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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결 잠깐 잊고 머리좀 쉬어가세요.
한반도를 침략할 때 수나라, 당나라처럼 정예병력이 30만이 되면,
병력이 되니까 성을 하나 하나 다 점령하면서, 수도로 진격합니다.
병자호란의 청군, 고려 거란 소배압이 정예기병은 10만 정도라,
성은 다 포기하고 성을 우회해서 수도로 직공합니다.
현지 약탈 빼고는 압록강 넘어서는 본국으로부터 무보급 상태입니다.
수양제, 당태종은 성 점령하느라 세월아 네월아 하다가 퇴각한 군대였고,
고려 현종때 거란 요나라성종 40만(?)은 수도 개경을 점령했지만,
나주로 도망간 고려 왕을 못 잡은 상태에서,
남하하며서 점령했던 성을 고려군한테 다시 뺏기면서,
전세가 역전돼,
보급로 차단, 퇴로를 차단당할까봐 이렇다할 성과도 없이 어쩔 수 없이 퇴각하다가,
가는 도중 고려군한테 여러 번 뚜들어 맞습니다.
송과 대치하던 상황에서 대군을 고려에 오래 묶어 둘 수가 없었죠.
압록강을 막 건너 의주성을 단 한번도 점령을 하지 못해,
보급로가 항상 위태로운 상황에서 왕을 추격해서 개경 밑으로 남하할 여력이 없었죠.
귀주대첩으로 알려진 소배압 10만 요나라 황실정예기병과,
병자호란 10만 청군의 전력을 비교하면,
병력은 비슷하지만, 병력의 질적인 면에서 소배압 거란군 전력이 높다고 봅니다.
거란 소배압군은 기병 10만이 한덩이가 되어서 남하한 반면,
청군은 느린 한족 보병까지 섞인 상태로,
인조를 잡으러 최전방에 선 것은 여진기병 수천이었습니다.
광해군이 만주로 조선군을 파병했던 사르후전투 때에도 여진은 병력이 얼마 안 나옵니다.
여진 자체 병력이 5만이 채 안 나옵니다.
명나라가 10만을 만주로 보내면서 부대를 몇 조각으로 나눠 보내는 패착을 범했는데.
2-3만 규모의 명나라 각개 부대를 여진 기병이 각개격파했던 것이죠.
임란때 왔던 명군 장수들 여기서 많이 죽습니다.
우리 역사책에는 광해군이 청과 싸우는 척만 하라는 부분을 크게 다루는데.
실제 전투는,
명군 주력이 다 깨진 상태에서 마지막 남은 조선군이 부차전투에서
들판에서 들이닥친 여진기병 돌격 한방에 조선군 조총수들이 쓸려 나갑니다.
절반 가까이 되는 들판에 있는 조총수들은 거의 몰살당하고,
언덕에 주둔했던 병력만 항복해서 포로가 되어 나중에 만주를 탈출해서 돌아온 것일뿐.
싸우는 척할 시간 자체가 없었어요.
화약 연기에 가려서 여진 기병돌격 한방에 조선군 조총병이 무너진 전투였습니다.
전체 전력으로는 여진 애들이 명나라 치기에는 많이 딸렸고,
여진 지기들 힘으로는 산해관을 돌파 못하던 애들인데,
명나라가 자책골로 중원을 먹은 겁니다.
역대 중원을 정벌한 군대 중 젤 약한 애들이 청나라 애들입니다.
요나라 소배압의 10만과 청태종 10만 병력은 똑같지만,
소배압이는 귀주대첩에서 참패했고,
청태종은 인조 꼴아박게 해서,
겉으로 보면 소배압군 < 청태종군 같지만,
실은 고려군 >>> 조선군 차이였습니다.
고려는 이미 전쟁이 난다고 보고,
강감찬을 비롯해 북계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를 해놓은 상태였고.
거란하고 수십년 전쟁을 통해서 군대수준이 거란수준에 올라온 상태였습니다.
역사시간에 고려시대 예비군 광군이 나오는데.
고려는 실제로 20만 광군 병력을 북쪽 국경 성들에 배치합니다.
조선은 임란 터질거 알았으면서도 이런거 안 했죠.
성을 수리하고 새로 짓고, 여진족 2인자를 사로잡은 이순신 같은 유능한 인물을 발탁해 남쪽 전선으로
보내긴 했는데, 거기까지고 왜군과 맞서 싸울 정규군 수준의 병력은 양성하지 못했습니다.
임란사 어디에도 조선군 1만 이상의 병력이 안 보입니다.
(와키자카 2천에 도망간 근왕병 5만은 농민이지 군대가 아닙니다.)
이에 반해 명나라 육군이 4만에서 10만 가까이 조선에 배치된 상태였습니다.
귀주대첩과 인조가 꼴압가은 차이는,
전쟁에 대비해 병력을 일으킨 나라와 갖은 변명을 해대며 병력을 일으키지 않은 나라의 차이입니다.
임란때 100만명이 죽거나 끌려갔는데, 주로 병들고 굶어 죽었습니다.
인구가 1,000만이 될뚱 말뚱 하던 때 병자호란때 잡혀간 사람이 50만이에요.
남한산성 이북에 살던 7명 중에 1명 꼴로 잡혀 갔습니다.
병란때 깨진 거 얘기하면 임란 들먹입니다.
인조가 의심했다고 반란 일으켜 서울을 점령한 이괄난(이때 북쪽국경 2만 정예병 없어짐)을 들먹이는데.
이괄난 터지고 나서 바로 전쟁이 난게 아니고.
임경업이 의주 지키고 있었죠. 국경에 병력이 없던게 아니었어요.
정예기병 일부만 선봉으로 보내고.
다른부대 천천히 합류해서 나중에 10만이 됩니다. 보병도 섞여 있어서..
청군 기병 선봉이 황해도를 지날 때,
처음으로 조정에 보고합니다.
이건 나라도 아닙니다.
그러니, 인조가 도망도 못 가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것이죠.
애초에 강화도로 갈려고 했는데.
안전할 줄 알았던 강화도도 청군이 점령합니다.
강화도로 도망갔어도 인조는 어차피 잡힐 운명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고려는 이미 전쟁난다고 보고 북쪽에 병력을 배치했고,
10만 소배압군이 성을 우회해서 개경으로 직공하자,
소배압군이 지나갈 길목을 미리 알고 초장부터 뚜들어 팹니다.
거란군 초장부터 큰 병력을 잃기 시작합니다.
뚜들어 맞고도 거란군이 개경으로 남하하자,
강감찬군이 거란군을 뒤쫓아 남하하고,
고려 정예 철갑기병 1만을 보내 거란군을 추격하게 합니다.
고려 현종은 저번에는 나주로 도망갔는데, 이번에는 개경앞까지 온 거란군을 상대로 버팁니다.
개경은 성곽이 전투용이 아니고,
고려군 전체병력이 북쪽 국경으로 올라갔기에, 개경을 지킬 정예병력이 없었는대도 안 도망갑니다.
고려 왕이 저번처럼 도망갈 줄 알았는데, 여기서부터 소배압이 예상이 안 맞습니다.
대패를 괜히 하는 것이 아니죠.
원래 계획은 개경에서 식량을 확보하고 겨울이라 뜨뜻한 방에 지진 다음에,
힘을 차려서 돌아가려고 했는데.
뒤에서 고려 주력군이 남하하고 있어 공성하다 샌드위치 될까봐 후퇴합니다.
보급 없이 500킬로를 남하했기에 공성전할 힘이 없습니다.
약탈하면서 내려왔기에, 올라갈 때는 털어먹고 가려고 다른 길로 갔는데,
귀주에서 고려군과 만나는데.
이미 거란군은 천 킬로를 무보급으로 뛴 상태라.. 상태가 말이 아니었죠.
전투중에 추격조로 보냈던 고려 1만 철갑기병이 갑자기 거란군 후미에서 덥칩니다.
그 시대에 통신수단이 없었기에 강감찬의 작전이라고는 안 봅니다.
겜 끝났죠..
나폴레옹도 워털루에서 자기나라 군단하고 연락이 안 돼서 졌습니다.
당대 세계 최강 10만 정예 유목기병으로는 고려한테는 안 된다는 것을 주변에 보여줬죠.
귀주에서 거란군이 전멸한 것으로 역사책에 나오는데,
송나라 역사서에는 2/3인 6만 몇천이 죽은 것으로 나오고 고려의 승리로 기록합니다.
최정예 10만 기병이 고려서 깨졌는데.. 요나라가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어요.
고려 사신은 송나라에서 국빈으로 대접받고 송나라 가서 행패 무지하게 부립니다.
송나라 시에도 나올 정도로 사회문제가 됩니다.
조선은 보다 약한 청군 10만을 상대로 보고체계부터 나라다운 모습을 못 보여 줍니다.
선봉에 선 여진기병 수천이 아무리 평양성을 우회했다고 하더라도,
황해도 지날 때 조정에 보고했다는 것은 나라가 아닙니.
병자호란도 보면 의병들이 인조 구하러 남한산성으로 가다 각개격파 당하고,
의병들을 모아서 지휘통제하는 것이 없어요.
여진 기병 수백에 대군인 의병이 혼쭐나는건 여전하고요..
고려 전기에 개경 주변에만,
수도방어사령부처럼 4만 5천 정예병력이 상주합니다.
드라마 무인시대보면 응양군, 용호군 하던..
4만 5천이 개경 주변을 요새화 해서 지키고 있는데,
여진이 수천 기병을 선봉으로 내보내겠습니까..
여진애들은 명과 대치 중이라 조선에 오래 주둔할 능력도 없었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조선에 뜯어 먹으러 온 애들입니다.
사람 팔아먹으려고 조선사람 50만을 잡아갔지요.
거기에 비해 요나라는 송나라로부터 막대한 조공을 받던 국력이 욱일승천하던 상황이었죠.
병자호란 청군은 소배압군 10만 침입때보다 훨씬 쉬운 상대였지요.
지나라는 지가 지키겠다는 정신자세의 문제입니다
첫댓글 쏙속 들어오는 역사 강의 시간입니다.
고려 시대에는 그래도 무를 많이 숭상했었던 같은데요 중간에 평화가 오래되어 썩어 문드러져
무신 정권이 탄생했던것 같고요
조선 시대에도 태평 성대가 오래되다보니 많이 약해져있었고 당파 싸움으로 정권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시기에 두 임란을 맞아 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가는 불행을 맞았고요.
현대는 평화가 오래 유지되면 개인주의,복지 포풀리즘만 팽배해지며 예산의 과도한 쏠림으로
국방력은 약해지는것은 당연한것이며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속에
일방적으로 두둘겨맞고 손들겠지요.
해박한 역사지식에 감탄을 마지 않습니다.
저는 한 나라의 평화는 압도적인 군사력, 경제력과 외교력의 절대적인 우위에서만 유지가능하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한 나라의 평화는 절대적으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관심들 많으셔서 내용 추가했습니다.
어디서 배낀 것도 아니고, 누가 하던 얘기도 아니고,
이대로 안 고치고 출력하면 바로 책이 됩니다.
쓰고 있는 책에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회원님들 공으로 챕터 하나 읽었습니다. 실제 책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더 추가됩니다.
옛날에 다 기억하고 있던 것인데, 병력수처럼 기억이 덜 나는거 찾기 싫어서 빠드린거 많네요.
고려와 조선의 차이에 대해서 얘기하는 역사가들이 별로 없더군요.
십여 년 전에 고려-거란 전쟁사란 책을 보고 충격을 먹었습니다.
전쟁사에 평소 관심이 많았지만, 고려가 그렇게 잘 싸운 나라인지는 몰랐습니다.
거란과 전쟁하면 강감찬의 귀주대첩 하나만 조명하는데,
고려는 거란과 전쟁 어느 한순간도 임란, 병란의 조선처럼 쪽팔린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최씨가 안 싸우고 강화도에 틀어박히긴 했지만,
몽골에 항복하는 과정은 항복하는 나라 답지 않은 기개가 있었고..
홍건적의 침입, 정규군 수준의 왜군 침입을 겪고도,
4만 5천 병력을 요동으로 보낸 최영의 고려도 대단했습니다.
실제 병력 17만을 동원해 곧 있으면 송을 남쪽으로 몰이낼 금나라가 될 여진족이
살던 함경북도 땅을 쳐들어가 성을 9개를 쌓고 방어하다보니 병력이 각각 흩어져,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중에 조선 세종대왕이 함경북도를 우리땅으로 완전히 편입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윤관의 고려도 대단했네요.
금나라가 거란 요나라처럼 고려를 쳐들어올 생각을 아예 못하게 했죠.
중원에 새로 등장한 명나라가 평안북도 땅(철령위)를 거저 달라고 하면서,
행정구역에 편입하려고 10리에 1개씩 역을 40개소 설치하자,
국운이 다 하는 순간임에도 4만 5천 병력을 요동에 출병한 최영이
고려의 마지막까지 기개를 보여 줬습니다.
고려는 외세를 상대하는 데 있어 어느 한 순간도 부끄러워할 부분이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