다. 이 하틴 전투로 십자군의 전력은 결정적으로 파멸했고, 살라딘은 거침없이 진격하여 9월에는 예루살렘을 에워쌌습니다.
* 영화에서...왕을 보좌했던 레이몽 백작
수비대는 완강히 저항했으나, 결국 10월 2일에 항복했습니다. 성도는 88년 만에 다시 이슬람의 소유가 되었고, 살라딘은 항복한 기독교인들이 자유롭게 도시를 떠나게 둠으로써 88년 전의 악몽 같던 학살극과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 제3차 십자군(1189~1192) : 살라딘과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대결
* 영화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사자심왕 리차드 1세
이슬람 군의 예루살렘 탈환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각국은 경악해 마지않았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와 그 후임자인 클레멘스 3세의 새로운 십자군 파병을 호소에 여러 군주가 적극적으로 호응했습니다.
그 결과물인 제3차(1187-92) 십자군은 중세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 이동이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살라딘과 리처드 1세(1157-1199)라는 중세 이슬람과 유럽의 두 영웅이 격돌했다는 점 때문에라도 각별히 주목할 만합니다.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아들로 당대 최고의 명성과 무훈을 자랑했으며, 훗날 로빈 후드 전설이라든지 월터 스콧의 소설 <아이반호> 등을 통해서 중세 기사도를 상징하는 인물로 영원히 이름을 남겼습니다.
* 앙주 퐁테브로 수도원의 사자심왕 리차드1세의 묘
제3차 십자군이 동쪽으로 진군하는 동안, 팔레스타인에서는 기독교 국가의 잔존 세력이 다시 한 번 결집하여 살라딘의 대군을 상대로 전투를 재개했습니다. 기 드 뤼지냥이 지휘하는 기독교인 군대는 무슬림이 장악한 항구 도시 아크레를 탈환하려 육지에서 포위 공격을 가했고, 그런 기독교인 군대의 배후를 살라딘의 군대가 또다시 포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살라딘은 막강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적을 쉽사리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그런 와중에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함으로써 전세는 기독교인 군대 쪽에 유리하게 돌아갔습니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신규 병력에 리처드 1세라는 탁월한 지휘관까지 보유한 기독교인 군대 앞에서는 살라딘의 대군조차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 사자심왕 리차드 1세
기독교인 군대는 1191년 7월 12일에 아크레를 함락했으며, 이후 느리지만 착실한 진군 끝에 이듬해 7월에는 예루살렘의 코앞까지 진군했습니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기독교인 군대가 무력으로 성도를 탈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순간에 군대를 되돌립니다.
때마침 잉글랜드에서는 국왕의 부재를 틈타 그 동생(훗날의 존 왕. 폭정 끝에 귀족과 시민의 압력으로 마그나카르타를 승인하는 수모를 당한 것으로도 유명하다)이 왕위 찬탈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프랑스의 필리프 2세도 일찌감치 십자군에서 발을 빼고 고국으로 돌아가 휴전 서약을 깨트리고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영토를 잠식하는 중이었습니다. 1192년 10월 9일, 마침내 살라딘과 평화조약을 맺은 리처드 1세가 팔레스타인을 떠나 고국으로 향함으로써 제3차 십자군 전쟁은 일단 막을 내립니다.
전쟁 내내 살라딘과 리처드 1세는 피차 칼끝을 겨누는 와중에도 서로를 향해 비상한 관심과 호의를 드러냈습니다. 가령 술탄은 병상에 누운 잉글랜드 국왕에게 과일과 얼음을 선물했고, 전투 도중에 땅에 서서 싸우는 상대방의 모습을 보고는 “체통에 어울리게 말에 올라 싸우시라”며 명마 두 필을 선물했습니다.
리처드 1세 역시 살라딘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췄으며, 심지어 (물론 어디까지나 말뿐이었지만) 자신의 여동생과 살라딘의 남동생을 결혼시키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떠나며 리처드 1세는 조만간 다시 돌아올 테니, 그때 가서 승부를 짓자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습니다. 이에 살라딘은 만약 내가 이 땅을 결국 누군가에게 잃어야 한다면, 차라리 당신 같은 훌륭한 적에게 잃고 싶다고 재치 있게 응수했습니다.
* 리차드 1세와 살라딘
그러나 두 사람의 재대결은 결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리처드 1세는 귀국길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붙들려 1년 넘게 억류당했으며, 살라딘은 그 와중인 1193년 3월 4일에 갑작스레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는 살라딘의 사후에도 반세기 넘게 지속되었으며, 이후로도 지속된 제5차(1217-21), 제6차(1228-9), 제7차(1248-54) 십자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덕분에 팔레스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에 의해 점령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이슬람 세력의 영토로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 이슬람 세계의 구원자로 다시 부각된 살라딘
살라딘은 탁월한 군사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포로 수백 명을 처형하거나 노예로 팔아 넘기는 등, 그 당시로서는 지극히 당연시되던 전제군주 노릇까지 굳이 마다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면에서 살라딘은 상당히 관대하고 합리적인 면모를 종종 보여주었습니다. 전투에 임해서는 종종 단호하면서도 교활한 작전을 구사했지만, 때에 따라서는 타협과 외교라는 대안을 적극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평소에도 살라딘은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했고, 종교적 의무를 항상 앞세웠으며, 결코 정무를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특히 사유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 장례 준비를 할 돈조차 없었다는 후일담은 그의 검소함과 청렴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언급됩니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살라딘은 이슬람 세계보다 오히려 유럽에서 더욱 인기를 얻고 오래 기억되었습니다. 십자군을 소재로 한 여러 낭만적 문학작품에서 살라딘은 종종 리처드 1세의 숙적이면서도 존경할 만한 인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 살라딘을 성전(지하드)의 영웅, 즉 저항과 독립의 상징으로 드높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이슬람 여러 국가의 독재 정권이나 테러를 정당화하려는 얄팍한 선전술이라는 비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살라딘 붐은 20세기 들어서 독립과 근대화를 이룬 다음까지도 툭하면 서양 강대국의 입김에 휘둘리는 신세인 이슬람 세계가 느끼는 좌절과 분노, 그리고 거부와 저항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과 이란과 이라크 등지에서는 서양과 근동, 또는 유대-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두 문명 간의 충돌이 거듭되고 있으며, 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두와 아울러 미국에서의 9.11 쌍둥이 빌딩 비행기 폭파 사건에서 정점에 달한 테러리즘의 활개로 나타났습니다.
* 제4차 십자군(1202~1204)
* 콘스탄티노플 공략전
십자군 원정 중에서도 말썽 많은 원정으로 악명 높았던 것이 제4차 십자군 원정입니다. 1198년 교황에 오른 인노켄티우스 3세는 1202년 제4차 십자군 원정을 승인했습니다.
그러나 이 원정은 영국, 프랑스, 독일의 참여를 유도하여 이집트 공략에 나서려는 교황의 의도와는 달리 고작 프랑스 북부의 기사들만이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놀라운 일을 계속 벌여 또다시 교황을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사실인즉 베네치아에 집결해서 원정에 나서려던 이들은 예상보다 훨씬 적은 병력이 모였고 게다가 베네치아에 지불해야 할 수송비도 조달하지 못했습니다. 원정에 나서지 못하는 사이 이들이 지게 된 빚은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원정대에게 베네치아 당국이 기발한 제안을 했습니다.
그 무렵 헝가리가 점유하고 있던 아드리아해에 면한 ‘자라’라는 기독교 도시를 탈환해 주면 모든 빚을 탕감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이미 종교적 열의보다는 눈앞의 이익을 중시하던 이들은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고, 1202년 1월 자라를 점령했습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교황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한 일이었고, 헝가리 왕 또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주인데 그를 공격했으니 말입니다. 그는 즉시 십자군 전체를 파문하는 놀라운 결정을 내리게 되니 십자군이란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그 무렵 비잔틴제국에서 추방당해 유럽에 머물고 있던 이사악 2세라는 자가 파문자들에게 또 다른 제안을 한 것입니다. 바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자신을 황제에 오르게 해주면 이집트 원정에 필요한 재정 지원은 물론 베네치아에 진 빚도 갚아 주고 동로마 교회들마저 로마 교황청으로 귀속시키겠다는 등이 주 내용이었습니다.
어차피 파문당한 몸, 이들이 뭘 못했을까요? 이들은 즉시 말머리를 콘스탄티노플로 돌려 또 다른 기독교 국가를 향해 달렸습니다. 결국 이사악 2세를 황제 자리에 올리지는 못했지만 수개월에 걸친 격전 끝에 1204년 4월 12일, 콘스탄티노플은 이들에게 함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십자군들과 이들의 후원자이던 베네치아 상인들은 승리의 전리품을 나누어 가진 후 콘스탄티노플 자체도 분할 통치하기로 했습니다. 이때 동로마제국에서는 플랑드르 백작인 보드앵이 황제로 추대되면서 라틴제국(1204~1261)이 성립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정교는 가톨릭교와 합쳐지니, 이것이 제4차 십자군 원정이 거둔 유일한 성과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와중에도 자신들을 파면한 교황을 잊지 않고 교황을 위해 성물(聖物)과 보물을 바치자, 교황은 이들을 즉각 용서했습니다.이 후 라틴제국은 비잔틴인들의 지속적인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1261년 비잔틴 성직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부활한 니케아제국과 투르크 족의 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 비참했던 소년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이 끝나고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프랑스 북부의 한 마을에서 양치기 소년 하나가 신을 접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티엔.
“가난한 순례자의 모습을 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 제게 빵을 청하셨습니다. 그런 후 이 편지를 임금님께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가 몰던 양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습니다.”에티엔은 그러면서 출처불명의 편지 한 통을 들고 세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수천 명의 소년소녀가 그의 뒤를 따랐고, 이들은 부모나 신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명을 완수하러 길을 나섰습니다.
물론 이성적인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예나 이제나 인간은 변치 않습니다. 남이 나서면 나도 나서고 남이 흥분하면 자신도 흥분하는 것이 평범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들을 본 수많은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났다며 돈과 양식을 들고 아이들을 찾았습니다.
게다가 신의 부름을 받은 에티엔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천사가 되어 신이 출현한 것과 같은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찢겨 나가기까지 했고...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국왕은 그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누구도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고작 열두서너 살의 어린 십자군들은 마르세유 항을 향해 발길을 돌렸고, 무리는 이미 3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3만 명의 행렬이 한 곳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라니. 얼마나 많은 식량이 필요하고 얼마나 많은 잠자리가 필요했을까요? 그들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하면서 마르세유까지 탈 없이 당도했다는 것이야말로 그 시대의 광기를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그러나 이들과 이들을 부추긴 어른들은 마르세유 상인들을 너무 우습게 보았습니다.
마르세유에서 이들을 배 일곱 척에 태운 선주들은 곧 성지를 향해 출발했는데, 두 척은 이내 난파당하고 나머지 배에 타고 있던 어린 십자군들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내리자마자 노예 상인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것은 후에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와 알렉산드리아 술탄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소년 십자군으로 잡혀갔던 노예 700여 명이 풀려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그런데 소년들의 비극은 이로써 끝나지 않았습니다. 독일에서는 열 살 된 니콜라우스라는 아이가 나타나 다시 이탈리아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독일에서 이탈리아의 브린디시 항구까지 가야 했던 그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항구에서 배를 타기 직전에 사제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고 대부분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거지 그 자체였는데, 떠나올 때의 태도와는 달리 자신들이 왜 이곳까지 왔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의욕을 상실한 지도자 니콜라우스는 어디로 갔는지 행방조차 묘연해졌고, 다른 아이들도 무리를 지어 이리저리 헤맸습니다. 그 과정에서 노예로 팔려간 아이들이 없었다면 그것은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 이 후의 십자군(5,6,7,8,9차)
제5차(1217)와 제6차(1228) 십자군은 아이유브 이집트와 대결했고, 이 중 제6차에서는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술탄 알 카밀의 협상으로 예루살렘이 다시 기독교도들에게 넘어가기도 했으나(1229) 모두 일종의 해프닝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1244년에 아이유브는 다시 한 번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며 이후 20세기에 이스라엘이 세워지기까지 성도는 내내 이슬람에 손에 있었습니다. 제7차(1248)와 제8차(1270) 십자군을 이끈 프랑스의 루이 9세는 “성인 왕”으로 불릴 만큼 돈독한 신앙심의 소유자로서 십자군의 불꽃을 되살리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사이에 이집트는 노예들로 이루어진 맘루크 왕조로, 나머지 중동 지역은 몽골의 일한국으로 판이 바뀌어갔습니다.
최후의 그리고 무익한 십자군(제9차)은 1272년에 끝났으며, 맘루크는 1268년에 안티오크를, 1289년에 트리폴리를, 그리고 1291년에 최종적으로 아크레를 함락시켜 우트르메르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했습니다.
*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전쟁사의 이면에서 십자군은 많은 유산을 남겼습니다. 특히 무역과 국제교류에서 아시아와 유럽의 교류는 십자군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활발해졌으며, 십자군 지역이 멸망한 뒤에도 그런 흐름은 이어졌습니다.
동방의 문물이 유럽으로 퍼져가면서 철학과 과학, 예술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고, 교황의 권위와 기독교의 맹목적 신앙은 하향세를 탔습니다. 무역의 중심에 선 베네치아, 제노바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부흥하고, 전쟁 도중 수립된 성전기사단 이나 구호기사단 등 기사단은 근대 유럽의 상비군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십자군은 서양이 중세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전쟁 당사자들의 주관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비록 전장에서의 만남이었지만 이 지루한 각축전을 통해 동서교류가 더욱 활성화되었고, 이슬람문명을 비롯한 동방문명에 대한 서구인들의 이해가 깊어졌습니다. 제3차 원정 이후, 향료를 비롯한 동양의 기호품에 대한 서양의 집착이 원정의 한 동기였다는 분석이 제기될 만큼 십자군 원정은 문명교류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동과 서의 길고도 처참했던 이 전쟁을 놓고 두 세계의 지식인들은 반성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일찍이 볼테르나 루소 등이 십자군의 의미를 폄하했을 뿐 아니라,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십자군을 “광신에 따른 야만행위”로 평가했습니다.
아랍 쪽에서도,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을 쓴 아민 말루프는 십자군을 기본적으로 서구의 아랍 침략전쟁으로 보면서도 결론 부분에서 ‘아랍은 반성해야 했다. 우트르메르의 도시들은 전제정치가 행해지던 아랍세계에 비하면 개인의 자유와 합리주의가 살아 있었다 (…) 십자군 치하의 무슬림 백성은 아랍 사회의 동포들보다 재산권 등에서 훨씬 보호받고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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