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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9월 (1594년 9월)
972
9월 초1일 (병자) 맑다. [양력 10월 14일]
973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촛불을 밝힌 채 이리 저리 뒤척였다. 이른 아침에 손씻고 고요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쳐보니, 중이 환속하는 것과 같고,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다. 또 병세가 덜해질지 어떤지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은 소식을 들을 조짐이었다.
974
순무 사서성(1558~1631)의 공문과 장계초고가 들어왔다.
975
9월 초2일 (정축) 맑다. [양력 10월 15일]
976
아침에 웅천현감 ∙ 소비포권관이 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977
저녁나절에 낙안군수가 와서 봤다.
978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좀 나아졌다고 하나, 원기가 몹시 약하다고 하니 염려스럽다.
979
9월 초3일 (무인) 비가 조금 내렸다. [양력 10월 16일]
980
새벽에 임금의 비밀분부(有旨)가 들어왔는데,
981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병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
982
고 하였다. 세 해 동안이나 바다에 나와 있는데 그럴 리가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죽음으로써 원수를 갚을 뜻을 결심하고 나날을 보내지마는, 적이 험고한 곳에 웅거하여 있으니, 경솔히 나아가 칠 수도 없다. 하물며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983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라 일은 어지럽건만 안으로 건질 길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랴! 밤 열시쯤에 흥양현감이 내가 혼자 앉아 있음을 알고 들어와서 자정까지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984
9월 초4일 (기묘) 맑다. [양력 10월 17일]
985
아침에 흥양현감이 와서 봤다. 밥을 먹은 뒤에 소비포권관도 왔다.
986
저녁나절에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래서 활터 정자로 내려가 앉아 활을 쏘았다.
987
원균(元均) 수사가 아홉 푼을 져 술이 취해서 갔다. 피리를 불게하다가 밤이 깊어 헤어졌다. 또 미안한 일이 있었다. 우습다.
988
여도만호가 들어왔다.
989
9월 초5일 (경진) 맑다. [양력 10월 18일]
990
닭이 운 뒤에 머리가 가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 사람을 시켜 이를 긁게 했다. 바람이 고르지 않아 나가지 않았다.
991
충청수사가 들어왔다.
992
9월 초6일 (신사) 맑고 바람이 잔잔하다. [양력 10월 19일]
993
아침에 충청수사 및 우후 ∙ 마량첨사와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저녁나절에 활터정자로 옮겨 앉아 활을 쏘았다.
994
이 날 저녁 종 효대(孝代) ∙ 개남(介南)이 어머니의 평안하시다는 편지를 가지고 왔다. 기쁘고 다행함을 어디다 비기랴!
995
방필순(方必淳)이 세상을 떠나고 방필순이 그 가족을 데리고 우리집으로 온다고 한 말을 들었다. 우습다.
996
밤 열시쯤에 복춘(福春)이 왔다.
997
저물녘에 김경로(金敬老)가 우도(右道)에 이르렀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998
9월 7일 (임오) 맑다. [양력 10월 20일]
999
아침에 순천부사의 편지가 왔는데, 순찰사(홍세공)가 초열흘 쯤에 본부(순천)에 도착된다고 했다. 좌의정(윤두수:1533~1661)도 도착된다고 했다 심히 불행한 일이다. 순천부사가 진에 있을 때 거제로 사냥을 보냈던 바, 그들은 남김없이 다 잡았다는데, 그 사정을 전혀 보고하지 않은 것이 몹시 해괴하다. 그래서 편지를 보낼 때에 그것을 지적하여 보냈다.
1000
9월 8일 (계미) 맑다. [양력 10월 21일]
1001
장흥부사(황세득)을 헌관(獻官)으로 삼고, 흥양현감(배흥립)을 전사(典祀)로 삼아서 초아흐레날 둑제를 지내려고 입재(入齋)시켰다. 첨지 김경로가 여기 왔다.
1002
9월 초9일 (갑신) 맑다. 저물녘에 비가 오다가 그쳤다. [양력 10월 22일]
1003
여러 장수들이 활을 쏘았다. 삼도가 아울러 모였는데, 원균(元均) 수사는 병으로 오지 않았다. 첨지 김경로도 같이 쏘고서 경상으로 돌아가 잤다.
1004
9월 초10일 (을유) 맑고 바람도 잔잔하다. [양력 10월 23일]
1005
사도첨사가 활쏘기 대회를 열었는데, 우수사도 모였다.
1006
김경숙(金敬叔)이 창신도로 되돌아갔다.
1007
9월 11일 (병술) 맑다. [양력 10월 24일]
1008
일찌기 수루 위로 나갔다.
1009
남평(南平)의 색리와 순천의 격군으로서 세 번이나 양식을 훔친 자를 처형했다.
1010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1011
저녁나절에 충청 수사가 와서 봤다.
1012
소비포권관은 달빛을 따라 본포로 돌아갔는데, 까닭은 원수사가 몹시 모함하려는 때문이었다.
1013
9월 12일 (정해) 맑다. [양력 10월 25일]
1014
일찌기 김암(金岩)이 방에 왔다.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의 종놈이 돌아가는 길에 편지답장을 써 보냈다.
1015
우수사 ∙ 충청수사가 함께 왔다. 장흥부사가 술을 내어 함께 이야기하다가 몹시 취해서 헤어졌다.
1016
9월 13일 (무자) 맑고 따뜻하다. [양력 10월 26일]
1017
어제 취한 술이 깨지 않아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1018
아침에 충 청우후가 와서 봤다. 또 조도어사 윤경립(尹敬立)의 장계 두 통을 보니, 하나는 진도군수를 파면해 달라는 것이고, 하나는 수륙 양군이 서로 침해하지 말라는 것과 수령들을 전쟁에 보내지 말라는 것이니, 그 뜻은 자못 임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019
저녁에 하천수가 장계 회답과 홍패(과거 합격자 명단) 아흔일곱 장을 가지고 왔다. 영의정 편지도 가져 왔다.
1020
9월 14일 (기축) 맑다. [양력 10월 27일]
1021
흥양현감이 술을 바쳤다. 우수사 ∙ 충청수사가 같이 활을 쏘았다. 방답첨사가 공사례를 했다.
1022
9월 15일 (경인) 맑다. [양력 10월 28일]
1023
일찌기 충청수사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망궐례를 했다. 우수사는 약속을 하고도 병을 핑게하니 한탄스럽다. 새로 합격한 사람들에게 홍패를 나누어 주었다.
1024
남원 도병방과 향소 등을 잡아 가두었다.
1025
충청우후(원유남)가 본도로 돌아갔다.
1026
종 경(京)이 들어왔다.
1027
9월 16일 (신묘) 맑다. [양력 10월 29일]
1028
충청수사 및 순천과 함께 이야기했다. 이 날 밤 꿈에 아들을 보았는데, 경의 어미가 아들을 낳을 징조다.
1029
9월 17일 (임진) 맑고 따뜻하다. [양력 10월 30일]
1030
충청수사 ∙ 순천부사 ∙ 사도첨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1031
우후 이몽구가 둔전에 마당질하는 일로 나갔다. 효대(孝代) 등이 나갔다.
1032
9월 18일 (계사) 맑고 지나치도록 따뜻하다. [양력 10월 31일]
1033
충청수사 및 흥양현감과 함께 종일 활을 쏘고서 헤어졌다.
1034
저물 무렵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왔다.
1035
이수원(李壽元) 및 담화(曇花)가 들어왔다. 복춘(福春)이 들어왔다.
1036
이 날 밤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을 못 이루었다.
1037
9월 19일 (갑오)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11월 1일]
1038
흥양현감 ∙ 순천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해남현감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흥양현감 ∙ 순천부사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1039
9월 20일 (을미) 새벽에 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비가 잠깐 들었다. [양력 11월 2일]
1040
홀로 앉아 간 밤의 꿈을 기억해 봤다. 꿈에 바다 가운데 외딴 섬이 달려 오다가 눈 앞에 와서 주춤 섰는데,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은 우뚝 서서 끝내 그것을 구경하니, 참으로 장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애걸하고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나는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다. 이것은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갈 징조다.
1041
충청수사와 흥양현감이 왔다. 거제현령도 와서 보고 곧 돌아갔다.
1042
체찰사의 공문에 수군에게 군량을 받아 들여 계속 대라고 했다. 잡아 가두었던 친족과 이웃을 다 풀어 주었다고 했다.
1043
9월 21일 (병신) 맑다. [양력 11월 3일]
1044
아침에 활터정자에 나가 앉아 공문을 처리하여 주고, 저녁나절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 순천부사 ∙ 충청수사가 종일 이야기 했다.
1045
어둘 무렵 여러 장수들이 뛰어넘기를 하게 하고, 또 사병 들로 하여금 씨름을 하게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1046
9월 22일 (정유) [양력 11월 4일]
1047
아침에 활터 정자에 앉았다. 우수사 ∙ 장흥부사 ∙ 경상우후가 와 서 명령을 듣고서 갔다.
1048
원수의 비밀서류가 왔는데, 27일에는 꼭 군사들을 출동시키라는 것이었다.
1049
9월 23일 (무술) 맑으나 바람이 사나왔다. [양력 11월 5일]
1050
아침에 활터 정자에 올라가 공문을 써 보냈다.
1051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군사기밀을 논의하고 갔다.
1052
낙안의 군사 열한 명과 방답의 수군 마흔다섯 명을 점고했다. 고성 사람들이 연명으로 하소연하였다. 진주 강운(姜雲)의 죄를 다스렸다. 보성에서 데려온 소관(召官) 황천석(黃千錫)을 끝까지 추궁했다. 광주에 가두었던 창평현 색리 김의동(金義同)을 사형하 라는 전령을 내보냈다.
1053
저녁에 충청수사와 마량첨사가 와서 봤다. 깊은 방이 들어서야 돌아갔다.
1054
초저녁에 복춘(復春)이 와서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다가 닭이 운 뒤에야 돌아갔다.
1055
9월 24일 (기해) 맑고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11월 6일]
1056
아침에 대청에 앉아서 공무를 봤다. 아침식사를 하는데 충청수사와 같이 먹었다.
1057
오늘 더그레(號衣: 각 영문의 군사와 馬上才의 軍이 입는 세 자 락 난 웃옷)을 나누는데, 전라좌도는 누른 옷 아홉 벌, 전라우도는 붉은 옷 열 벌, 경상도에는 검은 옷 네 벌이었다.
1058
9월 25일 (경자) 맑으며, 바람이 조금 잤다. [양력 11월 7일]
1059
첨지 김경로는 군사 일흔 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1060
저녁에 첨지 박종남(朴宗男)은 군사 육백 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1061
조붕(趙鵬)도 와서 같이 자면서 밤에 모여 앉아 이야기했다.
1062
9월 26일 (신축) 맑다. [양력 11월 8일]
1063
새벽에 곽재우(郭再祐) ∙ 김덕령(金德齡) 등이 견내량(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이르렀으므로 박춘양(朴春陽)을 보내어 건너온 까닭을 물었더니, 수군과 합세할 일로 원수(권율)가 전령하였다고 하였다.
1064
9월 27일 (임인) 아침에 맑더니 저물녘에 잠깐 비가 내렸다. [양력 11월 9일]
1065
아침에 출항하여 포구에 나가자 여러 배들도 일제히 출항하여 적도(거제시 둔덕면) 앞바다에 대었다. 그러니 첨지 곽재우(郭再祐) ∙ 충용 김덕령(金德齡) ∙ 별장 한명련(韓明璉) ∙ 주몽룡(朱夢龍) 등이 와서 약속하고 각각 원하는 곳으로 갈라 보냈다.
1066
저녁에 병사 선거이(宣居怡)가 배에 이르렀으므로 본영의 배를 타게 했다.
1067
저물무렵 체찰사의 군관 이천문(李天文) ∙ 림득의(林得義) ∙ 이홍사(李弘嗣) ∙ 이충길(李忠吉) ∙ 강중룡(姜仲龍) ∙ 최여해(崔汝諧) ∙ 한덕비(韓德備) ∙ 이안겸(李安謙) ∙ 박진남(朴振男) 등이 왔다.
1068
밤에 잠깐 비가 내렸다.
1069
9월 28일 (계묘) 흐리다. [양력 11월 10일]
1070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치는 일로 길흉을 점쳤 더니, 길한 것이 많았다. 첫 점은 활이 살을 얻은 것과 같고, 다 시 치니,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았다.
1071
바람이 고르지 않았다.
1072
흉도 안바다에 진을 치고 잤다.
1073
9월 29일 (갑진) 맑다. [양력 11월 11일]
1074
출항하여 장문포(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앞바다로 마구 쳐들어 가니, 적의 무리는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나오지 않는다.
1075
누각을 높이 양쪽 봉우리에는 진지를 쌓고서 항전하러 나오지 않는다. 선봉의 적선 두 척을 무찔렀더니, 뭍으로 내려가 도망가버렸다. 빈 배들만 쳐부수고 불태웠다.
1076
칠천량에서 밤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