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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혼례(婚禮)
"결혼은 가다 하면 되는 것이고 일단 술이나 한잔합시다."
두 사람의 말이 어느 정도 끝났다 싶자, 일휘를 비롯한 광풍대원 전원이 술을 들고
나왔다. 분주객잔부터 시작하여 주변 객잔에 있던 모든 술을 가져왔는지 온통
술항아리로 넘쳐났다.
"오늘 각조의 서열을 정한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놈이 부조장이 되고 이것들 다
먹는다."
술 한 동이를 들며 바닥에 던져놓은 것, 뱁새와 찍새가 유일하게 남기고 간 주머니
두 개였다. 먼저 떠난 놈이 형님이 되고 돈을 먹기로 했던 내기, 그 주머니를 일휘가
찾아온 거였다.
모든 대원들이 술항아리를 들고 들이키기 시작했다. 이젠 정확하게 마흔여덟 명이
된 광풍대원들이 뱁새와 찍새의 마음을 마시는 것이었다. 누구의 입에서인지 나직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건달시절에 세상을 원망하며 불렀던 자신들의 노래.
처음부터 건달이 어딨더냐.
배운 것도 없었다.
가진 것도 없었다.
몸 하나만 튼튼했더라.
우리가 건달이라 욕하는 놈들.
우리가 건달이라 얕보는 놈들.
우리도 너희에게 할 말 있다.
"에이! 씨팔."
누구도 취하지 못했다. 내공을 전혀 일으키지 않은 상태에서 그 독하다는 분주를
항아리째 들이키고 있는데도 정신은 더욱더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보다 더 독한 피를 마셔도 취하지 못했는데 이까짓 술로 취할 수가 없을 터이다.
찍새와 뱁새가 보고 있는데 취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광풍대원들의
술잔치는 밤새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쏟아지는 빗방울이 온몸을 때리는데도
땅바닥에 주저앉은 그들의 몸은 일어설 줄 몰랐다.
"형님!"
"왜? 술이 부족하냐? 더 가져올까?"
소살우의 부름에 백산이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마셨는지, 정신은
말짱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요, 술은 됐소. 이제 그만 형수님께 가보시오."
소살우도 백산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해놓고 그녀들을 죽이려 했던
행동 때문에 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사과는 말이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거요. 야! 마셔."
백산에게 한마디 툭 던진 소살우가 고개를 돌리며 다시 광풍대원들과 어울렸다.
백산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린 것이다.
어기적거리며 아래쪽에 있는 인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귀혼곡에서 정신을 잃어버린 광견조원들에게 호통을 쳤던 자신이,
가족을 보게 되면 잃었던 정신도 돌아온다 했었는데.
그랬던 놈이 망각했다. 그녀들을 잊었다. 자신에게 화가 났다. 스스로도 통제하지
못한 놈이 누굴 지켜준다고…….
문을 열고 들어서던 백산이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멈춰 섰다. 추렴과 소운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서 있었던 거였다. 그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백산이 힘들어하는
만큼 두 사람도 힘들어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을 뻔했다는 배신감. 이
사람의 상태를 알고 있었고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었지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천영 언니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려 했고 자신들이 천영 언니의
입장이 되었어도 그리했을 사람이란 것을 알지만 그래도 서운했다.
찰싹!
"미안해……. 정말 미안해."
백산이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시간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미 지난
시간이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녀들에게나 자신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을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세요?"
"응! 사랑해.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해."
"그런 사람이 내 목소리보다 소운의 목소리보다 이까짓 반지 소리를 더 크게
들었다는 거예요?"
냉추렴이 화를 내고 있는 이유였다. 조천영을 더 생각한다 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목소리는 알아듣지 못한 사람이 애명환의 울음소리를 듣고 손을 멈췄다는
게 더 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냉추렴이 잘못 알고 있었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냉추렴과 소운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부터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거의 정신을 차리려는 순간에
애명환이 울었을 뿐이었다. 그때 애명환 소리가 아닌 냉추렴이나 소운의 목소리가
들렸어도 백산의 동작은 멈추었을 것이다.
"아니, 당신들 목소리도 들었어. 그런데……. 그게 꿈속 같았어. 꿈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인 줄 알았어."
"좋아요. 무슨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 했죠?"
그녀들도 울고 있었다. 자신들을 덜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만은 알아들었다 한다.
"나가면 당장 혼례를 올려요. 가장 성대하게……."
마침내 냉추렴에게서도 울음이 터져나왔다. 참고 참았던 울음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세 사람이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울고 또 울었다. 하늘도 울고
광풍대원들도 울고 모두가 우는 밤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떠난 사람만 생각하며 슬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슴이
찢어지고 마음이 아프더라도 산 사람은 다시 움직여야 한다. 뱁새와 찍새가 가고자
했고, 또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북경으로 가야 한다. 백산의 말에 따라 막연하게
간다고 생각했던 북경이 이제는 모든 광풍대원의 꿈이 되었다. 기다리는 사람도
반겨주는 사람도 있을 턱이 없는 곳인데, 가서 정착해 사는 모습을 찍새와 뱁새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무가 생겨버렸다.
강구두와 장한수가 배를 구하러 간 사이에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이곳에 계속 있게
되면 가기 싫어질 것 같기에 하루라도 빨리 떠나려는 것이었다.
사방을 가득 메운 갈대들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간밤의 빗줄기에 부대꼈던
몸을 달래듯 이리저리 나부끼고, 제 할 일을 다 한 태양은 서편으로 길을 떠나는
저녁 무렵.
무심히 흘러가는 분하를 바라보며 서 있는 연인이 있었다.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것인지 널따란 남자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단지 뒷모습만 그렇다는 것이다. 남자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여인의 얼굴에 눈물이
가득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자신 때문이었다. 이 사람이 변해버린 이유가……. 자신이 다치지
않았더라면 결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결혼의 경험도 있는 여자이고 나이도
많다. 배경 좋은 가족이 있는 것도, 얼굴이 예쁜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최악의
신붓감이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자신을 사랑해준다. 목숨마저 버릴 정도로
사랑해주고 있다.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이 사람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해주고 싶다.
"미안해요, 백랑!"
"뭐가?"
"모든 게……."
"누님! 누군가 그랬대요. 사랑은 미안하다 말하는 게 아니라고. 그냥 사랑하는
거라고."
그런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할 정도의 사람이면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이고, 설령 조그마한 잘못을 했다
할지라도 사랑해란 한마디면 모든 감정이 눈 녹듯 풀어질 게 아닌가.
"누님은 어디 아픈 데 없어요?"
"아니, 괜찮아요. 그런데 언제까지 누님이라 할 거예요?"
"호칭이 무슨 상관인가, 마음이 아니면 그만이지……."
백산도 호칭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어쩐 일인지 누님이란 호칭이 가장 편하고
마음 또한 편해진다. 천영이라 부르자니 너무 가볍고, 당신이라 부르자니 너무
무거워서 어색하고, 이래저래 생각해봐도 누님이 가장 편하다.
"왜 싫어요? 누님이라 부르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괜찮아요?"
"뭐가? 아! 얼굴, 내가 더 먹어 보이지. 설마……."
"무슨 소리하는 거예요, 어찌 백랑의 얼굴을 가지고……."
백산이 웃으면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자 조천영의 얼굴이 금방 울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자신은 부인에게 누님이라 부르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 눈에 안 좋게
보일까봐 하는 말이었는데 그는 그게 얼굴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또 운다. 어째 소운이나 추렴이보다 울음이 더 많아졌어, 누님……. 얼굴이 늙어도,
나이를 먹어도 백산은 그냥 백산이야. 내가 누님이나 추렴이, 소운이를 생각하는
마음은 언제나 같아요. 세 사람이 날 싫어해도 어쩔 수 없어요."
"미안해요, 흑흑!"
결국 백산의 품으로 파고들며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언제나 이런 사람이다.
자신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을 더 헤아릴 줄 아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 이런 모습 때문에 추렴이와 소운이, 그리고 자신도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누님, 그만 올라갑시다. 응차!"
조천영을 번쩍 안아 든 백산이 인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더 이상
아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양맹도 자신들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고 북경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행복하게 살아갈 세월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날 밤 뱁새와 찍새의 무덤을 남겨두고 배에 올랐다. 분하만 따라 올라가면 드디어
북경이 있는 하북성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백산이 가고자 했던 팽가도…….
"형님, 가문에 들러봐야죠?"
분하를 타고 오르면서부터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는 팽무도를 향해 남궁세우가 입을
열었다. 그 또한 팽무도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마음이 곧 팽무도의
마음이기에.
자신 역시 선뜻 가문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글쎄, 모르겠네. 다시 볼 자신도 없고."
아버지를 말함이다. 아직 살아 계신다 하였다. 더욱더 강한 팽가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도 활동을 하신다 했다. 당신이 자식을 죽였노라고, 가문을 위해 장자를
죽였노라고 공포하시고 더욱 가솔들을 다그치고 있다 하였다.
그런 아버지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자식을 죽인 것에 대해서도 당당하신 당신.
오히려 죽어주지 못한 자신이 더욱 죄스러워질 것 같았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아버지에 대한 위축감이었다. 그런 자신감이 하북팽가를 천하제일가로 만든
원동력이라 할 수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꺼려지기도 했다.
"참, 사부도 소심하기는. 다 늙어버린 노인네가 무서울 게 뭐 있다고 그러오?
여차하면 한 방 날려버리면 되지."
옆에 있던 백산이 한심하다는 듯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참으로 가문이란 놈은
이해할 수가 없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자간에도 알 수 없는 선이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사부의 표정만 해도 그렇다. 오십 년 만에 찾아가는 집이다.
그리고 사부가 가장 원했던 일이고, 오죽 가고 싶었으면 자신에게 도법까지 보낸
사람이 막상 집이 가까워지니 망설이고 있다. 자신 같으면 한시가 급하고 바쁠
터인데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저 애늙은이 말이 맞네. 집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이야. 가장
편한 곳이기도 하고."
갈태독도 백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로서는 팽무도의 고민이 부럽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잃었던 사람이지만 아무것도 잃은 게 없어 보였다. 오십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집이 남아 있고 또 아직 기다리고 있다. 실패한 인생이 아니었다.
"영감! 애늙은이가 뭐요? 애늙은이가."
"나이는 이십 대인데 얼굴은 장한수인 네 놈을 뭐로 불러야 하냐?"
"그럼 영감은 나잇값도 못하는 늙은이네?"
"나잇값을 못하면 어떠냐, 이놈아. 젊어지는 게 어딘데……."
드디어 두 사람의 수준이 같아졌다. 백산이 나잇값을 못하다고 놀려도 더
즐거워한다. 오히려 백산의 얼굴이 맛이 간 것에 대해서 더욱 면박을 주고 있다.
갈태독의 말에 백산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분명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이고,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돼, 갑자기 십 년 이상 늙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노망난 늙은이까지 날 놀리네. 아이고, 우리 마누라들."
"산이 형님!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로 들리네."
장한수가 한술 더 뜨며 백산에게 형님이란 소리를 하자 일행이 떠나갈 듯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장한수까지 그런 소리를 할 줄 몰랐던 터였다. 어쨌든 인간 하나
바보로 만들어 놀려 먹는 것도 상당한 재미라 할 수 있었다.
"우씨. 어찌 되었든 팽가는 갈 거요. 아버지 무섭다고 자식도 소개시키지 않으면
되겠소? 나도 할아버지 수염 한번 쥐어뜯고 싶다고."
결국 말싸움에 진 백산이 팽가에 간다는 말만 남기고 도망을 쳤다. 세 부인이 있는
곳에 신세한탄을 하러 가는 것임에 분명할 터였다.
"다행이네, 마음에 상처가 없는 것 같아서……."
갈태독이 도망치듯 선실을 나가는 백산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비록
겉으로야 내색을 않고 있지만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은 터인데 의외로
잘 적응해나가는 것 같기에 마음이 놓였다.
"저 녀석의 장점이지요, 자신의 처지에 쉽게 적응하는 게……."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가장 가슴 아픈 것이기도 했다. 현실을
쉽게 받아들인다는 게 무엇인가. 받아들이지 않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살아온 삶이 그랬기에 체념이란 말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는 사람들, 그렇게 사는
삶이 편하다는 걸 알아버린 삶이 불쌍하다는 것이다.
비단 백산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백산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민초들, 그들의 삶이 전부 그렇지 않겠는가. 세상사의 현실이고 시대의 아픔인
것이다.
"자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이네, 이 나이 들어서 생각해보니
저들처럼 사는 삶이 더 가치 있어 보이더군."
자신만의 생각뿐이었다. 결코 알려고 해서 깨달아지는 삶도 아니거니와,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알지 못하는 삶인 것이다. 그래서 산다는 게 어려운지도
모르는 일인 게다.
"나도 천하제일가를 한번 보고 싶구먼?"
팽가에 들르라는 갈태독의 간접적인 표현이었다.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면 모르되
어차피 발을 들여놓았다면 풀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때 풀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이
되지 않는 것이다.
팽무도와 그 일행이 팽가를 갈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는 그 순간에, 그들보다 먼저
팽가를 방문하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 * *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장인어른!"
풍신개 구칠.
천마맹을 떠난 그가 드디어 하북팽가에 도착했다. 자신에게 처갓집이 되는 곳임에도
팽무련의 죽음 이후에 한 번도 들르지 않았던 곳이다. 자신에게 부인이 되고 지금
앞에 있는 저분에게는 딸이 되는 팽무련을 쫓았던 사람들이기에 찾지 못했다.
아니, 원망했다는 것이 옳았다. 자식을 변호해줄 수 있는 힘이 있었음에도 가문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내쳤던 자들.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시 찾고
말았다.
강호 정의니 대의니 하는 것을 위한 방문이 아니다. 오직 무련이의 복수를 위해서
찾은 것뿐. 이미 강시가 되어 있는 그녀, 그녀를 찾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오랜만이구나."
팽무도와 비슷한 체구에 그보다 더 호리호리한 눈매를 가진 인물. 오십 년 전
천하제일인이었고 원 황실로부터 무림왕이란 칭호까지 하사받았던 도왕 팽인덕이었다.
백이십이 넘어가는 나이임에도 그의 몸에서는 세상을 오시할 것 같은 패기가
흘러넘쳤다. 오십 년 만에 사위를 만났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오랜만이라는 한마디의
말밖에 하질 않는다.
"무던히도 저를 싫어하셨지요."
풍신개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자신과 팽무련의 결합을 결사반대했던 사람,
개방의 방주라는 직위에 있었지만 팽인덕의 마음에 차는 사윗감이 될 수 없었다.
그가 원했던 사윗감은 무림의 인물이 아니었다. 무림이야 이미 평정하고 있었기에
사위는 관(官)에서 얻고 싶었던 것이다. 황실에서까지 인정을 받는 최고의
무림왕국을 세우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다.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해줄 사람이
외동딸인 팽무련이었는데, 그 딸이 사랑했던 사람은 명문가의 사람도 아니고
거지였던 것이다.
"옛날 일이다, 다 지난 일이고."
팽인덕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변했다. 그때 자신의 나이가 칠십이었다. 죽기 전에
무엇인가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천무맹에서 오천맹의 영재들을 원할 때도
선뜻 승낙했다. 그들이 준 무공을 완벽하게 익히게 하여 오천맹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이 자식들을 강호공적으로 만들어버렸다. 음모였다는 걸
알면서도 민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자식을 죽이는 데도 망설이지 않았다. 팽가의
자손으로 팽가를 위해 죽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자신도 그렇게 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자식을 죽이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명예가, 팽가라는 가문을 위한 것이
아닌 바로 자신, 황실로부터 무림왕이란 칭호까지 하사받았던 도왕 팽인덕을 위한
것임을 깨닫는 데 오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자식인 무도가 살아 있다 했을 때, 살아 있음에도 가문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때야 자신이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자인 월이
가져왔던 소식과 무공구결, 그 두 가지가 자신의 몽상을 깨웠다. 아무리 가문이
뛰어나고 대단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단 한 번이라도 방문하기를
원하는 그런 곳이라 할지라도, 정작 그 집주인이 들어오기를 꺼리는 그런 집안이
과연 집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
결국 지난 백이십 년 세월의 신념이 뿌리째 흔들려버렸다. 자식을 밖으로 내몬 것은
하북팽가의 위대함이 아니고, 팽가 곳곳에 묻어 있는 명예라는 괴물과 무림왕
팽인덕이었던 것이다.
"무련이는……."
가장 사랑했던 자식이었다. 외동딸이었기에 더욱 사랑했고 애정을 쏟았다. 그런
아이가 거지에게 시집을 간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때문에 더욱 반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얻은 게 무엇인가. 딸의 죽음도 보지 못했고, 손자도 보지 못했고, 개방의
꽃이라 소문난 증손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편안하게 갔습니다, 저의 품에서……."
팽무련이 죽었노라고 말하는 풍신개의 표정은 의외로 침착했다. 언제나 그녀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면 힘들어하는 그런 얼굴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정리해버린
얼굴이었다. 더 이상 미련이 없는 얼굴…….
'저 혼자 알고 끝내겠습니다.'
강시가 되어 있는 상태가 살아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직 살아 있다고,
그녀를 그리 만들었던 자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다고 말할 순 없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녀에 대해서 혼자만 알고 가야 한다.
"저를 사위로 생각하신다면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십시오."
지난 오십 년간의 음모가 흘러나오고, 백살대가 그리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
밝혀져도 팽인덕의 표정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음모에 의해서 저질러진 일이라지만 이미
자식의 가슴에 도를 던졌던 자신이었기에. 놀랄 일도, 놀랄 것도 없음이다.
"그래서 네 말은 팽가를 비우고 떠나라 이거냐? 자식을 죽이면서까지 지켰던 이곳을?
"
"아닙니다. 아버님은 이곳에서 죽어야 합니다. 팽가를 비워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풍신개 또한 엄청난 말을 하고 있었다. 장인어른이고 무림왕이란 칭호까지 있는
팽인덕에게 팽가를 지키다 죽으라 하고 있다.
"누구를 위해 하는 일이냐……."
두 사람이 다 정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그 말을 듣는
사람도 차분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무련이를 위해섭니다."
"그래?"
팽인덕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어렸다. 강호 정의니 대의니 하는 게 아니었다.
오직 제 놈이 사랑하는 무련이의 복수를 위해 일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감히 장인더러 죽으라 하고 있다. 이곳에서 팽가가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적에게
보여주라는 것이다.
"이곳에 있으면 무도를 만날 수 있을까?"
"네, 그 녀석도 지금 오고 있습니다. 분하를 따라 올라오고 있을 겝니다."
아직 팽무도 일행의 정확한 소식을 듣지는 못했지만, 시간상으로 볼 때 분하
끝자락에 있어야 하기에 하는 말이었다.
"좋네, 자네 말대로 하지."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구 서방. 우리 술 한잔할까?"
"네? 네, 장…인…어…른."
풍신개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처음으로 불러주는 구 서방이란 말, 아들인
팽무도의 친구 이상으로는 대우해주지 않던 양반이 사위로 인정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것도 오십 년 만에…….
'무련, 아버님이 드디어 나를 인정하셨다오.'
오십 년 전에 인정해주셨더라면, 그때 자신을 받아주었더라면 그곳에서 죽지도
않았을 터였고 지금 강시도 되지 않았을 텐데. 그녀를 데리고 팽가로 올 수 있는
분위기만 되었던들……. 풍신개의 눈에 눈물이 일렁거렸다.
"빨리 안 오고 뭐하나?"
"아예! 아버…님."
처음으로 맞는 술자리. 사위와 장인이 그들을 이어주었던 여인은 이미 고혼이 되어
없는 상태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성공과 실패가, 영광과 좌절이 함께 했던 두 인생이
지난날의 즐거웠던 기억을 회상하며 서로의 마음을 감싸 안았다.
다음 날.
찬란히 떠오르는 아침 태양을 받으며 풍신개 구칠이 하북팽가를 나섰다. 사랑했던
여인의 집이었고 자신에게는 사랑과 증오가 같이했던 집. 그러나 이젠 증오라는
감정을 없애버렸다. 다시 만날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지만 과거의 앙금을 풀었기에 더
이상 미련도 없음이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이 잘된 모양입니다, 시주님."
거의 작은 점으로 멀어져버린 하북팽가를 바라보며 잠시 쉬고 사이에 요몽이
풍신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백치나 다름없다 했던 요몽 스님의 입에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음색이 흘러나왔다. 모든 병마가 사라졌는지 제법 스님의 모양새가
잡혀가고 있었다.
"예, 요몽 스님."
묘한 일행이었다. 풍신개의 원수인 각인대사의 아들, 요몽. 서로가 원수지간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스스럼없이 대화를 하고 있다.
사사지옥혈공의 무서움이었다. 분명 각인대사가 요몽을 자신의 아들이라 했는데
풍신개는 기억을 못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요몽을 데리고 가라 했던 그 말만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근데 스님은 무엇을 그리 찾고 있습니까?"
언뜻언뜻 스치는 요몽의 얼굴은 마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팽무련을 잃어버리고,
그녀를 그리워했던 그 얼굴.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어쩔 수 없는 숙명에
반항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얼굴이었다.
"어머님입니다, 제가 그리워하는 얼굴은……. 고생만 하셨지요. 한겨울에 손이
얼어터지는데도 두 자식을 굶기지 않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셨던 분입니다."
자신이 죽는다 한들 잊을 수 없는 것은 어머니의 얼굴이 아니라 손이다. 추위에
갈라터진 손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얼음을 깨며 빨래를 하시던 피 흘리는 두 손.
"그런데 아버지란 양반이 어머니를 해친 겁니다. 자신의 무공성취를 위해서요."
"설마……."
풍신개가 놀라는 얼굴로 요몽을 쳐다보았다. 무공성취를 위해서 부인을 죽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 사람이 익힌 무공 때문이지요. 아울러 불제자라는 제약을 벗고 싶었을 테고요."
불제자였기에 사사지옥혈공을 익히지 못하는 몸이었다. 사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내면에 잠들어 있는 사악한 기운을 깨워야 하는데 이미 불심에 젖어 있던 그였기에
쉽지가 않았던 터였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한 여인의 겁탈이었다.
일이 묘하게 되느라 한 번의 겁탈이 임신이 되었고, 그녀는 마을에서 쫓겨나 아이와
함께 살게 되었다. 모진 고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모양을 쳐다보면서도
각인대사는 언제나 주변에 있었다.
그리고 또 겁탈, 이번에는 각인대사가 아니었다. 각인대사의 사주에 의해
마을사람이 저지른 일이었다. 어떤 남자인지도 모른 채 요몽의 어머니는 두 번째
아들을 낳았다. 남편도 없이 아이 둘 딸린 여인이 살아가기엔 세상은 너무 험난한
곳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인간은 다 보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겁탈했고 또 겁탈을
시켰던 여인이 두 자식을 키우면서 고생하는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요몽의 얼굴에 미약했지만 살기가 어렸다. 한 짐승에 대한 저주의 표정이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동정심이 생길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정이
없어져야만 그 무공을 익힐 수 있기에……. 제가 사십이 되던 해에 알았습니다.
그자가 아버지였다는 것을요."
그때부터 기억을 묻어버리고 백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동생인 요불은 거의 미친놈이
되어 소림사 때문에 그리되었다며 동료들을 해치고 도망을 쳤다 한다.
"어찌 그런 일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요몽의 말을 보건대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더구나 불심을 말하지
않는가.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일 것 같은
생각이…….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각인대사라 부릅니다. 그 저주받을 인간을 말입니다."
"뭐라고? 지금 각인대사라 했는가. 정녕 각인대사라……."
풍신개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불안감이 엄습해왔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철천지원수의 자식,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린 그 자의 자식이 요몽인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더 기막힌 일은 자신의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자식을 데려다
키운 겁니다."
"그럴 수가……."
원수의 자식이라 해서 죽일 수도 없었다. 아예 살기조차 일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불심을 버리기 위해 아녀자를 겁간하고 그녀에게
동정심이 생길 때까지 관찰하다, 결국 마음속에 그녀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자 죽였다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불심이 사라졌나를 확인하기 위해서 자식을
제자로 길렀다는 말이다. 자신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요몽이었다.
"무슨 무공을 익혔기에……."
많은 무공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 익히는 무공은 없다. 사악한
마음을 끌어내기 위해 부인을 죽이고 자식으로 시험하는 그런 것을 무공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상식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사지옥혈공이라 하더군요."
"그 고금오천무의 무공 말인가?"
점점 더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고금오천무란 이름만 있었을 뿐 인세에
한반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무공이 아닌가. 인간의 심령까지도 통제할 수 있다 했던
사공(邪功)의 최고봉이 바로 사사지옥혈공이라 했다.
"저도 지금 저의 상태를 알 수 없습니다. 그자가 깨워놓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
깨어난 것인지……."
요몽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도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목적이 있을 리가 있겠나. 이제는 강호무림이 전부 그자 것인데. 자네를
이용할 데가 어디 있다고."
풍신개가 마음을 놓으라는 듯 요몽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찌 주변엔 하나같이
불행한 사람들밖에 없는 것 같았다.
"가세……. 열심히 불심에 정진하다보면 잊혀지든지 용서가 되든지 하겠지."
그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전부였다. 요몽의 입장이 돼보지 않고는 누고도 그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위로한답시고 이러니저러니 해봐야 마음만 아플 뿐이란 것은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다.
이럴 땐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놈들의 틈바구니에 섞여서 그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아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라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버거운 삶을 피할 틈바구니를 찾기 위해 풍신개와 요몽이 분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백산과 광견조 일행은 타고 오던 배를 내려 홍안리(鴻雁理)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 * *
십여 호의 인가밖에 없는 초라한 마을이 때 아닌 방문자들로 화들짝 깨어났다.
"에게! 이 작은 마을에서 혼례를 올리자고?"
소운이 입을 빼쭉 내밀며 불만을 토했다. 성대한 혼례 운운하기에 번화한 도시를
기대했었는데 피죽도 먹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초라한 마을이다. 더구나 올 여름
가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시기였기에 마을은 더욱 황량해 보였다.
"있잖아, 큰 도시는 왠지 정이 안 가서……."
백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마음이 편한 곳에서 혼례를
올리고 싶었다. 영원히 기억에 남아야 할 혼례이기에 형식적인 것보다 정으로
축복해주는 곳을 원했던 것이다.
"좋은데요……. 우리 덕에 마을 사람들도 음식다운 음식을 한번 먹어 볼테고."
"저도 좋아요. 특히 홍안리란 마을 이름이."
냉추렴도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홍안리(鴻雁理), 기러기 마을이란 게 더욱 마음에
들었다. 기러기는 암수가 같이 살다 한 마리가 죽으면 남은 새는 평생을 혼자 산다는
특성 때문에, 남자들이 신부 측에 보내는 구혼 선물로 많이 쓰이는 새가 아니던가.
"그럼 오라버니가 기러기 마을로 들어와서 벌써 청혼한 거네?"
소운도 백산의 의도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표정을 풀었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은 일임에 틀림없었다.
"근데 신랑이 너무 삭아서, 원……."
"내 청혼이 마음에 안 들면 배를 타면 된다."
"마음에 안 든다고 물릴 수 있는 건가? 벌써 배는 떠났고 확인 절차일 뿐인데.
팔자려니 하고 따라야지. 늙은이에게 적선하는 셈치지, 뭐."
"너~?"
이미 잠자리까지 같이 했으니 물리고 싶어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백산이 눈을
치뜨며 달려들자 소운이 저만큼 달아나며 혀를 쏘옥 내밀었다.
"석두야, 준비는?"
"네, 마을 사람들이 벌써 준비를 시작했는데 촌장이 기절해버렸습니다."
"왜요, 도련님?"
"돈 때문에요."
석두가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마을 촌장에게 가서 네 사람의 혼례 준비를 해
달라고 돈을 내놓았는데 그 액수 때문에 촌장이 뒤로 넘어 가버린 것이다. 만 냥,
마음 사람 전체가 몇 년을 먹고 살 수 있는 금액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도련님?"
은 만 냥이란 말에 저만치 도망갔던 소운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왜 아까워서 그러냐?"
"오라버니, 제가 뭐 어린앤 줄 아세요?"
"형수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압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놀까봐 그러시죠?"
고함을 팩 지르며 백산을 쳐다보는 소운을 대견하다는 듯 쳐다보며 석두가 말했다.
언제나 철없는 애처럼 행동하지만 세상살이에 대한 것 만큼은 자신들보다 나았다.
"도련님, 지금 나 거지라고 비웃는 거죠."
"무슨 말씀이세요, 형수님. 강호에서 두 번째로 돈이 많으신 분인데."
석두가 진땀을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돈이란 많이
있으면 좋은 것이긴 한데, 언제나 성실하게 살았을 때의 이야기다. 수중에 많은 돈이
있는데 누가 일을 할 것인가.
돈이 영원히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돈이 다 떨어졌을 때에는 살아갈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소운이 걱정하는 바는 그런 점이었다. 거지들의 삶에서 배운 지혜. 거지가 돈이
많아지면 거지노릇을 더 하지 않듯이, 농사짓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가장
힘들 때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장하오, 부인!"
소운의 마음 씀씀이에 백산도 더불어 기분이 좋아졌는지 활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모든 준비를 마을 사람들에게 맡겨버렸기에 자신들은 그저 몸만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로 해서 혼례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혼례의 시작은 신랑과 신부집에 서로의 부모님들의 위패(位牌)를 쓴 다음, 그곳에
신랑 신부의 태어난 날과 시를 적어 삼 일간 보관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 삼 일간
집안에 변고가 없으면 조상님들이 혼례를 묵인하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일행에게는 따로 집이 없는 관계로 마을 집 두 채를 빌려서 절차를 진행했다.
"어르신, 날은 언제가 좋겠습니까?"
삼 일이 지난 후 백산과 석두, 그리고 일휘가 기일을 받기 위해 촌장의 집을
방문했다.
"근데 신랑의 나이가 맞아?"
촌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백산의 생년월일이 적힌 붉은 종이와 백산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보아도 얼굴과 나이가 어울리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신랑 얼굴이 좀 그렇죠?"
"그래, 이 사람아. 신랑을 앞에 두고 이런 소리 하기는 뭣하지만 신부들이 영……."
아깝다는 표정이었다. 거의 사십에 달해 보이는 백발의 못생긴 남자에게 꽃 같은
여자가 세 명이라니……. 자신도 남자지만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요,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하다보니 겉늙어서 그렇습니다."
옆에 있는 백산의 얼굴이 구겨지든 말든 촌장과 석두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하긴 그리 고생을 했으니까 그 정도로 돈을 모았겠지……."
"이건 비밀인데요……."
갑자기 석두가 촌장의 귀에 대고 뭐라 속삭였다. 그러자 촌장이 깜짝 놀란 얼굴로
다시 한 번 백산을 쳐다본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암! 남자는 얼굴로 사는 게 아니거든."
그래도 한 가지 재주는 타고나서 다행이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백산이라고 했는가?"
"예, 어르신."
"생긴 게 그렇다고 너무 기죽지 말게나. 남자는 말일세, 밤일만 튼튼하면 모든 게
용서되는 법이야. 얼굴 좀 못나면 어떤가. 살다보면 얼굴은 눈에 보이지도 않아.
번지르르한 얼굴로 기방이나 찾아다니는 자들보다 차라리 자네 같은 얼굴이 훨씬
나아."
말이야 칭찬같이 하고 있지만, 네 얼굴로는 기방에서도 받아주지 않으니
부인들에게나 충실하며 살라는 소리였다.
"험! 어르신, 날은 안 잡아주십니까?"
터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석두가 촌장을 다그쳤다. 상대방을 앞에 두고도
도대체 가리질 않는 마을 촌장의 행동에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던
터였다.
"날? 아, 그것 때문에 왔지? 삼 일 후가 좋아. 그날은 비도 안 올 것 같고 날도
따뜻할 테고……."
"어르신, 그런 이유로 날을 잡아요?"
"그 이상 좋은 게 어디 있나. 날이니 뭐니 하는 것 다 필요 없어. 막말로 자네와
신부들의 궁합이 안 좋다면 이 혼례 물린 텐가? 그건 아니지 않는가. 날도
마찬가지야. 좋은 날이란 춥지도 덥지도 않고 비만 안 오면 되는 게야. 마을 사람들
손 없는 날이면 더욱 좋고."
단순한 말이지만 그 말이 진리인 것이다. 어차피 혼례를 치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궁합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좋은 날이란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서로 간에
생각해주는 애틋한 사랑과,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의 축복, 그 두 가지면 최고의
혼례가 아니겠는가. 형식이니 절차니 하는 것은 있는 자들이 자신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수단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가능하면 길게 하게."
"그건 또 왜요?"
"자네들 때문이 아니고 마을 사람들 때문에……."
타지인이라 하지만 백산의 혼례를 빌미 삼아 동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의도였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촌장집에서 물러난 세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고 말았다. 좋은 날을 받아
달랬더니 비 안 오고 따뜻한 날이면 아무 날이나 상관없다는 것 아닌가.
백산이 빌려놓았던 집으로 향하는 일행의 눈에 빛살처럼 달려오는 인물이 눈에
잡혔다.
"야, 이 도둑놈아. 나에게 허락도 없이 소운이를 훔쳐가려 해?"
풍신개와 요몽이었다. 분하를 타고 내려오다 소운의 혼례 소식을 전해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던 것이다.
"어? 영감은 역시 타고난 거지야. 어떻게 이곳에서 나는 냄새까지 맡았소."
얼굴에 나타난 반가운 표정과는 반대로 입에서 나가는 말은 거의 욕에 가까웠다.
"너?"
백산의 대응에 뭐라 한마디 하려던 풍신개가 손을 들어올린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백산의 변해버린 얼굴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얼굴 본 지가 구 개월밖에 안 됐는데 녀석의 얼굴은 십여 년을 지나가
버리지 않았는가.
"좀 의젓해졌지요? 잘생긴 얼굴에 무게까지……. 최고의 남자 아니요. 갑시다,
소운이 기다리는데."
'어찌 된 일이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백산의 뒤를 따르던 풍신개가 석두를 향해 재빨리 전음을
날렸으나 팽무도에게 들으라는 말만 들려올 뿐이었다.
"허허! 어찌 이런 일이……."
팽무도의 이야기를 듣던 풍신개의 얼굴이 참혹하게 변했다. 초리하에서 일어난 일을
대충 듣기는 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한순간에 얼굴이 늙어지는 현상이라니…… . 주안술이 풀려서 한순간에 늙어버린
사람은 보았어도 나이를 건너 뛰어버린 증상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소운을 못 주겠다는 거요, 뭐요?"
"이놈아! 소운이 불쌍해서 그래, 어쩌다 너 같은 놈에게……."
백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풍신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젊은 얼굴이었을 땐
그나마 봐줄 만 했었는데 이제는 그나마도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네 녀석이 나보다 오래 살 터이니, 잘해줘야 한다. 소운이 울리면
지옥에서도 뛰쳐나올 게야 알았냐?"
"영감! 지옥은 사람이 많아서 못 가오. 내가 많이 보내버렸거든, 헛소리하지 말고
소운이랑 오래오래 사쇼."
"그래야겠지. 나 소운이 좀 보러 갈란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풍신개의 얼굴에 쓸쓸함이 서려 있었다.
"얼굴 펴시오, 그런다고 내 얼굴이 젊어지겠소?"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혼례가 시작되었다.
어깨에 붉은 띠를 두르고 꽃을 꼽은 모자를 쓴 백산과 광견조원 여덟 명이 말을
타고 온 마을을 돌며 혼례의 시작을 알렸다.
툭!툭! 탁! 탁! 타타탁!
여기저기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가 온 마을을 덮으며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악대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세 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는 꽃가마와 함께 신부들이 있던 집 안으로 들어선
백산의 얼굴에 놀라운 표정이 가득했다.
화장을 하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세 명의 신부 때문이었다. 맨 얼굴만으로도
예뻤던 여인들이 화장까지 하고 있으니 눈알이 핑핑 돌아갈 지경이었다. 자신이 저런
미인들을 아내로 얻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당연 눈동자가 풀리고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헤! 전부 내 각시들이란 말이지?"
지금껏 구 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보아온 얼굴임에도 오늘은 또 달라보였다.
"백랑! 입."
"험험!"
나직한 조천영의 말에 재빨리 표정을 바꾼 백산이 헛기침을 하며 신부들과 함께
풍신개를 향해 절을 올렸다. 이제 정식으로 처조부가 되는 것이다.
"그래, 잘살아야 하느니……."
풍신개의 두 눈에 뽀얀 물막이 어렸다. 자신의 복수 때문에 거의 돌보지도 못했던
아들놈, 그 아들이 남겨준 유일한 핏줄이 소운이었다. 이 애만큼은 잘 키워보려
했었는데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아서 개방에 맡겨버리지 않았던가.
그랬던 손녀딸이 시집을 가는 것이다. 비록 잘 키워주지는 못했지만 먼저 간
아들에게 떳떳한 아비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
급기야 소운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옆에는 자신보다 더 불행한 언니들이
있는데, 그녀들을 생각하면 울어선 안 되는데 주책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어이구, 이 애를 어찌 데리고 사누……."
울고 있는 소운을 쳐다보며 백산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소운의 뒤로
손을 돌려 조천영과 냉추렴의 손을 꼭 쥐었다. 부모의 소식을 모르는 사람과 부모가
없는 사람, 그녀들의 마음도 결코 편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차라리 혼례를
올리지 말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행복하고 기뻐야 할 일인데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백산의 예상대로였다. 먼저 냉추렴이 어깨를 들썩이는 것 같더니 이어서 가장
어른인 조천영마저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한 번 터진 울음은 쉬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 여인이 울음을 터뜨리자
가장 당황한 사람은 풍신개와 백산이었다. 자신 때문에 방안이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이놈아, 어떻게 수습 좀 해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던 풍신개가 급기야 백산에게 전음을 날렸다. 자신이야
정말 기뻐서 눈물을 흘렸던 것인데, 신부 셋은 서럽게 울고 있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가기 싫은 시집인데 돈에 팔려 억지로 가게 되었다고
오해를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더구나 신부들의 생김새가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정도이니.
'이놈아, 연기라도 해서 좀 달래봐.'
아예 우는 것으로 끝장을 보기로 했는지 세 여인이 부둥켜안고 정말 서럽게 울고
있는 모습에 풍신개의 얼굴이 더욱 난처하게 변했다. 자신이 한 말이라곤 잘살란
말밖에 없는데 신랑이 신부를 맞으러 오는 영친(榮親)의 자리가 울음천지가
되어버렸다.
"흑! 흑!"
세 여인이 대성통곡을 하고 있을 때 한쪽 구석에서도 조용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지막이 우는 소리 같았지만 내공을 실었는지 세 여인의 귀에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주변 이목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서럽게 울던 세 여인이 구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백산이 있던 곳이었다.
순간 백산의 입에서 세 여인보다 더 서러운 신세한탄의 소리가 흘러나온다.
"아이고! 아버지, 내 얼굴이 망가졌다고, 내가 늙었다고, 신부들이 서러운 모양이요.
얼굴 멀쩡할 때는 서로 좋다고 난리더니, 거지새끼 같은 얼굴로 변하니까 내가
싫어졌나보오. 나 같은 늙은이에게 시집오는 게 슬퍼서 저리도 서럽게 우는 게
아니겠소, 아이고……!"
백산의 한마디 한마디에 세 여인이 움찔거리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처음엔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울었지만 울다보니 그게 아니었다. 웬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꾸만
감정이 북받치며 자신들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던 거였다. 울음이 울음을 불러왔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랑 되는 사람도 한쪽 구석에 박혀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가
서러울 게 뭐 있다고, 생긴 것도 없는 사람이 신부가 셋이나 되는데…….
"백…랑! 오라버니?"
"아이고! 아버지 이 얼굴로 어찌 살란 말이오."
더욱 가관이었다. 어느새 꺼내들었는지 액땜을 위해 미리 준비해두었던 신부들의
동경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며 울먹거린다.
'천영아, 저거 장난이 아닌 모양이다. 좀 달래봐라.'
풍신개가 이번에는 조천영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그도 처음에는 부인들을 달래기
위한 장난인 줄 알았다. 백산의 말 중에 나온 거지새끼란 말은 분명 자신을 두고 한
말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신부를 울렸다고 자신을 욕하는 소리로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속 두고 보자니 이놈 또한 장난이 아닌 것 같지 않은가.
결국 세 여인이 백산에게 달려들어 갖은 아양과 교태를 떨고 나서야 사내대장부의
울음은 그쳤다.
신랑 신부의 울음으로 시작된 영친은 다음 날 아침 신부들의 얼굴과 이마의 솜털을
뽑아주는 개검식이란 절차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신랑집으로 가기 위해 머리를 얹고 비녀를 꽂은 신부들이 푸른 바지에 붉은 웃옷을
받쳐 입고 붉은 보자기로 얼굴을 가린 후 마차에 올랐다.
"형님! 참으로 대단하오. 어쩌면 그리 능수능란하게 거짓 표정을 지을 수 있소."
꽃가마를 앞세우고 신랑집으로 가는 도중에 소살우가 백산에게 넌지시 물었다.
백산이 아무리 속이고자 해도 소살우의 작은 눈은 피해갈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옛날 얼굴 같으면 들켰을 터인데 지금은 얼굴이 변했잖냐, 임마."
자신의 얼굴이 변했기에 거짓말할 때의 표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풍신개마저 속았으니 어쩌면 백산의 생각이 맞는지도…….
그러나.
"언니는 오라버니가 거짓으로 그런다는 걸 어찌 알았어요? 나는 못 알아차렸는데."
"응. 백랑의 처음 말이 아이고로 시작하면 다 거짓이야."
마차 안에서 냉추렴과 조천영이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쿡! 곰 아저씨 재주 잘 봤소."
"킥킥킥!"
마찬 안팎에서 묘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사부는 사부였다. 백산 자신도
모르고 있던 버릇을 조천영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그녀가 한 수 위였다.
온 마을 사람들이 축복해주는 가운데 혼례가 끝났고 마을 한가운데에서 뒤풀이
여흥이 한창일 때 신랑 신부는 방에 들었다. 황촉불이 은은하게 밝혀진 방안에
술상을 가운데 두고 네 사람이 둘러앉았다.
각 신부들의 얼굴을 덮고 있던 붉은 천을 들어올리고 비녀를 뽑아준 백산이 상 위에
있던 나무빗과 가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잘라 조심스럽게 상 위로 놓았다.
이어서 여인들도 백산을 따라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잘라놓자, 그것들을 전부 섞은
백산이 비단 끈을 이용하여 굳게 묶은 다음 조그마한 주머니에 담아서 자신의 품속에
넣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혹시라도 무슨 말을 하면 부정이라도 탄다 생각했는지 의식을
행하듯 경건한 마음으로 임했다.
이번에는 하나밖에 없는 커다란 대접에 조천영이 술을 가득 따르자 그 술잔을
들어올린 백산이 세 사람의 신부를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서약을 했다.
"천지 신명께 고(告)하노니 나 백산은 사랑하는 부인들과 죽음까지도 같이할 것을
맹세합니다."
"천지신명께 고하노니 나 조천영은 사랑하는 백산과 죽음까지도 같이할 것을
맹세합니다."
네 사람만의 사랑의 서약이었다. 영원히 같이 하고자 하는 맹세.
"이제 식도 올렸으니까 북경 가서 자리 잡으면 부모님도 찾아봐야지. 북해도 가고,
감숙성도, 그리고 원앙곡도……."
세 여인의 얼굴이 일제히 변했다. 부모님들이 계신 곳, 낮에 서럽게 울게 만들었던
분들이 계신 곳이 지금 백산이 말한 곳이다.
그러나 이내 미소를 지으며 백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그분들을
추억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분들보다 더 사랑해주는 낭군이 있기에 불행한
과거가 아니다. 가슴 한편을 채우는 아름다운 추억일 뿐이다.
"누님, 먼저 북해로 가자. 눈꽃이 보고 싶어."
냉추렴과 구소운이 나가고 난 후 두 사람만 남은 신방에서 백산이 조천영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칠성리 먼저 갔다 가요."
"아냐, 내 고향은 맨 마지막이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걸, 뭐."
"아버지가 아직……."
조천영이 말끝을 흐렸다. 벌써 십여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은밀하게 들렀을 때 병색이 완연한 분이셨다. 정상적인 몸이었다면 자신을 찾으러
사람을 보냈을 터인데 강호상에서 빙궁의 인물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함은 이변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복수에 미쳐서 방황하느라 부모님마저도 잊고 산 불효자가 되어버렸다.
"살아 계실 거야. 사부를 보면 알잖아요. 해야 될 일이 있는 사람은 절대 죽지를
못해요."
걱정하지 말라며 조천영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그녀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들로 만들어줄 자신이 있다. 지금처럼 영원히 사랑해주면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하셨던 것처럼만 하면 된다.
"이제는 더 이상 불행은 없어요, 괴로움도……."
"고마워요, 백…… 으읍!"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하려는 조천영의 입을 다른 입술이 내리누르며 막아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이나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도 어색한 것이다.
오직 사랑한다는 한마디 말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
온몸을 불사르는 황촉불처럼 두 사람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아나며 서로를 향한
갈증을 식히기 위해 항해를 시작했다.
* * *
신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이젠 사돈까지 된 건가?"
풍신개가 환하게 웃으며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처음엔 마음이 맞는 친구로 시작된
인연이 처남 매부가 되었고, 이제는 사돈지간까지 되었다.
"우리 인연도 참으로 질긴 인연이다, 안 그러냐?"
"무슨 일이냐?"
웃으며 하는 말임에도 팽무도의 얼굴은 밝지가 않았다. 웃고 있는 것 같지만
풍신개의 얼굴에 나타난 아픔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구서방이라 불러주셨다. 무련이가 떠난 지 오십 년만에……."
"칠아……."
팽무도도 풍신개의 한을 알고 있다. 처갓집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위, 아무리
노력해도 풍신개를 인정하지 않았던 분이셨다. 오죽했으면 죽어가는 무련이를 보고도
팽가에 가지 못했을 것인가. 그녀와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줄 거라는 확신만 있었어도
산속으로 숨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미련 없다. 소운이가 제일 마음에 걸렸는데……. 며느리 구박하지
말고 잘해줘야 한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팽무도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사위로 인정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유언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질 않는가.
"북경 가면 아예 안 나올 거냐?"
팽무도의 다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딴소리만 하고 있다. 북경으로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팽무도의 대답을 기다린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야겠지. 더 이상 무림이란 곳에 관여되는 것도 싫고, 석두 녀석이나 관직에
밀어 넣고 편하게 살지, 뭐. 그런데 아직 대답 안 했다."
"무슨 일은……. 이제야 먼저 간 아들놈에게 당당한 아비가 되어서 그렇지. 이젠
만나도 그 녀석이 구박하지 않을 것 아냐."
북경을 간다 했으니, 다시는 안 올 거라 하였으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팽무도의 말마따나 북경은 은거지나 같은 곳이다. 더구나 석숭을 통해서 석두를
관직에 넣으면 누구도 이들을 건들지 못할 것이다.
"그래? 너도 북경으로 가야지, 이젠 같이 살자."
"그래야 하겠지, 이젠 쉴 때도 되었어. 그동안 너무 힘들게 살았다. 나도 이젠 쉬고
싶어. 한 가지, 한 가지 일만 마무리하고……."
"아직도 남은 게 있냐? 그들은 이제 끝장……."
"그때만 해도 말이다. 정말 좋았다. 오늘처럼 저렇게 별이 유난히 크게 보이는
날이면 무련이와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원앙곡에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며 별을
세곤 했다. 죽을 때도 같이 죽자 하였는데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만 살아 있다."
옛날을 그리는지 풍신개의 얼굴에 아련한 표정이 어렸다. 마음은 그때 이미
죽었는데 몸만 남아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만 강시가 된 게 아니라 자신도
이미 강시였다. 한 가지 의지밖에 없는 강시…….
"무도야……."
"왜."
"이거…… 산이 녀석 줘. 뇌룡현이 있을 때 돈이 될 거라며 무지하게 욕심을
냈었거든."
"주고 싶으면 직접 줘."
풍신개가 내미는 피독주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팽무도가 고개를 돌리며 먼저
가버린다.
그러나 돌아서는 그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녀석이 죽으려 하고 있었다.
양맹의 전쟁이 다 끝나가는데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이다. 불꽃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양맹과 마지막을 함께 하려는 것이다.
알면서도 말릴 수가 없다. 녀석이 살아온 인생을 알기에 가고자 하는 길을 막을
수가 없다. 살고 있는 이곳이 지옥인데, 이 지옥을 벗어나고자 하는 놈을 무슨 수로
말린단 말인가.
'그래, 어쩌면…….'
"북경까지만 동행해라. 그 다음엔 안 말리마."
"당연하지, 이 녀석아. 거지가 갈 데가 어디 있냐. 산이 녀석 좀 괴롭히다 가야겠다.
그동안 진 빚도 좀 청산하고."
첫댓글 즐독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입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감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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