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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백석 산수화의 예술적 가치는 도대체 기하학이다齐白石山水画艺术价值到底几何
출처: 미술신문 소스:EK 이페어케이 플러스
2015년 초, 오랫동안 숨겨온 궈슈이(秀秀儀)의 구장대작 치바이시(白白石)의 '산수십이병(山水十二横)'이 시장에 등장해 10억 위안에 달하는 경매 시작가를 자랑했다.치바이시는 화조초충화와 수족화에 가장 능숙하고 유명한데 비해 그의 산수화의 예술적 가치는 도대체 얼마나 됩니까?그의 산수화의 특색은 무엇입니까?그의 산수화는 일찍이 어떤 비난을 받았습니까?그의 산수화의 가격과 시장 시세는 얼마입니까?
회화 장르에서 치바이시는 만능 화가이지만 화조, 풀벌레, 수족 새우, 게를 가장 많이 그리고 인물화 수량이 다음이고 산수화가 가장 적어 수량이 10분의 1도 안 된다.치바이시는 초기 친구 추강을 위한 소품 산수화를 그릴 때 "여는 사람을 위해 산수를 그리지 않는 것, 즉 가끔 하는 일이 있을 뿐, 한 구석에 골짜기가 있을 뿐"이라고 썼는데, 치바이시에게 산수화는 '우위("爲)'의 작품이지 화조초충처럼 대량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치바이시는 1930년대와 1930년대에 소량의 산수화를 그렸는데, 적지 않은 수가 다른 사람의 요청에 따라 그렸다.그가 1922년 친구 능직지를 위해 그린 산수화처럼 직지도형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그림은 모두 권내 친구들의 상이다.영국 예술사가 소립문은 을축년(1949년)에 '백석강화병제구구(白石强畵题題舊句)'라는 문구와 함께 '백석강화병제구(白石强畵并題舊句)'라는 제목의 제백석(画白石)의 산수화(山水畵)를 소장했다.
치바이시(画白石)가 산수화를 거의 그리지 않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1917년 다시 베이핑으로 돌아와 중시되지 않았고, 특히 당시 베이징 화단에서 유행했던 '복고' 산수화 스타일과 맞지 않아 구설수에 밀려났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1930년대 북경에는 푸유, 천스쩡, 푸쉐차이, 샤오첸중, 호패형, 천샤오메이 등 산수화로 유명한 화가들이 대거 모였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이러한 '호사'와 '중국화학연구회'를 위주로 한 산수화가들은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복고'파이며, 주로 송원, 명사, 청나라의 '사왕'을 공부했고, 당시의 수집시장도 그들을 추앙했고, 치바이시의 독창적인 산수화는 자연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외면받았다.일부에서는 제백석의 산수화를 야호선이라고 욕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그는 산 밖 누대는 운외봉이고 장가는 만고에 이와 같으며, 30년 동안 뇌동법을 삭제하여 동료를 얻어 이 옹을 욕했다고 시를 썼다."내가 산수를 그리는데, 시시때때로 비방을 해서 몇 번 절필하였다."
1928년 호패형은 《호사월간》 설경전문지를 편집하기 위해 치바이시(景白石)에게 설경산수를 한 폭 그려달라고 부탁했다.치바이시는 "남은 나이에는 인물화를 배우고, 30세 이후에는 산수화를 배우고, 40세 이후에는 꽃과 벌레와 새를 전문으로 그린다.금냉암 선생이 하루 동안 종이를 들고 설경을 그리시니, 산수와 인연을 끊은 지 이미 이십여 년이 되었는데, 어찌 그림이 될 수 있겠는가?하지만 선생의 뜻은 거절할 수 없습니다, 비록 추악하기 짝이 없으나 어쩔 수 없습니다."이에 그는 "여화산수 20여 년, 전청은 청등(靑藤)·대첩자(大子子) 외에 호사가(好事者)는 왕(王)의 성을 화성(畵聖)으로 삼고 나머지는 장인(章家) 작품으로 삼았다.그러나 여화의 산수는 결코 칭찬할 사람이 없고, 중년은 산도를 수십 장 빌려 그린 것일 뿐 노년에 절필했다."자기의 허탈함을 털어놓다.
치바이시는 기사(己年)년(1929년)에 그린 산수화에서 "어디 취옹을 가만히 두느냐.화산역주(畵山易酒)는 찾는 사람이 없고, 강 건너편 사람은 자풍을 본다"고 말했다.완전히 그 당시 산수화가 지음소문진(知音人人)이 부족했던 자신의 자황을 묘사한 것이다.
1930년대 치바이시(水白石)의 산수화는 개인의 풍격이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도식이 너무 기발하고 필치가 뛰어나 당시 유행했던 복고적이고 세밀하며 세련된 산수화 스타일과는 너무 차이가 나 그의 산수화를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또 다른 산수화에서 제백석은 "여중중경사(画中京師)에 와서 그림을 많이 그렸다.처음에 산수를 하지 않고 친구를 위해 네 개의 작은 스크린을 그렸으나, 공께서 이를 보고 웃지 않으시고, 이것을 그리게 하셨습니다.화법은 냉일(逸日)에서 천혜(天趣)를 찾는 것이 소연(然然)한 것 같다.당시 제백석의 산수화는 진사증 외에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다.1932년 서비홍은 제백석을 위해 《제백석화첩》을 편찬하고 서문을 작성하였는데, 이 중 산수화 20점을 선택하여 서비홍이 제백석 산수화를 감상하고 추앙하였음을 알 수 있다.치바이시는 쉬비홍이 보낸 그림책 견본에 낙서를 하며 "그동안 산수를 그리는 것은 오직 큰 폴리만이 변할 수 있고, 나도 변할 수 있다.이 책은 비홍이 인쇄를 하기 때문에 산수가 매우 많다.어찌 비홍이 조로 화신할 수 있겠는가, 나의 산수화가 전해져 온 천하 사람들이 석도만 아는 것이 아니겠는가."
제백석 산수화의 변화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30세에 산수화를 배우기 시작하여 1894년부터 1903년까지 10년을 임고학습기로 사왕, 석도, 팔대산인의 산수화를 주로 공부하였고, 1903년부터 1922년까지는 변혁의 과도기로 오출오귀하여 명산대천을 탐방하여 자연을 스승으로 삼고 《차산도》, 1922년 이후는 풍격의 성숙기로 명청 이래의 산수도식과 준찰점염의 기법을 철저히 배제한 치백석 자신의 개인 산수도식과 언어를 형성하였다.
치바이시 초기 산수화는 《겨자원 화보》에서 뚜렷하게 계몽되었으며, 베이징 화원에 소장된 산수화 원고 몇 점(《객계림위곽오조고》)을 보면 구도나 선은 매우 전통적이다.현재 제백석 최초의 산수화는 1894년 31세의 나이에 그린 《용산칠자도》로, 산석준법은 청나라의 '사왕' 산수의 틀에 박힌 것으로 알려져 있어 특별한 점이 없다.1903년 화산도선(華山圖》,)은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 전통 산수화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제백석(自己白石) 자신의 뚜렷한 개인기가 없었다.1910년의 《차산도(图山圖)》는 치바이시(白白石)의 과도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진경(眞景)을 묘사하기 위해 노력하고 구도는 소박하고 심플하지만, 필치가 아직 개방적이고 억척스럽지 못하다.이후 20~30년대 산수화는 치바이시 산수화의 진정한 성숙기로, 구도가 참신하고 먹물이 풍부하며 붓을 놓고 휘둘러 자연스럽고 개인적인 스타일이 두드러져 치바이시 자신의 산수화 언어 도식을 찾았다.
객관적으로 치바이시의 산수화는 전통과 혁신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전통적으로 치바이시 산수화는 스타오, 팔대산인, 미불 세 사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1922년 치바이시(白白石)가 그린 '극림대첩자팔개(劇大大子子八開)' 산수책에서 석도에 대한 그의 추앙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치바이스는 "나는 폴리(화백 석도의 별호)를 평생 가장 존경했다"며 "누가 붓을 들이대면 귀신을 울리고 2000여 명의 스승을 가르쳤다"고 시를 지었다.스타오 외에도 미씨운산도 제백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산수화에서 크게 묵법으로 표현돼 당시 동년배 산수화가들 사이에서 흔치 않았다.구도를 간결하게 하고 붓으로 대담하게 하는 것은 팔대산인의 화풍을 분명히 본받았다.팔대산인은 제백석에 평생 영향을 미쳤고, 그의 초기 화조화는 매우 전형적인 팔대산인의 냉일화풍으로, 마찬가지로 산수화에서도 팔대산인은 제백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치바이시(水白石)의 산수화는 혁신적인 성분이 더 컸고, 특히 1903~1909년 오출오귀(五出五") 이후 큰 변화가 있었다.사생할 것이 많아지자 1910년 제백석은 여행에서 얻은 산수화 원고를 정리하여 50여 점의 《차산도(山山圖)》 한 세트로 그렸는데, 도식과 필묵은 완전히 자가화법이었다.진사(陳師)는 "나를 그리면 자화자합(自畵自合古)인데 왜 손을 낮추어 동족을 구하느냐"는 발문을 써서 치바이시(画白石)의 산수화를 높게 평가한 바 있다.예를 들어 충칭삼협박물관에 소장된 '산수십이병'의 한 세트 중 하나는 '나는 안남을 맛보고 친저우의 동쪽에서 철교를 건너면 만초 중견야옥이 있고 경치가 매우 좋아 이미 산도를 빌렸다'는 제목이다.치바이시는 계림의 산수를 그리는 것을 가장 좋아했는데, "나는 장년시대에 많은 명승지를 여행했다. 계림 일대의 산수는 형식이 가파르다. 나는 다른 곳의 산수는 늘 신기하지 않지만 화산도 웅장하지만 수려하고 아름답다.나는 평생 계림 일대의 풍경을 그리며 기봉이 우뚝 솟아 있고 평탄에서 고기를 잡거나 산거도를 그리는 것도 이강변에서 보았던 것이다."진경에 대한 관찰사생으로 제백석의 산수화는 천지개벽이 되었고, 그림은 생생하게 그려져 옛사람의 모사에서 자기표현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비교적 경직된 산수화 필묵(筆齐)이었던 제백석(后白石)은 1920년대 이후 필묵(筆完全)이 완전히 풀리면서 1922년경부터 자신만의 산수화법이 형성되었다.그는 한 폭의 '산수사평(山水四屏》)'에서 "이 산수화법은 옛사람들을 볼 수 없고, 비록 큰 세탁물이 나와 비슷하지만, 이렇게 기졸한 것은 있을 수 없다.제백석은 자신의 산수화에 대해 상당히 자부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923년부터 치바이시(画白石)의 산수화(山水畵)는 점차 색채가 가미되어 농염한 색채가 돋보였다.갑자년(1924년)의 '린교연류도' '노부간숙계림산'과 을축년(1925년)의 '산수십이병'은 치바이시 산수화의 철저한 변법 성공을 상징하며 수백 년 동안 중국 산수화를 뒤덮었던 구유정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수구(守舊)를 답습하지 않고 자창가법(自家家法)으로 구도·필묵(筆还是)·입의(立意)를 불문하고 전무후무하다.
치바이시의 산수화는 사생을 제창하고, 자연의 진산진수를 묘사하며, 가슴속의 구렁텅이를 묘사하고, 옛사람들을 그대로 베끼는 것을 경멸하여, 20세기 중국화가 현실의 산수를 묘사하는 효시였다.그는 "가슴 속의 물이 천하에 기이하니 모사 손 한 켤레를 삭제하라"는 시운을 썼고, 화가 가슴 속의 중산수를 강조하며 옛사람의 모사만 하는 것을 반대했다.또 다른 시에서는 "근관(关關)을 치욕적으로 듣고 종파(宗派)는 칭찬하지만 체면은 깎인다.마음은 천하제일이다, 노부는 계림산을 보는 것이 익숙하다.전통파가 복고만 하는 것에 대한 시큰둥한 반응이다.그가 그린 '만죽산거도', '파초서방' 등은 모두 실제 풍경을 바탕으로 개인의 재창작을 더해 삶의 분위기가 짙을 뿐만 아니라 고도로 정제되고 요약되어 있다.1922년 제백석은 한 그림에 "그림은 옛사람의 진적을 많이 읽고, 그 다음 옛사람의 습성을 버리고, 화격을 만들지 말라"고 썼다.중국미술관에는 '강안수봉(江:"秀》,)'이라는 제목으로 '행자오(坞子民用) 노인은 우리 집 법'이라는 제목의 '강안수봉(江秀秀峰)'이 소장되어 있다.감히 독자적으로 만들고 자립하는 것은 치바이시 산수화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대문자의 필법을 사용하여 산수를 그리는 것은 치바이시의 근대 중국 산수화에 대한 큰 공헌으로 수백 년 동안 볼 수 없었던 것이다.명청 이래의 산수화는 심주, 문징명, 구영, 당인, 동기창, 석도 '사왕'을 막론하고 정교하고 촘촘하게 그려져 있어, 비록 글의 뜻이 있더라도 소소한 의미에 머물러 있고, 오직 8대 산인들만이 대문자의 글과 먹의 산수를 가지고 있다.제백석 증운: "그림은 필방사(筆方使)로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해야 한다." 여기서 "필이 있다"는 뜻의 대문자의 초마이종횡을 말한다. 제백석은 서위, 팔대산인의 묵법, 필법을 신기하게 계승하여 그 자신의 산수화에 창조적으로 적용하였다. 산돌의 그리기와 점염, 나무의 그림법은 조방하고 간결하며 휘둘러 쓰기가 자유로워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한다.제백석은 한 그림에 "여자는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장인이 만든 것으로 여겼는데, 큰 잎이 거칠고 함부로 칠하지 않으면 즐겁지 않다"고 썼다.치바이시는 청나라 문인 산수화의 경직성과 세련됨을 명확히 하고 붓을 크게 운반하여 먹을 깔고 붓을 놓고 직접 써서 자신을 즐겁게 하고 보는 이를 즐겁게 했다.1930년대 명청, 사왕의 복고풍에 치바이시의 대사의 산수화 풍조가 너무 앞서서 비난과 욕설을 듣는 것은 당연하다.
제백석 산수화의 희귀성은 그 가치를 결정짓는다.치바이시의 산수화는 최근 국내 촬영장에서 많이 찍혔고, 2011년 11월 가덕추박에서 치바이시의 '산수책'(12개)이 1억9400만 위안에 낙찰된 바 있다.같은 해 가을 한해에서 찍은 '경운대관-근현대 서화' 특별장의 '파초서옥도'는 9315만 위안으로 백석산수화의 단일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했다.이후 치바이시의 산수화 진품도 촬영장에 속속 등장해 2013년 5월 가더춘의 '노사호랑 청장화 특별전'에서 '비 온 뒤 운연' 한 점이 1265만 위안, '만죽산거' 한 점이 1150만 위안에 낙찰됐다.
치바이시는 초기에 팔대산인의 산수화를 여러 차례 모사한 적이 있어 팔대산인의 필치신운을 많이 받았다.
치바이시(水白石)의 산수화는 혁신적인 성분이 더 컸고, 특히 1903~1909년 오출오귀(五出五") 이후 큰 변화가 있었다.사생할 것이 많아지자 1910년 제백석은 여행에서 얻은 산수화 원고를 정리하여 50여 점의 《차산도(山山圖)》 한 세트로 그렸는데, 도식과 필묵은 완전히 자가화법이었다.진사(陳師)는 "나를 그리면 자화자합(自畵自合古)인데 왜 손을 낮추어 동족을 구하느냐"는 발문을 써서 치바이시(画白石)의 산수화를 높게 평가한 바 있다.예를 들어 충칭삼협박물관에 소장된 '산수십이병'의 한 세트 중 하나는 '나는 안남을 맛보고 친저우의 동쪽에서 철교를 건너면 만초 중견야옥이 있고 경치가 매우 좋아 이미 산도를 빌렸다'는 제목이다.치바이시는 계림의 산수를 그리는 것을 가장 좋아했는데, "나는 장년시대에 많은 명승지를 여행했다. 계림 일대의 산수는 형식이 가파르다. 나는 다른 곳의 산수는 늘 신기하지 않지만 화산도 웅장하지만 수려하고 아름답다.나는 평생 계림 일대의 풍경을 그리며 기봉이 우뚝 솟아 있고 평탄에서 고기를 잡거나 산거도를 그리는 것도 이강변에서 보았던 것이다."진경에 대한 관찰사생으로 제백석의 산수화는 천지개벽이 되었고, 그림은 생생하게 그려져 옛사람의 모사에서 자기표현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비교적 경직된 산수화 필묵(筆齐)이었던 제백석(后白石)은 1920년대 이후 필묵(筆完全)이 완전히 풀리면서 1922년경부터 자신만의 산수화법이 형성되었다.그는 한 폭의 '산수사평(山水四屏》)'에서 "이 산수화법은 옛사람들을 볼 수 없고, 비록 큰 세탁물이 나와 비슷하지만, 이렇게 기졸한 것은 있을 수 없다.제백석은 자신의 산수화에 대해 상당히 자부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923년부터 치바이시(画白石)의 산수화(山水畵)는 점차 색채가 가미되어 농염한 색채가 돋보였다.갑자년(1924년)의 '린교연류도' '노부간숙계림산'과 을축년(1925년)의 '산수십이병'은 치바이시 산수화의 철저한 변법 성공을 상징하며 수백 년 동안 중국 산수화를 뒤덮었던 구유정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수구(守舊)를 답습하지 않고 자창가법(自家家法)으로 구도·필묵(筆还是)·입의(立意)를 불문하고 전무후무하다.
치바이시의 산수화는 사생을 제창하고, 자연의 진산진수를 묘사하며, 가슴속의 구렁텅이를 묘사하고, 옛사람들을 그대로 베끼는 것을 경멸하여, 20세기 중국화가 현실의 산수를 묘사하는 효시였다.그는 "가슴 속의 물이 천하에 기이하니 모사 손 한 켤레를 삭제하라"는 시운을 썼고, 화가 가슴 속의 중산수를 강조하며 옛사람의 모사만 하는 것을 반대했다.또 다른 시에서는 "근관(关關)을 치욕적으로 듣고 종파(宗派)는 칭찬하지만 체면은 깎인다.마음은 천하제일이다, 노부는 계림산을 보는 것이 익숙하다.전통파가 복고만 하는 것에 대한 시큰둥한 반응이다.그가 그린 '만죽산거도', '파초서방' 등은 모두 실제 풍경을 바탕으로 개인의 재창작을 더해 삶의 분위기가 짙을 뿐만 아니라 고도로 정제되고 요약되어 있다.1922년 제백석은 한 그림에 "그림은 옛사람의 진적을 많이 읽고, 그 다음 옛사람의 습성을 버리고, 화격을 만들지 말라"고 썼다.중국미술관에는 '강안수봉(江:"秀》,)'이라는 제목으로 '행자오(坞子民用) 노인은 우리 집 법'이라는 제목의 '강안수봉(江秀秀峰)'이 소장되어 있다.감히 독자적으로 만들고 자립하는 것은 치바이시 산수화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대문자의 필법을 사용하여 산수를 그리는 것은 치바이시의 근대 중국 산수화에 대한 큰 공헌으로 수백 년 동안 볼 수 없었던 것이다.명청 이래의 산수화는 심주, 문징명, 구영, 당인, 동기창, 석도 '사왕'을 막론하고 정교하고 촘촘하게 그려져 있어, 비록 글의 뜻이 있더라도 소소한 의미에 머물러 있고, 오직 8대 산인들만이 대문자의 글과 먹의 산수를 가지고 있다.제백석 증운: "그림은 필방사(筆方使)로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해야 한다." 여기서 "필이 있다"는 뜻의 대문자의 초마이종횡을 말한다. 제백석은 서위, 팔대산인의 묵법, 필법을 신기하게 계승하여 그 자신의 산수화에 창조적으로 적용하였다. 산돌의 그리기와 점염, 나무의 그림법은 조방하고 간결하며 휘둘러 쓰기가 자유로워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한다.제백석은 한 그림에 "여자는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장인이 만든 것으로 여겼는데, 큰 잎이 거칠고 함부로 칠하지 않으면 즐겁지 않다"고 썼다.치바이시는 청나라 문인 산수화의 경직성과 세련됨을 명확히 하고 붓을 크게 운반하여 먹을 깔고 붓을 놓고 직접 써서 자신을 즐겁게 하고 보는 이를 즐겁게 했다.1930년대 명청, 사왕의 복고풍에 치바이시의 대사의 산수화 풍조가 너무 앞서서 비난과 욕설을 듣는 것은 당연하다.
제백석 산수화의 희귀성은 그 가치를 결정짓는다.치바이시의 산수화는 최근 국내 촬영장에서 많이 찍혔고, 2011년 11월 가덕추박에서 치바이시의 '산수책'(12개)이 1억9400만 위안에 낙찰된 바 있다.같은 해 가을 한해에서 찍은 '경운대관-근현대 서화' 특별장의 '파초서옥도'는 9315만 위안으로 백석산수화의 단일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했다.이후 치바이시의 산수화 진품도 촬영장에 속속 등장해 2013년 5월 가더춘의 '노사호랑 청장화 특별전'에서 '비 온 뒤 운연' 한 점이 1265만 위안, '만죽산거' 한 점이 1150만 위안에 낙찰됐다.
편집/ 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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